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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화등합작
"내 중국에 문혁은 필요없다!"의 첫 이벤트에 오시게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국무원 총리이자 중군위 부주석, 당 중앙위원회 제1부주석, 그리고 마오 동지의 명시된 후계자인 화궈펑 동지는 약간의 의구심을 표하면서도 평소에 존경하던 저우언라이 동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여러분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인민들의 추모열기가 불붙어, 4인방을 위시한 극좌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 무려 120만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4인방 중 하나인 야오원위안의 주도와 화궈펑의 측근 중 하나인 우더의 조력으로 이 시위는 강제 해산되었고, 수백명의 시위자들이 체포 및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죠. 4인방이 주도하는 정치국 회의에서는 이 사건을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 문혁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덩샤오핑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리는 중입니다.
궁지에 몰린 덩샤오핑은 자택에 칩거하며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개혁파와 극좌파 사이에 끼인 화궈펑 동지는 선택해야 합니다. 4인방의 편을 들어 덩을 규탄해야 할 지, 아니면 그를 지켜주어야 할 지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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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방의 등쌀에 시달려 녹초가 된 채 집무실로 돌아온 화궈펑 총리는 후난성 사투리로 욕설을 뱉으며 자신의 새 측근들을 찾았습니다. 그의 비서 위안차이나는 중난하이를 돌아다니며 류메이란, 샤오나이, 톰페티 라마, 후종밍 중장을 불러모았습니다. 위안차이나가 보기에 덩샤오핑의 축출이라는 사건은 아주 큰 여파를 몰고 올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인방이 아무리 독하게 나온다고 해도 덩이 ‘제거’되지는 않을테지만, 자신이 모시는 화궈펑 동지의 입지에는 아주 큰 영향이 있을 터였죠.
한때 인민해방군 공보처에서 선전요원으로 일했던 류메이란 역시 비슷한 요지로 발언했습니다. “어차피 덩샤오핑을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며, “차라리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구실을 쌓자”는 의견이었죠. 심지어 톰페티 라마는 한 술 더 떠서, “덩샤오핑을 명예직으로 영전시켜 실권은 내려놓게 하되 사인방의 위협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끔 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즉 덩을 원로 주더의 후임으로 전인대 상무회주석에 추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위안차이나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며 반대했고, 류메이란은 “주더 동무가 고령으로 마침 은퇴할 때이므로, 그를 임명하면 적절한 인사가 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후종밍과 샤오나이 역시 헝가리의 너지 임레가 라코시 마차시 주석에게 끊임없이 견제받던 역사를 언급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죠. 그러나 이 때 가만히 듣고있던 톰페티 라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박해받는 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복수나 금전이 아니라,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은인이 되는 것이지요, 총리 동지. 소승은 속세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적어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은원관계가 가지는 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덩 동지의 영전에 관한 의견을 겉으로라도 낸다면, 그는 동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화궈펑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무언가 깨달았는지 말없이 집무실을 나갔습니다. 정치국 회의에 복귀한 화궈펑은 즉시 덩샤오핑의 영전에 관해 주장하기 시작했죠. 이에 사인방의 리더인 장칭은 즉시 화궈펑을 공격했습니다. 덩샤오핑은 반동 중 반동이며, 그를 옹호하는 것은 마오 주석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파렴치한 행위라면서 말이죠. 상황이 덩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자, 사인방 및 그들을 지지하는 극좌파들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며 회의장을 나가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의 실각 역시 없던 일이 된 것입니다.
실각하기는커녕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 덩샤오핑은 화궈펑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화궈펑은 예젠잉 등 개혁파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02. 붉은 코끼리, 흰 코끼리?
천안문 사태를 빌미로 한 덩샤오핑의 축출이 흐지부지되고 나서 얼마 후, 태국 공산당의 동지들이 찾아왔습니다. 태국은 1973년 민주화 투쟁 이래 잠깐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지만, 군부와 왕당파들은 민주당 및 사회행동당 등의 자유주의 내각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죠.
동부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된 영향으로 태국 공산당은 최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들은 차기 선거에서 인민전선에 합류할 지, 아니면 군부에 맞선 무장투쟁을 전개할 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고, 결론이 나지 않아 중국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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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난하이의 한 소회의실에는 화궈펑, 덩샤오핑, 예젠잉, 리셴넨 등 반-4인방 인사들이 잔뜩 모여있었습니다. 소위 “아시아민족혁명문제임시소위원회”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곳에서는 태국의 일을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외교부 부부장 황화가 브리핑을 시작하자, 모두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습니다.
