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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촌로공파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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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 뿌리찾기 스크랩 세명의 왕후, 세명의 왕이 태어난 마을 (안산시 장상동 노리울 마을)
희망나라 추천 0 조회 180 12.04.04 08: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산시 안산동 노리울 마을 표지석 설치 [2008-11-14 오후 12:42

 

 

 

안산시 안산동 (장상동)

노리울 마을 표지석 설치

  행정동은 안산동이며 법정동 이름은 장상동인 노리울 마을 

 

안산시 상록구 안산동주민센터(동장 정점근)는 지난 13일 장상동(法定洞) 소재 노리울 마을 입구에서 조빈주 상록구청장을 비롯한 시의원, 기관단체장, 마을주민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리울 마을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안산의 노리울 마을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수리산 밑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세 명의 왕후(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외가인 이곳에서 덕종, 정종, 문종 임금이 탄생하신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왕후 세명의 외조부는 안산김씨(安山金氏) 시조인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의 아들인 김은부(金殷傅 ; 945∼1017)인데, 그는 성종, 목종, 현종 3대를 섬긴 중신(重臣)이었으며, 안산이 지군사로 승격됨과 동시에 김은부는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로 추증되었다.

 

이번에 건립된 표지석에는 노리울 마을의 역사와 유래에 대하여 새겨져 있다. 정점근 안산동장은 “이번 표지석 설치를 통해 마을주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노리울이란 지명은 마을지형이 노루의 입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은부 가계도

 

 

       원성왕후 및 원혜왕후는 태후로 추존됨

       * 원성태후 : 덕종, 정종, 인평왕후(문종 왕비), 경숙공주

         * 원혜태후 : 문종,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 왕비)

         * 원평왕후 : 효경공주

 

   

 

 

  장상동 전경.

동명에서 고구려 장항구현의 전통을 이어 받은 장상동의 오늘날 모습이다.

 

 장산동 고깔봉. 노리울 뒤의 봉우리로, 그 형상이 고깔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뒤 고깔봉에서 마을에 이르는 산세가 풍수로 보아 노루의 입처럼 생겨(獐口穴) ‘노리울[獐谷]’이라

부르고 있다.

 

  

안산시 안산동은 1914년에는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장상리()·장하리() 지역이었다.

1989년 수암동·장상동·장하동·화정동의 4개 법정동이 병합되어 안산동으로 바뀌었다.

1991년 화정동이 연성출장소로 분리되어 나갔고, 1995년 시흥시 안산동에서 안산시 안산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행정동인 안산동은 법정동인 수암동·장상동·장하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사박·동막골·노리울·원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행정동이란 ?

공부(簿)상의 법정동()처럼 자연부락을 바탕으로 하였거나 오랜 전통을 지닌 동과는 달리, 행정관청관할구역의 넓이보다는 주로 인구의 증감에 따라 인구가 많은 하나의 법정동에 여러 행정동을 설정하여 동행정을 따로따로 보게 한다든지, 인구가 적은 여러 법정동을 묶어 하나의 행정동을 두기도 한다. 따라서 행정동은 동사무소를 단위로 하는 행정구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설정은 시조례로 정한다.

 

법정동이란 ?

법정동(法定洞)은 대한민국 법정 구역으로, 법률로 지정된 행정 구역이다. 그 명칭은 전통적인 지역 이름으로, 대부분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정해진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이 주민 수에 의해 설치 또는 폐지되기 때문에 주민 수의 증가와 감소에 따라 변동이 있는 반면, 법정동은 변동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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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안산동(安山洞)
 

수인 산업도로와 수암봉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관아가 있었을 만큼 안산군의 중심지였으나, 1914년 일제가 부·군·면을

통폐합하면서 면 행정의 중심지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안산군의 관아가 있었으므로 '안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겟다리에서 동쪽으로 옛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직선 길을 따라 북쪽 지역을

독수리, 그 남쪽 지역을 수암리라 칭하고 있다. 또 마을회관 주변을 '개울께'

동사무소 서쪽을 '샛터말',수암봉 밑을 '웃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왕조 제2대 정종 2년(1400년)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공을 세워 좌명공신 4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김정경(1345∼1419년)이

안산군 관아 뒤에 살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 졌다. 그가 세거할 때 심은

은행나무가 세그루라고 하는데  그중 한그루가 남아있다.

