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부 인생
그 때 네가 이겼다. 향기는 동네에 사는 우리 또래들보다 키가 웬만한 장독대 하나 올려놓은 것처럼 컸다. 그러나 못 먹어서 그런지 허리는 늘 꾸부정하게 접혀 있었고 눈은 휑하게 큰 것이 멍청한 것처럼 보였다. 향기와 나, 그리고 두 서너명의 아이들은 늘 같이 좁은 동네에서 여러 장난을 치며 자랐다. 향기네 집은 좁은 동네에서 별로 평판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경상도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그것은 쥐어짜듯 지독하게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창 먹을 나이의 향기가 저렇게 빼빼 말라 동네 어른들로부터 혀를 끌끌 차는 소리는 듣지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향기네 집이 못 살았는가 하면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 내가 태어난 집은 기억 못해도 남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기억에 남는 첫 집은 향기네 집으로 그들은 당시 집 한 채와 향기의 아버지가 역근처에서 잡다한 미군과 선원들을 상대하는 술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다만 향기의 부모님들이 애들에게 야박하게 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아마 커서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 향기네 아버지는 술집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들을 집으로 데려고 와 재우곤 했는데, 향기 어머니와 누나들은, 전부 여섯 형제였는데 향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형제였다, 싫어했을 것이며 그 미움 전체를 향기가 그래도 사내라고 전부 덮어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튼 그런데 당시 향기는 요새 애들 사이에서 지금도 유행하는 그런 골목대장은 아니었다. 너무 껑충하고 애들을 부려먹는 요령이 부족해서 애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늘 얼굴에 씌여 있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 향기와 난 고등학교 입학 당시 당당하게 인문고를 들어간 나와 달리 겨우 인문계 야간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하나는 공부한답시고, 하나는 그 나이에 벌써 인생의 낙오자다운 쓴 맛을 다시며 방황의 길로 접어듦으로서 더 이상 자주 만나지 못할 때까지 같이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물론 단짝같은 친구는 성구, 재술이 등 두 어명 더 있었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친구는 향기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고자 한다.
얼마 전 서울에서 사업 확장 관계로 집에 내려와 있던 난 비교적 여유가 많아 아침마다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 빈둥거리자 그 모습을 몇 일 지켜본 어머니께서 딱하다는 듯이 권고한 새벽 등산을 다니게 되었다. 사업은 신규로 개발한 모종의 컴퓨터 부품으로 그것을 지금의 컴퓨터에 장착하기만 하면 지금보다 속력이 배가되어 각종 인터넷이나 아이들의 게임 등이 더욱 재미있을 것으로 별로 커지도 않는 회사에서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개발, 최근 출시의 기쁨을 준 상품으로 각종 정부 기관처로부터 올해 새로운 신기술 상품으로 상까지 여러 차례 받기도 하여, 우리는 굉장한 흥분의 열기에 휩싸인 채 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반응은 그런데 별로였다. 아마 각종 일간지나 기술 전문지에 광고까지 전부 실었다면 손해는 막심했을 것이리라. 그나마 부도직전까지 갔던 회사가 기존의 다른 종목으로 운좋게 만회하지 못했다면 난 집으로 사업차 내려오는 것이 아닌, 보따리를 몽땅 짊어진 채 낙향해야 옳았을 신세였다.
새벽 산의 공기는 오랜만에 찾은 것이라 그러했는지 무척 맑았고, 비록 낮은 산이긴 했지만(정상까지 한 시간이면 족한 거리다) 도착한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가지와 시가지너머 굽이 흐르는 푸른 강은 마음을 호연지기까지는 몰라도 지금껏 살아온 시간을 벅찬 마음으로 돌아보기에는 족했다.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야호! 야호!(거기에서 끝났으면 이야기는 애초 시작되지 않았다)하고는 냅다 요즘 유행하는 유행가 몇 가락을 기분좋게 불러 젖혔던 것인데, 마침 늘 오는 사람들인지 아줌마들은 큰 소리로 마구 웃으며 들어주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힐끗 한 번 쳐다보았을 뿐 별 말이 없어 난 스스로 그런 갑작스런 기분에 도취한 나머지 중단하지를 못했다. ‘울고넘는 박달재’ ‘과거는 흘러갔다’ ‘아빠의 청춘’ 등 여러 곡을 노래방에서 부르듯 섞어 부르고 막 ‘아파트’(이 노래는 가요주점의 아가씨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곡)로 넘어가던 참이었다.