“태국 공산당 대표단의 말에 따르면, ‘제대로 치러지기만 한다면’ 선거에서 나름의 실적을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소위 인민전선 내에서 한 축을 담당할 정도의 영향력은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여론을 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하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리셴넨 부주석이 황화의 말에 끼어들었습니다. 태국은 73년 이래 왕당파와 민주파 간의 극심한 정치갈등을 겪어왔고, 사실상 국론이 두 동강 난 상황이었습니다. 민주파를 지지하는 이들은 푸미폰 국왕에 대해서도 그리 호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죠. 이 ‘잠재적 혁명 지지층’을 좌경화시키는 것이 핵심이라고, 리셴넨은 주장했습니다.
다들 무언가를 종이에 열심히 끄적이며 고민하고 있을 때, 북부전구 부사령원 후종밍이 손을 들었습니다.
“몇달 전 저우 총리 동지의 장례식이 일종의 ‘추모 운동’을 촉발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해 태국 내에서도 좌익 세력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몇해 전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했던 ‘태국의 체 게바라’ 찟 푸미삭 동지의 장례식을 통한다면 말입니다.”
확실히 일리있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류메이란은 “UN 선거감시단을 동원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 태국 군부의 준동을 막자”는 아이디어를 발표했죠. 이는 광범위한 찬성을 얻어 정식 계획으로 통과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인민전선이 확실한 실체를 가진 연합으로 존속하느냐 여부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던 경제정책을 두고 각 당파들은 의견차를 쉬이 좁히지 못하고 있었기에, 적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부다페스트 칼 마르크스 대학의 정치경제학과 교수이자 경제학자로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부터 조합경제이론, 하이예크 등 신고전주의 자본주의 경제학까지 폭넓은 관련지식을 가진 샤오나이가 태국 인민전선에 파견고문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의 주선 하에 각 정당들은 토지개혁, 노조의 경영참여제도, 8시간 노동제, 아동노동금지 등 전반적인 개혁안을 합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류메이란과 후종밍은 각각 장례식 여론을 부풀리고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크메르 루주의 ‘뇌절’을 제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흐르는 눈물의 자취를 지우고자 기꺼이 모든 것을 던지겠습니다. 내게 한 번 더 삶이 주어진다면. 당신을 섬기는 데 바치겠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우리의 친구 푸미삭이여, 영면하소서.”
전반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감성을 자극하는 문구가 사용되었고, ‘좌익 냄새’가 나는 용어는 몇 번이고 자가검열 과정을 거쳐 매우 신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였고, 국왕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할 정도의 소요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망나니로 유명한 왕세자의 일명 “빨갱이를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 발언이 기폭제로 작용해, 민주파 인민들이 왕가에 매우 큰 불신을 얻게 된 것이 주효했죠. 다행히 크메르 루주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움직임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북방계통 방언을 쓰는 새 군사고문들이 ‘모험주의자 크메르 루주 당원들’을 적절히 손봐주면서 타이를 공격하자는 이야기는 쏙 들어가버렸죠.
그 다음은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태국의 사건을 공론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위안차이나가 차오관화 외교부장을 보좌해 연설문을 작성했죠. 요지는 “태국의 신생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비슷한 제3세계 국가들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서는 유엔 선거감시위원회 파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구권 국가들이 찬성 쪽으로, 서구권 국가들이 반대나 기권 쪽으로 갈피를 잡아 표 동원 싸움이 되려고 할 때, 갑자기 프랑스 측에서 입장을 선회해 찬성 쪽에 힘을 보탰습니다. 데스탱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알려진 엘리제궁 수석 ‘장 프랑수아 퐁세’는 중국과의 무역 확대를 통한 경제적 이익과 유럽 내 주도권 확고화를 이야기하며 챠오관화 외교부장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았죠. 아무튼, 결의안은 무사히 통과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톰페티 라마는 티벳에서 쌓은 명성을 이용해 태국 불교계의 지지를 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태국의 승려들은 톰페티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베트남에서 소신공양을 한 틱광둑 승려의 일을 거론하며 오히려 톰페티보다 더 열을 냈죠. 결국 불교계는 “부도덕한 정치를 끝내기 위해 인민전선의 집권이 바람직하다”는 짧은 성명문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거는 총 279석 중 166석을 차지한 인민전선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CNN, BBC, ZDF 등 유수의 외신들이 태국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왕실과 군부, 우익들은 행동에 나서는 것을 단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테죠. 미국은 비좌파세력인 민주당이 인민전선 내 주도권을 유지한 것을 보고 일단 지켜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무엇보다 동쪽의 한반도에서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지며 전쟁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에, 태국사태 개입이라는 선택지를 지금 당장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태국 인민전선 정부는 꾹릿 프라모이(진보동맹 의장) 외무장관을 보내 중국과 무역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태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고 ‘아직은’ 군주제 국가이지만, ‘이변이 없다면’ 현 정권이 친중노선을 걸을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03. 탕산 대지진
1976년 7월 28일, 탕산에서 리히터 규모 7.8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당 중앙에서 발표한 바로는 242,000명의 사망자와 164,000명의 중상자가 발생했지만, 허베이성 혁명위원회에서는 못해도 60만명은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무튼 엄청난 피해가 나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사태의 대처를 논의하기 위해 즉시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4인방, 화궈펑, 덩샤오핑, 예젠잉, 리셴넨, 천윈 등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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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가장 유력한 의견은 셋으로 모였습니다.