 

안산김씨 연성군 김정경(金定卿) 세거지


안산시 수암동 25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려 시대 읍성과 조선

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안산군읍지」를 보면 “관사의 뒤에 토체형지가 있는데 이곳은 연성군

(蓮城君) 김정경의 세거지이다.

은행나무 3주 역시 그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수령이 6백 년 정도된 것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3그루가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은 불에 타서 몸통의 일부만 남아 있다.

집터가 있었다고 하는 관사의 뒤쪽에는 곳곳에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

되어 있는데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수[槐樹(훼나무 괴,

나무 수)]라 하며 길상목(吉祥木)의 하나로 귀하게 여겼다.


그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삼괴국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로 하면 3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해당하는 삼공[三公 ; 태사(太師), 태전(太傳), 태보(太保)]이 마주보고

앉도록 하였다는데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벼슬을 기원하고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해나가면서 회화나무를

심어서 출세(出世)하거나 또는 출세의 시작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의 노수(老樹)들은 대개가 고궁, 서원, 문묘, 당대 명문대가들의 뜰에

심어져 있으며,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괴(槐)는 허정(虛精)의 정(精)으로서

노괴(老槐:오래된 회나무)는 불(火)을 잘 만들어 신선(神仙)이 깃들어 있어서 그

신기함이 귀히여겨야 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 판관(判官)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를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고

하니 회화나무의 정(精:정할정)으로 하여 진실에 이르도록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었고, 훗날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정문 안에 심어두면 그집에 행복이 찾아오고

자녀들이 출세한다라고 생각하며 즐겨심는 정원수로 자리잡은 민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 회화나무

[명사]<식물>콩과낙엽 활엽 교목. 높이는 25~30미터이며, 어긋나고 모양 겹잎인데 작은

달걀 모양이고 톱니있다. 8노란색을 띤 흰색 가지 총상 꽃차례피고

열매협과(莢果)로 10는다. 열매약용하고 목재가구재, 땔감으로 쓴다. 중국

원산지산이, 촌락 부근에서 자라는데 한국, 일본, 중국 등지분포다. ≒괴목(槐木),

괴화나무, 옥수3(玉樹), 홰나무. (Sophora japonica)

* 은행나무

[명사]<식물>은행나뭇과낙엽 교목. 높이는 60미터 정도이며, 부채 모양으로 한군데여러

 개가 다. 암수딴그루로 5는데, 암꽃녹색이고 수꽃연한 노란색이다. 열매

핵과(核果)로 10랗게 는데은행이라고 다. 목재조각, 가구 용재 따위고, 관상용

또는 가로수재배다. 동아시아 종만분포다. ≒공손수, 압각수. (Ginkgo bil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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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9년 이전의 안산 관아는 현재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안산김씨족보」의 내용이 참조가 된다. 이 족보에는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

(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조선 초기의 관아는 소릉지 부근인 지금의 안산시

목내동 성안마을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41년에서 「송자대전」에 기록된 1669년까지의 228년 동안 안산 관아는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겼다.’는 기록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지점인 읍성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안산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고 기록된 것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읍성터 부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 송자대전 :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집(문신, 주자학 대가, 노론 영수, 우의정, 좌의정)


따라서 조선 시대 안산 관아는 처음에는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소릉의 영조로

인하여 1441년 현재의 읍성 부근으로 옮겨가고, 1669년에 다시 수암동의 현 위치

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후 일제 시대부터 1965년까지 이곳에는 수암면사무소가

있었다.


관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안산현관사중건기>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땅이 밝고 시원해서인데,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비봉혈(飛鳳穴)에 해당

한다고 한다. 비봉혈은 성인군자가 배출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읍터로 정해

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세가 비봉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봉황이

날아가면 읍이 멸망하기 때문에 봉황이 좋아하는 대나무를 심어 봉황이 영구히

있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안산관아터에도 관아 앞 지대석 바로 밑에 대나무

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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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신라 때 이름인 장구군(獐口郡)과는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시대서기 940년(태조 23) 처음 오늘날과 같은 지명이 되었는데 인근의 시흥은 곡양현에서 금주(衿州)로, 과천은 율진군에서 과주(果州)로 각각 그 이름이 함께 바뀌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때는 양광도남경유수(楊廣道南京留守:楊州) 에 소속된 수주(水州)의 속현으로서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이 되었다가, 뒤에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감무(監務)를 두는 고을로 승차되었다.

