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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8,21-30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하시며
사람은 아래와 위, 두 세상에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 하늘에 속하고 유다인들은 땅에서 와서 땅에 속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으면 육신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속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여기서 “내가 나”라는 뜻은 모세가 들은 하느님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죄 속에서 죽습니다. 하늘에 속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은 아버지가 만든 세상입니다.
아버지를 바꾸지 않으면 아버지의 세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영화 ‘늑대의 살갗 아래’는 한 돈만 아는 아버지를 둔 두 딸의 인생이 그려집니다.
너무 큰 추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에서 늑대사냥을 하며 사는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겨우내 사냥하고 늑대 가죽을 무두질하여 이틀이나 걸쳐 산 밑으로 내려가 가죽을 팔아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람과 잘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는 사실 방앗간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주고 그 여인의 아버지와 거래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깁니다.
그녀는 임신하였지만, 몸이 약했습니다. 그곳엔 의사가 올 수 없었기에 사냥꾼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그녀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를 낳다가 여인이 죽습니다. 아기도 죽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가 딸이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에게 팔아넘겼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챕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는 아내의 시신을 지고 장인을 찾아갑니다.
장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이제 막내딸을 보여주며 돈을 내고 딸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딸은 이 사실도 모른 채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냥꾼이 파놓은 언니와 조카의 두 무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사용하라고 독약과 같은 약초를 줍니다.
딸은 임신하여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여기고 차에 독초를 타서 남편을 죽이려 합니다.
사냥꾼은 이유도 모른 채 몸이 약해져 갑니다. 이를 틈 타 아내는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짐승을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립니다.
사냥꾼은 간신히 아내를 찾아 데려왔지만, 아내는 얼어서 거의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유산은 했지만, 사냥꾼은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서 살려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를 놓아줍니다. 원하지 않으면 내려가라고 합니다.
사냥꾼은 아내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것을 알았고 쓰러져서 혹독한 겨울을 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두 딸의 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으로 딸을 팔아도 딸이 잘 살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아내를 사는 사람에게서 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건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사냥꾼도 지극정성으로 두 자매인 아내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만약 아내들을 위한다면 병원이 가까운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딸은 돈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자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상하고 사랑스러우면 아기는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악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악하면 자녀도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를 어떻게 한 번 정해진 바꿀까요? 잔인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아빠가 일란성 쌍둥이일 때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그저 자신에게 밥을 주는 대상을 아버지, 어머니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세상 아버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선택했으면 아기들처럼 그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다섯 명의 범죄자 집단에서 길러진 화이란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범죄자 집단에서만 머문다면 당연히 범죄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세상에 갇힙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화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돼야지…. 안 그래? 그래야 같이 살지.”
나쁜 아버지들은 화이가 자신들의 편이 되게 하려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합니다.
화이는 그 아버지들과 살면서 괴물을 봅니다. 괴물 아버지들과 함께 머물면 괴물들의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화이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한 다섯 명의 아버지를 죽입니다. 우리는 괴물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적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참 아버지 하느님을 죽인 그 아버지를 죽여서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면 그분은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까지 섬겨왔던 대상이 괴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아에 조종당하여 죽인 분이 나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1)
천국으로 가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지금 나의 아버지를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옥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납니다. 이는 상황이 아닌 아버지를 잘못 선택한 탓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온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모기로 머뭅니다.
모기는 사랑하려 해도 피를 빨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을 부모로 섬길 때 하느님의 자녀로 지금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을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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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어릴 때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세계명작 동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인 마크 트웨인은 가난한 이, 흑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1905년 미국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조약입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필리핀으로 보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내기 전에 교회는 ‘전쟁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필리핀에는 많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통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의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우리 주 신이시여!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해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 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마크 트웨인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던 이 도전적인 이야기는 ‘거대한 흥분이 들끓어 오는 시대’가 묘사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진정 전쟁의 기도는 ‘적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부상병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며, 죽은 아들을 부여잡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이며, 또한 ‘적군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며 생명이 시들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후각은 개보다 못합니다. 표범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시력은 독수리보다 못합니다. 지구별에 살아온 시간도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짧습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종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같은 종인 인간끼리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혼인 잔치에 가장 늦게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같이 초대된 다른 종들을 죽이고, 혼인 잔치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은 손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을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화의 방향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양면, 즉 고통과 기쁨, 빛과 어둠,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을 알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을 분간할 수 없으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광야를 건너지 않고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치유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인정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요르단의 끝에 가면 바로 앞에 요르단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을 넘으면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르단 계곡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구리 뱀을 두른 십자가가 있으며, 기념성당도 있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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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우리가 아닌, 주님이 붙들리신다
요한 복음 8장 12-20절
아무도 그분을 잡지 않았다.
