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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리 추 구
Seeking Truth I
원 초 질 문 [protoquestion, pq]
먼 옛날, 하늘과 땅이 생기고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생겨난 사람이었다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을 것인가 상상해본다. 태고의 순수한 자연을 바라보며 나의 존재의 근원과 내가 인지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궁구하며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최선의 삶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인류최초의 사람이 아니어도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현재를 사는 우리만 아니라 이 세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존재의 원인과 생의 목적을 탐구하여야 할 동일한 의무가 있다. 태고에 최초로 원초질문에 대하여 사색한 사람은 바이블에 기록된 아담Adam이나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슬기사람 Homo sapiens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전제로 한다. 그는 지혜와 명철을 가지고 있어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고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음미하며 선악을 판단하고 윤리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담이며 슬기사람이고 모든 존재물에 관심을 가지는 현존재가 되어 순간의 영락榮樂과 영속永續의 극락을 분별하며 우주를 고요히 바라보며 숙고하는 지식인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자신을 전경으로 하여 자신의 처한 상황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려는 순간, 나의 모습은 광활한 대지에 홀로선 아담의 모습과 다름이 없으며, 아직 인간의 모습을 갖지 못한 태아에서 발육하여 출생 후에는 기어 다니다가 직립보행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두뇌가 발달하다가 깊은 슬기에 도달한 슬기사람은 바로 내 자신이다*. 나는 아담이며 슬기사람이라는 선언은 내가 원초질문에 관하여 사색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주자로서 달려야 할 임무를 띠고 경기장의 출발점에 서 있는 운동선수와 같다. 어디를 향하여 달릴 것인가에 대한 목표가 명확하여야 경기에 임할 수 있으며 결승점이 없는 경기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계는 언제부터 있었고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우주와 인류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규명하지 않고는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없다.
원초질문은 세계와 생명의 시초, 시간과 공간의 한계,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이다.
원초질문은 최초의 인간 아담의 질문이고 생각하는 갈대 roseau pensant 호모 사피엔스의 질문이며 이 질문은 철학이 되었다. (바이블의 아담은 바로 그 답을 알았고 아담의 계보를 존숭하는 이스라엘은 철학이 없음이 특징이다.) 그러나 아담을 잊은 슬기사람과 후대는 독자적으로 생명의 본질과 그 목적을 부단히 궁구하였을 것이다. 이후 이 질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동양철학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기반으로 발아 發芽되어 실제와 관념, 과학과 철학, 신화와 종교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지식이 축적되고 근현대에 이르러 정치와 종교의 이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제약 없는 사유와 과학문명의 도약으로 개화開花되어 만개하였지만 이성과 오성의 한계점에서 낙화落花되어 철학은 해체되고 과학은 무한의 거시 확산과 미시 수렴의 덫에 걸려 좌초되었다. 즉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론과 종말론, 영혼과 육체의 본질에 관한 논의는 태고의 인간이 인지하였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념의 영역에 머물게 되었다. 현대과학계 천재들의 회합에서는 빅뱅이전 무에서 유가 생성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고 현대철학계의 결론은 신 영혼 등은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념의 문제라는 견해를 밝힐 뿐이다.
원초질문은 수학에서 한 줄의 답을 요하는 단순한 산술문제가 아니다. 국제수학경시대회에 출제되는 문제처럼 논리적인 전개를 요하며 정답을 얻기 위해 A4 용지10장의 답안지를 요할 수도 있고 페르마의 정리*처럼 한 권의 책 분량의 답안지가 필요할 수도 있다. 원초질문은 초월적 자기인식능이 있는 현존재에게 불안과 염려의 짙은 구름으로 헤드 업 디스플레이HUD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인류집단에게 주어지는 공동의 질문이지만 이성과 신념의 영역에서 개인의 답변을 요구하며 문제의 해결은 내면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 과제를 푸는 일이 삶의 우선순위가 된다.
존재망각 Oblivion of being
연극이 현실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환영무대 illusion stage에서 현실의 환영 illusion of reality을 경험하는 것처럼 무대가 지구이고 공연시간이 한평생인 연극배우로서의 인간persona은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에 의하여 구성된 우주속 지구의 안락한 생활세계everyday life world에 안주하다가 그곳이 연극무대이며 공연이 끝나면 자신의 거주지 영혼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처음도 끝도 없는 시간과 중심도 바깥도 모르는 공간가운데 태어나 성장을 위한 유소년기를 보내고 성숙을 위한 성년기를 맞아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나 청장년기 일상은 잡담과 호기심 애매성의 비본질적 adiaphora요건으로 구성되어 퇴락으로 향하게 되며 반복되는 일상사는 권태 체념 중독 환각 우울 허무 광신 과신과 오만Hubris의 여정을 거쳐 노년기 이른다. 성실한 지식인 중에서 원초질문에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사회의 저명인사와 사상가 재력가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사람은 사회적 역할의 중대성과 성취욕 때문에 일생동안 분요한 생을 보내며 자신의 생을 분석하고 종합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러다가 임종을 목전에 두고 침대에 누워서 겨우 *원초질문을 상기하나 노욕과 노구의 경직된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숭고한 삶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 이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입학시험장에 들어간 수험생이 처음 문제지를 읽고 난 후 시험시간 내내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시험문제를 다시 보고나서 답을 쓰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예기치 못한 신체적 질환과 재난으로 인하여 준비되지 못한 채, 생의 종식을 맞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은 사춘기에 직면했던 원초질문과 다시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홀연히 삶을 마감한다. 그러므로 원초질문에 대한 숙고는 생의 예측불가능성으로 인하여 미루거나 중단할 수 없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하루살이 Homo Ephemeros 에 불과하며 생명의 특성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에 지금 여기에서 hic et nunc 잊혀진 원초질문을 마주하여야 한다.
