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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스크랩 리지린 <고조선연구>,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이원철 추천 0 조회 340 16.03.01 10: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리지린 <고조선연구>

 

신채호-리지린-윤내현 

서영수-노태돈-송호정-오강원  

 

이희진, 이이화, 강만길, 박노자, 성삼제, 안호상, 임승국, 이정훈, 이형구, 한영우 

 

[인물 탐구]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으며 끝내 국사교과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노학자로부터 한국 고대사 연구 30년을 듣는다.

 

윤내현 교수는 1939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단국대 사학과,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했다.

 

 

 

 

 

 

 

 

 

 

 

 

 

 

 

 

 

 

 

 

 

 

소 윤내현 교수(64·단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말을 아끼고 몸을 낮추는 스타일이다. 30년 가까이 한국 고대사에 매달리면서 ‘비정통 역사학자’ ‘국수주의자’ ‘과도한 민족주의자’ 심지어 ‘북한 추종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조심성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윤교수가 요즘 부쩍 말수가 늘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정년퇴임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추죄한 학술회의에 참가해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윤교수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신감 부족 아닌가”라며 “초창기에는 우리 학문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교수가 주장해온 ‘한민족 자생설’은 한민족이 외부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지역 토착인들이 연합해 우리 민족과 문화를 형성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끊임없이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온 ‘한민족 외래설’ 혹은 ‘민족이동설’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최근 윤교수는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라는 책도 내놓았다. 1978년 첫 저서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상주사(商周史)’ ‘한국 고대사 신론’ ‘고조선 연구’ 등 중국사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과 논문을 썼지만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그 책이 발매 몇 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대사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질타와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묵묵히 감내하며 학문적 홀로 서기에 매진해온 한 노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책에서 윤교수는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을 한 학자는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윤교수의 홀로 서기는 길었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다. 그의 견해에 동조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실에서 윤내현 교수와 마주했다. 요즘 그가 무엇보다 비중을 두는 일이 북한 역사학계와의 교류다. 지난 10월 개천절을 맞아 평양에서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윤교수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한의 ‘단군학회’와 북한의 ‘조선력사학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1년 전 제1회 행사 때는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최초의 학술대회”라며 언론의 반응이 야단스러웠던 것에 비해 2회는 소문 없이 지나갔다. 윤교수는 첫 행사가 물꼬를 튼 수준이라면 이제야 남북한이 서로 말문을 텄는데 막상 관심 갖는 이가 별로 없다며 아쉬운 기색이다.

 

남북한 공동발굴 기대

“각자 준비해간 논문을 발표하고 끝난 1회 때와 달리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남측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1993년 발굴한 단군릉이죠. 알다시피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서 평양으로 수정됐고, 고조선 건국 시기도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또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3000~2800년이라고 발표됐는데 우리 쪽에서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연대를 올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해요. 실제 이번 학술대회에서 남측 학자들이 ‘당신들이 제시한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다, 방사선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조사할 생각은 없느냐, 객관성을 위해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는 방사성탄소 측정시설이 없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료 채취과정에서 뼈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지 않느냐, 대신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2개 기관에서 각각 24번, 30번씩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은 확보됐다고 본다’고 답했죠. 이번 학술대회의 수확은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문이 있으면 함께 풀어보자, 어렵더라도 발굴현장을 직접 답사할 기회와 발굴보고서를 제공해달라고 했습니다.”

 

 

 

 

 

 

 

 

 

 

 

 

 

 

 

 

 

 

 

 

 

 

 

 

 

 

 

 

 

 

 

 

 

 

 

 

 

 

 

 

 

 

 

 

 

 

 

 

 

 

 

 

 

 

 

 

 

 

 

 

 

윤교수는 또 북한측 학자들이 예상외로 남한의 연구 동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전한다.

“김일성대학의 한 젊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내용 중에 ‘천문학을 이용해 ‘환단고기’ 기록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지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9월1일부터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로 옮김)가 쓴 책의 내용이거든요. 아, 저 사람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천문학자의 연구까지 벌써 읽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북한 학자들은 남한 학자들의 연구방향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어 만나면 금방 알아봅니다. 처음 만난 북한 학자가 내 책을 읽었다기에 어떻게 보았느냐고 했더니 강인숙, 손영종 교수 등 선생님의 책을 빌려보았다는 거예요. 예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직접 책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북측은 연구비에 관심이 많아요. 재정 지원만 약속하면 공동 발굴도 가능하다고 봐요.”

