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
신라 후대에 정치 지배 세력의 지배 세력의 분열과 탈락현상으로 신라의 지배세력이던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과 부패, 타락현상이 극심해 졌다. 신라 중대에 마지막왕인 혜공왕(제위765-780)대에는 대공의 난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나 전국에서 96명에 달하는 귀족의 정권쟁탈에 뛰어들었다.
결국 현 집권자인 혜공왕파와 반 혜공왕파로 갈라졌다. 혜공왕파는 김지정이었고, 반 혜공왕파는 대표자가 김양산, 김경선 등이 었다. 여기에서 반 혜공왕파가 승리하고 김양상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으니 이가 곧 선덕왕(재위780-785)이었다. 선덕왕이 죽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다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원래 정상적인 왕위 계승자는 김주원(金周元)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김경선이 김주원를 밀어내고 원성왕이 되었다. 1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명주 군왕으로 불리는 김주원은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5대손으로 시중(현 국무총리) 자리에 있었다. 선덕여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조정의 주인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 되었다. 그러나 경주로부터 200여 리 떨어진 외곽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들고 궁궐로 향하던 중 때마침 홍수를 만나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큰 비로 불어난 하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의형제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경선 (경성왕)이 화백회의를 전격장악 하여 왕위에 오른다. 비가 그친 후 대궐에 들어온 김주원에게 원성왕은 마지못해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임금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내가 큰비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사양한다. 측근들이 무력을 써서라도 왕위를 되찾아올 것을 주장하지만, 김주원은 뜻을 굽히지 않은 채 가신 3,000여 명을 끌고 어머니의 고향 명주로 낙향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김주원이 명주로 올 때 최, 박, 함, 곽씨 성을 가진 측근들이 함께 따라와서 모두가 명주(강릉)를 본관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에 의해 이 지역의 5대 토착 성씨가 탄생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주원의 어머니는 연화부인 박씨였는데 아버지 김유정과의 러브스토리인 '신어( 神魚)이야기'. 즉 김주원 탄생설화가 자못 흥미롭다. 허균이 지은 <별연사고 적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김유정은 명주에 유훈관으로 파견된다. 유훈관은 신라 조정이 관할하는 중요 지역에 보내는 중앙관리로서 왕자 등 왕의 가족이 임명되었고 주 로 세습되었다. 이는 군사. 행정 관리는 물론, 특히 반란 위험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김유정의 아버지 김사임도 이곳 유후관으로 재임해 있던 중 토착세력가의 딸이었던 박씨 처녀와 혼인해 유정을 명주에서 낳았다. 화랑이었던 유정은 명주 유후관으로 있으면서도 주로 무술 연마 등을 위해 주변 산천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연화부인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사랑이 깊어갈 무렵, 유후관 임기가 만료된 유정은 "곧 기별하겠다"고 약속한 후 서라벌로 돌아갔는데 시간이 흘러도 소식이 없었다. 연화부인인의 이러한 사연을 알 턱 없는 부모는 시집보낼 자리를 만드어 놓고 준비하도록했다. 답답하기 짝이없는 그녀는 유정과 같이 가던 연못가(연화담 양지어)에 나아가 큰 금빛 잉어에게 자신의 심경을 하소연했다. 잉어가 알아듣자, 옷소매를 뜯어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이상 다른 남자와 결혼 할 수 없고,이번 달 보름까지 안 오시면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입에 넣고 큰냇가로던졌다. 며칠 후 서라벌에서 정무에 여념 없던 유정이 부하에게 알천강에서 안줏거리 좀 잡아오라고 일렀다. 부하가 커다란 잉어를 잡아왔는데 잉어가 계속 토하더 니 무언가를 뱉어냈다. 마침내 연화부인의 편지를 본 유정은 까마득히 잊고 있 던 일에 대한 죄책감에 다시 솟는 연모의 정을 앞세워 명주로 달려가 혼인을 해 첫아이를 낳게 되었으니, 그가 김주원이다. 후손들은 양어지 인근에 정자를 짓고 유정의화랑 이름 무월랑과 연화에서 한 자씩 취해 월화정(月花亭)이라 했으며, 현재 강릉 김씨회관의 이름도 월화정이다.
