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산은 백두대간이 포암산(961)과 조령산(1017)으로 남하하다가 대미산에서 지맥을 갈라쳐 여우목고개를 지나 일군 산이다.
공덕산 사불산의 유래에 대해 대승사 사적비는 삼국유사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불산은 본시 공덕산인데 신라 진평왕 9년(587년) 정미에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일좌방장암이 홍사에 싸여 천상으로부터 공덕산 중복에 내려왔다는 소문이 궁중까지 전하여 왕께서 친히 공덕산에 행행하시니...(중략).. 이로 인하여 산명은 사불산으로, 사명은 대승사라 칭하게 되었다."
이름에서도 불교적 색채를 느낄 수 있듯이 이 산은 불교를 전파한 고승들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다.
신라 진평왕때 창건된 대승사는 1400여년의 역사를 지켜오면서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대웅전에는 보물 575호인 목각탱화와 관련문서가 모셔져 있고 선실에는 보물 991호인 금동보살좌상이 있다.
또 멀지 않은 거리에 비구니승들의 수도처인 윤필암이 있어 쉬엄쉬엄 오르는 수행코스로도 손색이 없는 산이다.
등산로 입구에는 옛날 중국을 다녀온 나옹이 기념으로 심었다는 아람드리 전나무가 반겨주고 산행내내 아람드리 참나무와 소나무가 반겨주는산, 종주중 반정도는 육산으로서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 원시림은 때묻은 속세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게 하고 나머지 반은 노송과 함께 어우러진 암릉길은 속세에 나가 어려운 풍파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사전 수련을 하듯이 전개되는 바위길의 묘미를 볼 수 있는 산이다.
즉 육산과 바위산위 공존하는 산으로 대승사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공덕산 823봉까지는 길이 아주 좋은 육산으로 울창한 숲에 가려 조망이 없어 실망을 하는 산이나 823봉부터 윤필암 하산길 까지는 노송과 바위가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는 상반된 얼굴을 보이는 산이다.
산행기점 찾기
대승사 입구에서 2km쯤 올라가면 삼거리에 도착한다.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600m쯤 올라가면 좌측으로 화장실과 주차장이 있는곳에서 출발, 일주문을 거쳐 대승사 절 앞 우측으로 등산로가 있음
삼거리에서 올라오며 도로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돌을 쌓아 놓은곳에서 계곡쪽을 보면 70m지점에 나도야 바위가 보인다.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의 중턱에 자리하는 삼한거찰이다. 한국 불교사에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한 찬란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창건의 내력은 신라 진평왕 9년에 망명 비구에 위해 개산되었다고 한다.
사불산의 주봉은 공덕봉으로 산중허리에 사면에 본상이 조각된 사불암이 있다.
일연화상은 삼국유사에 천강의 사불암을 적어 전한다.붉은 포장에 가리워서 사불암이 공덕봉 중복에 하강했다. 진평왕은 서북 하늘 밑의 서광의 발원지를 찾아 이곳까지 행행하시와 환희재를 환희재라고 부르는데 소야리에서 대승사로 가는 길목이다. 1956년 소실된 전우를 증창하고 사적비를 건립했다.
대승사 목각탱부 관계문서(보물 제575호)
대승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불탱각은 관계문서 4점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높이3m 길이가 4m로 원래 부석사 에서 봉안하고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온 것으로 후불탱화는 나무를 깍아 부조아 투조기법의 조각으로 표현 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목각탱중에서도 이것은 대형이면서 정교하고 치밀하여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이 목각탱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4매의 문서는 탱각의 소유를 둘러 싸고 두 사찰사이에 있었던 분쟁결과 그 소속여부를 자세하게 적은 것인데 고종13년(1876)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있다.
구도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앙에 안치하고 좌우로 3구씩 4열을 맞추어 좌우 대칭으로 배열하고 각존상마다 존명 을 밝힌 명패가 있어 상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상들은 팔보대살, 이대천부, 사천왕과 6대제자상 등으로 각기 특징있는 수인에 지물을 들고 있으며 자세도 좌상, 입상, 꿇어앉은상 등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대승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991호)"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의 대승사 선실에 안치돼 있으며 총 높이가 85cm로 고려시대 작품이다.
대승사 선실의 주존불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 아니라 특히 돋을 새김이 선명한 영락등은 이시대 불상조각의 기법과 양식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불상의 작자나 유래는 미상으로 1981년 불상대좌에서 발견된 관음개 금원문에도 개금기만 있다.
소야리의 미면사가 폐사될때 대승사로 이전 봉안된 것으로 만 전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불상은 대부분 철불 또는 석불일 뿐 금동불은 우리나라에서 3∼4구 밖에 없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금동불은 불교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하나가 될 보물급 불상이다.