 

시흥은 같은 해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속현이 되었다가 안산보다 훨씬 뒤인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는 고을로 승격되었다.

 

1271년(원종 12)에는 몽고군이 선단을 이끌고 대부도 등 안산 지역에 침입하자 주민들은 민병을 조직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때 몽고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는데, 부사(府使) 안열(安悅)이 전쟁을 마무리지어 승리로 이끌었다.

 

이 같은 주민들의 공로로 안산현이 소속된 수원부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고, 부사 안열은 도호부사로 승진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별망성의 항몽 유적과 함께, 고려시대에 외세와 맞서 싸운 우리 시의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안산이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된 것은 1308년(충렬왕 34)의 일이었다. 안산은 고려조 덕종·정종·문종임금이 외가인 이곳에서 탄생한 때문이었다.

덕종·정종·문종의 외조부는 안산김씨(安山金氏) 시조인 안산현 개국후 김긍필의 아들인 김은부(金殷傅 ; 945∼1017)인데, 그는 성종. 목종. 현종 3대를 섬긴 중신(重臣)이었다. 안산이 지군사로 승격됨과 동시에 김은부는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로 추증되었다.

고려 때의 안산은 삼국 시대에 이어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뱃길의 출발지였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교역이 중심지였고, 당화(唐貨)가 쌓이는 부촌(富村)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잿머리 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으며, 무역에 종사하기 위하여 체류하는 당인(唐人; 중국인)들이 점차 늘어나 당인촌을 형성할 정도였다.

 

지군사로 승격된 안산은 이후 화성과 시흥, 그리고 과천의 승강(昇降)에 따라 약간의 변모를 보이기는 하나 조선 초기까지 별다른 변동이 없이 유지되었다.

 

오늘날의 학교와 지역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향교가 안산에 세워진 것은 안산이 지군사로 승격된 1308년 직후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군사로 승격되면 관아의 건물 칸수와 향교. 군영 등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지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안산은 덕종·정종·문종 임금이 태어난 외가의 향촌으로서, 그리고 외조부인 김은부가 안산군개국후로 추증되면서 그 지리적 이점과 함께 명실공히 대처(大處)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경기도 중서부의 농. 어업과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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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김씨, 권력의 중심에 서다
[안산 역사이야기] <6> 고려, 안산, 그리고 안산 김씨(安山金氏)

 

 때는 서기 1010년.
한반도 북방의 만주 벌판에 희뿌연 먼지가 끝없이 날리고 있다.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온 것이다. 소위 ‘강조의 정변’이라 불리는 고려 조정의 사건을 구실로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 온 것이다.

 

물론, 거란의 최종 목적은 고려 정벌이 아니다. 거란은 중국 본토의 송(宋)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후방을 안정시키고 송과 고려의 연합을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고려를 치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고려는 강조가 나서 흥화진에서 잘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 후 개경이 함락되자 당시 국왕이었던 현종(1009∼1031)은 어쩔 수 없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고, 몽진 도중 공주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현종은 고달프고 힘든 피난(避難)의  노정(路程)에서 당시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였던 김은부(金殷傅)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김은부(金殷傅).

전란의 와중에 국운과 가문의 이 놀랍고도 극적인 반전을 일구어낸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초기 1530년에 발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안산군조에 보면 안산을 본군(本郡)으로 삼는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안산 김씨가  바로 김은부의 집안이다.
안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인 김긍필(金肯弼)로 알려져 있다.

 

김긍필이 1024년(현종 15년)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그의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世居)하면서 안산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이다. 안산 김씨가 고려 초기 문벌의 반열에 오른 것은 김긍필의 아들, 바로 김은부(金殷傅) 때이다.


나주로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바로 이 김은부가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큰 딸에게 어의(御衣)까지 지어 바치게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그 딸이 왕비(王妃)가 되니, 그녀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그녀는 훗날 덕종(제9대)과 정종(제10대)을 낳게 된다. 또한 그의 두 딸들 역시 현종의 비(妃가) 되어 원혜왕후, 원평왕후가 된다. 그리고 원혜왕후는 문종(제11대)을 낳게 된다.