도성을 떠나 강릉김씨의 시조가 된 김주원은 원성왕이 예우와 회유 차원에서 내린 명 군왕에 봉해지고, 아홉 개 군 25현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다. 현재 강릉 영동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였다. 한편, 김주원의 세 아들 중 둘째 헌창은 원성왕의 등극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전사하고, 첫째 종기는 손자 대에 이르러 대가 끊어졌으며, 막내인 김식만이 온전히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대를 이어 문중을 번창시켰다. 강릉김씨 문중은 조선 명종-숙종 때에 여덟 명의 판서를 배출함으로써 이들이 모여 살던 서울 종로구 팔판동이란 지명을 유래하게 하였으며, 생육신 김시습과 <날개>, <오도감> 등을 지은 천재 문학가 이상(김해경) 같은 명사를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
현재 강릉 김씨 문중의 묘는 강릉시 성산면 대관령 밑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명주군왕릉>이라는 묘지석이 있고 지역사람들은 김주원과 두 아들 김종기, 김식을 지칭하는 '삼왕동(三王洞)'이라고 부르며 매년 이들을 기리는 '명주군왕제'를 열고 있다.
특히 강릉지역에서도 강릉 김씨를 비롯한 강릉지역 명문가 인사들이 행동규칙을 정해 우의를 다지고 선비로서 금도를 지켜나갈 것을 다짐하는 일종의 동아리들이 정한 벗에 대한 정의가 참으로 명문이다. 벗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심우(心友)와 면우(面友)다. 심우는 선한 일을 하면 기뻐하고 과실이 있으면 타이르되, 귀천을 불문하며 어려움을 당해도 능 한결 같고 분함과 욕심을 자제 할 줄 아는 마음의 친구다. 반면 얼굴로 사귄 친구, 즉 면우란 나보다 똑똑 하면 시기하고 과실을 발견하면 크게 드러내며 술자리에서는 형제처럼 하지만 이해타산에서는 지극히
냉담한 데다 귀하면 후대하고 천해지면 홀대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주왕이 현해탄을 건너, 아니면 요동과 지금의 북한 땅을거쳐 수만리 떨어진 주왕산에 숨어 들었을까?주왕굴 앞 주왕암의 안내판조차 소위 '중국설'을 적고 있으니과연 주왕산의 주왕이 중국인이었을까? 주왕산삼암기에는 주왕산의 주왕에 대해 옛날 신라의 풍모가걸출한 왕자가 명주(지금의 강릉)에 은거해 살다가 죽어 주원왕`이라고 했고, 왕자 때 지금의 주왕산에 은거해 그가바로 '주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이 왕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7대손인 명주군왕 김주원이다. 청송의 주요 역사·문화 전문가들은 주왕은 중국인이 아닌, 라의 왕족인 김주원 또는 신라 말 혼란기에 왕권다툼 과정에서 난을 일으킨 김헌창(김주원의 아들)을지칭하는 것이고,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주왕산에 은둔했거나청송인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명주군왕릉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으며, 강릉김씨 시조인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능묘(陵墓)로 강원도내 유일의 대묘다. 신라시대 묘로 조선 명종때 후손 김첨경(金添慶)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71년 강원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5세손으로 선덕왕(宣德王)의 뒤를 이어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뜻밖에 내린 큰 비로 경주 북천이범람하여 강을 건너지 못하자,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이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가 "원성왕(元聖王)"이다.김주원은 이듬해 선대(先代)로부터 인연이 있는 명주(溟州)로오게 되었으며, 원성왕은 김주원을"명주군왕"으로 봉하고통천에서 울진, 평해에 이르는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였다.묘는 전후 2기로 되어 있고 묘앞에 "명주군왕김주원묘"라고새긴 비가 있고 입구에 이승만 대통령이 글을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봉분은 장방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석물들이 아름답게설치되어 있다.매년 음력 4월 20일에 능향전에서 강릉김씨대종회와 강릉유림에서 능향대제를 거행한다.
|
출처: 논픽션 원문보기 글쓴이: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