“여보쇼, 여기가 뭐 노래방인지 아요, 조용히 마음을 닦는 곳에 와서 속시끄럽게 하지 말고 저 산구석에 가서 부를라면 부르소. 원 시끄러봐서.”
그래도 난 대학 들어갈 때까지는 남들 다하는 그 흔한 미팅도, 담배도, 술도 일절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수도하는 수도승처럼 공부만 한 착실한 모범생이었고, 대학 들어가서도 여전히 모범생이고자 노력한, 가끔 써클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밤이 늦어 차도 끊긴 시각, 마땅히 잘 곳이 없어 학교로 고양이처럼 기어올라가서 학예회다, 연주회다, 연극이다 하는 것을 공연했던 학생 회관앞 잔디밭에 새벽 이슬을 맞으며 잠을 청하기도 했던, 이 정도는 모범생이 아니라 모두들 한 번쯤 통과의례 절차 같은 것이니까, 하여간 사회에 나와서까지도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바리같이, 또순이처럼 산 사람으로 한낱 등산길에서 만난 나이가 아버지 연세만한 노인네하고 빌붙어 멱살잡아 가며 싸울 수는 없다싶어 순순히 그 길로 내려왔다.
순순히 내려왔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뭔가 욕을 한바탕 쏟아부었는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맞받아 헤꼬지를 했는지는. 그런데 며칠 뒤 안면이 있는 아주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왜 그랬냐는 말을 얼핏 들었으니 내 딴에 점잖게 물러서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향기는 키가 조그마해서 늘 앞 줄 두 번째에 앉곤했던 나에게는 참으로 불쌍하고 슬픈 짐승이었다. 그렇게 쉬운 영어를 한 두개 정도 틀리는 것도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향기는 몇 개 맞았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야 할 정도로, 그나마 뭘 맞고 뭘 틀렸는지를 알면 다행이고,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당시는 공부를 못하면 주먹이라도 뛰어나야 살아남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키만 달랑 컸지 허우대는 형편없었다. 그래서 늘 눈치를 이리저리 보는, 그것도 키가 커서 반 전체 모르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어디를 가나 향기였다.
“향기, 그참 이름 한 번 좋네, 발향기가 손향기가 뭐꼬. 어, 그러고 보니 손향기네. 그노무 자슥 이런 좋은 이름 놔두고 공부는 와 이렇게 밖에 못했노. 자슥아.”
빡빡 깍은 머리 뒤통수에 불이 났다. 시험을 치고 나면 으레 수학 선생은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시험 점수가 매겨진 답안지를 들고 들어와 오들오들 병아리처럼 떨고 있는 가엾게 그지없는 아이들을 후려치곤 했는데, 향기가 걸려 맞을 때면 괜히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영어 몇 점 나왔데, 어, 팔 점. 아인데 몇 개 더 맞을 껀데. 답안지 한 번만 더 체크해봐라. 다른 아이들은 지하고 지 친구들 점수도 좀 고쳐갖고 올려 준다던데. 영수야, 어찌 안되겠나?”
중간 고사가 끝난 어느 날, 늘 하던대로 영어 답안지 채점을 내가 하게 되자(담임이 영어 담당이셨다.) 집에도 가지 않고 늦은 시간 교실로 살짝 들어와 향기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결코 고쳐줄 수 없었다. 애걸하는 향기의 목소리가 간절할수록 눈빛이 불쌍할수록 더더욱 난 고쳐줄 수 없었다. 다른 아이가 와서, 반장같이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아이가 그랬으면 웃으며 고쳐주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렇게 해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고 해서 돈 떨어진 남자를 매정하게 차버리는 술집 작부처럼 매정하게 거절했다. 껑충하게 큰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모습이 안되어 보이긴 했지만 난 학생증 사진에 나온 밤톨같은 모습대로 입술을 지끈 깨물었다. 그리곤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기쁨을 지그시 눌렀다.
