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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비구니와 마라 빠삐만의 대화 9
셀라(Selā) 비구니는 알라위까(Āḷavikā) 라고 부르는 비구니와 동일인이다. 알라위까 비구니는 마라 빠삐만의 대화에서 나오는 열 명의 비구니 중에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비구니다. 셀라는 알라위까의 왕의 딸이었다. 그래서 셀라라는 본명도 있지만 도시 이름을 붙여 알라위까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름이 많을 때는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 앞에 자기가 태어난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셀라 비구니가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하기 위해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왓티에서 탁발을 해서 공양을 마친 뒤에 홀로 있기 위해 눈먼 숲으로 들어갔다. 이때 마라 빠삐만은 셀라 비구니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고 털이 곤두서게 하여 혼자 선정에 든 상태를 방해하려고 셀라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셀라 비구니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누가 이 존재를 만들었는가? 존재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존재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존재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마라 빠삐만의 말을 들은 셀라 비구니는 이렇게 알아차렸다. “이 게송을 말하는 자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가? 누가 이 게송을 말하고 있는가?”
상윳따니까야 경전에서 아라한이신 열 분의 비구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앞부분에 있는 내용은 모든 비구니들에게 동일하게 반복되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은 경전의 일관성을 위해서 다른 비구니 경에서도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경전결집을 통해서 모아진 내용을 암송으로 전하기 때문에 때로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문장뿐만 아니라 단어의 차이에서도 암송을 위해 만들어진 문장이라서 필요에 따라 더 붙이거나 생략할 수 있다. 이때 암송하기 위해서 만든 문장을 가다(gada)라고 한다.
셀라 비구니가 장님들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았다. 그는 선정에 들기 위해 집중을 하려고 할 때 짧은 망상이 일어났는데 이때 내면에서 일어난 망상을 마라 빠삐만이라는 존재의 형상을 빌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망상이란 오온 중에서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의미한다. 이때의 마라 빠삐만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표상이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관장하는 사악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사실 이때 내가 나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존재를 부각시켜 대화한 것이다. 사람들이 혼자서 하는 말은 넋두리처럼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하나의 존재와 말할 때는 사실처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죽음의 왕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마라 빠삐만이 ‘누가 존재를 만들었는가?’라고 말할 때의 존재는 빨리어로 빔바(bimba)라고 한다. 빔바(bimba)는 모양, 형상, 그림자, 영상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빔바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닌 가공으로 만들어진 자아를 가진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존재를 여러 가지 요소들의 결합으로 보아 자아를 가진 존재로 보지 않고 무아로 본다. 관념으로 본 존재는 형상에 의해서 생긴 그림자조차도 존재로 본다. 예를 들어 나를 찍은 사진을 볼 때 누구나 사진에 있는 존재를 나라고 본다. 이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없는 나를 본 것이다. 보는 순간의 나는 사진을 보고 있는데 사진에 있는 내가 실재하는 나라고 본다. 이것이 그림자를 나라고 알고 있는 착각이다. 그래서 이때의 빔바는 큰 그림으로 본 아트만이라는 자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라 빠삐만은 이 존재라고 하는 형상을 범천인 브라흐마가 만들었는가, 창조주가 만들었는가, 사람이 만들었는가,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빔바(bimba)는 자아를 가진 자기 존재라는 말이다. 하지만 빔바는 앗따 바와(atta bhāva)라고 해서 자기 존재의 생성이라는 뜻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기 존재란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뜻의 오온을 말한다. 이런 오온은 여러 가지 요소들의 결합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주도하는 실체가 없어 공(空)이라고도 하고 또는 무아라고도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몸과 마음이란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빔바(bimba)는 인간, 동물 등의 존재를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무아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업의 과보로 본다. 하지만 힌두교에서는 이러한 나를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하나의 존재로 본다. 그래서 앗따 바와(atta bhāva)라는 질문은 ‘나라고 하는 이 존재를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때 마라 빠삐만이 말한 존재는 힌두교의 항상 하는 입장에서 본 윤회하는 세계의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셀라 비구니는 아라한이라서 불교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고 오온을 하나의 형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에서 먼저 존재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간에서는 아직 무상, 고, 무아의 깨달음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존재로 본다. 하지만 출세간에서는 무상, 고, 무아라는 생명의 특성을 아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나를 존재로 보지 않고 단지 하나의 형상으로 본다. 이때 서로가 아무리 대화를 해도 견해의 차이에 대한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왜냐하면 세간의 어리석음과 출세간의 지혜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세간에 속하는 정의 단계와 출세간에 속하는 혜의 단계의 차이다. 어찌 보면 정과 혜의 차이는 단지 단계적 과정에 불과해서 서로 대립할 하등에 이유가 없다. 누구나 집중이라는 정의 단계를 거쳐 혜라고 하는 통찰지혜를 얻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마라 빠삐만이 질문한 ‘누가 이 존재를 만들었는가? 존재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존재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존재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라는 내용은 이런 질문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적 지혜에 속한다. 그러나 마라 빠삐만의 입장에서 본 존재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자아를 가진 항상 하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존재는 깨달음을 얻은 자의 입장에서 본 존재가 아니다. 아직 생명의 특성을 모르는 입장에서 말하는 존재다. 