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 길따라 - 제주섬 꼬라.
‘꼬라’는 탑이나 절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도는 성스러운 일을 가리키는 티벳 말이다.
수미산을 도는 순례도 꼬라이다.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며 안하고는 사바세계를 떠날 수 없는 일인 꼬라.
부처님을 가슴에 품고 걸어서 또는 오체투지로 수미산을 우러르며 한 바퀴, 두 바퀴, 그렇게 도는 일을 ‘꼬라’라고 한다.
우리는 두모악, 한라산을 가슴에 품고 바람따라, 길따라 ‘제주섬 꼬라’를 했다.
이 육신을 끔직하게 아끼고 위하는 만큼 신심이 모자라 오체투지도, 일보 일배도, 삼보 일배도 못했지만 행복하게 걸었다.
어떤 날은 오십리길을, 어떤 날은 육십리 길을 걸었다.
지난해 12월 1일 조천 고관사를 출발하여 동으로 동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걸망에 김밥 한 줄, 작은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꼬마 감귤도 몇알 넣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두모악을 오른 편에두고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마농 밭담과 푸른 태평양을 배경으로 길게 둘러진 환해장성에 마음을 빼앗겨 일행은 저멀리 보내고 혼자 늘작늘작 걷기도 했다.
지붕은 다 날아가고 돌벽만 남은 오래된 초가집을 까치발로 넘겨다 보다 집과 함께 세월을 보냈을 집 주인의 흐린 시선에 가슴이 싸했다.
빈 가지가 넉넉한 폭낭에 카메라 초점 맞추려 애쓰며 바람을 맞고 비를 피하며 열 번의 월요일을 걸었다.
무슨 복에 이런 호사를 누리느냐고 내게 묻고 혼자 행복해 했다.
함께하는 이들에겐 복이 얼마나 많아서 이 섬에서 태어났느냐고 부러워하면서 걸었다.
제주섬이 고향임이 분명할 풀뜯는 망아지도 복덩어리로 보였다.
걷는 동안에도 순간 순간 변하는 햇살과 바람과 두모악을 보며 생각했다.
바람 잔 바당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숨비소리에 묻어나는 우리 할망 살아온 혼시상으로 누리는 오늘의 풍요와 복을.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에 서려있는 하루 저녁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기억하기도 싫은 아픔과 슬픔을.
절 오백 당 오백에 서린 기도와 참회를.
그리고 이 모두가 조합되어 제주섬을 성스러운 순례지로 만들었다고.
두모악은 대웅전 앞에 무심히 서있는 이끼낀 석탑이다.
제주섬은 무심한 석탑을 고요히 품고 있는 잘 늙은 아름다운 절집이다.
곱게 늙은 절집 구석 구석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듯이 그저 걷는 일만 하지는 못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감탄과 찬사에 함께하는 이들이 감탄 했다.
‘ 스님 눈에는 아니 예쁘고 아니 신기한 것이 어서 예! ’
어딘들 아름답지 않고 감탄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서도 열 번째로 걸은
길은 참으로 고운 길이다.
도두동에서 제주항까지의 바다 곁길로, 쌍동이처럼 나란히 붙은 별도봉과 사라봉을 올라 화북으로 내려와 환해장성을 옆으로 하고 삼양해수욕장을 거쳐 원당봉을 지나 신촌까지의 소박한 들길이다.
신촌에서 출발지이며 회향지인 고관사 까지는 평범한 신작로라 재기재기 걸었다.
원당봉에서 신촌까지의 들길은 넓혀지고 포장되는 공사중이였다.
이렇게 고운 길을 왜 그냥 두지 못하는가.
제주는 아직도 길 만들고 포장하는 일에 배가 고픈가 라는 아픈 소리로 아쉬워했다.
보기드믄, 귀한 들길을 무참히 없애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만행이다, 자연 학대다 하며 서운함을 토했다.
그렇게 걷다가 문득 이 길이 나의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처럼 아득한 전생부터 지금껏 그리워하던 일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련한 가슴저림으로 알아차린 천년 전 쯤부터 걷기 시작하여 이제서야 할일을 마친듯한 후련함.
제주섬 꼬라를 마치고 나니 이제 어느것도 그립지 않다.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
그리움의 끝이다.
오래된 미래는 끝이다.
오래된 미래는 다시 시작된다.
이제 새로운 시절인연을 만들어 걸어야 겠다.
함께 하는 누구라도 도반이 되어 걸어야겠다.
긴 행선行禪으로 천천히, 꾸준히 걸을것이다.
비가오면 잠시 비 긋고 바람불면 옷깃 여미고 쉼없이 걸을 것이다.
제주섬을 사랑하는 누구라도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나를 태어나게하고 뼈를 굵게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두모악을 소중하게 살펴야 할 일이다.
두모악을 가슴에 품고 숨비소리 들리는 바당을 옆에 끼고 한 걸음씩 걷자. 진하게 풍기는 마농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두발로, 온 몸으로 느껴며 걷자.
호다 호다 맹심허멍 걸어 목숨같은 제주섬 꼬라를 하자.
아니하면 그리움으로 제주섬을 떠나지 못 할 것이다.
서러움으로 사바세계를 떠나지 못 하리라.
첫댓글 스님!!! 제주분이꽈? 진한 제줏말로 글쓰난 막 가슴에 화~확 왐수다...."호다 호다 맹심허멍 걸어 목숨같은 제주섬 꼬라를 하자. 아니하면 그리움으로 제주섬을 떠나지 못 할 것이다. 서러움으로 사바세계를 떠나지 못 하리라". ... 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