윤교수는 단군릉 발굴과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설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상고사 연구의 과학성과 실증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로 인해 한때 윤교수에게는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을 말하면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윤교수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 30년을 이렇게 자평한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우리 고대사’에서)

 

갑골문 연구에서 한국고대사로

원래 그의 전공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중국고대사였다. 1960년대에 동양 고대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귀해서 그는 일본, 홍콩, 방콕을 드나들며 자료를 긁어모아 논문을 썼다. 석사논문 제목은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고 박사논문은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다.

 

“당시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셨는데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알 수 있죠.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는 미진해서 다시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을 보는데 한국 관련 부분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특히 기자(箕子)에서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기자조선을 인정했어요.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의 기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자동래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가운데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됐죠. 곧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에 엄연히 기후(箕侯)라 해서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원시시대’와 ‘상주사’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한국 고대사 문제에 파고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중국 ‘사기’의 ‘송미자세가’를 보면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되어 있다. 그동안 이 문구는 기자가 제후에 봉해져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됐다.

 

그러나 윤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국경이 요동지역까지라고 기술된 부분을 떠올렸다. 당시 요동의 경계는 북경 바로 옆 갈석산이었다. 만약 그곳이 국경이었다면 갈석산 동쪽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조선의 강역(疆域·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설정해놓고 보니 다음 이야기들이 딱딱 아귀가 맞았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이었다.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이 다스리는 연나라(제후국)와 접해 있던 고조선의 변방을 망명지로 택한 것이다. 물론 여차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기자는 ‘고조선 변방의 제후’가 됐던 것이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학설을 정리해 1982년 ‘기자신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사 전공자의 외도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후 학계의 역풍이 몰아쳤다.

 

“제 학설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게 됐죠. 그런데 대선배 교수 한 분이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쓴 대로 읽었어요. 토론시간이 되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北 추종자라는 비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대한 글을 발표하는 윤내현 교수(오른쪽).

 

 

 

 

 

 

 

 

 

 

 

 

 

 

 

 

이때 윤교수는 결심했다. ‘기자만 연구하고 한국사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나머지 문제까지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내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겠는가.’

 

그 뒤로 중국사를 제쳐두고 한국 고대사를 집중 연구했다. 물론 중국사 전공을 십분 이용해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경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고 이어 고조선의 사회구조, 통치조직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는 ‘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 ‘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 ‘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 ‘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 ‘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동안 북한이 그 학설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무렵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하는 ‘한국사휘보’에 그를 비방하는 글이 실렸다. ‘북한의 어용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정보기관에 “고대사 분야에서 북한학설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고 고하는 바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이처럼 윤교수는 동양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지만 한국사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동양사로 가면 강단사학자, 한국사로 가면 재야사학자가 되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역사학의 역사’(지식산업사)에서 1980년대 윤내현 교수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고대사의 첫 장에 해당하는 고조선 연구는 1980년대에도 부진했다. 문헌이 빈약하고 고고학적 성과도 북한이나 중국과 관련되어 있어서 현장감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학설을 내세운 것은 윤내현 교수다. 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거하여 고조선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23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그 도읍은 지금의 평양에서 시작해서 중국 난하 유역으로 팽창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한 뒤 한나라 무제에 의하여 망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고조선 연구는 1994년 ‘고조선연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한교수는 덧붙여 “윤내현의 연구는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으로 학계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고 적었다.

 