존재자각 awareness of being
야생의 초원에 던져진 갓 태어난 어린 사슴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이내 홀로 서서 생존본능을 따라 초장을 이동하며 생육하고 번식하다가 생을 마치고 사람도 피투체 geworfen로 태어나 선조의 뒤를 이어 살아가다가 자손을 남기고 홀연히 생을 마감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생멸 과정이 유사하게 보이나 지성을 지닌 인류는 자신과 세계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합목적적 삶을 지향한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태어나 유년기 성장과 사춘기 성숙의 시기를 지나 성년식을 할 즈음이 되면 그간 잠재된 원초질문이 구체적으로 삶에 파고든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생의 목표를 규명하는 일이 우선임을 절감하는데 그 고뇌와 절박감은 지성의 예리함이 더 할수록 심화된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짧은 생애 중에서 원초질문에 답 할 책무를 알아차리는데* 생의 사분의 일을 소모한다. 그러다가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대한 해답이 쉽지 않음을 알고 이 근원적인 문제를 보류하거나 포기하고 복잡한 현실에 매어 분요한 생을 보내게 된다. 청년의 때에는 배움에 전념하며 사랑에 빠지고, 중년의 시기는 가정을 돌보며 기업을 일으키며 자아실현을 위해 전념하고, 노년이 되면 자리에 누워 생을 회고한다. 그리고 지나간 일평생이 생물학적 삶이었음을 고백하고 노년이 주는 예지로 다시* 잊어버린 원초질문을 상기한다. 이렇듯 원초질문의 중대성을 알면서도 미제 상태로 방치한 채 일상을 보내는 이유는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임을 모르는 미몽 때문이며 이 질문의 긴박성과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고 지혜로운 소수자는 자신의 이성으로 해답을 얻으려고 시도하다가 좌초된 후에 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고백론에서 그는 자신이 지나간 젊음의 날에 향락에 취하여 원초질문을 잊어버리고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진리를 찾아 구도자의 길을 택한다. 그는 존재근원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는 자책이 참회로 이어지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가장 우선적인 책무가 존재이유를 알아야하는 것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에 원로지성인의 존재질문에 대한 늦은 자각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가져야만 인간은 자신의 처한 상황에 대하여 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 개인에게 존재자각의 ‘알아차림’은 귀한 순간이며 이의 포기는 원점으로의 회귀와 다름이 아니다. 알아차림은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판단을 중지하며*epoche 가치관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겸허함에서 시작된다. 구도자의 길을 가는 첫걸음은 알아차림이며 인간의 존엄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고향 이타카Ithaca로 가는 오디세이Odysseus에게 아이아이에Aeaea island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긴 여정 잠시의 쉼은 필요하나 휴게실에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듯이 우리도 유희와 취미로 일생을 마감할 수 없다. 세속적 쾌락은 권태를 가져오고 자기의 본래성Eigentlichkeit을 잃은 소모적 일상은 불안에 잠긴다. 생활세계에서 대면하는 비논리적 현실에 고뇌하다가 이성적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당면하게 되면 고향에의 동경이라는 복원력의 작용으로 키르케의 유혹 그 미몽에서 깨어나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이제 철학이 되어버린 원초질문에 대한 해제의 책무는 철학자뿐 아니라 우리모두의 의무이어서 각자 살아가면서 철인은 인식론 존재론 실천윤리를 논하고 평인은 고향을 노래하며 시인은 아포리아적 상황에서 비범의 촌언으로 답한다. “철학은 본래적으로 향수병이다!’ “Philosophie ist eigentlich Heimweh!” sagt Novalis 수세기전 시인이 외쳤던 명문은 철학계에 반향하여 한세기가 지난 후 하이데거는 복창으로 화답한다. “철학은 향수병이다!" 그는 이 시대는 고향상실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우리는 자신이 안거해야 할 고향을 떠나 밤의 심연에서 유리하는 실향적 상황에 처해 있고 그 이유는 신과 원초적 퓌지스Physis의 결어라고 선언한다. 고향은 존재자체의 근저이고 귀향은 숭고한 영혼이 자신의 근원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이와같이 철학의 본래적 과제는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곳으로 귀향하는 노력이라고 요약한다. 무신론 철학자의 '고향Heimat 고향상실Heimatlosigkeit 향수병Heimweh 귀향Heimkuhr'으로 이어지는 생의 여정 제시는 이념과 취향을 떠난 필연적인 귀결이며 진리의 비은폐성 Unverborgenheit과 자증성 autopistia의 드러남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존재목적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곳은 즉자와 대자, 인도人道와 천도天道의 경계이고 생물학적 출생에서 지성적 탄생the second birth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다. 이 자리에 서는 자는 비로소 철학에서 언급한 초월적 자기인식, 현존재Dasein 의식을 가진 자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이다.
