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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도
2. 개요
3. 코스가이드
4. 주변의 문화유적 및 명소
(1) 안양산 자연휴양림
(2) 충장사
(3) 환벽당
(4) 취가정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 장군은 어느 날 석주 권필(1569~1612)의 꿈에 나타나 이 한 맺힌 노래 「취시가」를 불렀다. 꿈 속에서 권필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天命)을 어찌하리……."
(5) 식영정
(6) 소쇄원
(7) 독수정
(8) 송강정
무등산(無等山)-.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길래야 매길 수 없다는 뜻이 무등(無等)이다. 그렇다고 무등산은 결코 위압적이지도 거칠지도 않다.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호남 들녘에 솟은 달덩이처럼 넉넉한 인상을 풍기는 산이다.
화순과 광주, 담양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무등산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그저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파고들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큰골이 여럿 패어 있다. 북으로 꼬막재를 거쳐 덕봉산(422m)으로 이어지는 북동릉, 서석대에서 중봉~늦재~배재를 거쳐 북북서 방향으로 뻗는 능선, 장불재에서 안양산을 거쳐 화순읍내로 떨어지는 남동릉인 백마능선, 역시 장불재에서 만연산 또는 지장산으로 뻗는 능선 등, 무등산은 북봉~천왕봉~장불재 능선을 척추 삼아 사방팔방으로 곁가지를 뻗고 있다. 이들 여러 능선 사이로 깊게 패어든 계곡도 여럿이다. 중심사계곡, 동조골, 큰골, 용추계곡, 곰적골, 원효계곡, 석곡계곡 등 계곡마다 폭포와 암반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무진악, 서석산, 무당산, 무덤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온 무등산이 아름답다고 격찬되는 이유는 육산이면서도 산등성이 곳곳에 기암괴봉을 얹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천왕봉 동남쪽의 규봉(圭峰)과 남쪽의 입석(立石)과 서석(瑞石) 세 암봉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경이다. 장불재 북쪽 약 800m 지점에 솟아 있는 서석은 저녁 노을이 물들 때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하여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 일컬어지고, 장불재 북동쪽 약 400m지점에서 위치한 입석대는 선돌을 수백 개 모아놓은 듯 오묘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특히 입석대는 옛날부터 제천단(祭天壇)으로서 가뭄이나 전염병이 극심할 때 제를 지내던 신령스런 곳이다. 천왕봉 남동쪽에 위치한 규봉도 오묘하기는 마찬가지. 규봉암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규봉은 세 개가 솟아 있다 하여 삼존석(三尊石)이라 불리기도 한다. 삼존석은 여래불(如來佛), 관음불(觀音佛), 미륵불(彌勒佛)을 일컫는다.
무등산 정상부는 '정상 3대'라 불리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개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왕봉은 최고봉답게 순창뿐만 아니라 광주, 담양, 영암, 나주 등 호남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고, 비로봉이라고도 불리는 지왕봉은 꼭대기의 뜀바위가 김덕령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임진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뜀바위를 건너뛰곤 했다고 전한다. 반야봉이라고도 불리는 인왕봉은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낮은 봉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무등산은 예부터 시인묵객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왔다. 육당 최남선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금강산에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비길 경승이 없으며 특히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의 한 쪽을 산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고 찬탄했고 노상 이은상은 그의 '무등산기행'에서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고 하면 해금강을 본 이는 짐작할 것이다. 돌이 돌이라 부르지 않고 서석이라 부르는 것은 예찬의 뜻이 벌써 거기를 표한 것이지만 나는 그 예찬을 과하게 보려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부조하게 보고까지 싶다.'고 격찬하였다.