공부는 그런 맛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나 돌아서면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앞서 말한 성구와 재술이와 향기와 난 사추리에 새까만 털이 생겼는지, 생겼으면 몇 가닥이나 생겼는지, 목욕탕에 가서 확인하기도 하고, 그 아래 고추가 얼마나 큰 지 손가락으로 재보며 낄낄거리는 사춘기의 여느 아이들이었고, 틈나면 공부 핑계삼아 애들 집에 남아도는 골방이나 다락방으로 저녁 먹고난 밤이면 어김없이 집합해서 장기나 오목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카드로 도리지구땡에 얼마 살지도 않은 목숨을 초개처럼 걸고는 고뇌하는 머슴아들이었다. 하는 놀이마다 비록 코묻은 적은 금액이지만 십원부터(당시 삼십원이면 라면 한 봉지를 살 수 있었다) 열이 확 올라 밤을 새기 시작하는 날이면 냄새나는 호주머니에서 백원짜리 지페도 서슴없이 나오는 기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난 개를 선천적으로 무척 싫어한다. 재술이 집에는 ‘베스’라고 불리는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강아지 모양의 작은 몸으로 향기처럼 바짝 말랐는데, 아마 그게 그 때 다 큰 덩치였을 것이고, 악바리처럼 악만 남았는지 유독 나만 가면 짖어대는데 주인인 재술이가 ‘베스! 가만 있어. 야! 베스! 자꾸 그러면 맞는다’라며 으름장을 놓으며 줄을 잡아주지 않으면 난 도통 방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참고적인 사항이지만 어릴 때 동네에서 놀다가 풀어놓은 미친 개에게 물려 혼이 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억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잡기(雜技)를 좋아하는 우리는, 아니 노름의 유혹을 끊지 못하던 우리는 돌아가며 모이던 집중 재술의 다락방에 집결했다. 그 날 밤 다락창으로 달은 만월이었고, 이미 집에서 출전의 각오로 이야기하고 온 터라 대단한 격전이 예고되었으며, 베스가 방 마루밑에서 지키고 있는 한 난, 유독 난 퇴로가 막힌 배수의 진에 갇혀 비장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물론 어른들과 재술의 나이 든 형들이 다락 바로 밑의 안방에서 흑백 텔레비전을 보며 우리 노는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면 다 들리는 터라 비록 적진이긴 하지만 안전에는 소홀함이 없긴 했다.
다락에 올려놓은 낡은 책, 정확히 말하면 해독이 불가능한 낡은 일본 잡지에 나오는 비키니 차림의 여자 사진들을 보며 잠시 눈요기를 하고, 과자 봉지 속에 감춰 들여온 포도주를 소리없이 뚜껑을 따서 역시나 미리 준비해둔 잔에 넉넉하게 따라부어 숨죽이며 마시는 그 은밀한 즐거움이란! 과연 명승부 전야다운 준비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꾼은 아니지만 당시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노름에 반쯤 미친 아이들, 관례대로 장기를 소리나게 두고, 바둑도 두고 소리나게, 공부는 쥐오줌 정도만큼만 하고, 원체 나머지 아이들이 그 방면에는 취미가 없어서, 곧이어 재술이 다락방 문틈으로 안방의 분위기를 정탐하는 동안 우리는 국방색 담요를 좁은 공간에 부드럽게 접어 깔았다. 깔며 카드를, 화투를 준비하는 손길이 어느덧 알 수 없는 흥분의 불길에 휩싸여 일부는 부들부들 광기들린 개처럼 떨기도 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백중세, 돈이 줄지도 늘지도 않는 소강 상태를 두어 시간 넘짓 되풀이하고 있다. 그만큼 눈에 불을 켜고 하는 터라 마음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조차 아깝게 생각하며 방광에 오줌이 꽉 찬 나머지 그 뒷구멍으로 가끔 새어나오는 독한 가스와 더불어 찔끔거릴 때나 되어야 하는 수 없이 다녀오는 치열한 투혼을 모두는 발휘하고 있었다. 그나마 난 그 놈의 ‘베스’ 때문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며 버티고 있었다. 자, 이제 이 정도 읽었으면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는 자부터 서서히 돈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결국 나부터 잃게 되어 있었던 불보듯뻔한 형국에서 향기가 자제력을 그만 잃고 소리를 지르며 내 귓방맹이를 올려붙였고, 난 술취한 주인의 발길질에 낑낑거리는 개처럼 머리를 싸안고 뜨거운 닭똥같은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한 장 더 돌리라 카는데 와 안 주노.”
“성구가 스톱했다 아이가.”