 

 

뿐만아니라 그의 큰 아들인 김충찬(金忠贊) 역시 현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 어사대의 정6품 벼슬)가 되고, 덕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중추원의 종2품 벼슬), 정종 1년(1035년)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오늘날의 국방부장관)를 지내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김난원(金欄圓)은 출가(出家)하여 문종 때 개경의 영통사에 있었으며 화엄종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훗날 문종은 왕명으로 넷째 왕자 후(煦, 대각국사 의천)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는데, 김난원이 바로 그 왕자의 스승이 되어 화엄교관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후에 김난원은 ‘경덕국사(景德國師)’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김은부는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고 외손자들이 왕이 되니 가히 당대 최고의 집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안산 김씨는 고려 현종에서 문종대에 이르는 장장 4대 50여 년의 세월을 권력의 중심부에 있게 된다.

 

안산 김씨 가문의 흥성을 통해 우리는 이곳 안산이라는 공간과 고려 초라는 시대가 씨줄과 날줄로 만나는 역사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신대광 (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최종편집 : 2008-01-25 11: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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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서 맺은 사랑 (난중가연 亂中佳緣 )】


*가연(佳緣) : 부부관계나 연인관계를 맺게 된 연분

 

강조가 죽은 후에도 고려의 여러 장군들은 선전 분투했고 여러번 적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꾀하기도 했으나 적군은 집요하게 남으로 남으로 진격해 내려왔다. 이렇게 되자 왕성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적의 예봉을 피하여 왕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길을 떠났다. 도중에 왕을 원망하고 있던 김치양의 잔당들의 장난으로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겪다가 공주(公州)땅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주절도사 김은부(金殷傅)의 영접을 받게 되었다.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으로 성품이 몹시 근검했다. 성종 때엔 견관승(甄官丞)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현종 때에 이르러서는 공주절도사가 되어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전진 속에 시달린 왕을 대하자 김은부는 눈물을 흘리며 애석히 여겼다. 그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예의를 갖추고 왕을 영접했다. 은부는 왕의 모습을 보고 무엇보다도 피난길에 조석조차 변변히 취하지 못한 것을 짐작했다.

 

그는 곧 왕을 자기 거처로 인도하고,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갖추어 대접하니 실로 오랜만에 대하는 별식이었다.

 

이때 음식 시중을 드는 여자들 틈에 끼어 한층 아리땁고 품위 있는 처녀가 왕의 눈에 띄었다. 특히 피난길에 여인을 멀리한 왕의 눈에는 그 처녀의 모습이 실물 이상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김절도사, 저기 저 처녀는 어떠한 처녀이오?"

 

왕은 앞에 끓어 앉아서 대접하는 은부에게 물어 보았다.

"예, 바로 신의 장녀이옵니다."

 

왕은 다시 곁눈질로 그 처녀를 바라보며

"경은 좋은 딸을 두었구료. 이런 시골에서 보기 드문 가인인걸."

하면서 슬며시 눈웃음을 띄웠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은부가 장녀를 데리고 왕의 침실로 들어왔다.

처녀는 비단옷 한 벌을 들고 있었다.

"폐하 변변치 못한 것이오나 갈아입으시도록 준비했사옵니다."

은부가 이렇게 말하자 처녀는 그 옷을 왕의 앞에 공손히 놓았다.

그러고는 딸에게 "그럼 너는 폐하가 갈아입으시는 걸 도와 드리도록 해라."

이렇게 일러놓고 은부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처녀와 단 둘만이 되자 왕은 처녀의 얼굴과 비단옷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탐스럽고 그윽한 정이 느껴지는 처녀였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몹시 끌렸지만 처음 대하는 처녀일뿐더러 왕이라는 지위를 생각해서라도 경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겨우 이런 말을 던질 뿐이었다.

"어느 틈에 이렇게 옷 한벌을 다 지었는고?"

"어젯밤에 지었사와요."

"어젯밤에... 혼자서?" "예." "그렇다면 밤을 꼬박 새웠겠구먼."

처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살포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가냘픈 눈두덩이 약간 분 것 같기도 했다.