고조선 재평가 열풍

그러나 학계의 반발이 크면 클수록 고조선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은 고조됐다. 이 무렵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윤교수의 특강에 1500여 명의 일반관중이 몰려들 만큼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불었다. 1986년 3월 윤교수는 ‘사학지’를 통해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종래 사학계의 통설은 한반도 북부 평양지역에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윤교수는 위만조선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고조선과 병존했던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원전 195년 서한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자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며, 훗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침략해 지금의 요서지l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 학설대로라면 고조선-준왕(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여러 나라 시대(열국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되어 있던 고대사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는 맞지만 이는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와는 별도로 고조선-열국시대(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삼한 등)-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남북국시대(신라, 발해)의 체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1986년 11월 당시 문교부는 국사교육심의회(위원장 변태섭)를 발족하면서 단군조선을 비롯, 일제의 의해 조작·왜곡된 한국사를 복원해 새 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윤교수는 30여 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가장 젊은 40대 위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대동강 유역으로 제한된 고조선의 강역만큼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생님뻘 되는 다른 심의위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칠 필요가 있더라도 천천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교수는 마음이 바빴다. 고조선 땅의 넓고 좁고의 문제를 떠나 고조선 역사를 바로 세워야 다음 시기의 혼란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흑룡강성 지역에는 부여, 연해주에 읍루,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남쪽에는 삼한 등이 있었습니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그 중 하나이고 다만 조금 먼저 세워진 나라일 뿐이죠. 그러나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하면 고조선 붕괴 후 지방세력이 독립해 여러 나라로 갈라서는, 역사체계 자체가 달라집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주에 신라를 세운 사람들이 조선의 유민(遺民)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유민(流民)이 아니라 유민(遺民)인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잔류한 백성이라는 것은 고조선이 한반도 남쪽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죠.”

 

하지만 심의위원 가운데 윤교수의 주장에 동의한 사람은 단 두 명(손보기, 박성수)뿐이었다. 윤교수는 그날로 심의위원직을 사퇴하고 학생들과 강원도로 답사를 떠났다. 그런데 언론이 윤교수의 사퇴 이유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야단이 났다. 결국 변태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개편되는 중·고교 국사교과서(중학교는 1989년, 고등학교는 1990년)에 고조선 초기의 정치·문화적 중심이 요령지역이었음을 명기하겠다고 밝히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 고대사에서 ‘학문의 국수주의화’냐 ‘식민사관의 청산이냐’는 논쟁은 계속됐다.

 

윤교수는 그때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영토는 넓게 그려졌지만 여전히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서술된 점에 대해 불만이 많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위만이 준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해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사료의 비판적 해석 필요

“이 서술대로라면 우리 민족은 기자가 망명한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낙랑군이 축출된 기원 313~315년 무렵까지 무려 14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돼요. 일제 35년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하면서 1400년 중국의 지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되는 해인 기묘년에 서주 무왕이 즉위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해석해야 해요. 지금까지는 단군조선이 건국 후 1500년 되던 해에 끝이 나고 통치자가 기자로 바뀌었다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시기에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겨 그대로 존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이런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이 망한 뒤 기자가 조선에 와서 통치자가 됐다고 기록한다.

“이승휴 선생은 유학자로서 중국을 숭상한 분입니다. ‘제왕운기’가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권이 중국역사고 하권만이 한국사입니다. 즉 중국사를 죽 서술하고 그 밑에 한국사를 붙인 것인데 이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천하사상-중국 천자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죠. 이승휴 선생의 학설이 광복 후까지 비판 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길을 잃었을 때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윤교수가 30년 가까이 고조선에 몰두한 이유도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가 대부분 분열의 시대인 삼국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입니다. 2000년이면 신라가 건국한 이래 오늘날까지를 합친 만큼 오랜 시간이에요. 고대사회라 지금처럼 조직적인 중앙통치가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이루고 그만큼 오랜 세월을 존속했다면 민족공동체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겠습니까. 그후 사국(윤교수는 가야를 합쳐 사국시대를 주장한다)으로 갈라졌다 해도 끊임없이 공동체 복원을 바라고 통일은 당연한 과업이었을 겁니다.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 국가였다면 자연스럽게 부여나 고구려,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국가였다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에 편입된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슬쩍 윤교수에게 “그동안 역사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의미심장한 답이 돌아왔다.

“정치하는 분들이 필요에 따라 역사를 이용했지요. 사실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심스러운 것은 아예 역사에 관심이 없거나 이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죠.”

정년을 앞두고 윤교수는 칭찬보다는 매가, 격려보다는 비난이 돌아오기 일쑤인 고대사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학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나마 고고학을 빼면 문헌사 분야에서 삼국시대 이전 상고사를 전공하는 박사급 연구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논문을 썼을 때 칭찬받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성공한 것이죠. 반론도 칭찬도 없는 논문이 제일 가치가 없어요. 저는 제자들에게 제 학설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내 것을 뛰어넘어야지, 이미 내가 다 해놓은 것을 따라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학문은 스스로 틀을 깨는 작업입니다. 내가 쓴 논문이라도 세월이 지나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남이 지적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고치는 것이 학자의 도리입니다.”