첫째, 군병력 등을 총동원해 중앙에서 직접 피해복구를 시도한다.
둘째, 군병력 총동원은 물론이고, 이러한 사태가 또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재정부담을 지우더라도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고 보상책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허베이성 정부에 짬때린다 (...)
또한, 외국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4인방을 위시한 극좌파들은 이 안건에 반대하고 있지만, 덩샤오핑/예젠잉 등의 개혁파들은 "지금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좀 쪽팔리는 게 대수냐?"라면서 반발했습니다. 덩샤오핑의 발언에 장칭은 안경을 벗어던지더니..
“애초부터 덩샤오핑이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요. 탕산에서의 일은 고작 수십만의 목숨이 달렸지만, 덩샤오핑의 일은 8억 인민 전체의 일이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덩샤오핑은 “당신같은 작자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8억 인민에 대한 모욕이오!”라며 일갈했습니다. 장내가 소란해진 틈을 타, 화궈펑은 측근들과 조용히 토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측근들의 의견은 생각보다 쉽게 모아졌습니다. 허베이성에서 구호작업을 돕던 톰페티를 제외한 4명은 최대한의 구호와 이를 위한 국제원조를 요청하자는 안을 찬성했습니다.
톰페티 라마가 화궈펑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왕이면 국제회의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면도 살고 실리도 챙기는 방법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샤오나이를 비롯한 다른 측근들도 이에 동의, 새로 상무회주석직에 취임한 쑹칭링을 보내기로 합의했죠. 사인방도 명목상 국가원수인 쑹칭링을 대놓고 모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톰페티 라마의 조언을 받은 쑹칭링의 유창한 영어 연설이었습니다. 총회에서는 중국에 구호물자를 보내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쑹칭링은 동생 쑹메이링과의 해후까지 가질 수 있었죠. 이로써 쑹칭링과 민혁은 화궈펑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04. 주석의 죽음
1976년 9월 9일, 모든 이들이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간의 실책이야 어쨌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자 거의 반세기 가까운 기간동안 당의 최고영도인이었던 마오쩌둥이 사망한 것입니다. 많은 인민들은 주석의 실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송, 대외활동, 오락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마오 주석의 사망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4인방이 날뛸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고, 덩샤오핑에게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던 인물이기도 했으며, 화궈펑에게 후계자의 권위를 부여해준 인물이었습니다.
4인방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동’들에게 대항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결정했습니다. 그들의 기반인 상하이에서는 홍위병 그룹과 군 내 급진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상하이 시민군’이 대기상태로 배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예젠잉, 녜룽전, 양청우 등 역시 군을 대기시켰습니다. 난징군구, 푸저우군구, 광저우군구 등이 즉시 대응할 태세를 끝마쳤습니다. 화궈펑의 측근 왕둥싱이 지휘하는 8341부대(호위사령부) 역시 베이징에서 초동대응을 준비중입니다.
조만간 일이 터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합니다. 여러분의 책무는 한 가지입니다. 만약 이 나라에 내전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피해는 상당할 것이기에, 어떻게든 상황을 조기에 종료해야 합니다. 4인방과 그 지원세력을 분쇄하고 새 체제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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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정보업무를 맡아 정세파악에 능한 류메이란이었습니다.