한국온대아구(韓國溫帶亞區) 남부의 식물구계(區系)에 속하는 식물들이 고루 분포해 있는 무등산은 철마다 새롭게 변한다. 용추계곡과 원효계곡에 진달래꽃이 피면서 봄이 시작되어 장불재에서 규봉암 가는 산길에 철쭉꽃이 피면서 여름이 다가온다. 이어 한여름에는 산등성이 초원에 산나리가 꽃밭을 이루다가 산기슭의 단풍과 산등성이의 억새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가을을 맞는다. 겨울에는 나뭇가지마다 빙화(氷花)가 피어나면서 무등산은 또 한번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1972년 전라남도가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무등산의 이러한 아름다운 산세는 남도 문학을 화려하게 꽃피우는 데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산 북쪽 기슭의 지실 마을에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환벽당(環碧當)과 식영정(息影亭)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공부하고 시가를 읊은 곳이다. 또한 그 부근에는 조선시대 민간정원의 전형이라 일컬어지는 소쇄원(瀟灑園)을 비롯해 독수정(獨守亭), 취가정(醉歌亭), 풍암정(楓岩亭) 등 시인묵객들이 시심을 풀어놓곤 했던 정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무등산은 시인묵객들의 보금자리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고려 말 명장 정지(鄭地) 장군을 모신 경열사와 묘역, 임진란 때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 선생의 발자취, 간신의 모함으로 29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충장공 김덕령 장구의 사우 충장사, 해광 송제민 선생의 묘비와 제각, 정묘호란 때 충신 전상의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忠愍祠) 등 순국선열들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많이 있어 가히 문무를 겸비한 산이라 할 만하다.
무등산은 수박과 춘설차라는 명물로도 소문이 자자하다. 수박 하나가 장정의 지게 바구니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크다는 무등산 수박은 여름과일이 끝날 무렵인 8월 중순경부터 나오는데 크기로나 맛으로나 수박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또한 증심사 입구 왼쪽 비탈에 위치한 차밭은 넓이가 3만여 평으로 광복 후 남화산수(南畵山水)의 대가인 의제(毅霽) 허백련(許百鍊) 화백이 이 차밭을 맡아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 부르고 춘설이란 이름도 붙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녹차와 홍차를 생산하는데 4월 하순 곡우에서 5월 초 입하 사이에 따낸 첫순으로 만든 작설차를 맛과 향에서 으뜸으로 친다.
무등산은 여러 시군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산을 넘나든 흔적이 많이 있다. 때문에 중머리재, 바람재, 꾀재 등 이름을 지닌 고개도 여럿이고 등산로 역시 이들 고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 뻗어 있다.
화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고개는 중머리재로 특히 동복 주민들이 많이 넘나들던 고개다. 중머리재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고갯마루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마치 중의 머리를 연상케 한다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화순군과 광주시 경계를 이룬 장불재는 옛날 큰골 위에 있는 고개라 하여 장골재라 불리던 것이 부근에 장불사(長佛寺)가 생기면서 장불재로 바뀌었다 한다. 장원봉과 중군봉 사이 고개는 옛날 이 일대에 잣나무 또는 까치가 하도 많다 하여 잣고개 또는 작고개라 불렸지만, '자'라는 말이 조선시대 고어로는 성(城)을 뜻하는 말이었기에 성치(城峙)가 원래 의름이라고 한다. 또한 무등산장과 규봉암 사이에 있는 꼬막재는 고갯마루에 꼬막 크기만한 돌멩이들이 하도 많이 깔려 있어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광주시내쪽은 등산로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가닥 나 있어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등산인들이 많이 찾아 평일 휴일 가릴 것 없이 붐비는 반면 화순쪽은 대도시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교통이 불편한 까닭에 상대적으로 찾는이가 적기 때문에 한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화순 방면의 등산로로는 안양산자연휴양림, 만연사, 수만리 기점 코스를 들 수 있다.
무등산 정상부는 입석대·서석대·규봉 3대 석경과 함께 1966년 7월부터 완전 통제되었다가 1985년 장불재~규봉간 등산로에 이어 1990년 서석대와 입석대 일원이 개방되었으나 정상부는 아직까지 통제되고 있다. 정상부는 올 5월까지 군시설물로 훼손된 지역을 복원한 다음 개방할 계획이다.
