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문화재 보호 미래문화재 창출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고도의 목포.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때문에 잘 보존해야 한다.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현존 역사가 사라져 버린다. 복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실물이 아니잖은가. 때문에 보존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본래 낚시가 취미였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민물・바다낚시를 번갈아 다녔다. 한겨울에는 얼어버리기 때문에 특히 민물낚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휴일만 되면 사찰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의 우리 문화가 숨 쉬는 곳은 거의 다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아쉬운 것이 오래된 문화재의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개축 또는 신축이었다. 아무리 원본에 가깝게 복원했다하더라도 본래의 모습은 아니잖은가. 조상의 손때 묻은 혼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망되고 한스러웠다. 약한 민족이었기에 수많은 외침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갖고 갈 수 있는 보물들은 모두 약탈해 가버렸다.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불태워져버렸고. 이래저래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최소한 직접지배는 받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왕조 말기에는 외세에 짓눌렸다. 급기야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국가를 빼앗기면서부터는 일제 36년사라는 치욕스런 새로운 피의 역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반출됐겠는가. 또한 얼마나 수많은 건축물들이 불타 없어졌겠는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들의 총칼 앞에서 이 나라의 국민들은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모든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97년 10월 1일 개항한 목포는 전국 6대도시, 남한의 4대 도시 중 하나였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만큼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동안 민초들의 고통은 어떠했겠는가. 소위 이 나라 지도자라는 기득권층의 잘못으로 기름진 나주평야를 비롯해 전라도 곳곳에서 쌀 등 수많은 곡식, 면화, 소금 등이 공출되었던 것이다. 영산포에서 실려 뱃길로 목포를 거쳐 일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놋그릇, 놋수저, 놋젓가락 등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물자로 강탈해 갔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목포에는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일본식 절 동본원사(東本願寺)목포별원 등 수많은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에 맞서 항일운동의 산실인 죽동교회(1935년 건축)와 정명여고 유애나관(1920년대 초)등도 건립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수군 주둔지였던 목포진지 역사공원과 1930년대 일본인이 만든 이훈동 정원 등도 있다. 가치 있는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목포의 옛 개항장 일대를 ‘지붕 없는 근대역사박물관’이라 하잖은가. 이렇게나마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목포시민들을 비롯한 우리 지역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로마 등 유럽 각국을 보라. 조상 때문에 수많은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잖은가. 조상이 현세대들을 먹여 살리고 있단 말이다.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현대화 물결이 불어댈 때 무조건 없앴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야말로 엽전들이다. 지금부터라도 남아있는 문화재들을 최대한 보호하자. 또한 이를 기반으로 보다 질 높은 현 세대의 창조물들을 미래의 문화재가 되도록 하자. 그래서 고도 목포는 물론 우리의 전 지역을 문화의 도시로 우뚝 서게 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