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리 선생님
옛날 중학교 다닐 때 영문법 강의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자그마한 키에 마흔 정도의 나이에 항상 밝은 미소를 달고 다니시던 선생님을 아이들은 존경하고 따랐다. 선생님은 학창시절을 일본에서 지내시고 나이 들어서야 한국으로 건너오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유난히 우리민족의 수난과 함께 우수성을 강조하시곤 하셨다. 작은 체구에 어디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목청을 돋우어 열심히 강의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 사이에서 부뚜리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유인즉 영어 예문을 쓰실 때 거기 등장하는 이름은 Tom이나 Judy가 아니라 언제나 부뚜리(Puturi)였기 때문이고, 선생님의 소박한 인상이 그 부뚜리라는 어휘가 풍기는 인상과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나는 그 부뚜리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는 했지만 그냥 촌에서 자주 듣던 개똥이 소똥이 같은 소박한 의미를 담은 이름일거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얼마 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후배 중에 ‘부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 이름의 내력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돌’이면 ‘돌’이지 ‘부돌’은 또 뭐냐? 농조로 반쯤 약을 올리면서 물어본 부돌이란 이름이 바로 부뚜리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부뚜리는 부뜰이 즉 ‘붙들이’라는 말의 사투리였으니 붙드는 사람 곧 붙잡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갓난아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단한 심사가 휘리릭 마음속을 지나갔다. 누군가에게 ‘붙잡는 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까닭은 누군가 붙잡지 않으면 달아날 사람을 막기 위함일 텐데, 그 달아나는 자가 누구며 왜 달아나느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지난 세월동안 조상들의 고단한 삶까지 생각이 가 닿을 수밖에 없다.
이 한 많은 땅의 수많은 남정네들은 얼마나 원치 않는 가출을 해야만 했던가? 몽고군에게 끌려가고, 일본순사에게 끌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기를 들고 태극기를 들고 끌려간 수많은 남정네들은 어느 골짜기에서 귀신도 모르는 죽음을 죽어가야만 했던가. 그러나 그게 어디 남정네들만의 아픔이었을까.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여섯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하고 서둘러 아이라도 하나 낳아야만 끌려가기를 모면했던 모진 세월도 있었으니, 그럴 때 태어난 아이는 그 아비와 어미를 집안에 붙잡아두는 부뚜리의 중책을 다하는 집안의 보물덩어리였을 법한 일이다.
하긴 달아나는 남정네들이 어디 그 뿐이었으랴? 요즘도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먼저 세상 뜬 남편을 두고 “영천 장에 콩 팔러 갔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렇게 길을 나섰다가 불귀不歸한 사람들이 얼마였으면 그런 말이 저자거리의 유행어가 되었을까. 하긴 게 중에는 콩 팔러 간다는 핑계 대고 읍내 주막집 색시와 눈 맞아 달아난 난봉꾼 아저씨들도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그 뒤에 남은 가족들의 한 맺힌 나날들이야 보지 않아도 가슴 아린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부뚜리란 이름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태어난, 또는 태어나야만 했던 아기라는 극찬의 이름인 동시에 무거운 짐을 진 이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환자 중에는 이런 사연이 있는 분도 있다. 아흔의 할머니인데 벌써 10년 넘게 고혈압으로 내 진료실을 찾으시는 분이다. 두 살 적으신 할아버지도 고혈압으로 함께 다니시다가 요 몇 년 동안은 문 밖 출입을 못하시는 처지이다. 병원 다녀가시는 일만으로도 기진맥진하시는 할머니는 그러나 하루도 약을 거르시지 않는다. 할머니에게는 언어장애가 있는 고등학교 3학년 손자가 하나 있다. 할머니의 아들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엄마가 가출을 해버렸다. 아이는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십 년 전 팔순을 막 넘겼을 때도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고만 딱 갔으면 좋겠는데 머시기가 불쌍해서 갈수가 있나. 지나 내나 팔자가 사나와서 이 고생인걸...... 먼 구체가 없시까요 원장님?”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나온 내 대답이 이럴 수밖에.
“우짭니꺼 손자 장가 갈 때까지는 사시야지요. 할메 가시믄 손자는 인자 우짭니꺼?”
“그러게요. 그러게 말이시더......”
그런 할머니의 손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부뚜리가 된 셈인데 그 부뚜리는 조부모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가야하는 부뚜리였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부뚜리들은 고단한 역사의 증언자이기도 하고 고단한 가족사의 증언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저 구순 할머니의 손자처럼 부뚜리가 가진 구원의 의미조차 부여받지 못한 필연의 부뚜리들은 온몸으로 고단한 가족사의 짐을 지고 가아만 하는 일이니, 세상은 어찌 그리 천층만층의 사연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지 답답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영문법을 가르치시던 부뚜리란 별명의 그 선생님은 무수한 부뚜리들에게 부여된 이 땅의 한 맺힌 사연들을 언젠가는 너희들이 알 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집요하게 부뚜리를 외치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 한 많은 땅에서 부뚜리란 이름이 사라져도 좋은 그런 세월을 너희들이 만들라고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고야 마는 것. 이제 이 늙어가는 아이들은 여전히 한숨 천지인 세상을 선생님의 기대처럼 바로잡지도 못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을 붙들 수조차 없는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일임에야. 건듯 불어가는 한 평생의 숨소리가 깊은 골짜기마다 한이 되어 쌓이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첫댓글 쌤이 그동안 안행수필의 부뜨리였고 지금도 여전하지요. 쌤의 음덕으로 카페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많이 쓰시고 또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