이 관음상은 원각 독립상으로 머리에는 보관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두어깨를 감춘 통견대의에 앞가슴과 무릎에 보살 특유의 영각등 장업구가 화려하게 나타나 있다.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제51호)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의 깊은 산골짜기에 화장사의 절터라 전해지는 곳에 비교적 규모가 작은 아담한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9세기경)의 화강석 탑으로 건립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 곳에 신라시대에 창건한 화장사가 있었는데 100여년전 불타 없어진 후 불상 및 기타 문화재는 산북면 전두리에 있는 대승사로 옮겼다고 하며 또 이 부근에서 금동불상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찰규모를 추정할만 한 유적을 찾을길 없고 지금도 이 곳을 탑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탑은 일제시대에 탑 내부에 장치되었던 舍利를 끄집어 내려고 무너뜨려 많이 파손되어 3층탑신은 인근에 신축한 제실의 주춧돌로 사용되는등 흩어져 있던 것을 1960년 9월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용사"
개산조 운달조사가 창건한 후 지금의 김룡사가 큰절의 초창은 인조2년 에 수행 공덕으로 고명했던 혜총선사가 제자들과 힘을 모아 이룩하였으며 그후 소실된 것을 의윤,무진,대휴의 세분 대사가 옛모습을 되살려 놓아 번창시에는 48동에 건평 1,188평이나 되었으나 현재는 대소 전각 30여채가 남아 있다.
험상한 모습의 사천왕 신장상이 방문객을 압도하고 대웅전을 위시한 고색 창연한 전각들이 그 옛날의 창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경흥 강원 건물은 국내 최대 강원건물의 하나로 300명을 동시에 수용 할 수 있는 온돌방으로서 그 부엌아궁이는 어린 학생들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다.
인조 27년 설잠대사가 조성한 대웅전의 불상은 그규모가 웅대하며 기예 또한 현묘하고 성균대사가 만든 후불 탱화가 유명하다. 고종26년에 사증대사가 조성한 거대한 쾌불탱화를 비롯한 죽은 사람의 생,전사가 기록 영화처럼 비쳐진다는 거울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였으며 석탑과 석상을 절뒤에 세운것은 그 선익을 진압한다는 뜻이며 혹은 산혈의 촉맥을 보우하는 뜻이라 한다.
김용사에서 특이한 것은 물빛이 우유빛과 흡사하여 신기한 느낌을 주는데 그 이유는 절자리가 풍수지리학상 와우형국 이기 때문이라 한다.
김용사의 애기중 전설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운달산 골짜기 깊숙히 자리잡은 김룡사는 창건이래 참선하는 수도승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수많은 수도승들 가운데 유독히 한 애기중이 있었다.
하루는 주지스님이 이 애기중에게 상추를 씻어 오라고 하여 애기중은 시내로 나갔다. 맑은 물에 손을 담구어 상추를 씻고 있던 애기중은 문득 눈앞에 붉은 불기둥과 함께 활활 타고있는 절을 보았다.
가만히 살펴 본 즉 김룡사에서 십여리 떨어져 있는 대승사였다.
불타고 있는 대승사의 중들은 우왕 좌왕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애기중은 놀라서 자기가 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신없이 염불을 외고는 시냇물을 상추잎으로 불길을 항해 퍼부었다. 손끝을 따라 상추 잎들이 마구 불기둥을 향해 날아 갔다.
한참만에 불을 다 꺼졌다. 그제서야 제 정신을 차린 애기중은 상추그릇을 보니 상추는 몇 잎 남아 있지 않았다. 큰일이다 싶어 남은 상추를 씻어 급히 절로 달려 갔다. 한편 주지스님은 이제나 저제나 상추 씻으려간 애기중을 기다리다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뒤 늦게서야 애기중이 헐레 벌떡 달려 왔다. 어디가 낮잠을 자고 오느냐고 묻던 주지스님은 몇 잎 남지 않은 상추 그릇을 들여다 보고는 더욱 화가 폭발해서 무슨 장난을 치느라고 이제 왔느냐며 따지며 매채를 들었다.
애기중은 아무말도 못한 체 매를 맞았다. 이야기를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핑계를 댄다고 더 매를 맞을 것 같아서 말도 못하고 매만 실컷 맞았다.
밤이 되었다. 애기중은 말없이 잠을 이루지 못한 체 누워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이 절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번뇌에 잠겨 있었다.
그때 옆에 누워있던 한 중이 낮에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매를 맞았느냐고 물었다. 애기중은 낮에 일어났던 일을 하나 하나 얘기헀다. 그러나 그 중 역시 믿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중들이 모두 잠들기에 애기중은 몰래 절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중들은 애기중이 매를 맞고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어젯밤에 들은 애기중의 이야기를 모두들에게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여러 중들은 가타 부타 논쟁을 벌리다가 누가 직접 대승사에 가보기로 하였다.
과연 대승사는 불타 있었고 중들은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대승사 중들은 불이 일어난 시각이며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와 불을 끈 상춧잎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중은 과연 애기중의 이야기가 참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급히 돌아 온 중은 주지스님께 이 사실을 고하여 애기중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길이 없어 그 애기중을 잃은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