안양산자연휴양림은 장불재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백마능선의 막내격인 안양산 끝자락에 위치한 사설 자연휴양림으로 산행 역시 안양산~백마능선~장불재로 이어진다. 길은 단순하게 한 갈래로 이어져 어려움은 없다.
휴양림의 출렁다리 앞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팻말이 보여 쉽게 등산로 입구를 알 수 있다. 숲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별다른 굴곡이나 특징이 없는 숲길을 벗어나면 간혹 미끄러운 구간이 나타나지만 밧줄이 설치돼 있어 쉽게 통과할 수 있다. 30분 정도 오르면 숲지대를 벗어나고 비교적 완만한 억새밭을 지나 안양산 정상에 선다.
안양산에서 장불재로 연결된 백마능선은 무등산을 한눈에 바라보며 초원 또는 억새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코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능선을 따라 등산로가 빤히 보이고 곳곳에 표지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중간에 만나는 남서쪽의 샛길은 주말농장가든으로 내려서는 길이다.
만연사~선정암~농장~중머리재 코스도 요즘 들어 등산인들의 발길이 잦다. 화순읍에서 만연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거리. 만연사 입구에서 왼쪽 계곡을 건너 산길을 따르면 선정암이 나오고 이후 만연산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간다. 장불재에서 너릿재로 이어지는 능선 중간쯤을 따라 옆으로 빙 돌면 농장이 나오고 여기서 비스듬히 돌아가다 용추계곡 상류를 건너면 중머리재에 닿는다(약 2시간 소요). 화순읍에서 만연사까지는 대중교통편이 없어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수만리 코스는 만수 마을 버스종점에서 농장과 용추폭포를 거쳐 중머리재로 오르는 등산로다. 교통이 조금 불편하지만 화순 주민들이 즐겨 오르는 코스로 특히 용추계곡과 용추폭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지만, 91년부터 자연휴식제로 묶여 있다. 화순읍 버스터미널에서 만수동까지는 군내버스가 다니고 있다.
광주쪽 등산로는 크게 원효사 집단시설지구, 증심사 집단시설지구, 지산유원지 등으로 기점을 나눌 수 있다. 원효사 집단시설지구 기점 코스는 경관이 뛰어나고 원효계곡 주변에 조선조 정자문화의 유적이 산재해 있어 산악인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원효사 기점 코스 가운데는 집단시설지구~오성원~꼬막재~규봉암~장불재~군통제소~늦재~집단시설지구로 잇는 무등산 일주코스가 가장 긴 코스(약 16.5km)로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3대 기암과 화순과 담양의 드넓은 벌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코스다. 늦재에서 중머리재를 거쳐 증심사, 바람재, 새인봉, 용추계곡 방향으로도 내려설 수 있다.
증심사 기점코스로서는 집단시설지구~증심사~대피소~중머리재~용추삼거리~장불재~입석대~서석대~장불재~규봉암~신선대 삼거리~꼬막재~오성원~원효사 집단시설지구 코스(6시간 소요)를 가장 긴 코스로 꼽을 수 있다. 총길이가 약 16km로 6시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코스를 바꿀 수 있다.
집단시설지구에서 증심사로 향하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북동쪽) 산길로 접어들면 바람재나 토끼봉으로 오른다. 바람재에서 서쪽 능선을 따르면 향로봉을 거쳐 지산유원지 또는 흥룡사로 내려선다. 또한 증심사 바로 못미처 도로변에서 오른쪽(남쪽) 산길을 따르면 얏사사를 지나 새인봉 또는 중머리재로 향할 수 있다. 새인봉은 광주 일원의 클라이머들에게 암벽훈련장으로 널리 알려진 암봉으로 전망이 뛰어나 탐방객들도 많이 찾는다.