여기서 이처럼 존재의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깨달음으로 본 실재하지 않는 존재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본 관념의 존재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이런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마라 빠삐만과 셀라 비구니가 말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인도에서는 존재를 항상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도 브라흐마가 만든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브라흐마, 위슈누, 시와 중에서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의문은 붓다께서도 깨달음을 얻고 49일 동안 다시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에 대해 숙고한 뒤에 비로소 확신을 가진 과정과 같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자도 반드시 새로운 진리에 대해 숙고하기 마련이다. 이런 숙고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깨달음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질문은 마라 빠삐만이 한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셀라 비구니의 내면에 있었던 의문을 자신이 스스로 떠올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의문은 셀라 비구니의 망상이기도 하고 오온 중에서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망상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단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작용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없애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에게는 어떤 현상이나 찾아온 손님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셀라 비구니도 오랫동안 자신이 믿고 있던 힌두교의 항상 하다는 아트만에 심취해 있다가 그 믿음이 깨질 때 앞서 밝힌 것처럼 붓다와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 뒤에 최종적으로 내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아는 지혜가 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여기에 나오는 아라한 비구니들이 똑같이 체험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혜가 났다고 해도 자기가 아는 지식과 전혀 다른 지혜는 누구에게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붓다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과연 누가 이 진리를 알 수 있을까 매우 고심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은 일반 수행자에게는 끊임없이 더 많이 제기되는 의문이다. 그래서 일반 수행자의 경우에 이런 의문이 들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구나.’ 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셀라 비구니는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가 완성한 지혜를 돌이켜보는 필요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 해탈의 자유를 얻은 뒤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회광반조의 단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은 모든 수행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회광반조는 아라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도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시작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계속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되고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난 뒤에 열반에 이른다. 그리고 열반에서 깨어나 지나간 것을 돌이켜보는 회광반조로 깨달음이 마무리 된다. 이것은 모든 열반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것을 나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가 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번뇌도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자아가 있고 존재가 항상 하다는 이러한 견해가 연기를 회전시켜 윤회를 하게 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속에서는 당연히 내가 한 것으로 알지만 출세간에서는 나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순간의 마음이 한 것이라고 알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괴로움이 소멸한 차이다. 또 깨달음이 없는 것과 깨달음이 있는 것의 차이다. 사실 없는 존재를 만들어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간이다. 그리고 없는 존재를 없다고 알아서 자유를 얻는 것이 출세간이다.
사실 이런 질문은 수행자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않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다. 수행자가 수행 중에 이런 질문을 하면 집중이 깨지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각으로 알려고 할 때는 알아차림이 없어 집중력이 깨지기 때문에 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결과로 집중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셀라 비구니가 이미 아라한이 된 뒤에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복기를 하는 차원에서 숙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가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다시 경전의 본문으로 돌아간다. 이때 셀라 비구니는 마라 빠삐만의 질문을 듣고 이렇게 알아차렸다. “이 자는 마라 빠삐만이구나. 그는 나에게 몸의 털이 곤두서게 하는 두려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혼자 있는 것을 방해하려고 게송을 말하고 있구나.” 셀라 비구니는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마라 빠삐만에게 게송으로 대답했다. “이 존재는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이 불행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흙의 영양분과 수분이라는 두 가지가 있어야 잘 자라는 것과 같도다. 이와 같은 무더기들과 구성요소들과 여섯 가지 감각장소는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네.”
여기서 셀라 비구니가 말한 빔바(bimba)라는 뜻의 존재는 마라 빠삐만이 말하는 존재와 다르다. 셀라 비구가 말하는 존재는 자아가 있고 항상 하는 그런 힌두교의 존재가 아닌 단지 오온을 형성하고 있는 실체가 없는 형상을 뜻한다. 다음에 불행이라고 했을 때의 불행은 아가(agha)를 의미한다. 아가(agha)는 사악함, 죄, 잘못, 증오, 고통, 불행, 비참, 화(禍), 역경을 의미하는 다양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오온을 가진 존재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아가(agha)가 갖는 다양한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비참한 생명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의 삶은 죄를 지어서 괴롭고, 항상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화를 입어서 불행하다. 이때 불행이라고 하는 아가(agha)는 괴로움의 토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존재를 말한다. 이처럼 불행한 존재는 남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만든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네.’라고 했을 때 ‘원인이 부서지면’이라는 말은 원인이 소멸하면 이라는 뜻과 조건이 결핍되면 이라는 뜻이다. 원인이 되는 조건에 결함이 있으면 조건이 성숙되지 않아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은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를 원인으로 연기가 회전하여 윤회를 하는데, 무명과 갈애 대신에 지혜와 관용이 생기면 집착을 하지 않아 연기가 회전하지 않아서 윤회가 끝난다.
