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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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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게시판 스크랩 (必聽)복음 강론 요약<12>(마6:16~34)
깊은골짜기 추천 0 조회 11 10.07.04 08: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6:16~34)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1. 구약시대 선지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고, 율법대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들도 죄인이기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하심으로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구약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언약이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언약대로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는 그림자이고,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림자는 사라지고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의 행위는 어떠해야 하는가요?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 육체적인 평안함을 채워주는 예수를 요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복의 개념을 육체의 형통함으로 생각합니다.“나의 사업과 가정과 자녀들을 성공하게만 해주면 내가 당신을 최고의 신으로 믿어 주겠소!”라고 하나님에게 충고하는 현실상황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도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다 이루셨음을 믿는 성도라면 무엇을 행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6:1절).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의 행위의 원리입니다. 믿음의 원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은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서 자기 신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주님, 세상의 모든 사람이 깨닫는 은혜를 주소서ㅡ옮긴이) 예수님께서 자기의 의를 평가 받으려는 바리새인들을 내세워서 책망하심은 더 무서운 판단과 심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3. 14~15절에 문자적으로만 보면 용서를 해준 자만이 그 의를 공로로 해서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용서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면” 조건문이라면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지 않는가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용서했는가? 아니면 우리가 먼저 용서했는가요? 그러기에 조건문으로 해석하면 결코 안되는 것이다. 만일에 조건문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결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도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해주셨으므로 너희도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왜냐하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12절). 그래서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의롭다는 것이요,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무엇인가를 맡겨 놓았다가 찾아가는 것처럼 기도하게 되는데, 그 자세가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자신이 죄인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자세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4. 16~18절에서 금식에 대한 말씀인데, 그 의미는 무엇이고, 오늘날에도 금식을 하라는 것인가요?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이란“괴롭다”는 의미입니다. 금식의 근원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아담을 추방함으로 생명과(그리스도)를 먹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죄로 인하여 괴로움을 주어 금식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금식하라고 명하신 것은 범죄하면 재를 뒤집어쓰고, 옷을 찢고, 금식하면서 자기를 괴롭힘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는 날은 속죄제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굶으면서 슬프고 고통스런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진정한 금식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금식(율법)은 규범이 아니라 언약으로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애통하며 금식하실 것에 대한 모형이고, 그림자 언약이다. 그 언약대로 예수님께서 친히 택한 자들의 죄를 대신하여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을 하셨고, 십자가에서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아니하시고 가장 큰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 금식을 하심으로 완전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우리는 괴로움이 다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생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계22:2).

 

5. 왜 유대인들이 금식을 했을까요?

 

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왜 나라를 잃었다고 여겼는가요? 자기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때문입니다.1주일에 두 번씩 정해놓고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동참하여 마땅히 금식을 해야 하는데, 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5:34~35절“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결혼잔치 집에서 가서 울고불고 한다면 거기가 초상집이지 어찌 잔치집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 나라를 잃은 슬픔과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것 중에 어느 것이 크냐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잃은 슬픔이 크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돈을 잃고, 건강을 잃은 것과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 중에 어느 것이 큰가요? 예수님보다 땅의 것들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유대인들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땅에 것 때문에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슬퍼할 때가 오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러면 지금도 여전히 금식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 손에 있는 모든 것,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영원토록 유일하게 남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남느냐 아니면 영원한 사망으로 남느냐는 것뿐입니다.

 

오늘날에도 금식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심지어 금식기도원까지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예수를 잃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천국을 잃어버린 것 때문인가요? 썩어 없어질 땅에 것 때문인가요?

금식이 필요하다는 분들은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 즉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자요, 예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되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자요, 말씀이 복음으로 들려지지 않는 불신자요, 나는 땅에 것이 좋사오니 하는 불신자들이라는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슬퍼하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신세타령을 하였는데, 언약대로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슬픔과 고통이 사라져 버리고, 기뻐하며 찬송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해 주신다!”는 언약이 성령이 오심으로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 되심”을 믿어짐으로 슬퍼하며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님을 자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범사에 즐겁고, 기뻐하고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닌가요? 이제는 예수가 영원한 진리이고, 최고의 가치이고 보배임이 믿어지는 것 복음입니다.그래도 여전히 땅의 것을 구하는 자라면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입니다.