지산유원지 기점으로는 유원지~깨재~향로봉~바람재~늦재~원효사 집단시설지구 코스(2시간 30분 소요)를 대표적인 코스로 꼽을 수 있다.
화순군 이서면 안심리, 안양산 남동릉 끝자락에 위치한 안양산 자연휴양림은 숲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곳이다. 특히 삼림욕에 효과가 뛰어난 편백나무, 삼나무가 주요 수종으로 40년생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편백나무 잎은 모기약의 원료. 때문에 이곳은 여름철 모기에 시달리는 일 없이 상쾌한 숲속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휴양림은 지난 61년부터 숲을 가꾸어온 진재량씨가 건림, 97년 7월 개장한 것이다. 총 20여만 평의 휴양림 안에는 300명 수용이 가능한 편백나무연수원과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단체산막 4동이 들어서 있다. 침구와 취사시설, 식기류까지 완비돼 있는 5동의 가족단위 산막도 있다. 이 밖에 식당·매점 등의 편의시설과 썰매장, 수영장, 야외무대, 놀이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입장료는 대인 1,000원, 어린이 800원. 주차료는 1일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 시설물 사용료는 야영장 1,000원, 텐트 대여 15,000원, 산막 1동당 60,000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대장이였던 김덕령 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다.
김덕령(1567~1596)은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형인 덕홍과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담양 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크게 활약했으므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이라는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그후 다시 선조로부터 초승(超乘)장군 군호를 받았다. 나중에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이 충용군에 소속되자 그는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지역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에 선조 29년(1596) 7월 홍산(지금의 부여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으로 난을 진압하러 가다가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는데,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옥에 갇힌 지 20일, 그는 혹독한 고문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한편 그의 형은 금산전투에서 고경명과 함께 전사했고, 그의 아내 이씨도 그가 죽은 다음해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담양 추월산에서 순절했다.
그가 죽은 후 현종2년(1661)에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고, 현종9년(1668)에는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숙종7년(1681)에는 병조판서, 정조12년(1788)에는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정조는 그에게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지어 배향하도록 했다. 헌종8년(1842)에는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을 석저촌에서 충효리로 바꾸도록 하고 표리비를 내렸다. 이 비는 충효동 마을 앞에 있는 정려비각(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 안에 있다.
취가정에서 마을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환벽당이 있다. 바로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과 마주보는 곳이다. 예전에 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서하당 주인 김성원은 창계천 위에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윤제는 광주에서 태어나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나주 목사로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왔다. 환벽당은 그가 집 뒤에 지은 별당으로, 그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후진을 키웠다. 그러나 이곳은 송강 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서 송강정,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집 아래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가 잠을 깨고 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 소년이 바로 정철이었다. 그때 정철은 식영정 옆 지실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순천 처가에 가 있는 형 정소를 만나러 가던 길에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윤제는 이런 인연으로 만난 정철을 환벽당에서 지내게 하면서 공부를 시키고 외손녀 사위로 삼았으며, 관계로 나아갈 때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정철은 이곳에서 머물며 기대승, 김인후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여러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는 「성산별곡」에는 환벽당 주변의 산수경관이 담겨 있다.
환벽당은 비스듬한 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쌓고 지은 남향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서쪽 2칸이 방이며 그 앞에 반 칸짜리 툇마루가 깔려 있다. 원래는 정각 형태였는데 후대에 중건할 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집 마루에서는 남쪽의 무등산과 창계천이 잘 내려다보인다. 원래 푸른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환벽당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대숲은 없고 집 뒤 비탈과 앞쪽 축대 아래의 커다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집 뒤에는 왕벚나무가 있고, 옆에는 모과나무가 있으며, 또 축대 아래에 느티나무와 벽오동나무 들이 있다.
