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현(絃)이어서 나뭇잎은 수만 개 건반이어서 바람은 손이 안 보이는 연주가여서 간판을 단 건물도 고양이도 웅크려 귀를 세웠는데 가끔 천공을 헤매며 흙 입술로 부는 휘파람 소리
화초들은 몸이 젖어서 아무데나 쓰러지고 수목들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비바람을 종교처럼 모시며 휘어지는데 오늘은 나도 종교 같은 분에게 젖어 있는데 이 몸에 우주가 헌정하는 우현환상곡. (공광규·시인, 1960-)
+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정호승·시인, 1950-)
+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곽재구·시인, 1954-)
+ 비 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천상병·시인, 1930-1993)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시인, 1966-)
+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함민복·시인, 1962-)
+ 빗소리 듣는 동안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 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단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안도현·시인, 1961-)
+ 가랑비 오는 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꽃들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이 오늘만큼은 우리를 꽃으로 여기셨나 봐요. 꽃같이 여기셨나 봐요.
모처럼 오늘은 나도 한 송이 꽃이 아니었을까? (박두순·아동문학가)
+ 풀밭에서
여우비 그친 뒤 풀밭에 갔더니 빛들은 풀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아기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박유석·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