(끝)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발행일: 2003 년 12 월 01 일 (통권 531 호)

쪽수: 414 ~ 422 쪽

 

 

 

 

 

 

 

[INTERVIEW]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한 획 그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고조선, 중국 하북성 동남쪽 요서까지 지배했다”
기사입력 2014.12.05 14:16

    

중국 고대문헌에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활동 무대가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남쪽 요서(遼西) 지역까지 이르렀음은 물론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또한 요서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심백강(沈伯綱·59) 민족문화연구원장이다.

중국 사료 <사고전서>에서 한국 고대사 새롭게 밝혀내



고조선(古朝鮮)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우리 고대사의 주요 쟁점 중 하나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 경계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내학계에서는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른바 ‘강단사학(講壇史學)’으로 불리는 이병도·이기백·노태돈의 입장이다. 이에 맞서 민족사학자들은 요동설(신채호), 요서설(정인보·리지린·윤내현)을 주장한다.

최근 고조선의 서쪽 변경(邊境)이 민족사학의 요서설에서 주장하는 것 보다 중국 대륙 쪽으로 더 들어간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받고 있다. 20여년 동안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疆域)을 연구한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고조선의 주무대는 중국 대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 고조선의 영토는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의 서쪽, 즉 요서 지역까지 미쳤다.


낙랑군 수성현은 고조선 강역의 실마리
고조선의 강역은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달려 있다.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해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을 설치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낙랑의 영토가 고조선의 영토인 셈이다.

그는 “한사군의 낙랑은 한국사의 척추에 해당한다”며 “낙랑이 바로 서면 한국사가 바로 서고, 낙랑이 뒤틀리면 한국사 전체가 뒤틀린다”고 강조했다. “낙랑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강단사학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는 대동강 부근이 되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곳이 발상지가 되기 때문이죠.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遼寧省)의 서쪽, 즉 요서 지역에 있었어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그곳에 있었던 거죠.”

곧 낙랑군은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秦皇島)시 노룡(盧龍)현 산해관(山海關) 일대에서 서쪽으로 당산(唐山)시, 천진시를 지나 북경 남쪽의 보정(保定)시 수성진(遂城鎭)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동에서 서로 펼쳐진 지역이라는 얘기다.

현재의 통설인 대동강 낙랑설은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한 반론인 <한단고기>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학계에서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심 원장의 주장이 주목받는 것은 중국의 권위 있는 사료(史料)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가 바로 그것이다. <사고전서>는 18세기 중후반 청나라 건륭제 때 10여년에 걸쳐 청 이전의 중국 사료·사서 3400여종, 8만여권을 집대성한 책이다.

심 원장은 “<사고전서>에는 낙랑이 중국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20여개의 각기 다른 자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 사고전서에는 북경 북쪽의 조선하(朝鮮河), 시라무렌강 유역의 조선국(朝鮮國),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조선성(朝鮮城) 등 요서조선에 대한 기록이 넘쳐 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전한서(前漢書)>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낙랑·현도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태강지리지>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두 사료에 나오는 수성현·갈석산의 위치를 찾던 그는 <사고전서>의 관련 사료들을 훑어본 결과, 현재의 하북성 남쪽에 낙랑군의 수성현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 수성현 갈석산은 정인보 등이 주장한 현재 진황도시 창려(昌黎)현에 있는 갈석산이 아니라, 하북성 남쪽지방으로, 오늘의 호타하(河) 유역 북쪽의 보정시 인근에 위치하는 백석산(白石山)이라는 것이다. 백석산은 한 무제 때에는 갈석산으로 불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사고전서>를 읽고 보정시 수성현 지역 등을 수 차례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정인보 등은 현재의 창려현 갈석산을 한사군 설치 당시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갈석산’으로 봤다. 그러나 창려현 갈석산은 한 무제 때에는 게석산(揭石山)이었는데 이후(수·당대)에 갈석산으로 개칭됐다는 기록이 <사고전서>에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백제 영토도 요서 포함
오늘날 보정시 부근이 낙랑군이라는 근거는 더 있다. “수성현에서 장성(長城)이 시작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천리장성을 연결해 쌓은 것이 만리장성입니다. 연나라 장성이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기점이 바로 수성입니다.”