축대 아래에는 세 단으로 된 화계(花階)가 있고 그 밑에 네모진 연못이 있다. 그것들은 환벽당 마루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 있고 또 그 아래 넓은 터가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던 곳이니, 별당인 환벽당의 뜰이 아니라 본채에 딸린 후원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편 환벽당 아래 창계천가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김윤제가 그의 손님들이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釣臺)인데, 지금은 그 위에 기념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지금도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져 있어서 조대쌍송(釣臺雙松)을 노래했던 옛사람들의 흥취를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건너편을 보면 별뫼 봉우리가 삿갓처럼 볼록하게 보인다. 조대 앞이 바로 정철이 목욕하다가 김윤제를 만났다는 용소이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김덕령은 무등산 아래 석저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부구 충효동)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았다. 지금도 무등산 곳곳에는 그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했는데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옥사했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정자로, 정자의 이름은 권필의 꿈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큰 나무들이 서 있는 동그란 언덕에, 자미탄을 뒤로 하고 외따로 떨어져 자리잡았다. 부근의 정자들이 주로 자미탄을 내려다보는 데 비해, 취가정은 널리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고 있다.
앞쪽의 시원한 들판과 언덕 위로 부는 바람, 정자 앞의 '춤추는' 소나무가 좋았는데, 아쉽게도 근래에 소나무 한쪽 팔이 부러져 버렸다.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은 창계천(창암천)으로 흐른다가 광주호에 잠시 머문다. 광주호는 영산강 유역 개발사업의 하나로 광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인데, 신작로나 댐이 생기기 전에 창계천가에는 배로안무가 줄지어 서서 여름 내내 붉은 꽃구름을 이루었다. 그래서 창계천의 옛 이름은 자미탄이었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이다.
송강 정철이 살던 지실마을이 있고, 또 별뫼(성산)가 있는 자미탄 이쪽 저쪽으로는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 등 누정문학의 본고장을 일구었던 유적이 흩어져 있다.
그중 식영정은 성산의 한끝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곰실곰실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섰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며 그 건너로 무등산이 언제나 듬직하게 바라다보인다. 정면 2칸 측면 2칸 정자에는 한 칸 반짜리 방이 있고 또 당연히 너른 마루가 있다.
명종 15년(1560), 지금 식영정이 있는 곳 아래쪽에 서하당을 세우고 지내던 김성원(1525~1597)은 새로 이 정자를 지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에게 드렸다. 임억령은 해남 출신으로 152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을사사화가 나던 1545년에 동생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선비들을 추방하자 그는 자책을 느끼고 금산 군수직에서 물러나 해남에 은거했다. 나중에 다시 등용된 후 1557년에는 담양 부사가 되었다. 임억령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했으며 시와 문장에 탁월했지만 관리로 일하기에ㅔ는 부적당하다고 당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런 임억령인지라 정자 이름을 짓는 데도 역시 시인다운 남다름이 있었다. 식영정이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아무 맥락을 모르고 그 이름만 듣더라도 가슴이 흥건해지는데, 그가 쓴 「식영정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정자』에 나온,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사람 이야기를 말하고 나서) 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 그러는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 그러니 식영이라고 이름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그림자는 내버려두고 그 이전의 경지에서 조화옹과 더불어 노닌다.'는 이 유래를 알고 보면,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그저 서정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주인을 찾아, 이곳에는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그중에서도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들은 식영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풍경들을 시제로 하여 수많은 시를 남겼다. 그러나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송강의 「성산별곡」이다. 「성산별곡」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 주변의 풍경과 그 속에서 노니는 서하당 식영정 주인 김성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식영정 뒤편에는 배롱나무 서너 그루가 있어서 이제는 사라진 자미탄의 모습을 그려 보게 한다. 임억령은 "누가 가장 아끼던 것을 산 아래 시내에다 심었나 보다"라고 자미탄을 노래했다. 뒤편 공간에는 누가 썼는지 무덤이 하나 있는데, 그 뒤로 멀찍이 물러서서 식영정의 뒷모습 너머 붕 떠오르는 듯한 무등산 정상을 바라보노라면 따로 말이 필요없다.