소 진
Woo Jeong Jin
What is protoquestion?
It appears to be a term coined by Korean professor Woo Jeong Jin to refer to fundamental or essential questions that humans have been asking since the beginning of civilization. These questions relate to the origin of the universe, the emergence of life, the nature of time and space, and the purpose and meaning of human existence. According to Professor Jin, protoquestions are not limited to any specific culture or time period but are universal and timeless. They reflect the innate human curiosity and desire to understand the world around us and our place within it. The term "protoquestion" is not commonly used in academic or philosophical discourse, but it does capture an important aspect of human inquiry and contemplation about the fundamental nature of reality. chatGPT openAI answerback
진 리 추 구
Seeking Truth II
자각이후 post-awareness
자연계에는 질서의 법칙이 있다는 신념아래 자연과학이 발전하여 온 것처럼, 이 세계는 원초질문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해답을 얻을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전제에 공감할 것이다. 진리의 속성은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이어서 지성의 우열에 관계없이 그 답을 구하는 자는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출생이후 맹목적 타성적 생활세계에서 빠져나와 적요한 *벌판에 서면 세 갈래 길이 펼쳐진다. 슬기사람 중 슬기사람이 이곳에 모여 있으나 개개인의 인성적 특질은 판단의 갈래길을 만든다. 지성과 미모, 명성과 권위, 개인숭배와 집단의식이 혼재된 이모임은, 논리보다 정서에 치우치며 판단력이 유약한 그룹과, 지적 우월감을 가진 소수의 상류지식층, 그리고 진리의 길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소박한 평인들이다.
갈래길 Alternative Courses of Truth or Untruth
Agnosticism,
Atheism,
Theism
불가지론 nihilistic agnosticism
입양된 아이가 성년이후 출생의 비밀을 찾듯 지식인은 자신과 인류의 근원 찾기에 착념한다. 불가지론자는 지적 우월성을 가진 자들로 누구보다도 먼저 원초질문 스펙트럼과 관련된 상황을 깨닫고 숙고하며 노력하다가 이성의 한계를 실감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며 삶의 의미 없음을 깨닫고 허무주의에 빠진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만일 누군가가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면 인생은 참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현실을 자각하므로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불가피하다면 왜 죽음을 기다리는가?” 자문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다(LNT). 불가지론자의 특징은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 논리적 확실성만을 신뢰하므로 이들은 경이로운 세계를 탐구하며 후험적 a posteriori 경험들과 관계가 있는 과학적 지식을 쌓아가지만 선험적 질문과 관계가 있는 신념의 영역, 신에 관한 학문 즉 신학에 다가가지 않고 생을 마친다. “경탄과 존경은 탐구를 자극할 수 있으나 탐구의 결함을 보충해줄 수 없다. 자연세계의 고찰은 인간의 감관과 지성에서 출발하여 점성술에서 끝맺고, 도덕은 자연본성의 가장 고결한 성질에서 출발하여 광신이나 미신으로 종결된다. 이것이 조야한 모든 시도들의 종말이다. 일상의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질들에 관계할 때에 충분히 숙고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요소 개념들로 분해하고 이성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분리하여 연구해야 한다. 대중은 이러한 철학의 면민한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나 지혜자의 작업의 결과의 가르침에는 참여하여야 한다.” (I Kant) 이러한 제언에도 불구하고 불가지론자는 너무 조급하게 원초질문에 다가가고 쉽게 체념하며 삶은 무목적 무의미하다고 결론짓고 생을 포기하는 특성을 가진다.
물리주의 Atheist’s intellectual physicalism
인간의 심신이원론을 배제하고 유물론적 사고에 입각하여 일원론 또는 속성이원론을 주장하며 논리실증주의, 심리철학을 배후에 두는 물리주의는 세계의 모든 존재물을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철학과 첨단 과학적 지식으로 무신론적 지식체계를 구축한 물리주의는 소수 현자들이 육안과 육감으로 관찰하고 구축한 고대나 중세의 지식에 비하여 양과 질에서 우위에 서있음은 당연하다. 제임스웹 천체망원경 JWST과 강입자가속기 LHC로 관찰한 천체물리학과 입자물리학, 인지과학 뇌과학 인공지능으로 분석 종합한 지식의 총체는 고대 지식인과 종교 창시자가 생각했던 세계관을 수정해야 할 만큼 진보하였다(물리적 환원주의 vs 물리적 비환원주의). 그러나 물리주의는 세계의 시원과 종국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없으며 인간의 몸과 맘을 연결하는 실체의 규명이 이성의 한계를 넘는 영역임을 간과하고 있다. 정신적인 속성이 물리적 속성과 존재론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관념과 생각이 물질적인 대상에 수반supervenience한다는 이론에 분석철학이 몰두하고 있으나 가설에 가설을 더할 뿐이다. 이는 자신의 학설에 대하여 주장과 번복을 반복하며 생을 소모하는 철학계 거장들의 고뇌로 증명되며 그중 힐러리 퍼트남은 명예 실추에도 불구하고 물리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용기 있는 지성인이다.
