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4 : 자주성 전투와 최이 정권의 화친제의
04.09.18
귀주성에서 고려군과 몽골군이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몽골군 분견대는 남하하여 자주성을 공격하였다. 자주성은 현재 평안남도 순천군 풍산면에 있는 자모성인데, 앞서의 철주나 귀주보다 후방에 위치한 성으로, 서경(평양)의 바로 북쪽에 있다. 자주성 전투는 1231년 11월 경으로 추측되고 있다.
자주성 전투는 부사인 최춘명이 주도했는데, 그는 고려의 대표적인 유학자 최충의 후손이다. 그는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자 귀주성처럼 병사와 백성들을 거느리고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켜냈다. 아쉽게도 귀주성과 같은 자세한 전투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것은 후일담이지만 몽골군의 1차 침략이 끝나갈 무렵, 최이가 대집성을 보내 몽골군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왕명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항복하지 않았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였다 하나, 본관에게는 사수의 책임이 있도다. 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항복이란 있을 수 없느니라."
최춘명은 몽골군이 철수할 때까지 성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의 항명죄에 대한 논의는 몽골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듬해인 1232년 (고종 19년) 4월에 열렸다.
결국 최춘명은 서경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를 처단하라는 왕명을 지닌 국왕의 사신이 서경에 파견되어 형을 집행하려는 찰나, 서경에 있던 몽골 관리가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비록 거역하였으나 그대들에게는 충신이 아닌가? 이미 화친을 맺고 우리도 죽이지 않았는데, 성을 온전히 지킨 저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최춘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적으로 맞서 싸웠던 몽골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했던 것이다. 강화도로 천도한 후, 그는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 안찰사에 이어 추밀원부사(정 3품)에 올랐다. 그의 충절은 뒤늦게 조선조에 들어와 1599년(선조 32년) 평안도 성천에 무학사란 사당이 세워져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살리타이와 다른 경로로 출정한 몽골의 남로군은 철주성을 함락시킨 후, 적은 수의 경기병을 주둔시켜 고려군의 집결을 차단하는 작전을 썼다. 그리고 주위의 성을 통과하여 9월 10일 서경(평양)을 공격하다가 저항이 완강하자 또 그대로 통과하였다.
(살리타이는 고려의 지형을 감안하여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진군시켰다. 남로군은 황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청천강을 건너게 하였고, 북로군은 내륙 방어성이 있는 삭주, 귀주를 공격하면서 내려오게 하였고, 나머지 한 부대는 살리타이 자신이 직접 이끌면서 황해안을 따라 내려와 안북부(평안도 안주)에서 선봉부대와 만나기로 하였다. 한꺼번에 집결하여 개성을 총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황주, 봉주(황해도 봉산)에 이르렀을 때 이곳 주민들은 일제히 황해의 철도로 피신했다. 주민들은 식량과 가축을 거두어 마을을 완전히 비워버렸다. 이 청야전술은 이후 고려군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최이는 1231년 9월 9일, 3군으로 조직된 방어군을 출동시켰다. 몽골군의 침략 보고를 받은 지 1주일이 지나서였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넌 때가 8월 중순경이었으니, 벌써 20여 일이나 지난 후였다.
9월 13일, 최이가 보낸 고려의 중앙군과 몽골의 남로군이 봉산 북쪽의 동선역에서 맞부딪쳤다. 고려군은 정찰병으로부터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동선역에서 기병의 안장을 풀어놓은 채 쉬고 있었다. 지휘를 맡은 장군 중 하나인 채송년은 좌군을 10리 정도 전방에 배치하고 우군을 그 오른쪽에 주둔시키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때 몽골의 경기병 정찰조가 고려군의 동정을 탐지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고려군의 정찰병이 산 위에서 몽골군이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몽골군이 온다"고 외치자 고려군은 혼란에 빠졌다. 몽골군 1천여명이 순식간에 쇄도해 들어와 공격을 퍼붓자 고려군은 창에 찔리고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우왕좌왕하였다. 다행히 좌군과 우군이 몽골군의 배후를 공격해 위기를 넘겼다.
채송년은 몽골 기병의 기세에 위협을 느끼고 들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밤새도록 목책을 세워 몽골 기병의 돌격에 방어하려는 시도를 했다.
다음날 아침, 몽골 기병대가 몰려와 목책에 불을 질러 일부를 태웠다. 그 사이 중장기병들이 몰려와 고려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하마트면 고려군 전열이 붕괴되려는 찰나, 초적 출신의 두 병사가 활을 들고 정확히 조준하여 몽골군을 연속으로 맞추자 고려군은 이 틈을 타 반격하였다. 고려군은 준비한 장작을 불타는 목책에 던져 몽골군의 접근을 막았다.