식영정에서 내려와 왼편 안쪽으로 보이는 부용당은 1972년에 지어진 것이고, 그 뒤에는 김성원이 거처하던 서하당 자리가 있다. 또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는 마치 '백억 불 수출의 탑'을 연상시키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기념석물이 있다. 식영정 옆의 잘생긴 소나무를 딱 가리고 선 우람한 성산별곡 시비와 함께, '주화를 깨뜨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잊은 우리 시대를 증거하는 듯하다.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리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이다.
소쇄원은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1503~1557)의 별서정원(別墅庭苑)이다. 별서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되는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한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임천(林泉) 속의 별장이라고 할 것이다.
양산보는 양사원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쇄원이 있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는 창암촌이라고도 불렸는데, 창암(蒼岩)은 양사원의 호였다. 고향에서 지냈던 양산보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로 가서 조광조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17세 되던 중종 14년(1519)에는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조광조가 신진 사류를 등용하고자 실시했던 천량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바로 그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스승을 따라 능주로 갔던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55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의 자연에 묻혀 처사(處士)로 지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30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40대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면앙정을 지었던 송순과 김인후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양산보는 소년 시절에 마을 뒤의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를 따라서 지금 소쇄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언젠가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소쇄'(瀟灑)라는 말은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온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 양산보는 그 뜻을 따서 정원의 이름을 붙이고 그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기의 호를 소쇄옹이라 했다.
소쇄원은 멀리 남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업고 남쪽으로 슬슬 흘러내린 산비탈에 자리잡았다. 이 정원을 이룰 당시 차암촌은 제주 양씨들의 씨족 마을이었으니 소쇄원은 후원적 성격을 띠었다. 뒤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폭포와 작은 소를 만들며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른 후 대숲으로 빠져나가 창계천으로 합류한다. 계곡물 양쪽 비탈에 축대를 쌓아 꽃계단을 만들고 정자들을 올렸으며, 동쪽과 북쪽, 서쪽 일부에 직선 담을 두르고 남쪽은 틔워놓았다. 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는, 짚으로 이은 정자가 대봉대이고 왼쪽으로 계곡건너에 있는 것이 광풍각, 그 뒤로 서너 단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제월당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를 뜰로 삼으면서 꼭 필요한 곳에 인공을 가했던 조선 시대 정원에서는 이러한 인공적 축조물이 아니라 터전 전체가 종합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건축물들은 그 전체를 가장 살리고 누릴 수 있는 위치에서 전체 경관의 일부로 녹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실상 소쇄원은 찻길을 벗어나며 바로 이어지는 대밭에서부터 시작된다. 햇빛이 얼금얼금 무늬를 만들며 스며드는 대숲 사이로 계곡물이 흘러나오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숲은 들어가는 길 좌우로 빽빽이 이어지며 서늘한 바람을 일군다. 대숲이 끝나가면 앞쪽으로 담장과 대봉대가 보인다. 딴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 봉황처럼 소중한 손을 기다려 맞는다는 다정한 뜻이 담긴 곳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예전에는 곁에 오동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다.
대봉대 아래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입구 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조금 더 큰 연못이 있다. 나무 속을 파낸 흠대와 도랑을 타고 온 계곡물은 먼저 작은 못을 채우고, 그 물이 넘치면 다시 도랑을 따라 큰 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큰 못에서도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진다. 영조 31년(1755)에 만들어진 「소쇄원도」목판에는 두 못에 물고기가 놀고 못가에 물풀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못을 연결하는 도랑 중간에는 물레방아가 있어서 계곡으로 물을 날리며 시원한 물소리를 보탰다.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담에는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 있다.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 48가지를 노래한 「소쇄원 사십팔영」가운데 '애양단의 겨울낮'에서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노래했다. 양산보는 평소 도연명을 존경했다고 한다. 도연명이 했던 대로 그도 동쪽 담 아래에 국화를 심었을까? 역시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가운데는 동쪽 울타리 아래 점점이 핀 황국이 늦가을의 풍상과 잘도 어울린다는 대목이 있다.