중국 요서 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고구려, 백제의 영토도 요서 지역으로 확대된다. 그가 잘라 말했다.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진 부여, 고구려, 백제의 영토는 요서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헌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중국 고대의 문물과 제도를 다루고 있는 <통전(通典)>에는 북위(北魏)시대에 고구려가 요서의 평주(平州)에 도읍을 정한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시대를 거쳤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당나라 때 고구려를 쳐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을 쳤다는 것은 현재의 평양이 아닌 요서 산해관 지역의 평양을 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또한 <정개양(鄭開陽)>의 <조선고(朝鮮考)> 등 여러 문헌에 그대로 실려 있다.

위만이 조선에 올 때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한반도의 청천강이 아니라 북경 북쪽 지역에 있었던 조선하(朝鮮河)라는 강일 가능성이 크다. 심 원장은 송나라 때 펴낸 <태평환우기()>나 <무경총요(武經總要)>에 하북성 노룡현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가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웠다. 원나라 말기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지만, 명·청시대에 이르러 조하(朝河)로 변경돼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날 요동·요서의 구분은 심양 앞에 남북으로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이나 전국시대에는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요동·요서를 나누는 요하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기록으로 본다면 조하가 바로 요수인 겁니다.”

우리 역사는 어쩌다 이렇게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조선시대에는 사대주의가 만연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어요. 일본 강점기엔 일본이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000년의 역사를 신화라거나 말이 안 된다며 반토막을 내버렸죠. 이런 일제의 반도사관을 지금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 강단사학계가 그동안 사료 부족을 내세워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70년 가까이 이어온 셈이죠. 강단사학이 <사고전서>에 기록된 사료를 인정하면 그동안 주장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겁니다.”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다.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은 역사 서술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은 그가 직접 10여년 동안 모은 사료를 기반으로 한다. <사고전서> 등 중국의 사료에 기록된 대로 본다면 요하는 조하이며, 노룡현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강단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료가 없다고 핑계를 댔고, 사료를 내놓으면 오류(誤謬)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했다.



- 심백강 원장은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만큼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20여년 동안 고대사 연구

심 원장은 1983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연구실에서 연구직 전문위원으로 있던 한학자였다. 그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나온 것은 학자적 소신에서 비롯됐다. “<삼국유사>를 읽다가 고조선 대목에 이은 뒷장에서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孤竹國)이었다’는 대목을 봤어요. <소학>에는 백이·숙제가 고죽국 사람으로 나오거든요. 그때부터 고조선과 고구려사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런데 어느 누구도 고구려와 고죽국, 고조선과 고죽국의 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가 없었다. 국내에 고죽국에 관련된 논문은 전무했다. 한국 고대사에 커다란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학자로서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1992년 정신문화연구원을 그만두고, 이후 줄곧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다. 대만의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책은 다 읽어봤다.

“그래도 부족했어요. 그때 마침 중국에 있던 지인이 <사고전서>를 전해주더군요. 그동안 이빨 빠진 듯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고대사가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고전서>에서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부분을 모두 추려내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라는 500페이지짜리 5권을 펴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두 한문으로 된 책이라 역사학자마저도 이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지난 6월과 8월 사료의 원문과 번역문, 해설문, 주석을 실어 <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책을 펴냈다. <전한서>, <사기>, <후한서>를 비롯한 여러 중국의 정통 사서에 나온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기록을 모두 추려내 편찬한, 한 개인의 힘으로는 실로 벅차고 고단한 작업이었다. 지난 11월에는 이를 모두 집대성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라는 책을 냈다.

중국의 고전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한문 독해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심 원장은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주요 고전과 역사 기록물을 번역했다.

그는 “신채호·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생전에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었다면, 우리 고대사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5년 전만 해도 이러한 주장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져 다행입니다.”

그는 후학에 대한 기대가 컸다. <사고전서>를 더 연구하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응할 수 있고, 우리 역사도 바로 세울 수 있다.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를 단절하고 축소하고 왜곡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국사 교과서가 잘못돼 민족정신을 훼손시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는 없습니다. 잘못 가르치고 있거나 당연히 가르쳐야 할 내용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바로잡아야죠.”

그는 “역사학자와 한학자로 구성된 역사문화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역사를 바로잡고, 교과서도 개정해야 한다”며 “역사 교과서 개정은 한 개인의 힘으로선 힘든 작업인 만큼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중심의 반쪽짜리 한국사 교과서가 아니라 하북성의 요서를 호령하고 웅대했던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혁명과 정치혁명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혁명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영어와 중국어로도 번역한 책을 펴낼 계획이다.

