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순창 강천산
단풍의 남하속도는 하루 25㎞. 봄꽃의 북상 속도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10월 중순에 설악을 물들인 단풍은 11월쯤 월출산에 도착한다. 하루 60리 꼴, 옛날 날쌘 장정이 하루 100리를 걸었다고 하니 자연의 속도와 사람의 속도는 비슷한 셈이다.
올 단풍의 작황은 신통찮다. 한참 색소를 만들어낼 시기인 8, 9월에 일조량이 30% 정도 줄었기 때문이다. 10월 말 기습적인 한파로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이 져버린 곳도 많다. 그러나 수종에 따라 풍흉이 다르고 어떤 단풍목은 일교차가 클 때에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고 한다. 강천산은 올 단풍이 유난히 고왔다. 일교차에 강한 당(唐)단풍, 내장단풍 같은 활엽수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 바위`폭포`유적지 등 잘 갖춘 테마산행지
버스가 순창에 접어들자 특산품인 고추장을 알리는 구호들이 먼저 시선을 끈다. ‘발효천국 장수고을’ ‘장류(醬類) 세계화’ ‘발효과학 스캔들’. 재치 있는 캐치프레이즈들이 외부인들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순창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추장이다. 너무 짜거나 맵지 않은데다 단맛까지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순창군은 2004년 순창읍 백산리 일대를 장류산업특구로 지정하고 전통 한옥마을로 꾸며 놓았다.
이 고추장 민속마을을 끼고 북쪽으로 직진하다 보면 완만한 능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산이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강천산이다. 강천산은 본래 용천산(龍天山)으로 불리다가 조선 중기 학자 송익필 선생의 ‘숙강천사’(宿剛泉寺) 시가 널리 알려진 후 강천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산세가 웅장하지는 않지만 바위, 폭포, 계곡, 호수, 유적지 등이 잘 갖춰져 역사 테마산행지로 꼽을 만하다. 이런 후광 덕에 1891년 우리나라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크고 작은 등산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매표소-병풍바위-구름다리-신선봉-광덕산-연대봉-송낙바위에서 강천호수로 내려오는 코스가 가장 인기가 좋고 산의 특징이 잘 집약되어 있다.
군립공원으로는 드물게 입장료(2,000원)를 받는다. 대단한 위용을 갖춘 강천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책로가 펼쳐진다. 제철을 살짝 지난 시점이지만 산책로를 따라 단풍은 여전히 곱다. 계곡에는 무지개 송어들이 천연색 단풍 사이를 한가롭게 유영하고 있다.
제일 먼저 병풍폭포가 일행을 맞는다. 얼핏 보기에도 30~40m는 되어 보이고 폭포수도 기운차다. 작은 산세에서 이런 규모의 폭포가 어떻게 조성되었을까? 의문은 바로 풀렸다. 수량이 부족해 공원 측은 모터로 물을 양수하고 있었다.
◆ 원색의 물결속에 청량한 메타세쿼이아 길
토끼관찰장, 원앙관찰장을 지나 산책로는 계속 이어진다. 오색 잎새들의 현란한 유혹에 피로해질 즈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이 나타난다. 원색의 물결 속에서 청량한 녹색가로수가 더없이 싱그럽다.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강천사에서 생수로 목을 축인 후 일행은 오늘 산행의 백미 구름다리를 향해 오른다. 강천산 구름다리는 월출산, 대둔산 현수교와 함께 호남의 3대 구름다리 중 하나. 길이 56m, 높이는 약 50m에 달한다. 다리 입구엔 마지막 단풍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까마득한 절벽, 아찔한 발밑은 내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하늘 다리 밑, 단풍물결 사이에서 인파들이 점으로 찍히고 이 점들은 다시 선(線)으로 연결돼 이내 풍경 속으로 흡수된다.