애양단을 지나면서 담은 ㄱ자로 꺾인다. 그 담에 또 오곡문(五曲門)이라 새긴 판이 박혀 있다. 그 옆에는 담 밑에 구멍이 뚫여서 그리로 물이 흘러들도록 되어 있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죽 이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이다. 오곡문이란 담 아래 터진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수구 옆에 일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트여 있다.
소쇄원에 들어온 사람은 이곳에서 외나무다리로 계류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구부정한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을 바라보기 딱 좋을 위치에 걸터앉을 만한 바위도 있다. 담 밑으로 들어온 물은 굽이를 이루고 폭포를 이루며 정원 가운데로 흘러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나무 홈대에 이끌려 대봉대 아래 연못으로 간다.
다리를 건너면 두 단으로 된 꽃계단을 만난다. 이 같은 단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매대(梅臺)라 불렀다.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는 송시열 글씨의 글자판이 박혀 있다. 매대 앞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옛적 선비들이 앉아 즐기던 너럭바위를 지나 광풍각이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왼쪽에 치우쳐서 1칸 방이 있고, 나머지 2칸은 마루로 트여 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 이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시선이 광풍각 지붕 너머로 쭉 뻗다가 앞산에 가 닿는다. 「소쇄원도」에는 제월당 왼쪽 앞에 파초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은 그 자리쯤에 석류나무가 있다. 예전에 제월당 왼편 담 밖에 양산보의 아들들이 사랑채 겸 서재로 쓰고 고암정사와 부훤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월당이 주인의 사생활적인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공간을 나누어 주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 광풍각에서는 주로 물의 흐름과 폭포, 바위에 부딪는 물방울, 맞은 편에 있던 물레방아의 정취와 물소리 등 수경을 즐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광풍각의 처음 이름은 침계문방(枕溪文房) 또는 계당(溪堂)이었다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들였고 빙 둘러 가며 마루를 깔았다. 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 단 높게 달려 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 물론 방문은 여름에는 모두 들어 열도록 되어 있다.
요즘 광풍각 방 뒷벽에 「소쇄원도」목판을 복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요모조모 뜯어 보며 지금의 모습에 예전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도 재미있다. 광풍각에서 오른편으로 비낀 뒤쪽 단 위에는 복숭아나무를 심고 무릉도원의 풍류를 맛보도록 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 제월당과 광풍각의 현판 글씨는 이 지역 대부분의 현판 글씨와 마찬가지로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다. 제월당이니 광풍각이니 하는 이름도 송나라 사람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고경명, 김인후, 송순, 정철, 김성원, 기대승, 백광훈, 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 선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이 남긴 여러 시문 가운데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과 앞에서 나온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에 소쇄원의 옛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소쇄원 안의 바위 하나, 물굽이 하나에도 따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주는 감흥을 만끽했다.
소쇄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고들 말한다. 그 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더듬다 보면, 함부로 손대는 것을 아꼈을 뿐이지 어디 한 군데도 배려하지 않은 구석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계곡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자연 경관을 고루 경험하도록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적당히 걷다가 멈출 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눈 줄 곳, 또 앉을 곳 등 모든 것이 세심하고 철저하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란 엉성한 자연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완벽한 배려와 애정 속에 인공을 가함으로써 오는 자연과의 동화일 것이다.
양산보는 자기의 마음이 샅샅이 닿은 이 정원을 매우 아껴서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고 유언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이 조선 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비교적 원형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쇄원은 1983년에 사적 제 304호로 지정되었다.