 

7.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말씀하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인가요?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그리스도 되심을 친히 증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인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로 살아 존재하심이 확증됨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바라보며 찬송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마6:9)는 기도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식을 통해서도 언약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해 주셨고, 그것을 확인하고 믿어졌다면 과연 너희에게 보물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무엇이 소중한가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무엇이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사는 것아니겠습니까? 그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기에, 날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내용(주님의 기도)을 알려 주셨고, 죄와 관련된 금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셨고, 이 땅에 살면서 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 한권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의 통일성, 즉 성경 어디에서든지 같은 내용, 같은 주제를 증거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며칠 씩 금식했다고 나팔을 불고 다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8. 19~20절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과 땅에 쌓아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통장에 있는 것은 땅에 쌓아 놓는 것이고,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늘에 쌓는 것이라는 저급한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24절에서 증거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하나님과 재물 가운데 무엇이 주인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라면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과 방편일 뿐이고, 반대로 재물이 주인이라면 하나님은 재물을 채워주는 수호신이나 도우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육체의 형통함을 채워달라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호신이나 도우미로 믿는 것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고, 하나님은 모든 만물과 만사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가 되시기에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시는 여호와 되심이 믿어지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요, 내 인생의 영원한 가치임을 깨달아 어떠한 환난과 고난이 올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잘살기를 바라는가요? 못살기를 바라는가요?”즉 기왕이면 이 땅에서도 잘살고, 천국에도 가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잘살든지 못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고, 범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근본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고, 하나님을 배우고 의지하는 방편이라고 믿어지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9. 그래서 21~24절에서 우리의 보물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를 묻고 있는 말씀인 것인가요?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눈은 우리 몸의 등불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에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고 피조세계를 보는 눈은 밝아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수치를 가리게 된 것입니다.“네 눈이 어두우면 세상이 캄캄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아무리 태양이 중천에 있을지라도 내 눈이 어두우면 캄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이라면 밝은 몸으로 살아가지만, 눈이 있다고 할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소경과 같은 자로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잠시 잠간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는 자세는 하나같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으로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자라면 이 땅에서 잠시 잠간 영화를 누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그곳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다 배설물이고, 오직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함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보물이란 가장 귀하고 가치로운 것입니다. 무엇이 가치로운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대가치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의미는 당신만이 가장 가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의 눈으로 보면 가장 가치있는 것은 돈일 것이고, 신령한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하나님 한 분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자세는 욕심이 낳은 돈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근본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가치를 부여하며 순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10. 25~32절에“그러므로”라는 의미는 보물과 눈과 두 주인에 대한 증거를 통해서 무엇이 절대 가치로운 것인가를 바르게 판단케 하여 주심에 대한 결론으로 생각하면 되는가요?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인간들은 모두“솔로몬 영광 따라잡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솔로몬처럼 최고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내일 잘려버리는 들풀이라도 그 영광은 솔로몬의 입은 옷보다 월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는 자라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바라본 자라면 환난이 닥칠지라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만큼 살게 하셨다가 불러 가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신다. 때로는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신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오래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에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잠간 살다가 부르면 떠나게 될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닌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땅의 것을 구하려고 예수를 바라본다면 그 또한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좋은 말씀 주셔서 우리의 목숨을 연장시키고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먼저 저주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다 보물을 쌓아가려는 우리의 더러운 욕망을 낱낱이 폭로하심 앞에 부끄러워하며 자비와 긍휼을 바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살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협박을 하는 것이 가당치나 하겠는가?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들에 핀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는가? 목숨을 연명하는데 두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육체의 생명을 연명하는데 가치를 두기에 의식주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령한 눈이 없기에 신령한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육체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 곧 짐승처럼 사는 것뿐입니다.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하다. 그 원리를 어디에서 가르쳐 주셨는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루 먹을 만나만 주신 이유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현재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끝을 다 입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면 내일 일을 염려할 수가 없는 것이고, 반대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일 일이 불안하고 두렵기에 오늘을 만족하며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일 일이야 하나님만이 다 아시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알지만, 지금 주어서는 안되기에 주지 않을 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현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달라는 대로 다 주신다면서 죽기 살기로 구하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의 본향은 어디인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1. 33~34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무슨 의미인가요?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세상에 속한 것들은 구하지 말라. 그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임함(4:17)”을 친히 증거하셨고, 예수님이 한 의가 나타나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롬3:21).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고 쫓아가면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먼저”라는 단어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 다음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라고 했다고 해석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의식주로 상징되는 땅의 것은 불택자들이나 구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구할 것은“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깡통 주식이 우리 염려로 살아날 수 있다면, 오늘부터 신령한 산에 올라가서 염려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한국교회는 기도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란 즐거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이루어짐을 확신하기에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자기 생일날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 받기로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겠습니까? 어린 자녀가 배가 부르는데, 내일도 이렇게 배가 부르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는가? 그래서 걱정 염려와 분노 등은 오늘 하루로 끝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보물은 부지런히 말씀을 상고하고 배우고 깨달아 가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입니다. ㅡ아멘,마라나타!ㅡ

 

말씀선포:울산동은교회 정판옥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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