"동지, 동지께서 중국의 흐루쇼프가 되어야 합니다. 즉시 시민군을 해산하는 한편, 4인방을 쓸어내셔야 합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오른팔이자 심복이었지만, 그런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스탈린과 맞먹는, 아니 스탈린을 뛰어넘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만약 흐루쇼프가 스탈린에게 탄압받은 정적이었다면, 결코 그러한 권위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덩샤오핑 동지나 다른 동지들이 마오 주석을 비판하려는 속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마오 주석을 비판한다는 의심을 받을 것이므로 4인방을 제대로 견제할 수도 없을 것이며, 최악의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동원할지도 모릅니다.”
장칭,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 사인반도 그들이 예전부터 구워삶았던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을 통해 “마오 주석께서는 진정한 문혁의 계승자인 장칭 동지를 당 주석으로, 왕훙원을 국무원 총리로, 장춘차오를 중군위 주석으로 임명하셨다”는 가짜 정보를 퍼뜨리게 하는 상황이었기에, 빠른 대응이 필요했습니다.
사인방의 빠른 체포를 위해 왕둥싱 상장이 지휘하는 8341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원래 베이징 내 요인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이 부대는 중난하이에 있는 사인방들의 집무실을 급습, 즉시 체포했습니다.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극좌파들 역시 함께 체포됐죠.
사인방들을 체포한 뒤, 권력 분배에 대한 안건이 올라왔습니다. 화궈펑은 당 중군위 주석, 당 중앙위 주석(당주석), 그리고 국무원 총리라는 당/정/군의 수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사인방 체포 후 가장 큰 세력으로 올라온 중도파와 개혁파를 만족시키려면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했죠.
우선 중군위 주석과 당주석은 최소한의 통제를 위해서라도 쥐고 있어야 하기에, 결국 덩샤오핑을 국무원 총리로 내정하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직에는 중군위 부주석 녜룽전 원수가 겸임, 내무 담당 국무위원에 자오쯔양, 당 부주석단에 후야오방이 추가되었죠. 결론적으로 중도-개혁파의 파이가 넓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공당 제1부주석이자 차기 주석으로 내정된 톤페티 라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4인의 측근들은 모두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05. 55년 체제의 붕괴
한편, 조직 개편과 동시에 대외상황 역시 안건에 올라왔습니다. 크게는 인도와 캄보디아, 일본의 일이었고, 특히 일본의 경우가 쟁점이었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에 대한 레짐 체인지 작전을 시도하고 실패할 경우 베트남의 선제공격을 지지하자는 안, 그리고 인도의 낙살라이트 및 마오주의공산당을 손절하고 인디라 간디 내각과 화해하자는 안이 통과됐습니다. 톰페티 라마의 설득으로 마르크스주의공산당 역시 의회주의 노선을 타게 되면서 일이 더 쉬워졌죠.
베트남군이 56식 소총과 54식 전차를 몰고 캄보디아 영내로 진입할 무렵, 일본 사회당에서 에다 사츠키 의원이 방문했습니다. 샤오나이와 위안차이나의 정보분석으로 록히드 사건 이후 일본이 정권교체의 적기를 맞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초빙한 것이었죠.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어차피 혁신계의 리더십이 혼란스러운 것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자민당을 흔들어놓는 것이 본질이다!”
일본에 대한 직접적 개입은 역효과만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기에, 조총련을 우회한 언론공작이 펼쳐졌습니다. 주로 재일 사업가 및 조총련계 야쿠자 조직들의 후원을 받는 신문사에서는 연일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와 그 측근들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심지어 김대중 납치사건에 오히라 마사요시 장관이 개입했다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들리는 상황에서 자민당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칼을 뽑아든 미키 다케오 총리는 이들을 공천에서 배제했고, 구태 정치인들이 따로 당을 창당하는 소동 속에서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양패구상. 결국 미키 총리는 직을 내려놓았고, 구태 정치인들이 공명당과 민사당을 끌어들여 정권을 재창출했습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직에 올랐죠.