소쇄원에서 나와 북쪽으로 더 들어가면 담양군 남면 연천리이다. 남면 면소재지인 이곳 산음동 산기슭에 독수정이 있다. 광주호 주변에 밀집한 정자들이 16세기 호남 사림의 문화활동의 터전이었던 데 비해 이 정자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북쪽으로 뻗어나간 무등산의 한 자락,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언덕에 숨듯이 자리잡은 독수정은 조선 초기에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이 처음 세운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은 조선이 들어서자 서울에서 먼 곳으로 와서 송도가 있는 북쪽을 향해 정자를 짓고 숨어 살았다. 그는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아침마다 조복을 입고 송도를 향해 곡하며 절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 가운데는 한 칸짜리 방이 있고 마루에 앉으면 정면 나무들 사이로 무등산이 내다보인다. 독수정 입구 계천가의 소나무 숲에는 돌단을 쌓은 송대가 있으면 전신민이 이곳에서 낚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독수정이라는 이름은 이백의 시구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에서 따온 말이다. 독수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 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면앙정을 나와 15번 국도를 타고 고서사거리 쪽으로 향하다 보면 유산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유산교 건너 오른쪽 언덕 위, 중키의 소나무들 사이로 정자 지붕이 힐끗 보인다. 조선 시대 시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의 행적이 어린 송강정이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 진영에 속했던 정철은 49세 되던 해인 선조 17년(1584),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냈다. 그는 다시 우의정이 되어 조정으로 나아가기까지 4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겼다.
그 후 200여 년이 지나,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져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 총총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철의 후손들이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는 영조 46년(1770)에 다시 정자를 지었다. 당시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이 터를 죽록정이 있던 자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송강이라 하기도 한다)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정자도 오래 전부터 죽록정이라 불러 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로 되어 있다.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이제는 찻길 모퉁이 언덕이 되어 옛 정자의 기분을 그대로 맛볼 수는 없지만, 마루에 앉으면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가 아쉬운 대로 사각사각 들린다.
정철이 담양 창평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나중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지내던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열 살 먹던 해(명종 즉 위년, 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났다. 계Flarns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베되었고 정철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여섯 살 먹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땅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의 자질을 흠뻑 길렀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었다.
명종 16년(1561)에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시작된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 즉위 이후, 시대적 분위기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수찬·좌랑·종사관 등을 지냈다가 40세 때 당쟁에서 밀려 낙향, 43세에 다시 조정에 나가 직제학·승지 등을 지내다가 동인의 탄핵으로 다시 낙향,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도승지·함경도 관찰사·예조판서로 승진, 49세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낙향하여 4년간 송강정에 은거, 54세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동인 세력을 철저히 추방, 다음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경기·충청·전라 체찰사,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 송정촌에서 쓸쓸히 살다가 58세로 죽음……. 마루에서 골로, 골에서 마루로 치솟고 다시 처박히기를 거듭한 그의 역정을 좇노라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동서 붕당으로 갈려 치고 받던 시절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할 말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하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친우권귀(親友權貴)라도 조금도 용서함이 없어 화를 산같이 입더라도 앞장서 싸우기를 불사하던 정철의 성격상, 정치가로서 그의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천상 시인이었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도 물론이지만 싸움에서 밀릴 때마다 자기를 키운 담양 창평으로 돌아와 왕에 대한 그리움, 자연에 대한 찬탄, 고요한 생활에 대한 동경 등을 토로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깊이 했다. 평생 권력을 추구하며 정적들에게 매서운 칼날을 들이댄 정치가와 가장 다감한 시인이 한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이다.
"…… 숨어 살 계획 이미 정해져/세모엔 내 장차 떠나가리라/항상 원하기는 물고기 되어/깊은 물밑에 잠기고 싶다……."라고 노래한 시인 정철과 '성격이 편협하고 도량이 좁아 일을 그르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성질 급한 정치가 정철을 오버랩시키면, 피가 몹시 뜨거운 한 사람의 윤곽이 떠오른다.
송강정은 식영정, 환벽당과 더불어 정송강 유적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