몽골군 남로대는 결국 정주성 방면으로 후퇴했고, 고려군은 몽골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북상해 청천강을 넘었다. 아마 몽골군의 본대를 막기 위해 북상을 서둘렀을 것이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그 사이 용주, 선주, 곽주, 박주 등 지금의 평안북도 서해안 일대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남하하고 있었다. 북상하던 방어군과 그 본대가 마주친 곳은 안북도호부(평남 안주)로 10월 하순에 들어서였다. 방어군은 안북성에 10월 21일 입성하여 바로 뒤이어 도착한 몽골군 본대와 여기서 두번째 전투를 벌였다.
몽골군은 안북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성안에서는 여기에 맞설 대응 방법을 놓고 혼선이 빚어졌다. 성밖으로 나가 몽골군을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수성전으로 일관할 것인지 오락가락 했던 것이다. 이런 지휘부의 혼선에는 3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대집성의 영향이 컸다.
3군의 총사령관은 상장군 이자성이었다. 그러나 최이의 측근인 대집성의 정치적 위상은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대집성이 군사들에게 성밖으로 나가서 싸울 것을 독려하자 군사들은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따랐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성 위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려의 우군이 기세좋게 성문을 열고 나가자 그 앞에서 대오를 지어 서 있던 몽골군은 기묘한 태세를 취했다. 우선 경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간격을 넓힌 다음, 그 사이로 중장 기병들이 말을 달려 돌격하면서 화살을 쏘아댔다. 고려군은 삽시간에 혼란 상태가 되어서 성안으로 퇴각하였다.
성안에 있던 중군이 지원하러 나왔으나 다시 말에 올라탄 경기병들이 돌격하는 바람에 중군도 붕괴되었다. 몽골군은 사정없이 고려군을 도륙했는데, 장군들도 여러 명 죽었다. 이때의 패전으로 고려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으며 중앙군은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마비되었고, 몽골군의 남하를 막을 힘을 상실해 버렸다.
살아남은 고려군은 항복하고 안북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항복의 표시로 몽골군에게 음식이 제공되었고 살리타이는 안북성을 거점으로 하여 그들의 총지휘부로 삼았다. 그리고 서북면에 분대어사로 나가 있던 민희라는 자에게 살리타이는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주어 개경으로 보냈다.
한편 안북성을 함락시키기 전, 살리타이가 고려 조정에 사신 두 명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개경에 들어오지 못하고 평주(황해도 평산)에 억류되고 말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처리를 놓고 고심하다가, 특사를 파견하여 살리타이의 첩문만을 접수하고 그 두 명은 개경으로 압송해 왔다. 10월 20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신을 억류한 평주는 몽골의 남로군에게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말았다. 주의 관리와 병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닭이나 개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평주의 도륙은 몽골의 남로군이 남하하면서 저지른 것으로 11월 22일의 일이었다. 선발대가 개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 살벌한 소문은 도성 안에 먼저 퍼지고 있었다.
11월 29일 마침내 몽골군 선발대가 개경의 선의문 밖에 도달하였다. 안북성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들은 최이가 새로이 5군으로 편성된 방어군을 미처 출정시키기도 전이었다. 평주에서 예성강을 넘으면 바로 개경 근교인데, 몽골군은 예성강 밖에서 온갖 살륙과 방화, 약탈을 마음껏 자행하며 일부러 지체했다.
몽골군이 도성 밖에까지 몰려왔다는 소식은 성 안을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다. 민심은 물 끓듯 했고, 최이는 계엄령을 내리고 사위 김약선(귀주에서 분전했던 분도장군 김경손의 형이다)과 함께 가병들을 총동원하여 신변 호위에 들어갔다. 자신의 신변안전만 강조하다 보니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은 허약한 병사와 노약자가 태반이었다. 거란족 유민들이 쳐들어 왔을 때 아버지 최충헌이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개경의 도성 4대문 밖에 나누어 주둔한 몽골군은 그 사이 흥왕사(경기 개풍군에 위치)에 쳐들어가 노략질한 뒤, 불을 질러 버렸다. 흥왕사는 이때 소실되었다가 후에 다시 복원된다.
최이 정권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개경의 도성 안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몽골군을 무력으로 물리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사실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방법은 단 하나, 그들과 화친을 맺는 수 밖에 없었다.
12월 1일, 최이는 민희를 몽골 군영으로 보내 화친의 뜻을 전했다. 안북성에서 화친의 사절로 나섰던 바로 그 사람이다. 화친의 의사표시로 음식까지 잔뜩 준비하여 몽골군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12월 2일 민희가 다시 몽골 군영을 찾아가, 몽골 사신 두 명과 함께 도성 안으로 들어와 국왕 고종을 면대하고 정식으로 화친 체결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화친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몽골군은 고려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개경에 주둔했던 몽골군 중 일부는 남하를 계속했다. 광주(경기도)를 거쳐 충주, 청주까지 밀고 내려갔으며, 역시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륙을 일삼았다.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켜 항복을 신속히 받아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