그러나 일본의 인민들은 더 이상 자민당을 신뢰하지 않았고, 1976년 11월의 중원선을 “도둑맞은 선거”로 지칭할 정도였습니다. 55년 체제는 명백히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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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름: 류메이란(刘梅兰)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42년 3월 16일
- 성별: 여성
- 민족: 혼혈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영어(약간)
- 능력치:
통솔(7)/체력(10)/지능(10)/지혜(8)/매력(17)
- 기술:
지휘(0)/관리(0)/사격(1)/격투(0)/조사(0)/연구(0)/설득(1)/토론(0)/기만(1)/협박(0)/선동(1)/심문(1)/매혹(3)
- 트레잇:
- 잔여포인트: 1
- 배경:
충칭 태생의 류메이란은 (아마도) 백계 러시아인인 아버지와 (역시 아마도) 치앙족(서하인의 후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게 추정인 이유는, 메이란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공습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며, 메이란은 충칭에서 암약하던 공산당의 간부인 류한이라는 여성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중국의 적화 후 충칭 시장이 된 덩샤오핑과 군부의 실력자 양상쿤과 함께 손을 잡은 류한은 류메이란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노선을 자주 비판하는 등 '이상한 징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메이란은 1962년 중인전쟁에 자원하여 인도군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메이란은 모병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세를 끌었으며 촉망받는 청년당원이 되었습니다. 공청단의 간부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운명의 그 해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양상쿤과 덩샤오핑 모두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메이란의 양모인 류한의 과거도 밝혀졌습니다. 류한은 과거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지지하던 당간부로써 대장정의 대참사에 책임이 있었고, 그래서 양상쿤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 과거가 30년을 돌아 다시금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라 낙인찍힌 류한은 조리돌림을 당한 끝에 음독자살하였습니다. 혁명가의 딸에서 반역자의 딸이 된 메이란은 1년 동안 수감되었고, 그 이후에는 장시성의 석유기계 공장에서 천윈의 밑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메이란은 마침내 천윈과 덩샤오핑이 1973년 저우언라이에 의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음독자살할 때 마오 주석도, 덩샤오핑도, 양상쿤도 도와주지 않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만을 추구해야 하며 다른 모든 노선은 수정주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류메이란은 천윈의 충복입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
- 이름: 위안차이나(袁彩䛔)
- 플레이어: dear0904
- 생년월일: 1939년 9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영어, 노어, 프랑스어(약간)
- 능력치:
통솔(16)/체력(10)/지능(12)/지혜(7)/매력(7)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4)/설득(0)/토론(1)/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 잔여포인트: 2
- 배경:
위안차이나는 후난성 출신 관리 위안졔치(袁解奇)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시기의 혼란기중 몇몇 군벌의 눈에 들어 입신양명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은 후회되었기에, 자식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비단줄을 붙잡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위안졔치는 아들을 훌륭한 관리로 키워 내었습니다.
칭화대학 농대를 졸업해 허난성에서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수습하는 농경제진흥소조 관료로 일하던 차이나는 1971년 우연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9.13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마침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었던 후난성 지역혁명위원회를 지도하던 화궈펑 정치국위원에게 조언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화궈펑은 그의 답변에 감명을 받아 위안차이나를 정식 공산당원으로 추천했고, 이내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사람좋은 관료' 화궈펑은 국무원 총리가 되었고,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습니다. 위안차이나는 '주군'의 말도 안되는 성공에 매우 기뻐했으나, 그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석과 함께 할 것입니다.
3.
- 이름: 샤오나이(肖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북방계)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헝가리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 능력치:
통솔(9)/체력(9)/지능(12)/지혜(10)/매력(12)
- 기술:
지휘(0)/관리(2)/사격(0)/격투(0)/조사(1)/연구(1)/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 잔여포인트: 3
- 배경:
샤오나이는 중국 공산당 수뇌부인 샤오즈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샤오즈푸는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정강산 시절부터 공산당의 자금 수급과 재정 관리를 도맡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재정부 부장과 상무부 부장을 역임했습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데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씩 전란에 휩싸여 죽고 그만 유일하게 남은 터라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별 탈 없이 초중고를 졸업한 뒤. 대학도 국내에서 다닐까 했으나. 해외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유학지는 헝가리였습니다.
부다페스트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을 대학 친구들에게 듣자, 그가 태어나고 자랐을때 생긴 가치관에 조금씩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마져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그리고 굴라쉬 사회주의로 만들어진 헝가리의 (다른 공산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경제학 교수로 취직했습니다. 1966년 약혼녀인 베이웨이웨이(贝微微)와의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칼 마르크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헝가리에서 지내다가.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아 1975년 11월에 중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렇게 샤오나이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때. 조국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반우파 투쟁으로 인한 국내의 대대적인 숙청.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실로 경악할만한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귀국 이후 샤오나이는 재정부에 들어갔고,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 덕분에 고속 승진을 하여 재정부 내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라면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진정한 신중국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4.