붓다가 계신 당시에 교학자들 사이에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다는 견해를 가진 학파가 있고,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학파가 있었다.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다는 견해를 가진 자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서 모든 것이 항상 하다는 상견(常見)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괴로움은 남이 만든다는 견해는 단견(斷見)으로 이번 생이 끝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앞선 견해는 영원한 자아가 있어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업의 과보에 따라 윤회한다는 견해다. 다음 견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견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겪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모두 외부의 조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부정하셨다. 그리고 모든 현상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기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때 원인이 소멸하면 결과가 소멸하여 다시 태어남이 없어진다. 다시 태어남이 없으니 다시 죽을 일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이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문(門)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원인과 결과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부서지다, 사라지다, 소멸하다, 라고 하는 다양한 말은 여러 가지 빨리어 단어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짐, 부서짐, 파괴, 분해, 억제, 제어, 소멸이라는 이 단어는 쓰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다만 지혜의 정도에 따라 소멸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이러한 차이를 순간적인 소멸과, 일시적인 소멸과, 완전한 소멸, 세 가지로 분류한다. 예를 들면 수다원이 되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했을 때와 사다함이나 아나함의 소멸과는 다르다.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한다. 그래서 열반을 말할 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고 해탈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앞선 세 단계의 도과는 열반은 열반이지만 아직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소멸이 아니고 일시적인 소멸의 수준이다. 그러나 아라한의 열반을 반열반이라고 해서 완전한 열반이라고 여긴다. 사실 수다원이 되기 전의 범부의 상태에서도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사라짐과 많은 소멸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번뇌가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멸이 있고 번뇌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완전한 소멸인 아라한의 소멸이 있다.
다음으로 셀라 비구니가 말한 ‘이 존재는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이 불행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네.’ 라는 말은 앗사지 존자가 길거리에서 탁발을 하는 중에 만난 사리뿟다에게 설법한 말이기도 하다. 또 붓다께서 마지막에 남긴 유언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하라.’라고 하셨다. 이때의 완성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한 열반이다.
다음으로 셀라 비구니가 말한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흙의 영양분과 수분이라는 두 가지가 있어야 잘 자라는 것과 같도다.’ 라고 했을 때 씨앗은 의도로 행한 업을 의미한다. 씨앗이 뿌려진 뒤에 흙이라는 영양분과 수분은 적절한 조건의 성숙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업이 성숙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다른 말로는 조건이라고도 한다. 조건과 원인과 결과를 같은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내용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형태를 말하고 있다.
붓다께서는 하나의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업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때의 업(業)은 의도가 있는 행위를 말한다. 붓다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아는 마음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속박되어 아는 마음을 갖는다.” 이 말씀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셀라 비구니의 말과 같다.
이렇게 해서 오온과 12처와 18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흘러가는 것이 모든 존재의 현주소다.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업과 불선업이 자라는 장소가 갈애라는 뜻에서 업은 들판이다. 업과 함께 생긴 업을 형성하는 마음이 자란다는 뜻에서 씨앗이다. 씨앗을 돌보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물과 같다.” 또 “의도를 가지고 한 업이 과보가 없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도 하셨다.
다음으로 셀라 비구니 말한 ‘이와 같은 무더기들과 구성요소들과 여섯 가지 감각장소는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네.’ 라고 했을 때 무더기들은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뜻의 오온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성요소는 18계를 의미한다. 18계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포함한 12가지 장소 말하고 나머지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합쳐 18계라고 한다. 이러한 18계를 하나의 독립된 세계라고 한다. 이때 오온이란 모양이 하나의 세계가 아니고 오온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가 하나의 세계라는 뜻이다. 이것을 궁극의 진리라고 한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며 모양과 요소의 차이다.
다음으로 여섯 가지 감각장소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원래 일체, 전부,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세 가지를 합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온(蘊), 12처, 18계다. 하지만 12처와 18계가 순서가 바뀐 것은 암송을 위한 가다(gada)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오온과 12처와 18계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결합되어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여기에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없어서 무아다. 무아는 최종적이고 최상의 지혜에 관한 문제라서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아를 알려면 반드시 무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괴로움의 과정을 거쳐야 마지막에 무아의 지혜가 성숙된다.
결국 이러한 일체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고 원인이 없으면 소멸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때 원인은 무명과 갈애인데 이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무명과 갈애도 사라져 열반에 이른다. 그러면 원인이 소멸하여 태어나는 결과가 없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의 자유고 열반이다.
이때 셀라 비구니의 말을 들은 마라 빠삐만은 “셀라 비구니가 나를 알아버렸구나.”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 순간에 셀라 비구니의 망상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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