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5년 11월 01일 18시 16분 57초
朴民宇 추천수 : 9
컴맹이라...지도를 못 퍼 왔습니다.
청해 중앙에 있는 두섬(山)을 가리켜 海心山, 安心島, 鳥島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서쪽에 있는 작은 섬의 진짜 이름은 해서산(海西山)이고 형태는 낙타 등의 육봉과 비슷하며 면적이 약 0.3 평방킬로미터이며 높이는 해발3266미터 이다. 동쪽에 있는 섬은 해서피(海西皮)라고 부르는데 면적이 상대적으로 커서 약 4.6 평방킬로미터이다.
" 삼국사기에 이런 글이 있다.
三年 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삼년 동십월 왕렵서해대도 수사사십록
3년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대도(大島)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과연 한반도 서해에 말을 달리면서 이런
사슴을 40마리씩이나 사냥할 수 있는 섬이 있는가?
사진은 경주에서 출토 된 '공심전(벽돌)' 그림 인데 바로 시베리아 초원에서나 볼 수 있는 사슴이다. "
靑海湖가 있는 서해군에서 율곤선생과 권철현의원
사진출처 : 사단법인 상고사학회
청해진의 위치로 본 신라
글 : 노성매
중국역사지도집의 당(唐) 시기에 보이는 청해진(淸海鎭)의 위치
표시된 영역을 확대
신강성 우루무치(烏魯木齊)와 인접한 곳인데, 우루무치는 실크로드의 천산북로 중간지점으로, 700여개의 강과 50여개의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8쪽
…博斯騰湖.「湖」在塞外慣習上原可叫做「海」所以太康地記說‥「河北得水爲河, 塞外得水爲海」
청해진은 이 수많은 강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한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음이 보입니다. 장보고 때의 청해진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청해진 오른쪽 아래로는 돈황이 보이는데, 돈황 일대가 대륙사관으로는 신라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청해진 아래쪽으로 고차(庫車)라는 곳에, 당나라가 두었다는 안서도호부가 있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언기(焉耆)가 보이는데, 중국민족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는데,
"연연…隨水草畜牧其西則焉耆之地. 東則朝鮮之地. 北則渡沙漠窮瀚海. 南則臨大적…
연연족은...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했는데, 그 서쪽은 언기의 땅이다. 그 동쪽은 조선의 땅이다."
언기의 동남쪽에 있는 박사등호(博斯騰湖)가 고대의 서해(西海)였다고,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쪽…(史記大宛列傳索隱引) 而且博斯騰湖之名爲西海…約定的集合地點博斯騰湖(西海)…博斯騰湖卽大荒西經的西海…
청해(靑海)는 곧 서해(西海) 입니다.
아무튼, 이 지도상에 나와있는 청해진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며, 동시에 당과 신라를 비롯해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국경지대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역에서 돈황으로 이르는 실크로드 천산북로의 거점도시이므로, 국제무역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입지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보고의 활동영역은 이곳이 아닐까요!
실재로 청해성 지방은 고산지대이지만 지반이 융기하기 이전에는 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청해성의 고산지대는 바다같은 호수들이 여러개 남아 있습니다.(청해진과 청해성,청해는 각기 다른지역임)
율곤 이중재 著「上古史의 새發見」787쪽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金城은 최초 주물로 이룩된 城…감숙성 난주(蘭州)이다. 이곳은 서북에서 흘러오는 황하(黃河)의 남안에 금성(金城)의 관문이 있다.…대완열전(大宛列傳)에 의하면 토곡혼(吐谷渾)의 왕이었던 훈사왕(渾邪王)은 백성과 군졸을 데리고 한(漢)나라, 즉 진한(秦韓)으로 항복하여 왔다. 이때 진한(秦韓)은 신라의 선조다. 훈사왕은 금성으로 왔다…
금성(金城)은 금속에 가까운 주석인 주물(鑄物)로 이루어진 성(城)이므로 담장이 비교적 방어하기 좋고 견고하고 단단하다. 지세는 험하고 요충지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금성은 천리(千里)이고 하늘에서 정해준 나라이다(天府之國也)…
응소(應 )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성(城)을 쌓을 때 금으로 쌓았다고 하여 금성(金城)이라 했다…
신라의 금성이 서역(西域)인 실크로드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도 거서간(居西干)이라는 말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신라의 최초 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사금((尼師今)인데, 간(干, 汗)은 당시 천산(天山)과 알타이산 일대에 웅거하던 유목민족들의 왕의 호칭입니다. 몽고도 처음에는 한국(汗國) 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금(尼師今)의 호칭은 역시 청해성, 서장성, 감숙성 , 신강성 일대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천축(天竺)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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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등호(博斯騰湖)와 청해(靑海) 그리고 청해진(淸海鎭)
글 : 朴民宇
박사등호(博斯騰湖)
쿨러시(庫爾勒市)북쪽으로 57㎞, 언기(焉耆)분지의 박호현(博湖縣), 화석현(和碩縣)경내에 위치. 호수면적은 약 1000㎢, 소택 면적은 400㎢, 해발은 1048m, 중국내륙의 가장 큰 담수호이다.