- 이름: 라싸더챠오(拉萨的橋) (본명:톰페티)
- 플레이어: 하일레 셀라시예
- 생년월일: 1910년 10월 4일
- 성별: 남성
- 민족: 티베트족
- 모국어: 티베트어
- 사용가능언어: 중국 보통화, 영어,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 능력치:
통솔(7)/체력(7)/지능(18)/지혜(7)/매력(13)
- 기술:
지휘(0)/관리(1)/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3)/토론(3)/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 잔여포인트: 1
- 배경:
포달랍궁에서 전대 달라이 라마의 시중을 들던 톰페티는 영특한 두뇌를 가져 달라이 라마의 총애를 받으며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티베트 불교내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라마가 되었으나 1959년 티베트의 대규모 봉기와 중공의 탄압이 벌어지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티베트인들을 불쌍히 여긴 톰페티는 차마 라싸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로 망명을 가거나 투옥되어 죽는 가운데 남아있는 승려들을 규합하여 티베트인들을 안정시키고 공산당과 티베트 독립세력간의 의견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그의 오랜노력 덕에 티베트인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될 무렵 시찰을 나온 저우언라이와 만나게 되었고 긴 설득 끝에 독립운동을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더욱 큰 자치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도움과 함께 몇년간 라싸의 시장으로 있으며 티베트를 발전시키고 강경파를 회유하던 톰페티는 공산당 인물들에게 '라싸강경파들과의 대화창구'라는 뜻에서 '라싸더챠오(라싸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저우언라이에게 기대며 티베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우언라이의 요청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젊은 승려들 몇을 데리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5.
- 이름: 후종밍(胡中明)
- 플레이어: 세르게이 비테
- 생년월일: 1930년 8월 8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진어
- 능력치:
통솔(17)/체력(9)/지능(9)/지혜(11)/매력(7)
- 기술:
지휘(3)/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0)/토론(0)/기만(1)/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잔여 포인트: 1
- 트레잇:
- 배경:
후종밍은 인민해방군의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후챠오밍은 국공내전과 조국해방전쟁에서의 공로로 북부전구의 동원국장과 육군 정치위원직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지난의 북부전구 육군 사령원으로서 북부전구 내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였습니다. 후종밍은 그러한 아버지의 위세를 덕에 청소년 시절부터 저명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개인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 1대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서 재학하는 동안 북부 전구 지역 출신의 생도들과 파벌을 형성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 전구의 장교로 임관하여 고속 승진한 그는 아버지의 입김을 빌려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재학 시절 자신이 형성하였던 북부 전구 출신의 파벌원들을 북부 전구의 주요 요직에 앉히며, 북부 전구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 전역을 휩쓰는 과정에서 챠오밍-종밍 부자는 적절한 처신으로 오히려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대외적으로 중앙정부에게 능력있고 당에 충성하며 비교적 젊고, (마오 주석이 만든 군사학원의 초대 졸업생)장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후종밍은 사십 대의 나이로 북부 전구의 부사령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지금, 그는 겉으로는 당에 충성하는 면모를 보이며 최대한 당을 자극하지 않고 있지만, 은밀히 공청단과 접촉하고, 북부 전구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면종복배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
중국의 상황:
- 미국과의 관계: 5(중립적)
- 소련과의 관계: 2(적대적)
- 당내 계파 세력분포:
극좌파(8%)/보수파(20%)/중도파(28%)/개혁파(33%)/자유파(11%)
- 포괄적 경제협력기구(CEPO) 회원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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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으로만 작성했더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네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생략된 묘사가 많습니다.. 힘드네요;;
다음 이벤트는 가능하면 오늘 밤 10시쯤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안되신다면 내일 밤 9시로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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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의회에 가서 인도-중국 협력체제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하겠습니다(약간 적벽대전 참여 유도하러 오나라 간 제갈량같은 느낌으로 키배)
뉴델리의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톰페티 라마는 “친애하는 친구들, 평화를 사랑하는 동지들!”이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의원A:
“중국은 파키스탄의 우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도와 파키스탄 간 상황이 비우호적일 때, 결정적인 국면에서 우리의 뜻을 배신할 확률이 높은 것 아닙니까?”