“우리 역사를 과대포장하자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가르치자는 겁니다. 그래서 자랑스런 역사는 재현하고, 치욕스런 역사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거죠.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의 의지입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데 우리 국민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하는 역사 광복은, 남북통일과 함께 이 시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글: 장시형 기자 (zang@chosun.com)

사진: 한준호

 

 

 

 

낙랑은 중국 요서지역 남쪽에 있었다”

등록 : 2014.07.17 18:57수정 : 2014.07.17 22:19

   
심백강 박사.

 

 

 

 

 

 

 

 

 

 

 

 

 

 

 

 

 

 

 

‘사고전서…’ 펴낸 심백강 박사

기존 통설 대동강 유역설 반박
“건륭제때 사료 8만권 엮은 책엔
‘요서지역의 낙랑’ 20여군데 언급”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의 위치가 어디였는가는 우리 고대사의 큰 쟁점 중 하나다.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을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역사 갈등’의 한 진원지이기도 하다.

국내 사학계의 통설은 대동강 유역설이다. 이른바 강단사학으로 불리는 이병도·이기백·노태돈의 입장이다. 이에 맞서 이른바 민족사학으로 묶이는 학자들의 견해는 요동설(신채호), 요서설(정인보·리지린·윤내현)이다.

20년 동안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 연구를 해온 재야 역사학자 심백강(역사학 박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은 최근 펴낸 책 <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역사)에서 민족사학의 요서(랴오허 서쪽)설에서 더 서쪽으로 나아간다.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 허베이(하북)성 남쪽 지역에 발해를 끼고 있었다. 즉 허베이성 동북부에 있는 강인 난하 중·하류 유역으로부터 서쪽으로 허베이성 남쪽 역수 유역의 갈석산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만을 끼고 펼쳐져 있었다.”

기존 대동강설에 대한 반론이 <한단고기> 같은 중국·일본은 물론 국내 학계가 인정하지 않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면, 심 원장의 주장이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 청나라 조정에서 편찬한 공식 사서 모음인 <사고전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사고전서>는 18세기 중후반 건륭제 때 수십년에 걸쳐 청 이전의 중국 사료·사서 3400여종, 7만9000여권을 집대성한 책이다.

15일 만난 심 원장은 “<사고전서>에는 낙랑이 중국의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20군데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강단사학계가 사료 부족을 내세워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근 70년 가까이 되풀이해왔다”고 주장했다.

심 원장의 주장은 크게 보아 요서설을 계승한다. 그는 민족사학의 요서설이 ‘허베이성 동쪽’설이라면, 자신의 주장은 ‘허베이성 남쪽’ 설이라고 밝혔다. 곧 낙랑군은 현재의 친황다오(진황도)시 루룽(노룡)현 산하이관(산해관) 일대에서 서쪽으로 탕산(당산)시, 톈진(천진)시를 지나, 베이징 남쪽의 바오딩(보정)시 쑤이청(수성)진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동에서 서로 펼쳐진 지역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2007년 <황하에서 한라까지>라는 책에서 낙랑과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중국 동북부 요서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는데, 몇년 간 <사고전서>를 읽고 바오딩시 쑤이청진 지역 등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견해를 보완했다고 밝혔다.

 

 

 

 

 

 

 

 

 

 

 

 

 

이번 책은 <사고전서>에서 낙랑 관련 기사를 발췌하여 원문과 번역문을 싣고 역주를 붙였다. <전한서> <사기> <후한서>를 비롯한 20개 사서에 나온 낙랑 기록이다.

<전한서>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낙랑·현도를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고, <진태강지리지>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이 두 사료에 나오는 갈석·갈석산의 위치를 찾던 그는 <사고전서>의 관련 사료들을 훑은 결과 새롭게 ‘허베이성 남쪽’ 설을 주장하게 됐다고 한다. 그 갈석·갈석산이 정인보 등이 주장한 현재 친황다오시 창리(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이 아니라, 허베이성 남쪽지방으로, 오늘의 호타하 유역 북쪽의 바오딩시 인근에 위치하는 백석산이라는 것이다. 백석산은 한무제 때에는 갈석산으로 불렸다는 주장이다. 정인보 등은 현재의 창리현 갈석산을 한사군 설치 당시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갈석산’으로 보았으나, 창리현 갈석산은 한무제 때에는 게석산이었는데 후대(수·당대)에 갈석산으로 개칭됐다는 기록이 <사고전서>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그는 <사고전서>에 낙랑군 수성현은 현재 허베이성 바오딩시의 수성(쑤이청)진이라고 주장한다.