유신론A Theism
우주는 빅뱅이전 절대타자(Das ganz Andere : Prima Causa Efficiens )에 의해 설계되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이것 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다 (추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대안이 없고 희망도 없다). 천재들의 모임인 입자물리학회는 “우리는 빅뱅이후의 문제만 다룬다.”라고 말하고 현대철학계의 거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선언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철학과 과학이 답을 내놓지 못한 질문지 괄호속에 ‘신’을 넣는 순간 원초질문의 해답이 완성된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에 선 의사결정나무 Decision making tree는 신의 선재를 지시한다. 이 세계를 조성한 신 Almighty God, Intelligence provider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은 인간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다. 자연법칙에 내재된 신성 그 존재유비 analogia entis를 통해서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가진 신은 인류에게 공평하게 원초질문을 풀 수 있는 지능과 기회를 부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학적으로 정립된 신 존재는 이론적인 신이어서 이신론 다신론 범신론 등 유신론의 아류를 만들고 원초질문을 답하기에 부족하다. 무신론자 무종교자는 니체의 초인 ’Overman’과 쇼펜하우어의 의지 ’Will’ 헉슬리의 포스트휴먼'posthuman'처럼 신의 대행물을 찾고, 이념단체는 종교의 기능적 대체물 ’Functional Alternatives’에 경도되고, 이신론자는 빅뱅이전의 논리적 공백을 신으로 채움으로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 다원주의 종교학자와 종파지도자는 논의와 합의를 통하여 만들어진 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우주의 역사, 종말적 상황, 영혼구원의 답을 제시하며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
유신론B Biblical solifidianism
바이블에 기초한 유일신론은 원초질문 해답의 완전성을 보여준다. 동양철학의 이기론에 몰입한 조선후기 학자들이 성경에 집중한 이유는 책의 첫 장부터 천체물리학과 맥을 같이하는 우주 시작의 로고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라는 신의 선포 속에 빅뱅이전의 답이 있고 (Genesis)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언급 (Revelation)은 우주종말의 예언적 선언이며 생의 목적과 삶의 법칙이 이 안에 있다. 초월하신 신 God of transcendence, 인간의 육을 체험하신 신 Messiah,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하신 거룩한 영 God of immanence, 이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핵심으로 종교사에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던 이론이다. 에밀 브루너는 (입자물리학 규명보다 난해한 신의 본질 substance) 형언할 수 없는 신 Ineffable God을 단순화하려는 시도로부터 신의 위상을 보호하려는 보호교리 Schutzlehre 로서 삼위일체를 역설한다. 당신이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파악했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Quimirum si non comprehendia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Augustine)
개인의 일생은 선택의 일생이다. 가치주의value_ism에 의한 합리적 선택이론 (rational choice theory)은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나 기업의 경제원리일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론이다. 지식인은 침묵할 때 조차도 의사표현을 하는 것처럼 삶의 노정에서 선택을 보류하는 경우에도 유보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 선택은 항상 최대 가치를 지향한다. 백캐럿의 다이아원석 대신 롤리팝을 선택하는 유아나 백억의 명화를 백벅스bucks에 파는 프리마켓 상인도 그 상황에서는 가치주의에 의한 선택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현명한 선택이 되려면 내적 성장과 지적 성숙이 필요하다. 이에 더하여 원초질문의 해결을 위한 선택은 육soma, corpus과 영spiritus, ruah의 문제가 결부되어 기존의 가치주의나 합의적 결과consensus theory를 적용하기에 부적합하다. 이는 고전물리학과 양자역학, 천동설과 지동설, 정적우주와 팽창이론이 공존할 수 없듯 쿤TS Kuhn이 언급한 바 종교적 개종에 비유되는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며 실제로 지금도 하데스나 명계(cf.명복을 빕니다)를 믿는 타종교인이라면 종교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엄격히 고려해보아야 한다 (‘영혼에 관하여’ 참조).