의원B;
“영토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아루나찰프라데시는 티베트에서 클레임을 거는 영토로 아는데, 티베트의 유력인사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오히려 파키스탄과 인도가 대립상황에 있기에 중국이 양국 모두와 우호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만약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을 경우, 중재할 국가가 필요한데 인도에 친한 국가가 중재하려 들면 파키스탄이 거부할테고, 파키스탄에 친한 국가가 중재하려 들면 인도도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와 파키스탄 둘 다 대국이므로 이스라엘처럼 un에서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어려울 것이고요. 파키스탄과 인도 양국이 인정할만한 '공정한' 중재자로써의 중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b: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아루나찰프라데시에 사는 주민들이 행복해한다면 상관없습니다.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어느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차별받지 않는가?' '내 삶이 풍족한가?'입니다. 괜한 움직임으로 억지로 아루나찰프라데시를 돌려받아도 워낙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다보니 티베트에서 해결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인도가 티베트 민족과 불교를 탄압하지 않는 한 저는 인도와 갈등을 빚을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차원의 위신 문제도 있고 하니 향후 주민투표를 통하여 중국과 인도 어느 곳에 귀속될지 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인도에서 이제껏 해왔듯이 잘 통치한다면 주민들은 인도 잔류를 선택할 것이고 중국에서도 일방적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이니 위신면에서 해가 될 것은 없겠지요
의원A에 대한 토론(파키스탄과 친한 중국을 믿을 수 있는가?, 기준 13, +7)
: 2/4/6 +7 = 19.
“크윽…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중국은 큰 산같은 나라… 중국몽 함께합시다…”
의원B에 대한 토론(영토문제에서의 대폭 양보, 기준 18, +7)
1/2/6 +7 = 16.
“굉장히 논리적이고 유려한 말솜씨이지만 영토를 넘기라는 건 불합리하다! 아루나찰 프라데시의 영유권을 인정하기 싫다면 통치권이라도 인정하라!”
기준이 18이었군요.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라서 놀란 ㅋㅋㅋ...
+ 아. 근데 이 기준 18은 크리 필요랑은 달랐나 보군요. +7이 명시된거보니...
기준 18과 버프 7의 싸움이라니...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상부 가서 아루나찰프라데시 통치권 넘겨도 상관없겠냐고 물어보겠습니다
악사이친을 보장, 아루나찰프라데시의 인도내 자치주화를 받아들이면 동의하겠다고 해보는건 어떨까요?
“흠… 한 2-30년 정도의 한시적 인정이라면 괜찮을 수도..?”
그럼 향후에 경제 협력 조약을 맺을 때 아루나찰프라데시 지배권을 20년간 대여해준다는 조건을 추가하겠다고 설득해보겠습니다
조약에 이렇게 넣는게 좋을듯 하네요.
- 중국은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한다.
- 본 조약은 1998년 1월 1일까지 유효하며, 양국의 의사에 따라 갱신 될 수 있다.
인도 측:
“양국 간 관계는 이제 막 화해를 향해 달려가는 상태입니다. 영토분쟁은 매듭을 자르듯이 단칼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며, 우리 인도 정부는 따라서 2000년 12월 31일까지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인도의 통치권이 미치지만 양국의 주권이 중첩된 잠정지역’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후 민족 간 거주지역 분포가 정리된다면 새로운 국경선을 책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도 정보부 측:
“그나저나… 그 망명객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수락하겠습니다
밑에 건에 대해서는요? ㅎㅎ
접촉을 시도할테니 도와달라고 하고 달라이 라마에게 설득하러 가겠습니다.
'중공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많이 있는 것은 알지만 티베트의 사람들은 당신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저항을 그만두시고 티베트로 복귀하시지요. 독립운동에 대해 철회하는 말을 하신다면 이전과 같이 모든 티베트인들을 굽어살필 수 있는 위치에 오르도록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노선도 다르고 서로 간의 반목도 있기에, 달라이 라마의 설득은 상당히 어렵습니다.(기준 17) 그러나 설득에는 +5 버프가 붙으므로 해볼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1/2 +5 = 10. 대실패..?
“차라리 날 시체로 만들어 라싸로 부치시오.”
이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달라이 라마는 모든 접견을 거부해버렸습니다.
톰페티는 더 설득하려다가 포기하고 인도정부에 달라이 라마가 가까이서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처소를 히마찰 프라데시에서 델리로 옮기도록 압력을 넣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대신, 그의 신변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 정부는 중국 측과의 관계회복과정을 전면 재검토할 것입니다. 신뢰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다만 그가 중국 정부 몰래 티베트에 접촉하는 것을 막는것이 목표일 뿐입니다.'
