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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대승론석서(攝大乘論釋序)
도기(道基) 지음
{섭대승론(攝大乘論)}은 듣기가 어려운 위대한 가르침[大敎]이니 지극한 이치[至理]가 그윽하고 은미하여 가지가지 오묘한 문[衆妙之門]을 뛰어넘고 삿된 논리의 법칙[邪論之軌]을 막아준다. 대사(大士)가 이 논을 지은 까닭이 아마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저 실상(實相)의 종지의 극치[宗極]는 언어가 사라지고[言亡 : 言語道斷] 사려가 끊어진[慮斷 : 心行處滅] 것이며, 진여(眞如)의 체(體)는 오묘하여 도가 현묘하고 이치가 아득하다.
장대(壯大)하구나, 법계(法界)가 툭 트여서 작위함이 없음이여! 신실하구나, 대방(大方)이 한계 밖으로 뛰어넘어 있음이여! 이 때문에 왕성(王城)에 세 번 머물고[三止] 보전(寶殿)에 세 번 들어갔으니[三加], 지인(至人)이 모범을 드리움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하겠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천백여 년에 군기(群機)가 진리의 문을 두드리니, 중생의 느낌이 부딪쳐 느낌이 마침내 소통되었다. 북천축국(北天竺國)에 두 분 보살이 계셔서 스승과 제자[師資]의 인연을 맺어 서로 족적(足跡)을 접해서 이으니 꽃과 꽃받침처럼 이어져서 아름다운 향기를 계승했다.
무착(無着)보살은 큰 줄기[紘網]를 천양하였기 때문에 논(論)의 본문을 훌륭하게 지었고, 바수(婆藪)보살은 그 명리(名理)를 드날렸기 때문에 지극히 정미하게 주석을 서술했다. 모든 논[諸論]의 종지의 귀결점[宗歸]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나, 법화(法華)의 논지(論旨)는 3거(車)를 이끌어서 수레바퀴 자국을 함께하고 비사(?沙)의 그윽한 종치[幽致]는 10주(住)를 열어서 함께 섬돌을 오르는 것과 같이 이 논[攝大乘論]은 여러 가지 명상[衆名]이 평탄하고 넓어 마치 왕이 행차하는 길[王路]에 샛길이 없는 것과 같고, 장식(藏識)이 항상 흘러서 넓은 하천[洪川]이 길이길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이 논에서는 3성(性)의 독특한 종지[殊旨]가 일심(一心)으로 혼용되고 6도(度)의 허종(虛宗)이 모두 피안(彼岸)에 깃들며, 10지(地)의 용급(龍級)을 밟고 3학(學)의 이로(夷路)를 막는다. 열반은 주처가 없어서 대비와 지혜[悲慧]의 양융(兩融)을 운용하고 보리는 원만하고 지극하여 진실로 감응하는 한결같은 법칙[一揆]을 갖추고 있다.
섭대승(攝大乘)을 말해보자. 섭(攝)은 주체적으로 포섭하고[能攝], 온축해서 축적하며[蘊積], 포함하고 포섭해서 간직하는 것을 섭(攝)이라고 한다.
대승(大乘)을 말해보자. 이치는 반드시 상대적인 의존관계[待]가 끊어져 있지만 임시로 크다[大]고 가칭해서 대승(大乘)이라고 한 것이다. 그 의미가 확연하고 두루하며, 체성(體性)이 해박(該博)한 것을 대(大)라고 한다. 그 세간에 유행하는 공덕이 열반에 이르러 갈 수 있고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을 승(乘)이라고 한다. 이 논은 무착보살이 지은 것이다. 이 논이 근원의 이치를 끝까지 추궁하여 청미(淸微)하고 화창하게 드날렸으니, 이를 논이라고 한다. 석(釋)은 바수(婆藪) 논사가 주해(注解)한 것이다. 명확한 논변으로 분석하니, 문장과 이치[文理]가 모두 뛰어나다. 이것을 석이라고 한다.
양(梁)나라 태청(太淸) 2년에 남인도[南身毒] 우선니국(優禪尼國)에 진제(眞諦) 삼장이 있었으니, 도(道)가 세간 밖으로 벗어났고 학(學)은 뭇 영재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법(法)으로써 제도할 때에 사방에서 뛰어난 제자들이 건업(建業 : 남경)에 운집하였는데, 양나라가 말기에 이르러 장차 무너지려 하는 때를 만나서 발길을 영남(嶺南)으로 돌렸다.