회심회심 回心悔心
인류지성사의 존재이해를 위한 궤적은 겸손과 오만 Hubris의 양쪽 선로위를 달린다. 인간 Human은 흙 Humus의 원소로 구성되었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Ash to Ash이어서 흙이 어원인 겸손 Humility은 인간의 특성이 된다. TS Eliot의 metaphysical poem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서 시인은 불혹의 나이 즈음 세속의 환락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늙은 독수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그곳을 향해 다시 그 날개를 펼쳐야 하는가?” 회의적인 자문을 한다. 그리고 세속과 종교사이 오류의 행보로 방황했던 과거를 잊게 해 달라고 겸허히 기도한다. 또 여든 살을 넘은 Antony Flew의 회심은 유럽의 지성인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신의 계시를 위한 접촉점 Anknüpfungspunkt 이 있으며 ‘이성은 신을 찾는 능력’ 이어서 사고하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출발점을 찾으려 시도한다는 주장을 상기시키는 회심의 순간이다. 인간이 살찐 돼지보다 낫다는 자부심을 갖는 순간 우리의 메마른 영혼은 생기를 갖는다 (Emil Brunner, Jean de La Bruyère, JS Mill)
겸허함에서 발현되는 매심(悔의 破字:每+心)은 인간관계에서 확장되어 신과 인간과의 소통을 가져온다. 고사 위편삼절의 책, 역易의 중심은 회悔이고 회는 의사소통 회복의 핵심이다. 성스러운 진리의 영역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겸허한 자세를 취할 때 드러나진다 (ἀλήθεια aletheia disclosure). 천년 전 신존재 문제를 논했던 안셀무스 (Anselmus Cantaberiensis 1033-1109)는 독어록과 대어록에서 오직 순수 이성적 숙고 Sola ratione만을 통하여 신존재질문의 해답을 구하였다.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 선언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택하였다. 이 논제는 이후 지속되다가 바르트, 슈톨츠, 숄츠, 하트숀의 숙고로 보완되었으며 이십세기말 “안셀무스는 플란팅가Plantinga A의 도움으로 영원히 승리했다.” 라는 타임지 (1980. 4. 7. Times) 기사로 이성적 신존재증명의 쟁론이 종결되었다. 이성적으로 신 증명이 명증된 것이다.
Men’s side
신을 찾고 신 앞에 뉘우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증한 인간이란 자기의 창조주를 부인하는 자이고, 무신론자란 신존재 유무에 관계없이 우주안에 공정한 재판이나 재판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탈무드는 말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를 부인하는 것은 모든 죄보다 크다. 이는 효는 백행지본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소급해서 올라가면 생명을 주신 창조주에 이르므로 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불효와, 생명의 법인 신의 명령을 무시했던 지난 세월의 비도덕적 삶에 대한 참회가 요구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위의 관점에서 출판된 책명 冊名이다. 솔로몬 King Solomon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며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연수가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Remember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days of trouble come and the years approach when you will say, "I find no pleasure in them" before the sun and the light and the moon and the stars grow dark, and the clouds return after the rain. Ecclesiastes 12:1,2
God’s side
한 인간이 삶의 유희에 한계를 느끼고 자각한 후에 즐기는 사회 Spaßgesellschaft 에서 빠져나와 고뇌하다가 회심의 자리에 서는 동안 창조주는 무엇을 하시는가? 자신의 창조물에게 신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신은 인간과 소통한다 (Deus revelatus). 일반계시는 자연계에 드러난 신성으로 누구나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고 (St. Paul, Romans 1:19) 특별계시는 마음이 청결한 자, 내면의 눈을 뜬 자만 볼 수 있고 들을 귀를 가진 자만이 들을 수 있다. 인간의 불찰로 인하여 신의 침묵 Schweigen Gottes, 신의 일식 The Eclipse of God을 토로하는 자라도 바이블에 표현된 신의 모습은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시는 자애로운 부모의 심경에 비유된다.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오렴!” Home Before Dark! 걱정하시는 모성母性과 방탕한 삶을 살다가 귀가하는 아들 prodigal son을 맨발로 달려나가 안으시는 부성父性은 기다림 외에 대안이 없어 보이는 무력한 신의 모습처럼 보이나 여기에 (이신론에서는 볼 수 없는) 신과 인간과의 아름다운 신뢰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원초질문protoquestion 세계와 생명의 시초, 시간과 공간의 한계,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 *George Wald(1906-1997) 노벨상 하버드대 교수 “세계는 왜 50억 년이나 되었나요?” 