 

왕은 더욱 고맙고 애틋한 정이 피어 올랐다.

왕은 잠자코 戰陣에 헐고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장이며 품이며 몸에 대고 잰 듯이 꼭 맞았다.

"어떻게 짐의 체격을 알고 이렇게 잘 맞는 옷을 지었을고?"

"눈짐작으로 지었사온대 맞으신다 하시니 다행이옵니다."

 

"눈짐작으로? 그대는 아리답고 마음씨가 고울 뿐 아니라, 대단히 슬기로운 처녀로군." 왕은 칭찬해 마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었으니 이제 떠나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니 길이 몹시 바쁘다. 욕심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깊은 정을 맺거나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지금의 처지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은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모든 정을 표시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다.

 

왕에게는 이미 두 왕후가 있었다.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로 피난길에도 왕을 따라오기는 했다. 그러나 두 왕후는 모두 혈족으로 정략적인 맺어진 결혼인만큼 살뜰한 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또 등극하기 전에는 정적의 독수(毒手)를 피해서 중이 되어 산중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여인과의 접촉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이 28세나 되어 김은부의 딸에게 첫사랑을 느끼게 된 셈이었다.

 

김처녀의 모습을 가슴에 안고 다시 남으로 내려간 왕은 그 해 정월 13일에 나주땅에 당도했다. 여기서 왕은 거란 진영에 가서 적군의 철병을 요구하도록 보낸 하공진의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공진은 지난날 여진인을 친 때문에 거란군의 침공을 초래케 한 장본인인만큼 이렇게 왕이 황성을 버리고 피난길을 떠나게까지 된데 대해서 통렬히 책임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왕이 남쪽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보다 앞서 죄가 풀려 원직을 복구했던 하공진은 왕의 앞에 꿇어 엎드려 진언했다.

 

"거란은 원래 딴 뜻이 있어서 신이 여진인을 친 것을 기화로 침공하였사오나, 겉에 내 세운 명분은 어디까지나 전왕을 내몰은 강조의 죄를 따진다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러하온데 이미 강조가 그들 손에 잡혔사오니 더 이상 전화를 확대시킬 명분이 없을 것이온즉 사람을 보내어 철병을 청하면 응할 수도 있을 줄로 아뢰오."

 

거란군의 철병은 왕도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

 

일이 뜻대로 될는지 아니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진의 진언을 받아들여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거란 진영으로 보냈다.

 

창화현에 당도한 공진 등은 낭장 장민(張旻)과 별장 정열(丁悅)에게 왕의 친서를 주러 먼저 거란 진영에 들어가서 할 말을 일러 주었다.

 

'우리 국왕께서 친히 오시기를 원합니다만 귀군의 군세가 두려울 뿐 아니라, 내란을 만나 남쪽으로 피신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배신 공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하려 합니다만 공진 등도 역시 겁을 먹고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군대를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장민 등이 적진에 당도하기도 전에 적의 선봉이 이미 창화에 쳐들어 왔다.

 

공진은 하는 수 없이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서 거란왕을 만나서 장민 등을 시켜 하려던 말을 얘기했다. 공진의 말을 들은 거란왕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공진을 쏘아보며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의 왕은 지금 어디 있는고?"

하고 물어 보았다.

 

공진은 시침을 뚝 떼고

 

"남쪽으로 행차하신 것까지는 알고 있사오나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 국왕이 갔음직한 남쪽 땅이 얼마나 먼 곳인고?"

거란왕은 다시 이렇게 물어보았다.

 

하공진은 거란왕이 고려 남쪽 땅의 지리에 밝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으매 천연스럽게 얘기했다. "우리 땅이 대국과 비길 바는 못됩니다마는 그래도 남쪽 끝까지 가자면 몇 만리나 될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이옵니다."

 

"몇 만리나 된다? 그렇다면 속히 불러올 수도 없는 일이로군."

하고는 일단 회군하기로 했다.

 

이것은 물론 하공진의 청을 들어 주었다기보다 전선이 몇 만리나 연장된다면 보급에 큰 고생을 해야 할 것이며, 장졸들의 사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일단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쨌거나 거란군은 하공진 등을 볼모로 끌고 갔다.

