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예뻐도 여름날처럼 매양 품속이나 소매에 감추어 둘 수는 없다. 합환(合歡)은 서로 대칭되는 문양을 말하는데 주로 부부간의 끈끈한 애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합환이 영원하리라 믿는 건 위험하다. 합환 부채라 해도 상자 속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그 신세는 고립무원이자 아득한 절망이 되고 만다. 그렇게 내쳐진 황제의 여인은 앙탈하고 반항하기는커녕 아린 속내를 안으로만 삭힌 채 영혼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시나브로 ‘가을 부채’가 떠올랐을 것이다. 실총(失寵)의 생채기를 달래는 것도 잠시뿐, 잊혀진 망각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 긴긴 시간들이 그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총애 잃은 신하의 처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첩여 반 씨의 이 절절한 하소연은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멀어지자 화려했던 과거로 귀소하려는 사대부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첩여는 황제의 비빈(妃嬪) 중 하나. 황후보다 한두 등급 아래일 정도로 지위가 높았다. 반 씨는 재덕(才德)이 뛰어나 한 성제(成帝)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 총애가 조비연(趙飛燕) 자매에게로 옮겨가자 태황후의 시녀를 자임하며 제 발로 황제 곁을 떠났다. 이 시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자료=교수동아일보입력 2019-11-01가을 부채[이준식의 한시 한 수]〈30〉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추풍단선ㅣ秋風團扇] ○ 가을철의 둥근 부채, 철지나 쓸모없는 물건 ○ 秋(가을 추) 風(바람 풍) 團(둥글 단) 扇(부채 선) 가을의 부채는 유용했던 물건도 철이 지나서 쓸모없이 된 물건을 비유한다. 원래 이 말은 이성의 사랑을 잃은 사람을 가리키다가 뜻이 확장됐다. 줄여서 秋扇(추선), 秋風扇(추풍선)이라고도 한다. 前漢(전한)의 成帝(성제) 후궁이었던 班婕妤(반첩여, 婕은 예쁠 첩, 妤는 궁녀벼슬이름 여)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후일 漢書(한서)를 저술한 班固(반고)의 집안 할머니이기도 한 반첩여는 인성이 좋고 재주가 뛰어나 왕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출중한 미모에 몸매가 가냘픈 ‘날아다니는 제비’ 趙飛燕(조비연) 자매가 후궁에 들어와서는 반첩여에 대한 왕의 사랑이 식고 더군다나 모함을 받고서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나중에 혐의가 풀려 석방되고도 궁녀의 지위는 떨어지고 왕의 총애를 되찾아올 수 없었다. 가을이 되어 반첩여는 자신의 처지가 쓸모없는 부채와 같다고 생각하며 ‘怨歌行(원가행)’이라는 시를 지었다. ‘새로 자른 제나라의 흰 비단 맑고 깨끗하기 눈서리 같구나(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신열제환소 선결여상설) 마름질해 만든 합환선 둥글고 둥글어 명월 같구나(裁爲合歡扇 團圓似明月/ 재위합환선 단원사명월) 임의 품과 소매 속을 드나들며 움직일 때마다 미풍을 일으켰지(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출입군회수 동요미풍발)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철 되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듯(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상공추절지 양표탈염열) 대나무 상자 안에 부채가 버려지듯 은혜와 애정마저 도중에 꺾여 버렸네(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기연협사중 은정중도절).’ 시문집 ‘文選(문선)’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