라는 질문에 “그 질문의 답을 알아내는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Gertrude Stein(1874-1946)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There are no answer. There ain’t gonna be any answer. There never has been an answer. That’s the answer. (George Wald 인용) 세기의 지성 Gertrude Stein임종 전 침상에 누워 Alice B. Toklas에게 질문함 “Alice, 답은 무엇인가요?” 엘리스의 답변이 없자… “그러면, 질문은?” *한계상황 critical situation Grenzsituation *알아차림(awareness)은 세속의 가치에 몰입하여 생을 소비하는 사람은 제외 대상이다. 알아차림은 즉자에서 대자, 육도윤회의 人間道, 퇴락과 현존재의 분기점. *퇴락Das Verfallen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한 채 배려된 세계속에 몰입하여 살아가는 일상적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의 양상을 의미 *집중력은 앎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자만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며 진리의 길에 집중하여야만 허무와 패망의 길로 이탈하지 않는다. * 노년기에 오는 제2의 사춘기는 십대의 사춘기와 유사한 성향을 가진다. 라틴어 'Pubertas'의 어원을 가진 사춘기 ‘puberty’는 어른다움 'adulthood'의 의미를 지니며 이스라엘의 성년식 [bar mitzvar-bat mitzvar]처럼 12-13세가 되면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연령이 되었음을 자각하는 시기이다. 사춘기 또는 제2의 사춘기에 부각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숙고는 생물학적 연령이 아닌 지혜의 연령을 가진 자 만이 경험하게 된다. *할라프문화 하수나문화 우바이드문화 emeth pursuer 진리추구자 자기동일성 identity 전생의 자신과 전혀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타종교의 윤회설과 대비, 자기동일성은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독립적 존재이며 바이블은 현세와 내세의 동일한 인격체의 부활을 직시한다. Hat die Offenbarung ein menschliches Apriori 계시에 인간적 아프리오리가 있는가? Fritz Buri *혼인서약: 결혼계약marriage contract을 뒤집고 대신 계약결혼contract marriage을 통해 혼인의 순결에 역행했던 셀럽 부부의 파행은(Sartre vs Beauvoir) 당사자들의 사회적 지위에 의한 보호막과 대중적 성해방의 대리만족Schadenfreude효과로 주목은 받았으나 이 명목상의 부부는 고결한 사랑의 본질을 맛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절대타자(Das ganz Andere) God의 구별성을 강조하는 용어 Kark Barth, *독어록 대어록 Monologion Proslogion Anselm, 최초의 작용인 Prima Causa Efficiens : Thomism, *Veritas Veritatis 인식안에 있는 진리의 원인 YHWH를 유한한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인간과는 다른 절대적 타자로서 진리의 진리이신 YHWH를 끝없이 알아가는 것이 Christentum안에서 영생Eternal Life의 개념이다.
진 리 추 구
Seeking Truth III
신인계약 神人契約
No Sweetheart without Covenant!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만나
지고지순한 사랑을 맹세하고 한 몸을 이룬다.
흠모했던 연인이 나를 향하여 사랑을 고백할 때의 기쁨은 사랑의 묘약으로 강요된 애정표현과는 비교할 수 없다. 바이블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결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한다. 인간을 고결한 신의 형상 Imago Dei 으로 창조하신 전능의 신께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복종하게 인간의 뇌회로를 조정하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인간의 신에 대한 자발적 사랑이 그것이다.
계약, 성약 Contract vs Covenant
타자와 온전한 사랑이 성립되려면 당사자간 의사표현의 합치에 의한 법률행위가 필요하다. 계약 없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No relationship without Contract). 국가나 기업, 심지어 거리와 광장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어떤 권리를 얻고 싶다면 그와 계약이 필요하며 이에는 의무조항이 따른다. 특히 사랑하는 연인간에는 사랑의 맹세 즉 혼인계약이 필수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신은 바로 첫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놓아두셨나? 어린시절 실락원을 아쉬워하며 되물었던 질문은 나약한 인간 심성에 대한 신의 깊은 배려라는 명료한 답변으로 반향된다. 그 질문의 중심에 있었던 선악과는 신인계약의 성립을 위한 임의의 조건이었고 계약조건은 무엇으로도 가능했다(Genesis 2:17). 인간이 약속을 위배하자 그 행위는 악이 되었고 나무의 이름은 선악과(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가 되었다. 아담과의 첫번째 계약이 인간의 과오로 파기되자 고고학 문헌에 나타나는 대홍수Deluge 이후 노아(Utnapishtim, Ziusudra, Atra-Hasis)와 두번째 계약(Genesis 9:4)을 맺고, 시내산에서 모세와 세번째 계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인간이 세계에 편만하자 신은 각 개인과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조건은 相愛! ‘서로 사랑하라’ 이다. 왜 끊임없는 계약인가? 관계의 지속성 sustainability 때문이다.
