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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16강
출애굽기 8:20-32
파리 떼 이적
우리 성경 신약에서 “재앙”이라는 표현이 처음 나오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9:18에서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라는 말씀이다. ‘플레게’는 ‘재앙, 타격, 재난, 상처’라는 뜻인데 ‘플렛소’(치다, 때리다)에서 유래하였다. 이 단어는 대부분 히브리어 ‘막카’의 역어로 쓰인 것인데 ‘나카’(치다, 때리다, 죽이다)에서 온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나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서신서에도 나오는데 대부분 ‘매질로 맞다, 상처’로 번역하였다(눅 12:48, 행 16:33).
바울 사도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플레게)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 11:23)라고 선포한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매를 맞는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앙이란 단순히 곤궁에 빠뜨리는 고난이 아니다. 금이나 철을 가공하기 위해 때려서 원하는 것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치셔서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내는 것이 재앙이다.
결국 이적을 통해 애굽에 내려진 재앙도 열로 완전하게 때려서 심판 가운데 있게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자리로 가게 되든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적을 통해 심판 아래 있는 존재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네 번째 이적부터는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애굽에만 재앙으로 주어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20절). “아침에 일찍이”라는 표현은 7:15과 같은 의미로 바로가 반복적인 종교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라는 표현은 바로가 종교적 의식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지만 그것은 나일강이라는 아랫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진리에 근거한 종교적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완악한 자의 특징은 종교적 의식과 행위에 목숨을 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직 그에게 말씀이 주어지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라는 같은 말씀이 계속 반복하여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자기 언약을 담아 놓으셨기에 언약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라는 표현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총회요 교회이다. 오늘날 교회는 나를 위한 구원, 내 중심의 관계 안에 있는 혈육의 구원, 나의 느낌과 감정의 평온, 행복, 자기 위로의 충족, 마음 상함에서의 구원, 세상 속에서의 잘나감 등 이런 모든 것들을 구원으로 착각한다.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21절).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는 것이 심판 가운데 있음이라는 의미로 파리 이적이 주어진다. “파리 떼”의 ‘아로브’는 ‘아라브’(혼합하다, 섞여 있다)에서 유래하였는데 ‘혼합물, 떼, 파리의 여러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 70인역에서는 ‘퀴노뮈아’(개파리 떼)라고 번역하였고, 우리 성경 시편 105:31에서는 “파리 떼”라고 번역하였으나 78:45에서는 “쇠파리 떼”라고 번역하였다(현대어, 공동번역, 가톨릭성경은 “등에”로 번역함). 당시 더러운 파리 떼들이 동물의 사체와 질병을 일으키는 곳에 창궐하는 것을 보고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파리의 신이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블레셋 땅 에그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 “바알세붑”(히, ‘바알제부브’)은 소위 ‘파리의 주인’이었다.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왕하 1:2-4)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주전 853-852년)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에그론의 파리 대왕 바알세붑에게 자기가 죽을지 살지를 물어보라고 사람들을 보낸 것이다. “아하시야”는 ‘아하즈’(붙잡다, 취하다, 연합하다)와 ‘야’(야훼)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잡으셨다, 여호와와 연합되었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자가 파리 신의 힘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죄악을 폭로하자 아하시야는 오히려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불로 심판을 받았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이나 아하시야에게 내려진 재앙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바알세불(헬, ‘베엘제불’)의 것으로 돌리는 유대인들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임을 폭로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진다는 표적 곧 십자가를 나타내셨다.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18-20)
“신하”는 문자적으로 ‘노예, 종’이라는 뜻이다. “집들”이란 바로가 종교적으로 추구하는 문자의 율법적 성전이며 종과 백성이란 그 성전에 속한 자들을 의미한다. “가득할 것이며”의 ‘말레’는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이다. 즉 바로의 성전은 파리의 신으로 충만한 상태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애굽에 내려진 네 번째 파리 떼 이적은 파리의 신, 곧 사탄에게 사로잡혀 진리를 좇는 것이 아닌 세상의 온갖 혼합된 것을 좇는 상태임을 폭로한 것이다.
“그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22절). 이적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지는 심판이라는 뜻이다. “구별”이란 말의 ‘팔라’는 ‘구별하다, 뚜렷하다, 나누다, 명확하다’라는 뜻인데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였다.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구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의 구별(출 33:16) 경건한 자로 택하심(시 4:3)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존재로 애굽의 혼합된 종교와는 구별된 존재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라는 말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 됨을 아는 자들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23-24절). 여기서 “구별”은 22절의 “구별”과는 다른 단어로 ‘페두트’인데 ‘자유, 구속, 구원, 구별, 분할, 구출’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 백성”으로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표징”(히, ‘오트’)으로 언약의 표가 된다. “황폐하였더라”(24절)의 ‘샤하트’는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라는 뜻인데 노아 언약을 통해 땅의 상태를 보여주신 표현이다. 땅적인 것으로 혼합된 것은 모두 파괴되고 잃어버림을 당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 자체가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출애굽은 세상의 혼합된 종교성, 문자의 율법으로 혼합시켜 진리라고 여기는 그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샤하트)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샤하트)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샤하트)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샤하트)(창 6:11-13)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25-26절). 바로는 이스라엘을 놓아주겠다는 제안을 하나 완전히 놓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25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굽에 계속 붙잡아 놓고자 하는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비진리로 장악하려고 하는 특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원은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27절)라는 말씀에서 드러내는 바와 같이 애굽에서 벗어나 삼 일 길을 가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되”의 ‘자바흐’는 ‘희생 제물로 도살하다’라는 뜻이다.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언약의 온전한 성취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28-29절). 바로의 제안은 적당한 타협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것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담임 목사가 가르치는 데까지만 가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도는 ‘자바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30-31절). 모세가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는 형식으로 재앙을 거두시는 이유는 엘로힘 하나님과 짝을 이루어 하나 된 모세를 통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엘로힘 하나님이다(출 4:16, 7: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31절)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대로 응답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의미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32절). 죄악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는 완악함의 상태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바로는 바로의 일을 하고 모세는 모세의 일을 함으로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완악함을 증거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심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202509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