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한 세 가지 전제
(벧후 3:14-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들어가며
신구약 성경이 물론 적은 양은 아니라 해도 무수히 서로 다른 성경 해석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지난 이천 년의 역사에서 수 많은 해석들이 있었고 지금도 해석이 달라 다양한 교단들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각자 주어진 사명이 달라 그렇게 진행된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는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 등으로 인해 소위 영해(영적 해석)라는 것까지 난무하고 있는 오늘날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한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찬에게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를 위한 전제들을 살펴봅니다.
전제1. 기존의 가치관의 제거
철학의 한 분야인 해석학(hermeneutics)은 인간의 해석 행위에 전통이 개입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통이란 개인의 경험은 물론 사회적 역사적 경험들도 포함한 개념입니다. 이 전통이 바로 개개인의 해석 행위에 있어서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가치관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인간의 해석 행위는 이 가치관과 논리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논리력은 가치 중립적이어서 논리력의 개발과 향상은 모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고 정작 문제는 가치관 부분에서 일어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가치관을 계시하고 있는데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오류가 일어나게 되며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 보니 성경 해석이 제각각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즉 가치관이 먼저 제거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가치관, 이타적인 가치관, 공동체적인 가치관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치관은 그 대상만 다를 뿐 모두가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부모와 처자는 물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고 하시지요. 전혀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이 가진 가치관을 절대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나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말씀으로 해석해 기복적인 신앙을 갖게 되고, 이타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타인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휴머니즘적인 신앙을 갖게 되며, 공동체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윤리도덕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치관이 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독해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바로 이 부분이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하는 신비한 부분입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과정이지요. 이 과정이 진행되면 비로소 생존과 번영의 추구라는 우리의 가치관, 즉 성경을 보는 선입견이 사라지면서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관으로 인해 성경 해석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대한 오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면서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라고 해석하고, 이타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불쌍한 이웃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범을 보이시는 예수님이라고 해석하며, 공동체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에 주목한 소수의 제자들만 남고 먹을 것에 주목하는 대다수가 예수님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지요. 아래의 관련 구절을 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 6:63-7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이와 같이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치관은 성경 해석에서 심각한 왜곡을 불러일으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오병이어의 메시지인데 오히려 예수님을 배가 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정반대로 해석하지요. 가히 소경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셨지요. 이 자기 부인의 핵심은 생존과 번영의 포기이며 그 결과는 기존의 가치관의 제거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극한의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강림과 충만을 간구하여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게 되면서 올바른 성경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더욱 회개와 간구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전제2. 깨달음의 한계에 대한 인정
조직신학 구원론의 논쟁 중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의 논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인간을 선택하신 시점이 아담의 타락 이전이냐 아니면 타락 이후냐에 대한 논쟁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씀하셨으니 타락 전 선택이 맞을 듯 하지만 타락 전 선택이 맞다면 타락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 되고 인간의 모든 악도 하나님께 귀책이 되는 논리 상의 심각한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논리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물론 기도하며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만 욕심이 앞서다보면 위에 예로 든 논쟁처럼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깨달음을 끝내 허락하지 않으시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한계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제 깨닫지 못했던 것을 오늘 깨닫게 되는 일이 거듭되는 것이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언젠가는 깨닫게 되리라는 소망 위에서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추정이나 상상, 지레짐작은 금물입니다.
전제3. 비논리적인 신비한 해석에 대한 경계
성경은 존재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라는 신비의 극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신비한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 말씀인 것이지요. 따라서 성경 해석은 성경 안에서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비논리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성경 구절을 성경 66권 전체를 기반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해석들이 신비한 해석인 양 대접받는 경우들을 봅니다. 위험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나 해석은 애초에 참이냐 거짓이냐의 판단의 대상조차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며
올바른 성경 해석은 설교하는 지체 뿐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의 평생의 과제이고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각자의 성경 해석을 기반으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간구 그리고 논리력의 개발에도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실행하는 우리의 매일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