톰페티의 개인이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2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다음화 올라왔습니다. 이벤트는 약 3시간 후인 1시에 시작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담으로 소확행소설 쓰다가 이대론 지루해질 것 같고 개인적 궁금증도 있어서 존 그레이의 불멸화위원회를 샀는데, 책이 도통 안 오네요.. 일단 오늘 두편분량 올려야겠습니다
무슨 책인지 검색해봤는데… ㅋㅋㅋㅋㅋ
레드플러드 제작진들이 한번쯤 읽어봤을 듯한 느낌이군요…
이게 저도 들은 풍월로 알고는 있었는데 진짜로 책을 발견하니 좀 놀랐습니다 ㅋㅋ
https://en.wikipedia.org/wiki/Lev_Karpov
요기 간략히 나옵니다
*후종밍의 개인이벤트.
선양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실력자 후종밍 상장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선양군구의 요직을 이너 써클들과 공유하고 세력을 장악해도 총정치국, 중앙검찰원, 공안부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중앙의 연줄이었습니다. 만주의 촌뜨기로 잊혀질 수는 없으니까요!
후종밍은 정치적인 힘을 이용해 중앙의 감찰기관들에 자신의 사람을 만드려고 합니다. 적절한 인재를 포섭해야 할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리크루트 방식, 후원 방식, 충성보장 방식 등등)
호오... 저도 다음에 이 방법으로 재정부, 상무부, CITIC를 제 손아귀에 넣어봐야겠어요.(플)
후종밍은 중앙감찰기관에 제 사람을 만드는 방법으로 꽌시를 수 차례 엮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고급인민검찰원과 중급인민검찰원 내에 파벌을 택하지 않아 요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접근하여 자금과 인맥, 군 정보국을 통한 정보 등을 제공하여 그들을 포섭한 후 그들을 또다시 꽌시로 묶어 파벌화 시켜 요직으로 끌어올리기를 시도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공안부의 판공청과 정치안전국(후 정치안보국), 동북3성 공안청에게도 중앙검찰원에게 하였던 것 처럼 자본과 인맥, 정보 등을 제공하고 충성하는 자들을 꽌시로 엮어 파벌화시켜 요직으로 끌어올리기를 시도합니다.
총정치국 쪽은 기본적으로 회유가 힘들고 발각될 가능성이 다분함으로 포기합니다.
관리 스킬로, 능력치는 통솔/지혜 입니다. 능력치버프 +1, 관리버프 +3. 총 +4 적용.
1) 검찰조직(기준 12)
5/3/5 +4 = 17. 무난하게 성공.
2) 공안조직(기준 14)
3/4/3 +4 = 14. 딱코. 절반의 성공.
검찰조직에 꽌시를 통한 파벌 조직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원활하게 성공했지만, 공안조직은 생각보다 복잡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유력자들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던 탓이었죠. 동북3성의 경우 후종밍보다 더 막강한 유력자가 몇 없었기에 성공적이었지만, 중앙에서는 생각보다 큰 조직을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 중앙 공안조직에서의 영향력 확보가 좌초된 것은 아깝지만.. 당장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검찰원과 동북3성 공안조직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했으니.. 이정도면 이제 중앙으로 진출해도 크게 탈이 없겠어 ... '
결과적으로 후종밍은 원로 녜룽전, 예젠잉이 차지하고 있는 총참모장과 국방부장 자리를 노리는 유력후보자군에 들어갔습니다. 화궈펑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것이고, 덩샤오핑은 자신의 최측근을 밀어넣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개인이벤트 종료. 2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다음화 올라왔습니다. 이벤트는 약 3시간 후인 1시에 시작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제 개인 이벤트도 다 끝난 거 같은데. 다음 글 올라올때까지 뭐 하지?
이번 댓글들은 밀도가 장난아니네요. ㅋㅋㅋㅋ
이것저것 축약하고 줄이면서 누락되는 부분이 없게 신경은 쓰고 있습니다만, 조용히 잊혀지는 설정이 나올까봐 좀 걱정입니다.
저도 소설로 쓰는데도 그럴뻔한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정리하면서 새삼 깨달은 거지만… 이란 사태가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
2차 오일쇼크가 더 큰 위기가 되겠군요.. 이란-이라크 대신 다른 어딘가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르고..
여기선 프랑스의 뒤를 이어 이란이 영고라인에 들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