심 원장은 1983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연구실에서 연구직 전문위원으로 일하다 “<소학>에 나오는 고사의 주인공 백이·숙제가 고죽국 사람인데, <삼국유사>를 읽다가 고조선 대목에 이은 뒷장에서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는 대목을 보고 고조선·고구려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92년 정신문화연구원을 그만뒀”다. 이후 줄곧 고대사 연구에 몰두해왔다.

그는 “신채호·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생전에 <사고전서>를 접할 수 있었다면, 우리 고대사의 방향은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낙랑의 위치가 중요한 까닭을 “낙랑이 고구려의 발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낙랑·현도 땅에서 고구려가 발상했는데, 기존 통설이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하니 고구려도 압록강 유역이 발상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당나라 때 고구려를 쳐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을 쳤다는 것은 현재의 평양이 아닌 요서 산하이관 지역의 평양을 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책 서두에서 2012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발간한 ‘한반도 역사’ 보고서에 들어간 동북아역사재단의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자료가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으며 낙랑군은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논지를 폈고, 올 초 이 재단이 발간한 <한국고대사 속의 한사군>이란 책도 한사군의 한반도 북부 위치설을 펴 기존 대동강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리지린, 고조선 연구, 영인본, 열사람, 1989

정진명(시인)

 

자료가 부족한 역사는 누덕누덕 기운 소설이 됩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는 옛 <조선>을 보면 이 말이 실감납니다. 물론 제가 한 말입니다. 이른바 <단군조선>은 일제강점기에 타의로 시작된 근대 역사학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의 한국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편년을 모두 일본의 역사에 맞추어 날조를 서슴치 않았고, 자료를 찾으려는 노력 없이 저질러댄 이런 첫삽은 그 후의 지형도를 정리해버렸습니다. 그 후의 역사학자들은 문헌 이외의 것을 찾으려 하지 않고 문헌 안으로 움츠러든 생각을 끝내 펼치지 못함으로써 후대의 학계 밖 보통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재 신채호의 발품이 떠오르는 해처럼 빛납니다.

 

사실 문헌자료만 놓고 보자면 단군 이야기는 고려 때 한 중의 손끝에서 조작된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화가 나라와 겨레의 지나간 세월이 이야기 형태로 변형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도 300년 후에 나타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 단순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일본학자들이나 식민사관 학자들의 성실성은 오히려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문헌기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소홀히 했다는 점은, 뒤늦게 밝혀지는 여러 자료들을 본다면 이들은 민족반역자로 처단 받아 마땅합니다.

 

단군신화가 지난 세월의 잊혀진 국가에 대한 암시라는 것은 고고학의 발달과 성과가 일구어놓은 위대한 업적입니다. 압록강 건너 만주와 요동 벌 일대에 뜻하지 않은 자료들이 출현함으로써 단군조선은 신화에서 비로소 역사의 일부로 복권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단군신화를 우리 민족사의 엄연한 현실로 끌어들이려는 눈물겨운 노력은 희미하게 이어져왔습니다. 그런 노력의 위대한 첫삽이 바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뿌듯함과 통쾌함과 자부심은 지금도 가슴 벅찹니다. 그러나 그런 가슴 벅찬 감동은 오랜 세월 묻어두어야 했습니다.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해서 그것을 처음으로 고조선의 존재와 의미를 해석한 남한의 학자는 1980년대에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음이 그것이죠.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이 책은 몇 년 뒤 내용이 더 보강되어 다음의 905쪽짜리 두꺼운 책이 됩니다.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5

 

그리고 뒤어어 대중을 위한 교양서도 냅니다.