박사등호는 옛날 <서해(西海)>라 불렀고 당나라 때에는 <어해(魚海)>, 청나라 중반에 현재의 이름을 가졌다.
호수모양이 거대한 반달 같고 그 둘레에 많은 작은 호수들이 있어 뭇 별들이 달을 둘러싸고 있는 듯 하다. 개도하(開都河)가 서북쪽으로부터 흘러들어 서남으로 흘러나와 공작하(孔雀河)의 발원으로 된다. 수면이 넓고 물이 맑아 서새명주(西塞明柱)라 불린다.
박사등호에 중국의 가장 큰 갈밭이 있다. 그 면적은 450평방㎢, 바람에 춤추는 갈대는 마치도 북방의 빙설과 같다.
이 호수는 신강(新疆)의 가장 큰 수산업기지이기도 하다. 호수에는 대구, 뱅어, 붕어 등 30여종의 어류와 진주가 난다. 물새의 천당인 이 호수 위에 많은 야생조류들이 날아 예고 수면에 고기배가 오가고 호숫가에서 낙시를 하여 강남의 경치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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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등호(博斯騰湖)는 천산북로에 위치한 호수이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는 이 곳이 고대에는 서해(西海)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언기의 동남쪽이다.
청해(靑海)는 지금의 청해성(靑海城) 고지대(高地垈)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말하며 사실 청해성은 호수가 대부분이라 할 만큼 엄청나게 크고 긴 강, 호수 등으로 이어져있어서 과연 내륙의 대해(大海)라 할만 하다. 수나라시기부터 이 청해를 서해로 부르게 된 것 같다. 당나라때 토번과 돌궐세력정벌은 이 곳 청해의 고지대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청해진(淸海鎭)은 신강성 우루무치(烏魯木齊)와 인접한 곳인데 천산남로에 위치한 청해(靑海)와는 달리 오히려 박사등호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청해진(淸海鎭)은 수 많은 강들이 거미줄 처럼 얽힌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바다해海 자를 사용한 것 같다.
진(鎭)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국경지대에서 검문이나 방어역활을 하기위해 설치하는 것이다. 고대지도에서 특히나 이 일대는 진(鎭)이란 이름이 많다. 함천진(咸泉鎭), 언기진(焉耆鎭), 구자진(龜玆鎭), 소륵진(疏勒鎭)…
청해진(淸海鎭)은 지금의 청해와는 별개의 것이다.
아래 그림은 신라의 南山에 대한 지명자료
(해설 노성매)
고대사에 등장하는 남산의 총체적인 모습입니다.
남산 줄기는 모두 고대 번성했던 문명의 중심지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의 南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던 탑리목분지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곤륜산맥을 南山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남산 위쪽으로는 고대 번성했던 도시들이 보입니다.
철륵은 고려사에도 나오는 민족으로, 명장 유금필은 태조의 명에 의해 북변 평정을 위해 보내지고(태조3년), 그리고 태조 19년에 있었던 후백제와의 유명한 '一利川 戰鬪'에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 (鐵勒) 등 여러 북방 번인(蕃人)의 굳센 기병(騎兵) 9천5백 명을 거느리고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산은 감숙성을 타고 내려갑니다.
산해경 해외서경에 의하면...
하수(河水)가 동북 모퉁이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서남쪽으로 다시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또한 해외(海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우(禹)임금은 물길을 틔우기 위해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갔다.
감숙성을 타고 내려온 남산은 태백산과 서경의 남쪽으로 연결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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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의 역사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는 살수대첩의 진실
구이(九夷), 구한(九韓), 구황(九皇), 구맥(九貊), 구려(九黎)
등록자 : bc8937 | 등록일 : 2005-11-02
상고사학회 기행문 中에서 ...
靑海 西海郡 古城 遺蹟地
靑海湖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 여름이지만 서늘한 초가을 날씨이며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 그리고 노란색의 유채꽃, 아득히 먼곳에는 거대한 사막의 모래산이 보였다.
한참을 달리다가 옛날 土城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그넓은 벌판에 西海郡이라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비문에 王莽이 새겨진 것을 살펴보니 2002년에 세워진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王莽의 세력이 이곳 靑海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곳 官吏의 말에 의하면 이곳 靑海는 그 옛날 戰亂의 격전지로 땅속에는 많은 병장기와 유물들이 묻혀 있다고 했다.