아담이 맺은 성약은 합의에 의한 쌍무계약이 아니고 일방적인 편무계약 片務契約이었으나 아빠와 응석둥이 어린아이 사이의 계약처럼 일방적으로 인간에게만 유리한 우의조항 뿐이어서 부담감 없이 신과 인간사이에 계약이 지속될 수도 있었다. 한사람 아담을 위해 풍요롭고 완벽한 낙원, 138억 광년 공간의 현묘한 우주(LamdaCDM), 지상의 모든 소유권을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계약을 파기했다(Hebrew calendar BC3761).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은 태생적 ‘일탈 경향성’으로 인해 ‘먹음직스러운 선악과’ 대신 ‘시고 떫은 탱자열매’로 바꾸었더라도 따 먹었을 것이고 지구상의 누구라도 아담의 역할을 맡았더라면 동일한 우를 범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ontological sin, peccata originale). 이후 모세Moses는 약속의 땅Promised Land에 들어가기 전 신께서 택하신 선민Chosen People과의 계약을 위해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쓰인 십계명을 받았고(BC 15C전후), 후일 *모세 (Moses ben Maimon, Maimonides, Rambam AD1135-1204)는 *토라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613가지로 정리했다. 바이블의 통시성은 특정시대의 가치관과 불합치 될 수 있고, 실천윤리학의 불확실성은 토라 법규에 대한 비논리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proverb 14:12,16:25) 이로 인해 율법학자들은 논리적인 법과 비논리적 법으로 분류하고 생활양식의 변화에 의한 적용불가의 법조항은 보완하여 현재에 이르고있다(Chukim, irrational law vs Mishpatim, rational law). 성문화된 율법조항에 따른 실생활의 법해석은 마차 한 대 분량의 탈무드를 만들어 본래의 신인계약의 의도에 역행하여 자유로운 삶에 속박을 가져왔고 외식에 치우치는 일탈에 이르렀다. 이에 인성을 창조하신 신의 예지력은 신의 성육신을 예언하고 그 카이로스의 때가 도래하자 메시아의 탄생으로 예언의 성취와 구원 사역을 완성하며 새 계약을 제정하셨다(A new command I give you : Love one another John13:34). 신인계약의 신학적 해석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초월하는 의미를 가진다. 인간을 사랑하시기로 예정하신 신께서 인류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아담뿐 아니라 이미 후대를 위한 성약을 하셨는데 이는 영원한 구속의 언약(pactum salutis)이어서 시대에 무관하게 누구와도 유효하다고 해석한다. 사회계약은 약조된 사항을 위반하면 해지되나 신인계약은 영원히 관계가 지속되므로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아담이 계약을 위반하자 행위의 계약을 은혜의 계약(foedus gratiae)으로 바꾸어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거룩한 언약 즉 성약이다.
*다윗은 11개, *이사야는 6개, *미가는 3개, 다시 *이사야는 2개, *하박국은 1개로 축약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진실을 말하며,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신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신과 함께 행하는 자,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는 자 *의인의 신실함 (king David’s psalm 15, Isaiah 33;15, Micah 6:8, *Isaiah 56:1, Habakkuk 2:4)
계약내용 Covenant Contents
옛 계약과 새 계약, 두 계약은 동어반복의 일관성을 가진다. 옛 계약인 십계명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는 신을 경외하듯 공경하고 존경하라는 전통적인 토라의 해석에 의하여 신에 관한 1, 2, 3, 4계명과 함께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한쪽 돌판에 기록되고, 다른 돌판에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을 금하는 인간에 관한 제6, 7, 8, 9, 10의 계명으로 구성된다. 신약의 새 계약은 ‘경천’과 ‘애인’으로 십계명 좌우 돌판의 내용과 같다(tautology). 바이블의 계약은 타종교의 계율이나 동서양의 윤리관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불살생 불사음 불투도 불망언 등 오계나 삼강오륜, 충효와 성경誠敬의 동양적 윤리관은 바이블의 계명과 너무나 유사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윤리적 실천행위에 대한 보상, ‘보증자로서의 신’의 유무가 그것이다.
순임금과 같은 효자에게 효도를 권하고, 군자에게 살인을 금하고, 열녀에게 지아비만을 사랑하고, 성현에게 절도와 허언과 탐심을 금하라고 한다면 당연한 것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효한 패륜아, 적대적 관계의 부부, 대도大盜와 사이코패스, 윤리적 회색지대에 속한 유약한 다수가 있다. 이들로 구성된 개인과 집단의 목표는 화목한 가정, 풍요와 평화가 넘치는 공의로운 사회이나 그렇지 못함은 강한 보상력의 부재 때문이다. 만일 인공지능AI 감시망으로 치안이 완벽한 사회에서 개개인의 미세한 일상사를 분초를 놓치지 않고 추적하여 공의로운 행동과 범법행위에 대한 정확한 보상과 징계가 이루어진다면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논리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감찰능과 보상력을 보유한 신의 존재는 착한 도적적 인간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로서, 현세의 향락에 매혹되어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철저한 감시자로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강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고대의 사회윤리와 양심의 규칙synderesis, 중세의 실천적 지혜prudentia, 근대 도덕철학에서 논의된 자치(self governance), 근현대의 직관주의와 상식학파에 의한 도덕적 행위의 고양, 동양사상의 양지와 양능, 자주지권의 실천에 의한 보편애(겸애)는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숙고되어진 자율적 프락시스 방법론이며 원리이다. 그러나 설명불가한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의 이행, 자기보상의 선행self-rewarding morality, 덕복일치의 공허한 논리는 현대윤리학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윤리적 상황과 언어 의미만을 다루는 메타윤리에 머물게 하고 말았다. 이 윤리학적 틈새 niche ethics를 타고 도덕적 판단을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기기를 주장하며 법과 도덕의 경계선에서 윤리적 일탈을 선도하는 셀럽지식인들의 사상적 배후에는 신과 내세가 없음이 특징이다(Everyone did as they saw fit! Judges 21:25). 민주국가의 죄형법정주의는 집행과정에서 법의 내면적 도덕성으로 인한 느슨함, 뚫린 범법 감시망과 금권에 취약한 법망으로 인하여 완전한 정의 실현이 어렵다. 그러나 신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은 입법의 공백(lacuna legis)과 내면의 사악한 의도까지 통달하며 소자에게 베푼 물한잔의 선행도 간과하지 않는 완전한 응보주의를 선포한다. 이러한 연유로 불가지론, 무신론과 이신론은 신의 간섭에서 배제되기를 원하며 ’진리안에서 자유’ 대신에 불안속에서 ‘자유의 현기증’을 즐긴다(Søren Kierkegaard).