누구보다 하느님과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은 성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사이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가둬둘 수는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을 모셔야 하는 이유도 모를 뿐더러 그분이 어떤분인지조차 모르고 무작정 모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누구신지 너무도 잘 알기에 모시려 하지 않을 때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늘 우리가 당신을 붙들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등경 위에 놓듯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우리가 어둠 속을 걷지 않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싶어 하기보다 주님이 우리를 떠나시길 원치 않으시는 그분의 뜻이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내 안에 머물겠다 말씀하십니다. 기꺼이 주님을 붙들 수 있는 용기를 청해봅시다.
*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신 기억을 떠올려봅시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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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가운데 쉽게 읽히는 흥미로운 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민수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파별 야영 위치와 행진 순서, 사제와 레위인들의 임무와 규정, 재물에 대한 규정 등이 끝도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록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시나이산에 머물면서 광야 여정을 준비하던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광야 여정을 끝낸 후 약속의 땅 입구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두 번의 인구조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제2차 인구조사는 모압 들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601,730명이라는 수가 헤아려지는데, 1차 인구조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인데, 이 숫자는 꽤나 상징적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은 이들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이들로 인해 인구수가 감소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입니다. 백성들은 이집트 탈출을 통해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모세의 권위에 대해 대놓고 불평합니다. 이집트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에 대한 주님의 성취 능력이 인간의 불평불만에 부딪혀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배신과 적반하장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땅으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광야 여정 중에 발생한 구리 뱀, 불 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과 불신앙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끝도 없는 백성들의 불평불만 앞에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주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십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중재기도를 요청합니다. 진노에는 더디시고 용서에는 재빠르신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날 방도를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결정적인 시험대 앞에 서게 됩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단 구리뱀을 쳐다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백성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순종의 시험이자, 동시에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도 주님의 현존과 권능이 드러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광야에 대한 큰 의미가 부여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로 부각된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가장 강하게 체험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라는 긴 광야 여정을 걸어온 우리입니다. 남아있는 여정 동안 우리는 이 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과 은총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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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당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하고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
당신의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언일 뿐 아니라
아버지를 온전히 알려주시는 말씀(계시)임을 새겨봅니다.
십자가상 돌아가심이
나무위에 들어올려 지신 당신의 모습이
오히려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이었음을
그 숭고한 희생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최광희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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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화요일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뒤, 그제서야 그를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니,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보는 것이 모든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슬픈 영화도, 공포 영화도 보기 힘든 연약한 이들에게 예수의 처참한 패배는 후루룩 건너뛰고싶은 재미없는 파트. 거길 후루룩 건너뛰고나면 다시 또 다시 돌아가야하는 쳇바퀴.
예수는 내내 소재파악이 힘든 떠돌이였는데, 결국 그의 주소는 십자가.
우리의 기도는 거기에 높게 매달린 이에게 보내는 편지. 장난처럼, 가볍게, 심드렁하게 게으른 말들은 참혹하다.
이근상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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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5주 화요일-조급증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오늘은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오늘 전례에서 좀 벗어나는 주제로 나눔을 하겠습니다.
벗어나는 주제란 <조급증>인데 이것을 주제로 삼은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주제로 나눔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급증을 먼저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참을성이 없이 매우 급하게 구는 증세'라고 나와 있었는데 그러나 왜 급하게 구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아서 제 나름대로 그 이유에서부터 종류까지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은 미리미리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찻시간이 11시이고 그래서 10시부터 천천히 준비해 나가도 되는데
괜히 9시부터 마음이 분주하고 불안하여 미리 떠나야지만 안심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급증은 그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일 뿐 그리 나쁜 것은 아니고 죄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저의 경우 이런 면에서는 아주 느긋합니다.
그리고 일의 경우도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지 못해도 느긋한 편입니다.
언젠가 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설사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조급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옛날에 양성 책임자로 있을 때는 제가 양성하는 형제들이 빨리 원하는대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마치 씨를 뿌리고는 언제 싹이 돋나 매일 살피고, 싹이 나면 빨리 쑥쑥 크기를 바라며 물을 자주 주는데 생각만큼 빨리 크지 않으면 억지로 키를 늘리기라도 할듯이 물을 너무 많이 줘 오히려 뿌리를 썩게 만드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고, 좋게 얘기하면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며, 저의 보람이 부나 일의 성취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사람은 욕심의 대상이 되면 안 되고 심할 경우 이것은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더 나쁩니다.
욕심으로 사람을 소유하려고 드는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욕심이 조급증을 유발하고 조급증은 사람마다 자기 성장의 때가 있는데 내가 그 성장의 때를 억지로 앞당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조급증은,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지만, 영적인 조급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오늘 민수기의 사람들처럼 자기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대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다 하느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여름이 돼야 자라며 가을이 돼야 열매 맺듯 다 그 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봄이라고 모든 나무가 똑같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 않고,
각기 자기의 봄 곧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자기의 때가 있듯이 일이나 사람도 다 그것의 때가 있고 그것의 때가 하느님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댑니까?
하느님의 때를 공순히 기다립니까?
우리 각자 조급증과 관하여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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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