광주(廣州)자사인 양산공(陽山公) 구양외(歐陽?)가 이 곳에 머물면서 보살계사(菩薩戒師)가 되어줄 것을 엎드려 간청하고, 아들[世子]인 형주(衡州)자사 구양흘(歐陽紇)은 또 번역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단양(丹陽)의 의학승(義學僧)인 승종(僧宗)과 혜개(慧愷)가 전수해 주시는 법어를 필수(筆受)하니, 이 일에 합당한 사람을 얻었다 할 것이다.
논본(論本)과 석론(釋論)은 모두 열다섯 권이다. 내가 용렬하고 학식이 얕기는 하나, 이 논을 연마하고 탐구하여 망실하지 않고[鑽仰無墜], 부족하나마 법문을 들은 것을 여기에 기술하여 후에 오는 명철(明哲)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예장(豫章)의 군수(郡守)인 왕흠(王欽)이 개황(開皇) 원년 5월에 이 논을 주상(奏上)하였는데, 천선사(遷禪師)가 수지(受持)하고 있는 논(論)과 다르지 않다.
섭대승론석서(攝大乘論釋序)
이 서문은 천선사(遷禪師)가 강남에서 서주(徐州)에 이르러 강설한 내용이다. 무릇 지극한 도(道)는 넓고 넓어서 생각할 수 없고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대비(大悲)는 평등하여 중생을 이끌어 나아감에 다함이 없다. 덕(德)은 함생(含生 : 중생)을 덮어 주며 이(理)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누설되지 않는다. 단지 길을 미혹하여 뒤바뀐 것이 오래되어 미혹 속에 빠져서 번뇌를 쉬기가 어려울 뿐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것[出世]을 먼저 말하면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겨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 때문에 교(敎)를 설함에 방편을 세우는 것이니, 각각의 근성과 욕구[性欲]에 따르는 것이다.
당우(唐虞 : 요순 시대) 이전에는 도첩(圖諜)이 간소하였고, 희주(姬周 : 주나라 시대) 이후에는 경전[經誥 : 유교 경전]이 매우 많아 비록 예(禮)를 만들고 훈(訓)을 지어서 모두 세속법으로 가르쳤지만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묘취(妙趣)에 대해서는 깜깜하여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취는 총령(?嶺) 서쪽(인도)에 숨어 있었고 가르침은 창해(滄海)의 밖에 비장(秘藏)되어 있었는데, 한나라 왕실에서 명을 받고부터 점점 동쪽으로 들어왔으며 진(晋)나라 왕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풍교(風敎)가 왕성하게 되었다. 양(梁)나라 시대에는 천하에 가득 차서 흥륭하였으며 천 년 세월을 지나면서 7대(代)를 걸쳐 지금에 이르렀다.
법란(法蘭)1)은 앞서서 청정한 근원[淸源]을 인도했고 동수(童壽 : 구마라집)는 그 후에 불법의 향기를 떨쳤으며, 안세고(安世高)와 승예(僧叡)는 웅장한 생각을 펼쳐서 의단(義端 : 불법의 실마리)을 일으켰고, 도생(道生)과 승조(僧肇)는 현묘한 언어[玄言]2)로써 그윽한 이치를 자유자재로 해석하였다. 비록 함께 모여 도모하였지만 분파가 갈리고 크게 시끄러워져 같은 물결(학파) 속에서 파가 갈려 깊고 낮음을 다투었으며 빛과 어둠[照晦]3)이 서로 뒤섞였다. 이로부터 돈독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이 점점 자세해져서 한결같이 다른 길로 달려갔다. 조상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수하였으니, 정서에 따라 버리고 취하였으며, 진귀한 것에 따라 개발하고 물리쳤다.
혜개(慧愷)4)는 뜻이 점점 커져서 바랑을 짊어지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거짓으로 나이를 속여 학도(學徒)가 되었다. 부처님의 교훈을 받들어 돌아다니면서 강의하였으며 수년에 걸쳐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을 만나서 토론하였다. 단지 종합적으로 섭렵하였기에 통찰이 얕아서 성인의 도와 덕을 탐구하였지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물결을 찾아 그 원류를 구했지만 깨닫지 못한 것이 많았다. 이것은 깊은 뜻이 문자에 가려져 있고 넓은 뜻은 생각에 미혹되었기 때문이었으니, 마음을 짊어졌어도 하나가 아님을 한탄하였다. 매번 풍조에 따라 도(道)을 묻고자 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했다.
