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배향(文廟配享):학덕이 높은 유현의 神主를 문묘-(孔子를 모신 祠堂)에 같이 모시고 제향하는 것을 뜻하며,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모두 18분이 중앙의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향교의 문묘에 모셔져 매년 2月과 8月의 상정일(上丁日)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낸다.
중국 당(唐)나라 때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追封)됨에 따라 문선왕묘라고 부르다 원대(元代) 이후로 문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에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 공자에 대한 국가적 규모의 제사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그 출생지인 궐리(闕里)에 한정되었으며, 수(隋)나라 때까지는 주대(周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고 하는 주공(周公)이 국학(國學)의 사당에서 선성(先聖)의 자리를 차지하고 공자는 선사(先師)로서 배향(配享)되었을 뿐이다. 그 후 당의 태종이 유교정치를 표방하면서 공자가 선성의 자리에 모셔지고 안회(顔回)가 선사(先師)로 배향되었으며, 송대에 주희(朱熹)가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정통(正統)의 확립을 강조함에 따라 문묘의 향사제도가 정비되었다.
한국에서 공자 사당의 유래는 통일신라 때인 714년(성덕왕 13)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그 제자인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립대학에 해당되는 국학(國學)에 모신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향사(享祀)제도를 따라 운영되었으며 주자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대성전(大聖殿) 건립이나 배향자 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에서 유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그 내용이 심화되면서 제도와 운영이 더욱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군현의 향교에 세워졌는데 제도적으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아래에 있었으나 정치와 유학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태종대에 공자에 대해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그 밑의 10철(十哲)을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큰 도통(道通)은 정리가 되었으나, 조선의 학자들을 모시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사림파(士林派)의 이념적 정치적 승리가 완결된 시점도 광해군대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이른바 5현(五賢)이 문묘에 종사(從祀)된 때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 대한 종사 문제는 서인 ·남인의 학맥(學脈)과 연결되어 현실 정치 상황에 직결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正位)에 두고, 좌우에 4성 ·10철 및 중국 송대의 6현(六賢)을 배향하고 동무(東)와 서무에 각각 중국의 명현 47위와 한국의 명현 9위를 종사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무와 서무의 중국인의 위판을 땅에 묻고 한국의 명현은 대성전에 올려 모셨다. 현재 성균관에 전해오는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중수를 거듭한 것이다.
我東十八賢
東從享(동종향)
■薛 聰(650-740年頃)-字 聰智 慶州人 新羅神文王 時 官 翰林 弘儒候
설 총.........................자 총지 경주인 신라신문왕 시 관 한림 홍유후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중시조. 자 총지(聰智). 호 빙월당(氷月堂).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 한림(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儒學)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학문 섭취(攝取)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두(吏讀)도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 선덕여왕 때의 《풍요(風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神文王)을 충고한 일화가 있으며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安 裕(1243-1306)-初名 珦 字 士蘊 號 晦軒 順興人 高麗忠烈王 時 太學士 諡 文成
안 유......................초명 향 자 사온 호 회헌 순흥인 고려충렬왕 시 태학사 시 문성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金宏弼(1454-1504)-字 大猶 號 寒暄堂 瑞興人 李朝中宗 時 贈 右相 諡 文敬
김굉필......................자 대유 호 한훤당 서흥인 이조중종 시 증 우상 시 문경
-본관 서흥(瑞興). 자 대유(大猷). 호 사옹(蓑翁) ·한훤당(寒喧堂). 시호는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지칭되었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趙光祖) ·이장곤(李長坤) ·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등이 있다.
-본관 한양(漢陽).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李 滉(1501-1570)-字 景浩 號 退溪 眞寶人 官 右贊成 文衡 諡 文純
이 황.......................자 경호 호 퇴계 진보인 관 우찬성 문형 시 문순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북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進士)가 되고 1534년(중종2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子)로 등용(登用)되어 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으로 지제교(知製敎)와 경연청 검토관(經筵廳檢討官)을 겸직,1540년 정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역임하고 4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겸임하였으며,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서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註官)을 겸임하였고 그 해 10월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승진하였다.
1542년(중종37) 3월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자 시종(侍從)으로서,특지(特旨)를 받고 충청도 어사(忠淸道 御史)로 파견(派遣)되어 지방을 검찰(檢察)하고 4월에 돌아와 공주 판관(判官) 인귀손(印貴孫)의 패정(悖政)을 임금에게 간(諫)하였고,5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 등을 겸임. 다시 재해(災害)를 시찰(視察)하는 어사(御史)로 강원도(江原道)에 파견(派遣)되었고 12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고 이듬해 1543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이어 8월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10월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任命)되었다.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7월에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며 1554년 4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 ·6월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 1556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1558년 12월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 1566년 2월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1567년 6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고 1568년(선조1) 2월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61년(명종16)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건립(建立)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中宗) ·명종(明宗) ·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역책한지 4년 만에 선생의 학덕(學德)을 추모(追慕)하는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상덕사(尙德祠)라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落成),1575년(선조8)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도산서원 陶山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유학(儒學)의 연수(淵藪)가 되었다.