갑작스런 소리는 안방까지 들려 당장 우리는 드러난 명백한 증거에 그만 불을 끄고 사이좋게 그 시간에 자야했는데, 그 때 시간이 밤 열 한 시로 잠이 올리 만무한 시간, 어두운 창으로 밝은 달빛은 고즈넉이 흘러들어오고 방광에 오줌은 꽉 찬 채, 챙피해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것보다 사나운 ‘베스’ 때문에 혼자 갈 수도 없고, 아마 오줌누러 나갈 수가 있었다면 그 날 밤 난 낑낑거리며 울다 잠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난 새벽마다 그 노인네와 마주쳤다. 웬만하면 인사를 해서 화해할 법도 한데 난 이상하게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며칠 뒤 그 노인네 없는 틈을 타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그 노인네는 등산오는 모든 여인네들을 제 마누라마냥 함부러 말을 한다며 고집쟁이고 버릇없는 노인네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던 터라 더더구나 말을 걸기가 싫었고 어디까지 가는가, 그 노인네는 내 눈앞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가를 지켜보기로 하고 계속 만나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하, 그러나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아닌가. 사업이 한 몇 달 지나고 나니 서울보다 형편이 잘 풀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고정적 수입과 아울러 순이익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니 시장은 마냥 커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책에도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유행처럼 서울로 뻗어올라 갈 수도 있는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자 난 기쁜 나머지 산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반갑습니다’ 등의 인사를 나누었다. 물론 그 노인네는 맨 끝자락에서 나의 이런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존심 강한 난 결국 내가 져야지 하는 심정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노인은 딴 생각을 하며 나라는 존재는 벌써 잊은 듯 인사를 받고도 딴 짓을 하는양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짓을 이리저리로 하는 등 ‘예’ 하며 그냥 올라가버리는 것이었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내리면서 난 그 노인네를 염두에 두지 않은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난 향기와 절교를 선언했다. 학교도 각자 따로 다녔으며, 늘 다니던 길도 외면한 채 향기가 보일만한 길은 숫제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좁은 동네라도 안 볼려면 얼마든지 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크나 작으나 소문을 먹고 사는 법, 향기와의 단절은 좁은 동네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아버지조차 “니, 향기하고 싸웠나? 자슥, 늘 인사를 잘 하더만 날 보면 요즘 슬슬 피하데.” 난 차마 노름하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는 챙피해서 말도 못꺼내고 그냥 “예.”라고 짧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 보고 지낸다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아주 극단적 방책인데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럴수록 늘 그 존재라는 그림자는 유령처럼 내 주변에 머물기 때문에 조금 지나면 금방 불편해지는 것은 말 할 수도 없고, 이후에는 내 존재조차 부정하는 정도의 정신상태로 몰고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참으로 기나긴 고통의 계곡으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국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다 우리는 결국 마주쳤다. 서로 피해 다닌다고 피해다녔는데 그것도 어느 맑은 날 차가 다니는 동네에서 가장 넓은 대로에서 그만 마주쳤던 것이다.
천성은 어쩔 수 없다는 것, 그래도 향기는 덩치값을 했다. 피해 모른 척 지나가는 내 팔을 어느새 뒤쫓아 왔는지 우악스럽게 붙들고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하는 것이다. 버릇없는 난 못 이기는 체 하며 사과를 받아주고 우리 사이는 다시 옛날처럼 복원되었다.
난 그 노인네에게 사과를 하고 온 날 기분이 이상했지만 뭔가 한시름 덜었다는 느낌이 들며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졌고, 천성대로 쓸데없는 곳에 너무 예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나이까지도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여전한 것에 쓴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제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다. 향기는 공부를 못해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계속 방황하다가 사회에서도 자리를 못 잡았고, 그 전에 대학에 번듯하게 입학한 나는 향기네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고, 학교 다닌다고 바쁘던 난 그와의 소식이 어느 순간 두절되었으며, 그리고 미국으로 시집간 누나에게 들어가 공부를 마쳤다는 것을 들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미국에 잘 적응했고, 원래 운동에 소질이 없던 향기였지만 그곳에서 골프를 배워 수준급의 경지에 다다랐고, 지금은 그곳에서 골프 용품구점을 하며 잘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까 난 인생에서 아직까지도 이기고 지는 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며 지금 돌이켜보면 난 향기에게 졌던 것이고, 그는 이겼던 것이다. 찬바람이 여전히 귓불을 때리는 일요일 아침 향기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