진리의 길 The way of truth
누구나 신인계약에 서명하는 순간 진리의 길에 서게 된다. 이제 지난날 실생활과 사고에 영향을 주었던 풍설과 가설이 물러가고 새로운 신념과 가치관이 자신 안에 자리잡는다. 청장년 신봉했던 낡은 지식체계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의상으로 교체하면서 생명의 본질과 의미를 두고 고뇌했던 정신적 방황은 사라진다. 그토록 찾았던 길은 좁고 초라하며 노정路程은 고독하고 주변은 적막하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그 *선취先取 의 자족감이 모든 곤핍을 극복하며 깊은 평안이 찾아온다(already but not yet : Oscar Cullmann). 이 길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고 *우주적 가치cosmic value를 얻기 위하여 숙고한 결과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은 신 앞에 선Coram Deo 첫 사람 아담의 재현이다. 내가 없다면 우주도 없기에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긴 실향적 방황을 끝내고 영혼의 본향을 향한 귀향길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계약의 조건은 나와 우주를 창조하신 신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의 행복을 위한 신인계약에 순명順命하며 나와 같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보상은 영원한 행복Aeternus Gaudiorum이다!
바이블에 드러난 신의 속성은 사랑과 공의이어서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신께서는 악인이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시고(Ezekiel18:23)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신다(2Peter3:9). 그러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신에게로 귀의’라는 창조의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거룩한 자를 선별하는 과정으로서 지상의 삶을 계획하신 신의 예지는 천국문에 보호망을 씌운다.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진리의 길을 감추기 위한 차폐물은 진리의 길을 찾았으나 그 속에서 타락한 자들과 돌아서는 자들의 모습이고 더 철저한 차폐물은 공의로운 자들의 고난이다. 통계학의 발전으로 행복지수에 의한 삶의 질이 분석되고 있어 오복이 편중되는 종교인 집단이 드러난다면 기복祈福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종교에 몰입할 가능성이 높아서 천국의 구성원이 현세와 동일하다면 천국에 또다른 감옥이 필요할 것이다. 수학의 상수와 무한대 개념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설명해준다. 지상의 苦와 樂의 기간이 하루이든 백 년이든 영원한 미래eternity, infinity와 견주어 보면 동연同然하기 때문에 진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만이 생명을 걸고 이 험로를 완주한다.
미물微物인 인간이 어떻게 신YHWH과의 조우遭遇가 가능한가? 지금부터 삼사 천년 전, 삼대 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Abraham이나 파우스트의 모티브가 된 욥Job은 신을 경외하고 나그네를 환대하며 살다가 신의 현현을 경험하였다(Genesis, Job). 하늘을 대종으로 삼고 순수하고 참되며 덕을 근본으로 삼는 천인-신인-지인-성인(장자: 천하 제33편)은 신과의 조우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Matthew5:8). 이와 같이 경전이나 사제, 종교적 건축물이 없었던 시기에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의와 공도를 행하던 하니프Hanif의 삶은 현시대에도 가능하다. 그러나 신성이 인성을 입으심(kenosis vs krypsis)으로 진리의 매뉴얼이 가벼워졌다(Cur Deus Homo?)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여 백년해로하기까지 많은 과정이 필요하듯 신과 하니프의 교감 이후 정립된 매뉴얼이 옛 계명이며(de novo pathway) 모든 종교적 구습과 인습의 무거운 짐을 척거한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 새 계명(salvage pathway)이다. 천문학적 고가의 사본codex 접하기가 어려웠던 고대와 중세와 달리 현대는 바이블이 값없이 주어지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 원초질문과 진리의 길에 대한 향심向心은 장애됨이 없다. 더욱이 놀랍게도 인간의 심성을 간파하시는 신은 한 사람이 회심悔心하여 신 앞에 나아가려고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이미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나의 회심回心 나의 고백을 기다리고 계신 신을 아는 것, 그 신을 알아가는 것이 그토록 인류가 소망하던 영생永生이다 (John17:3).
결 어
진리! 그 참된 이치란 지고至高의 지복至福을 얻어 나의 종국에 영원히 그 복을 누리는 방도이다 (I peter1:9). 이제 나의 맑은 정신은 분요한 삶의 현장을 벗어나 고요히 나와 우주를 관조한다. 그리고 생명의 빛이신 아도나이Adonai를 향하여 나의 마음을 열고 진리의 본체, 진리의 진리 Veritas Veritatis 그 품안에 안주한다.
진리의 길목에서
小 尘

첫댓글
고희를 지나며 쓴 독백입니다. [apologia pro vita sua]
www.DrJin.com > mental clinic > 생명, 철학 > > > 외...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