1574년(선조7) 2월에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했고,12월에는 시호(諡號)를 문순(文純)이라 추증(追贈)하였다.
1610년(광해2) 4월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9월 4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 40여 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心經釋疑》등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李 珥(1536-1584)-字 叔獻 號 栗谷 德水人 明朝 官 右贊成 文衡 諡 文成
이 이.......................자 숙헌 호 율곡 덕수인 명조 관 우찬성 문형 시 문성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치사상】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관직을 상당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담당층으로 자리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생활 안정과 사족중심의 향촌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 ·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칠정’ 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 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속에서 시급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 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金長生(1548-1631)-字 希元 號 沙溪 光山人 逸官 參判 諡 文元
김장생.......................자 희원 호 사계 광산인 일관 참판 시 문원
-본관 광산(光山).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 선조 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繼輝)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집(集)의 아버지.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왜란 이후인 선조 말과 광해군 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南陽) ·양근(楊根)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金)와 이귀(李貴)에 의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추천, 장령(掌令) ·사업(司業) 등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崔鳴吉)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1630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숭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이후원(李厚源) ·신민일(申敏一)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고, 죽은 뒤에 《사계유고(沙溪有故)》가 간행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金 集(1574-1656)-字 士剛 號 愼獨齋 光山人 沙溪長生子 官 判中樞 諡 文敬
김 집.......................자 사강 호 신독재 광산인 사계장생자 관 판중추 시 문경
-본관 광산(光山).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장생(長生)의 아들. 서울 출생. 영특하고 학예에 뛰어나 l8세 때 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등용되어 부여현감이 되고, 이어 임피현령 ·지평(持平) ·집의(執義) ·공조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중기에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퇴직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의 문책으로 사태가 시끄럽게 되므로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을 대성하여 그와 접하는 자는 예에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宋浚吉(1606-1672)-字 明甫 號 同春 恩津人 逸官 吏判 諡 文正
송준길.......................자 명보 호 동춘 은진인 일관 이판 시 문정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효종 즉위) 집의(執義)로 재기용되었다.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하였다가, 김자점(金自點)이 청(淸)나라에 밀고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을 지냈고,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를 비롯, 공주(公州) 충현서원(忠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南人)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 만 1년)를 관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에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부산), 〈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남양) 등이 있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중시조.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鄭夢周(1337-1392)-字 達可 號 圃隱 延日人 高麗恭愍王 時 文科官 侍中 諡 文忠
정몽주.......................자 달가 호 포은 연일인 고려공민왕 시 문과관 시중 시 문충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鄭汝昌(1450-1504)-字 伯욱 號 一두 河東人 李朝 安陰縣監 諡 文獻
정여창.......................자 백욱 호 일두 하동인 이조 안음현감 시 문헌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 호 일두(一). 시호 문헌(文獻). 함양(咸陽) 출생.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소격서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일두유집》이 있다.
(1491-1553)
■李彦迪-字 復古 號 晦齋 驪州人 文科 贊成 諡 文元
이언적....자 복고 호 회재 여주인 문과 찬성 시 문원
-본관 여주(驪州).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 (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어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金麟厚(1510-1560)-字 厚之 號 河西 蔚山人 中宗朝 文科 官 校理 諡 文正
김인후.......................자 후지 호 하서 울산인 중종조 문과 관 교리 시 문정
-본관 울산(蔚山).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成 渾(1535-1598)-字 浩恒 號 牛溪 昌寧人 宣祖朝 逸官 右參贊 諡 文簡
성 혼.......................자 호항 호 우계 창녕인 선조조 일관 우참찬 시 문간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趙 憲(1544-1592)-字 汝式 號 重峯 白川人 宣祖朝 文科 僉正 諡 文烈
조 헌.......................자 여식 호 중봉 배천인 선조조 문과 첨정 시 문열
-본관 배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
■宋時烈(1607-1689)-字 英甫 號 尤菴 恩津人 顯宗朝 逸官 左相 諡 文正
송시열.......................자 영보 호 우암 은진인 현종조 일관 좌상 시 문정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 ·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朴世采(1631-1695)-字 和叔 號 玄石 潘南人 逸官 左相 諡 文純
박세채.......................자 화숙 호 현석 반남인 일관 좌상 시 문순
-본관 반남(潘南),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 시호 문순(文純), 교리(校理)의()의 아들이다. 원두추(元斗樞)의 사위,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현석은 그가 태어난 한양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파주(坡州)의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관계를 가졌으며, 1659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나자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執義)·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남구만(南九萬)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시비명변(是非明辨) 후의 탕평론(蕩平論)'과 '벽이단(闢異端)'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 뒤에 김간(金幹)·김구(金構) 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계보를 파악하였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에 《남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