삼장법사[眞諦]가 있었는데, 우선니국(優禪尼國)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성은 파라타(頗羅墮)이고, 이름은 구라나타(拘羅那他)이었다. 중국말로 친의(親依)라고 번역하여 불렀다. 지식과 관찰력이 깊고 넓었으며 외모가 출중하고 뛰어난 천재였으며 변재가 막힘이 없었다. 도(道)의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덕음(德音)이 세속까지 전해졌다.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를 유행하면서 여러 스님들을 받들어 모셨다. 먼저 외전(外典)을 공부하였으며, 외서에 대해서도 모두 달통하였고, 4위(韋 : 네 가지 veda)를 품 속에 안고 6론(論)을 가슴에 품었다. 3장(藏 : 경·율·론)을 궁구하였고 5부(部 : 四諦와 修道)를 거듭 익혔으며, 대승을 연구하여 깊은 궁극을 모두 알았다. 법사는 이미 광범위하게 서적을 공부하였기에 깊은 이치[幽微]를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항상 다른 지역에 가서 현종(玄宗 : 자기 종지)을 떨쳐 깨닫지 못한 이에게 법문을 열어주고 싶어했다. 몸을 도에 바쳐서 먼 곳에 유행하는 것을 가리지 않아서 만 리를 가더라도 마치 이웃에 가듯 하며 사해(四海)를 건너도 지척과 같이 여겼다.
양(梁)나라 태청(太淸) 2년(548)에 건업(建業 : 남경)에 들어왔는데, 이에 양나라 말기의 혼란한 시대를 만나니 멋대로 흐름이 연이어졌다. 법사는 이로 인해 이쪽저쪽으로 피해 다녔으므로 끝내 대법(大法)이 가려져 펼쳐지지 못하였다. 구강(九江)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령(五嶺)에 유행하였으나 번역된 경권은 많지 않았다. 후에 민(? : 복건성의 옛 이름)과 월(越 : 절강성의 옛 이름)에 도착하여 적지 않게 강설하였다. 법사는 항상 비분강개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탄식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知音]가 적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백아(伯牙)가 현을 끊고 변화(卞和)가 구슬을 안고 울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으니 미묘한 뜻을 담은 곡조는 변별하기 어렵고 한 자 남짓의 진귀한 보배는 구별하는 이가 드물었다. 법사는 오랫동안 지방을 유행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였다. 여러 지역을 거쳐 드디어 번우(蕃? : 광동성에 있는 현)에 도착하였다.
의동(儀同) 삼사(三司) 광주 자사(刺史)인 양산군(陽山郡) 구양외(歐陽?)는 외모가 준수하였고, 그 덕은 여러 지방에 알려졌으며 문무(文武)에 능하였다. 바른 도로써 다스려 백월(百越)에서 유민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오령(五嶺)에서 바른 법을 세웠다. 법사의 고귀한 행(行)을 존경하고 대사의 수승한 규칙을 흠모하여 보살계사(菩薩戒師)로 청하여 모든 제자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예전에 업(業 : 보살계)을 받은 적이 있어 나쁜 것을 이미 씻어 버렸지만 계를 받은 지 오래되지 않아 어겼으므로 오늘 다시 계를 받으니, 마음이 매우 기뻤다. 다시 공양 올리고 덕을 받으며 도를 찾아 의심을 풀고 싶어서 세 번 간절히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여 마음에 의지를 잃었다.
형주(衡州) 자사이며, 양산공(陽山公)의 아들인 구양흘(歐陽紇)이 있었는데, 기세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권세와 무예가 뛰어났고 문사(文史)를 모두 섭렵하여 치도(治道)의 요점을 깊이 통달하였다. 내면에는 지혜의 물결이 가득 차있어서 담담했고 청정하고 밝은 기상이 밖으로 흘러 넘쳤다. 또한 현인을 흠모하고 도를 완미하였으며 돈독하게 믿고 빼어남을 흠애하여 몸소 청주(請主)가 되었으며 예를 올리는 일을 겸해서 행하였다. 법사는 이에 흔쾌히 청을 받아들여 번역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제지사(制旨寺)의 사주(寺主) 혜지(慧智) 스님은 계행(戒行)의 청정하고 도의 기운이 훌륭하였다. 한가롭고 담담하게 지내는 데 뜻을 두었으며 도탄을 만나면 반드시 거양해서 끊임없이 대중을 구제해 주고 쉴새없이 교화하였다. 정남(征南) 장사(長史) 원경덕(袁敬德)은 품행이 겸허하고 밝았으며 자연스럽고 고상한 경지에 뜻을 두었고, 훌륭한 계획으로 간단히 일을 처리하였으며, 옥과 같이 밝게 정치를 보좌하여 백성들은 일찍부터 그 명성을 들었다. 아울러 불법을 깊이 존중하여 숭고한 마음으로 깊은 이치에 이르렀으며 출세(出世)와 세속의 두 현인에게 항상 보시하였다.