靑海省은 대부분 해발 2,000m 이상이며 호수 한가운데 있는 安心山은 그 높이가 해발 3,700m 라고 한다.
靑海湖의 넓이는 濟州道의 約4倍 넓이로 바다와 같이 넓었으며 물맛을 보니 과연 짠맛이었다.
등록자 : 글펌 | 등록일 : 2006-01-05
최두환 (2003-02-17 21:14:53, Hit : 277, Vote : 10)
이 글은 다른 싸이트에 올린 적이 있는 글입니다. 한번 확인하여 조선의 강역이 어딘지를 생각해봅시다.
조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증거는 숱하게 많습니다. 토기조각 하나를 가지고 역사를 농단한다는 것은 사서를 무시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행주산성에는 행주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주대첩비의 존재는 가치가 없게 되지요. 우리 조선의 지리서인 에 보면 신라의 북쪽에 "大漠"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무지하게 넓은 큰 사막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大漠은 에서 찾아보면, 동쪽으로 흥안령에서 서쪽으로 천산산맥까지 이르는 사이에 뻗어져 있는 사막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지리적 구분이 흥안령이 동쪽 끝이라고 했으므로, 지금의 만주벌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반도 북쪽을 두고 신라의 북쪽이라고 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큰 사막을 기록한 의 내용은 같은 지역을 두고 말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큰 사막의 남쪽은 산서성 남쪽이 되며 동경이 낙양이요, 경주라는 그곳이 곧 신라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그 신라의 서쪽에 고구려, 신라의 서남족이 백제라는 속의 조선열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배치도를 참고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신라의 복쪽에 큰 사막이 있었다는 사막이란 유물은 기와조각, 토기조각의 몇 배나 될까요? 이보다 더 큰 유물은 있을까요?
등록자 : 朴民宇 | 등록일 : 2006-01-05
위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금성(金城)의 북쪽에 큰사막(大漠)이 있습니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 입니다. 이곳이 낙랑지역 이었음을 다음 내용에서 알수 있습니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로 봉하고, "
경주는 역사상 모두 다섯군데 있었던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우리나라 제외)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경주(慶州)는 처음 정주(定州)였다. 정주(定州)는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북이다. 두 번째 경주는 순화현(淳化縣)이다.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위쪽, 세 번째 경주는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 네 번째 경주는 섬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 북쪽, 다섯 번째 경주는 사천성(四川省) 기주부 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1, 3, 4, 5는 별로 중요하지않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다.
그리고 경주(慶州)란 이름도 신라가 망했기 때문에 생긴이름이다. 즉,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건으로부터 동맹(同盟)의 답례로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식읍으로 받은 땅에 경주(慶州)라는 이름을 왕건이 내려주었던 것이다.
원래 수도는 계림, 또는 금성인데 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 처럼 한 곳에 뭉뚱거려져 있으니 말이 되겠는가?
고려사절요 태조 을미18년
○ 봄 3월에 ,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 금제(金提))의 불사(佛寺)에 가두고 ,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견훤이 아들 10여 명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 그 형 신검․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근심하며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지방에 나가서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신검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이찬(伊粲) 능환(能換)이 사람을 시켜 양검․ 용검과 함께 몰래 모의하고 , 신검을 권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근년에 후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 공경(公卿)들이 유금필(庾금弼)을 천거하였다. 왕은 이르기를 , “나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 금필로서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삼아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 왕이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 6월에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女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사랑하는 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견훤이 이르매 ,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 남궁(南宮)을 사관(舍館)으로 주고 , 위(位)는 백관의 위에 있었다.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 겸하여 금과 비단과 노비 각 40명과 말 10필을 내려주고 ,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서 아관(衙官)을 삼았다.
○ 가을 9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순시하고 돌아왔다.
○ 겨울 10월에 임술(任戌)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어 회보 하였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니 ,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癸卯)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癸丑)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문무 백관을 모으고 예(禮)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
기미(己未)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危亂)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基業)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원컨대 , 신하의 예(禮)로써 뵈옵고자 합니다” 하니 ,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신유(辛酉)에 뭇 신하들이 아뢰기를 ,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사오니 ,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하였다. 임신(任申)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宰臣)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 “짐(朕)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 경(卿)등도 역시 옳다고 하므로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고 , 이에 김부(金傅)의 뜰 아래서 뵈옵는 예(禮)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여 그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로 봉하고 , 위(位)가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다. 해마다 녹(祿) 1천석을 주고 ,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食邑)으로 하게 하였다. 그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採用)하고 토지와 녹(祿)을 주어 그전보다도 더 우대되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다.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官職)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功臣)들도 역시 이를 본받아 각기 그 주(州)의 사심관이 되었으니 , 사심관은 이 때에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