 

윤내현,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1989

윤내현,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물론 이런 주장은 윤내현이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소박하지만 재야 사학자들 중에서는 이런 주장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손뼉도 짝이 있어야 소리가 나는 법. 대학에 진을 친 역사학자들은 재야 사학자들의 이런 몸부림에 끝까지 함구했습니다. 윤내현의 주장이 재야 학자들의 주장과 엄청나게 다른 것이 아닌데도 학계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것은, 오직 윤내현이 제도권 안의 학자요 교수라는 점 뿐이었으니,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한 동안 곱씹어보게 만드는 일입니다. 성안에서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하면서 노는 것입니다. 성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무책임과 독단이 1980년대 이후 재야의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격을 불러들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 쏟아져나온 엄청난 양의 역사서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어찌 보면 학계의 자업자득이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동안 잊었던 반쪽이 있었고, 그 반쪽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반쪽이란 북조선을 말합니다. 북한의 역사서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고대사와 관련하여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북한사회과학원에서 나온 <고조선 연구>입니다. 리지린은, 이 책에서 기존의 역사서에 남은 고조선의 기록을 모두 찾아내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놀라운 결론을 매직아이처럼 보여줍니다. 고조선은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저쪽 너머 요동 반도 근처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조선상고사>보다 더 명쾌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단군론으로 교과서에서 배운 나에게 이 책은 굉장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후 북한과 남한, 그리고 중국의 단군조선론은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왈가왈부 논쟁 중입니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으로 보는 자의 의도에 따라 그렇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료보다 그것을 보려는 자의 시각이 더 중요하지 아니한가요?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단군신화가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라면, 굳이 꼭 그것을 이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국의 사학자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고조선의 요동반도 언저리에 있다고 보아도 된다면, 굳이 고조선을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그렇게 애쓰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 먹은 이유가 무엇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자료가 부족한 역사는 누더기 소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더기 소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굳이 내용까지도 비굴하게 만드는 글쓴이들의 태도입니다. 단군조선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슬퍼집니다. 사실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슬픔입니다. 역사학은 이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이 위로는 역사학의 몫이 못되는 것일까요? 위로는 과학이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직 문학만이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책의 서지사항을 읽어보면 우리 시대의 아픔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63년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했고, 1964년에 학우서방에서 번인발행한 것을, 1989년에 열사람에서 영인 발행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동강난 것임을 느낍니다. 촌티가 줄줄 흐르는 그 활자 밑에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가슴뜨겁던 청년인 나를 20년 후의 내가 봅니다.

 

차례

 

머리말 = 1
제1장 고조선의 력사 지리 = 11
  제1절 고대 문헌 자료 상에서 본 고조선의 위치 = 11
  제2절 고대 문헌 상에서 본 고조선 령역의 변동 = 21
  제3절 기원 전 2세기 말(한4군의 설치 시기)까지의 료수의 위치(연, 진의 장성의 동단과 관련하여) = 44
  제4절 고조선의 패수의 위치에 대하여 = 72
  제5절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 83
제2장 고조선 건국 전설 비판 = 97
  제1절 단군 신화 비판 = 97
  제2절 기자 조선 전설 비판 = 124
제3장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에 대한 고찰 = 137
  제1절 예족과 맥족에 대하여 = 137
  제2절 예, 맥과 고조선과의 관계 = 164
  제3절 《삼국지》와 《후한서》의 《예전》과 《옥저전》에 기록된 《예》의 위치에 대하여 = 186
  제4절 맥국의 사회 경제 구성 = 192
제4장 숙신에 대한 고찰 = 201
  제1절 고대 숙신(肅愼)의 위치 = 201
  제2절 고대 숙신(肅愼)과 고조선과의 관계 = 211
제5장 부여(夫餘)에 대한 고찰 = 214
  제1절 부여는 어느 종족의 국가인가? = 214
  제2절 부여와 고조선과의 관계 = 221
  제3절 부여의 사회 경제 구성 = 238
제6장 진국(삼한)에 대한 고찰 = 263
  제1절 삼한 동천설에 대한 비판 = 263
  제2절 진국의 북변 = 267
  제3절 삼한인은 어느 종족인가 = 276
  제4절 진국의 사회 경제 구성 = 278
제7장 옥저에 대한 고찰 = 302
  제1절 옥저에 관한 자료에 대하여 = 302
  제2절 옥저의 위치에 대하여 = 305
  제3절 옥저인은 어느 종족인가 = 313
제8장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 문화의 분포 = 316
  제1절 석기 유물의 분포 = 316
  제2절 토기 유물의 분포 = 321
  제3절 거석 문화의 분포 = 328
  제4절 청동기 유물의 분포 = 332
제9장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그 사회 경제 구성 = 343
  제1절 고조선 사회의 생산력 = 343
  제2절 고조선의 문화 = 356
  제3절 고조선의 국가 형성 = 361
  제4절 고조선의 사회 경제 구성 = 369
맺는 말 = 388
도판 =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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