계미년(癸未年, 503) 3월 봄에 광주 제지사에서 곧 번역에 들어갔다. 법사는 이미 성론(聲論)을 잘 이해하였고, 방언(方言)을 잘 알았으므로 그 말이 나온 까닭을 반드시 밝혔고 의미는 은미하다고 해서 펼치지 않았다. 스승의 자리와 조금 떨어져서 항상 모시고 하루 종일 쉴새없이 즐거이 필수(筆受)에 전념하여 법문이 나오면 바로 받아 적었다. 한 장(章) 한 구절[句]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였고 해석하여 뜻이 완비되었을 때 마침내 문장으로 적었다. 그러나 번역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다. 한 글자가 어긋나면 이치의 깊은 뜻이 호월(胡越)5)의 거리만큼 벌어지는 것이니, 질박하더라도 뜻을 얻게 하여야 하고, 문채롭게 꾸미는 데 힘써서 근본 종지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지금 번역된 경문에서는 문채로움과 질박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승인(僧忍) 등과 함께 밤낮으로 공부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촌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곧 그 해 수단(樹檀)의 달에 문장과 의미가 다 완성되니, 본론(本論) 3권·석론(釋論) 12권·의소(義疏) 8권을 합하여 23권이었다.
이 논은 대승의 종극(宗極)이요, 정법(正法)의 신비한 오의[秘奧]라 미묘한 뜻이 구름같이 일어났으며 밝은 언사가 바다와 같이 넘치면서도 깊고 심오하여, 2승(乘)은 이것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넓고 장엄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10지(地)의 종학(宗學)이 되는 것이다.
여래께서 입멸하신 후 천백여 년에 미륵보살이 적절한 시기에 나투어 영부(靈俯)에 강령하여 중생을 제접하니, 자기를 잊고 자신을 낮추어 대중에게 감응하셨다. 또한 아승가(阿僧伽) 법사를 위하여 대승의 뜻을 자세하게 해석해 주었다. 아승가는 이 나라 말로 무착(無着)이다. 법사는 하나를 얻으면 도에 회합하고 둘을 받아들이면 종지를 알았다. 이치를 이야기한 것은 궁극적인 것을 비추어서 정신과 현상에 응시하여 지극한 이치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논을 짓게 된 것이다. 유식(唯識)의 미묘한 뜻[微言]이 이로 인해 드러날 수 있었다.
본론(本論)은 무착 법사가 지은 것이다. 법사의 두 번째 동생은 바수반두(婆藪槃豆)이며 이 나라 말로 천친(天親)이다. 도에 대해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하여 버금갔으며 덕성을 갖추고 풍격(風格)이 뛰어났으며 정신과 기력이 모두 화통하였다. 그 형의 고귀한 교훈을 계승하여 대승의 큰 종지[弘旨]를 학습하였다. 무착 법사가 지은 여러 논은 언사가 매우 심연하여 그 이치를 알기 어려웠다. 장차 후세에 다시 어떤 오류라도 범할까 두려워 석론(釋論)을 지어 본문을 해석하니, 소승을 그 안에 다 포함시켰고 외도는 붓끝으로 논파하였다. 이로부터 상계(像季)시대에 이르러 방등원교(方等圓敎)가 번성하게 되었다. 혜개(慧愷)6)는 허박(虛薄)한 것을 법으로 삼지 않고 정려(情慮)가 볼품없이 얕았지만 겨자씨 같은 작은 배를 큰 골짜기에 띄우고자 했고 느린 말을 채찍질해서 먼 길을 가고자 하였다. 바라건대 털끝이 모여서 한 길 높이가 되고 작은 불이 모여서 큰 광명이 되는 법이니, 혜를 갖춘 군자(君子)여, 깊이 연구하고 열람하도록 할지어다. 그리하면 반드시 그 도(道)를 잃어버림이 없으리라.
각주
1) 67년에 『사십이장경』 등을 가지고 낙양에 들어온 중인도 축법란(竺法蘭)을 말함.
2) 노장의 언어로 불교를 해석하는 격의불교를 말함.
3) 각 종파로 분리되어 서로의 종지를 내세우는 것을 뜻함.
4) 지의(智?)라고도 하며 진제삼장에게서 배웠으며 {섭대승론} 및 {구사론}의 번역을 도운 섭론학과 초창기의 한 사람.
5) 큰 차이가 남을 말함.
6) 진제삼장의 제자로 섭론종의 초기 학자.
출처: 동국역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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