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이씨 시조묘와 퇴계선생
*진성 이씨 시조와 번성[네이버 지식에서 발취한 사실]
진성이씨는 이석(李碩)을 시조로 한다.
진성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현(현 진성)에 살았기 때문이다. 진성이씨의 조상들은 이 고을의 아전(고려시대의 아전은 높은 관직임.)이었다고 한다. 대대로 아전 직을 이어오다가 고려 말 이석이 학문에 뜻을 세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해 가문을 새 출발시켰다.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忠肅王) 때 명서업(明書業,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과거)에 급제, 나중 홍건적토벌에 공을 세우고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지며 벼슬이 판전의사사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진성이씨의 기틀은 고려 말 이자수에 의해 싹이 트고 조선시대 퇴계(退溪) 이황(李晃)에 이르러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학문의 가문답게 문집등 저술을 남긴 학자만도 조선시대에 50여명을 헤아리며 5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한국의 지성(知性)을 대표하는 명문이다.
퇴계 이황은 시조 이석의 6대손으로 1501년 안동 도산면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막내로 태어나서 1571년 문묘에 배향될 때까지 그의 70년 일생은 성(誠)과 경(敬)으로 성인(聖人)을 추구해간 구도와 정진의 나날이었다.
34살에 문과 급제했고 그 학문과 인격이 나라 안을 감화시켜 대제학, 예조판서,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높은 벼슬도 했으나, 그보다는 학문과 자기수양에 뜻이 있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안동 도산면에 돌아가 연구와 저술, 후진 지도에 몸 바쳤다.
퇴계는 당시의 학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주자학(성리학)을 쫓았다. 그러나 연구와 실천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을 재정리하고 발전시켜 퇴계학으로 정립했다.
퇴계의 형인 이해는 인종때 예조참판, 대사헌에 올랐고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가 퇴계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진성 이씨 시조묘[감람묘]의 전설 [내가 어릴 때부터 들은 설화]
'옛날에 퇴계 선생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을 때, 풍수에 밝은 원님이 오셨단다. 그리고 아전인 5대조를 대동하고 이 고을 저 고을로 산천을 둘러보다가 감람골[청송군.파천면.신기리]의 지세를 눈여겨보고 돌아와 아전에게 말하기를 "달걀을 가지고 가서 봉우리 위에 파묻고 자시(子時)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고 하였단다.
그는 사또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정말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이인임을 안 아전은 그만 명당자리가 탐이 났단다. 다른 생각을 품은 그는 일부러 썩은 달걀을 묻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다음날 그 곳을 찾아간 사또는 썩은 달걀을 파내어 보면서 ‘그럴 리가 없는 데....,’고개를 젓고는 그 일을 잊어버리더란다. 그러다가 임기가 끝난 사또는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단다.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가 훗날 아전은 부친상을 당하여 시신을 그 산 그 자리에 안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관을 묻고 돌아서며 관이 땅 위로 솟아오르더란다. 아무리 깊이 파고 다시 묻어도 자꾸만 관이 땅 밖으로 튀어나왔단다.
그때야 잘못을 느낀 아전은 급기야 한양으로 옛 원님 집을 찾아가 멍석을 깔고 옛사또가 퇴청할 때까지 석고대죄 청하였단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던 옛 원님이 아전의 -여차하고 여차저차하여........- 죽을죄를 지었다고 이실직고를 하였다.
듣고 있던 사또는 ‘그러면 그렇지.......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거늘 이것도 인연인가’.
사또는 자기가 입었던 헌 관복을 내어주며"그 터는 대인이 묻힐 곳이니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묻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더란다.
백배 감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의 장례를 치루니 과연 아무런 탈이 없는지라, 그 일이 있은 후 진보에서는 행세하기 어렵다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안동으로 이거하였다. 명당의 음덕인지는 몰라도 당대에 발복을 받아 본인은 안사공신 송안군이 되었고, 6대만에 퇴계 선생 같은 훌륭한 대학자가 태어나게 되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