 

적군이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자 왕은 그달 21일 나주를 떠나 황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황성 궁중으로 향하기보다 공주 땅에 있을 김처녀에게로 곧장 달렸다.

 

두 왕후만 사람을 달려 먼저 보내고 왕 자신은 다시 공주땅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이 행차한다는 기별을 받자 김은부는 멀리 마중을 나와 지난날보다도 한층 더 융숭히 영접했다. 김은부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는 산해진미도 물론 달가운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아쉬운 것은 한시도 잊지 못하던 김처녀의 모습이었다.

 

"이곳에 오니 마치 오래 비어 두었던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구료. 모든 것이 반갑고 모든 사람이 정답고..."

 

나이 젊고 수줍은 왕은 자기 심중을 직접 드러내지 못하고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김은부는 왕의 뜻을 재빠르게 짐작했다.

 

"이곳에도 폐하의 성덕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특히..."

하고 잠간 말을 끊다가

 

"밤이나 낮이나 폐하를 사모하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낸 한 처녀가 있사옵니다."

그리고는 슬쩍 눈웃음을 쳤다.

그 말에 단순한 왕은 낯이 붉어지며 다급히 묻는다.

 

"그 처녀가 누구요?"

"곧 들여보내겠사옵니다."

 

김은부가 눈짓을 하니 시종을 들던 자들이 일제히 물러가고 그 대신 꿈에도 잊지 못하던 김처녀가 들어왔다. 전보다 어딘지 초췌해 보이는 김처녀는 그래도 정성껏 단장한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다소곳이 절을 하더니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고운 보따리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덧 방문은 굳게 닫혀지고 방장마저 내려진 속에 처녀와 단둘이만 대하자 왕의 가슴은 그저 뛰기만 했다.

 

"고개를 드오. 무엇이 그리 부끄럽다고?"

 

왕은 자기 자신의 수줍음을 꾸짖기라고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처녀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 반짝이는 처녀의 두 눈은 억만가지 정을 담고 호소하는 듯 왕에게는 느껴졌다.

 

처녀를 만나면 이런 말도 하리라, 저런 말도 하리라, 벼르고 벼르던 왕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하고 보니 말문이 막혀 그저 망설일 뿐이었다.

 

방안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러자 처녀가 앞에 밀어 놓았던 보자기를 펴기 시작했다.

수줍은 왕은 그것을 보자 겨우 말할 거리를 찾았다.

"그건 또 무엇인고?" 하고 보따리 속을 들여다보았다.

 

왕의 이마가 처녀의 이마와 거의 마주 닿게 되자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왕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찔끔해서 물러 앉았다. 수줍어 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처녀가 오히려 왕보다 대담했다. "폐하, 이것을 갈아입으시어요."

 

처녀는 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왕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오, 또 옷을 지었구먼. 그대가 손수 지은 건가?"

 

"예."

 

"솜씨도 참 곱구먼. 감도 좋고..."

왕은 손으로 부드러운 비단옷을 어루만졌다.

"이 옷을 짓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했을고?"

별로 그렇게 느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말꼬리가 끊어질까 보아 그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줍음을 거둔 처녀는 정이 넘치는 눈으로 왕을 응시하면서

"한올 한올 바늘을 뜨면서 폐하의 용안을 그리어 보았사옵니다... "

한다.

 

그 말에

"오, 그렇듯 짐을..."

왕은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외치다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 머뭇거린다.

 

다른 일에는 상상히 슬기롭고 과단성도 있는 왕이었지만 이런 일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막막할 뿐이었다.

 

"폐하, 어서 갈아입으시어요."

처녀는 먼저 하의를 펴든다.

"오, 갈아입어야지. 누가 지어 준 옷이라고.. "

왕은 헌 옷을 훌훌 벗고 처녀가 들고 있는 옷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처녀는 그 옷을 내어주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입는 것을 돕겠다는 시늉이었다. 왕은 하의에 한쪽 다리를 꿰다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기우뚱하고 몸이 기울어졌다.

 

"폐하.."

 

처녀는 육중한 왕의 상반신을 풍만한 자기 가슴으로 안아 받들었다.

 

아무리 수줍은 왕이었지만 이미 두 왕후를 맞은 몸이었다. 그러나 처녀는 왕의 두 팔이 허리에 감으려 하자 재빠르게 빠져나가 두어 걸음 물러섰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여전히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안 되다니... 이제 와서..."

