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
신라의 승려. 화엄종의 개조이다.
661년 문무왕 때 해로로 당나라에 가서 지엄의 문하에서 현수와 더불어 화엄종을 연구하고 670년 귀국했다.
676년 부석사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했고, 해동 화엄종을 창시했다.
한국 불교 사상의 토대를 닦다
의상은 신라의 승려로 화엄종을 창시했다. 644년(선덕여왕 13)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뒤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했고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냈다.
의상에 관한 첫 기록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처음 유학을 갔던 650년의 일이다. 이때 두 사람은 육로로 고구려를 통과하려다 정탐자로 오인받아 몇 달간 억류되었다 겨우 신라로 돌아왔다. 11년 뒤인 661년(문무왕 1) 의상과 원효는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 중도에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귀국한 원효와 달리 그는 8년간 당에 머물며 선진 불교를 배웠다. 유학 시절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대 교조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의상이 찾아가기 전날 밤, 지엄은 해동(海東)의 큰 나무 한 그루에서 잎이 번창하더니 그 잎이 중국까지 덮는 꿈을 꾸었다며 의상을 특별한 제자로 삼고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일일이 해석하며 가르쳤다. 의상은 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창시자인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류하며 사상의 폭을 넓혔다. 특히 당시 사귀었던 동문 현수(賢首)와는 신라에 돌아온 뒤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 갔다. 현수는 훗날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3대 교주가 되었다.
8년간의 유학을 마친 의상은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동기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조금씩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할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귀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송고승전》에는 그가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해 신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다만 그가 당나라에 머문 기간 동안 화엄 사상을 폭넓고 깊게 익혔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의상은 화엄학의 한 사상을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는 도해시를 통해 남겼다.
귀국 직후 의상은 낙산사 관음굴로 들어가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의상은 색깔이 파란 이상한 새를 쫓아 관음굴 앞으로 왔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의상이 이상하게 여겨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지성으로 7일간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이 소원을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되기에 훗날 이곳에 홍련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를 통해 의상은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에 상주하며 설법을 편다고 전해지는 《화엄경》의 관음이 신라의 동해에도 머물고 있다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주고자 했다. 이때 쓴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261자의 간결한 문장으로 그의 관음 신앙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의상은 676년(문무왕 16)에 왕명으로 부석사를 세우기 전까지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화엄 사상을 강론했다.
화엄경 중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의 변상도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내용을 청련화 보살로 하여금 연화장 보살에게 설법하게 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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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의 업적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것은 수많은 사찰을 건립한 일이다. 이전에도 신라에서 화엄 사상은 존재했지만 의상처럼 널리 유포시킨 사람은 없었다. 의상은 왕명에 따라 건립한 부석사를 비롯해 중악 팔공산 미리사, 남악 지리산 화엄사, 강주 가야산 해인사, 웅주 가야현 보원사, 계룡산 갑사, 삭주 화산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무악산 국신사 등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해 화엄 사상을 설파했다. 이 밖에도 불영사, 삼막사, 초암사, 홍련암 등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 사찰 건립에 열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을 청빈한 승려로 기록한 문건도 많다. 그가 제자들을 통해 화엄 사상을 널리 전파한 것을 높게 평가해 문무왕이 땅과 노비를 내린 일이 있다. 그러자 의상은 “우리의 법은 지위가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이 귀하고 천함을 한가지로 합니다. 또한 《열반경》에는 8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어찌 제가 이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까지 전해져 《송고승전》에 기록되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하루는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을 것을 명하자의상이 이를 듣고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언덕 땅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성곽 축성을 중지했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정리하는 일 외에도 평생 3,000여 명의 제자를 육성하기도 했다. 부석사에서 40일간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을 나눴고 소백산 추동에서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했다. 의상은 제자들이 답을 청해 오면 그들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의심이 나는 점을 풀어 설명했고, 제자들은 이를 통해 창의적인 학문 세계를 펼쳤다. 이렇게 그가 배출한 오진(悟眞), 지통(知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은 10대덕(大德)의 고승으로 평가된다. 한국 화엄종의 개조로 추대되는 의상은 고려 숙종으로부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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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