◆ 구름다리 아래로 펼쳐진 아찔한 선경
다리는 이내 인파에 출렁인다. 중간쯤엔 몇몇 여성들이 오금(?)이 저린 듯 한복판에서 진퇴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중간에 서자 번지점프를 하듯 묘한 스릴이 흐른다. 멀리 시퍼런 용소(龍沼) 위를 떠다니는 진홍빛 단풍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 긴장 속에서 단풍이 눈에 들어오다니 신기할 따름.
긴장과 미(美)가 불협화음을 이루듯 때로 비경은 주위의 극적 요소들과 결합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풍경엔 테마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없는 풍경은 그저 현란한 색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수교 바로 위에 있는 신선봉(425m)은 높이는 낮지만 봉우리 중에서 조망이 뛰어나다. 강천사는 물론 왕자봉, 형제봉까지 한 흐름으로 조망할 수 있다. 보통 노약자들은 여기까지만 오른다.
광덕산을 거쳐 연대봉-금성산성으로 오르는 코스는 7㎞ 남짓한 평범한 등산로. 송림과 활엽수림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침나절 색감에 흥분되었던 신경들이 이제 안정을 찾는다.
끝자락에 만나는 금성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되었지만 옛 마한(馬韓)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교과서에서는 배웠지만 유적이나 사료가 희박해 전설처럼 느껴지곤 했던 삼한시대의 실체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다.
일행은 북문 못미처 송락바위로 하산길을 잡는다. 왼쪽으로 강천 제2호수를 굽어보며 하산길을 재촉한다. 호수 끝자락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일행 앞에 막아선다. 구장군폭포다. 옛 마한시대 패전 장수 아홉이 이곳에서 동반투신 하려다가 다시 의기투합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수에 피로를 씻어낸다. 긴 물줄기를 따라 낙엽들도 함께 흩어져 내린다. 이 폭포수는 호수 둑을 넘어 계곡으로 흘러든다. 바람에 쓸린 낙엽들도 이내 물길에 몸을 맡긴다. ‘낙엽유수’(落葉流水)의 아름다운 행렬에 관광객들도 아쉬운 듯 가을을 배웅한다. 계류는 용소(龍沼)를 지나 삼인대를 지나 강천호에 이른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낙엽이 퇴색할 때쯤이면 아마도 계절은 겨울에 닿아 있을 것이다.
풍취와 오색 미감에 빠지려는 산객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제일 먼저 오색 단풍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를 뿌리는 여궁폭포가 일행을 맞는다. 약 20m의 높이에서 끌로 판 듯 좁게 팬 홈으로 맑은 물이 쏟아진다.
수십 길 벼랑 아래로 작은 능선들이 원색의 물결로 일렁인다. 그 오색카펫 끝자락에 문경시내가 살짝 내려앉은 듯 걸쳐 있다. 정상에서 좌우를 돌아보니 밑에서 보던 것과 달리 웅산의 면모가 느껴진다. 정상 등정의 성취가 식욕으로 이어진 듯 주봉엔 오찬을 즐기는 등산객들의 수다가 요란하다.
야생화와 바위언덕(서들)
야생화와 바위언덕(서들)이 조화를 이룬 꽃밭서들로 이어지고 능선을 끼고 쭉 나가면 영봉과 만난다. 영봉은 해발 1,106m로 주봉보다 30m가 높다. 그럼에도 조망과 산세가 뒤진다는 이유로 주봉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어렵고 위험한 등정을 완수하면 대신 멋진 조망과 산세가 기다린다. 유감스럽게도 산에서는 모두가 후불제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교통= 88고속도로 순창IC에서 나와 순창읍 내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담양 방향으로 약 1㎞ 진행. 백산삼거리서 우회전 792번 지방도로 타고 강천산 입구로.
◆숙박=강천산호텔(063-652-9930) 가마골펜션(010-2366-0684) 거목민박 (061-382-9597) 모텔 붐(063-653-4728) 가마골펜션관광농원(061-381-9999).
◆맛집=완도식당(육류 보신탕, 063-652-5439) 메밀꽃필 무렵(카페, 063-652-7892) 강천산가든(해물 생선요리, 063-652-5100) 강천각식당(한식, 063-652-9920) 강천골한정식(한식, 063-653-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