왕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다가 갔다.

 

수줍었던 왕이지만 한 번 불길이 당겨지자 자제 할 줄 모르는 짐승처럼 변해 벼렸다. 그러나 처녀는 요리조리 피하며 지껄여댔다.

 

"폐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시면 소녀는 혼사길이 막히옵니다."

 

"혼사가 무슨 상관인고? 궁중으로 데려가면 될 것 아닌가!"

 

"궁중으로 데려가시면 소녀를 후궁으로 삼으시려는 뜻이옵니까? 소녀는 그런 자리는 싫사옵니다. 그런 뜻에서 소녀를 가까이 하신다면 혀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뜻을 쫓지 못하겠사옵니다."

 

"누가 후궁을 삼는다고 했는고? 어엿한 왕후를 삼겠다는 거지."

왕은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왕후를 봉하시다니요? 지금 폐하께는 왕후가 두 분이나 계시지 않사옵니까? "

 

"왕후는 몇 사람이든지 봉할 수 있는 거야.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떻담."

 

"셋중에 하나란 말씀이어요? 그런 건 싫사옵니다. 소녀는 소녀만을 사랑하는 분에게 몸을 맡기고 싶사옵니다."

 

"아따, 왕후가 셋이라고 다 한결같이 사랑하겠소? 사랑이 가는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지."

 

욕정이 제법 왕의 입을 매끄럽게 했다. 처녀는 왕의 두 눈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는 왕이 식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는지 비로소 품에 안기었다.

 

그 후 왕은 김은부의 집에서 엿새를 묵은 다음 황성으로 돌아갔는데 왕은 과연 환도 즉시, 처녀를 왕후로 삼았으니 곧 원성왕후(元城王后)이다. 원성왕후는 왕에 제9대 덕종(德宗)과 제10대 정종(靖宗)을 낳았으니 깜찍한 시골 처녀의 야망은 최고로 이루어진 셈이다.

 

장녀를 왕후로 미는데 성공한 김은부의 세력은 갑자기 강대해졌다. 그리고 세력이 강해지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김은부는 장녀와 의논해서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하는 뜻에서 두 딸을 다시 왕후로 들여보냈으니 곧 원혜(元惠)왕후, 원평(元平)왕후가 그렇다.

 

이렇게 되니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던 처녀의 속삭임도 결국 왕의 마음을 낚으려는 술책이 아니었다면 부친의 정략결혼에 순정을 희생시킨 셈이다.

 

그 후 김은부는 형부시랑(刑部侍郞), 호부상서(戶部尙書), 중추사(中樞使) 등을 역임하다가 현종 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딸들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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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부 (金殷傅)

 

○金殷傅水州安山縣人性勤儉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하였다.

 

주) 1009~1031년 현종 초에 양광도() 남경수부 양주 소속의 수주군() 안산현()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곳이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된 뒤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成宗朝授甄官丞穆宗時累遷御廚使顯宗初爲公州節度使.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으로 임명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어주사(御廚使)로 되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되었다.

 

王避契丹南下次公州殷傅備禮郊迎曰: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녘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豈意聖上跋涉山川凌冒霜雪至於此極." 獻衣帶土物王遂更衣以土物分賜扈從官.

 

“성상(聖上)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띠며 지방 산물을 바치니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王至巴山驛吏皆遁御廚闕膳殷傅又進膳羞分供朝夕

 

왕이 파산(巴山)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 공궤조차 못 하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하여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공궤하였다.

 

契丹兵退王還次公州殷傅使長女製御衣以進.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게 유숙하였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因納之是爲元成王后元惠元平二王后亦其女也

 

이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원성(元成) 왕후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

 

尋除刑部侍郞如契丹賀生辰還至來遠城契丹 女眞執之以歸數月乃得還.

 

그는 미구에 형부 시랑으로 승차되어 거란 왕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에 도착하였을 때 거란이 여진을 시켜 그를 붙잡아 갔다가 몇 년 지난 후에야 돌려 보냈다.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고려사. 열전(신하)

고려사 기록 오류 (1072년 문종26년 경덕국사 묘지명 참조)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 ===>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1072년 문종26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생략--------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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