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숲속터널 지나 지리산 첩첩산중에 '5만평' 들판이…
지리산 청학동 가까이 있는 논골마을 가는 길은 자동차만 타고 가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오지탐방길이다. 어떤 땐 구불구불, 어떤 땐 숲속터널. 마치 미로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사람이 사는 곳 중 이 정도로 오지마을이 있을까 싶다. 글·사진 심재근 명예기자(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정감록에서 언급한 피난처 중 한 곳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피난지로 좋은 열 곳이 적혀있다. 그 중 한 곳이 지리산 청학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청학동은 쌍계사 뒷길로 불일폭포를 지나 삼신산(해발 1288m)으로 산행하는 길 깊은 오지에서 만난다. 도로가 뚫리고 교통이 발달한 지금은 청학동으로 가는 길이 산청에서 가는 길과 하동 횡천면에서 청암면을 거쳐 가는 길 등 두 갈래다. 하동군 청암면에서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앉은 두메산골이 청학동이다. 지리산 삼신봉 줄기를 따라 해발 800m가 넘는 오지 청학동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것은 1910년 일제가 이 나라를 강점하자 정감록을 섬기던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와 살면서부터라고 한다. 청암면의 오지 논골마을도 청학동에 가까이 있고, 첩첩산중이라 정감록에서 언급한 피난처와 다를 게 없다. 논골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도 마을사람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고 하니 정감록의 예언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닌가 보다.
안내 표지도 없어 물어물어 길 찾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논골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하동 횡천 5일장을 만났다. 농사철이라 붐비지는 않았지만 시골 5일장에서 옛 정취를 느낀다.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유통산업이 발달하면서 명목만 남아있지만 정겨움은 그대로다. 횡천 5일장을 둘러보다 길에서 만난 이에게 길을 물었다. 논골마을에서 중장비로 도로를 내고 있다며 종이에 약도를 그려주었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는데도 별로 감이 잡히지 않는다. 미로를 찾아가야 한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녹음이 우거진 1003번 지방도를 따라 청학동 방향으로 가다 혹시 도움말이라도 들을까 해 청암면사무소에 들렀다. 주말 당직근무를 하고 있던 민원계장이 커피를 한잔 건네며 자기도 논골을 다녀 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논골마을을 가려면 심답마을을 찾으라고 안내했다. 청학동 방향으로 여정을 잡으면 '소수력발전소'가 보이고, 하동호 옆에 '비바체리조트'가 있다. 그리고 이내 청학동과 논골마을의 갈림길이다. 이곳에 금남마을 버스정류소가 있는데, 8곳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지만 논골이나 심답마을 표지는 없다.
'산과 계곡, 물과 공기가 마을과 화합' 사전에 연락을 해둔 김태일 이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산골 특유의 구수한 말투로 "쭈욱~ 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왕복 2차로 포장도로가 있어 오지마을 치고는 길이 괜찮다고 생각 했다. 1.5km 쯤 들어가니 중장비 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요란하게 겹친다고 느낄 때 쯤 좁은 임도가 이어진다. 솔이봉 자락에서 발원해서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흐르는 중이천을 따라 고개위에 서니 화강석에 새긴 심답마을 표지석이 반겨준다. 표지석 옆에는 '산과 계곡, 물과 공기가 아름다운 마을에 화합하고 단결하여 더 잘살자'는 정감어린 글귀와 익살스런 장승이 있다. 김태일 이장이 심답마을회관 입구에서 고향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맞았다. 이정표에 있는 심곡마을의 명칭은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청암초등학교 심곡분교가 개교 되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논골마을은 심답마을회관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더 가야 나온다. 김태일 이장의 연락을 받은 부녀회장 정숙선(66) 씨가 동행했다.
말발굽 닮은 능선에 둘러싸인 너른 땅 논골은 논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행정상으로는 중이천이 가르는 상이리와 중이리 두 개 마을로 나누어진다. 논골은 지리산 능선 줄기를 타고내린 산세가 마치 알파벳 U자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형태다. 이 말발굽형 능선은 악양면과 청암면의 경계가 되는데 논골은 그 경계 능선의 거의 꼭대기에 자리한 분지형 들이다. 논골은 악양면과 청암면의 면계에서 청암면 방향으로 치우친 까닭인지 청암면에서 오면 넓은 길인데 악양면 쪽에서는 길 초입을 제외하고는 비포장에다 구불구불한 산중 오지탐험 도로를 방불케 한다. 논골을 달리 답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름 그대로 논이 있는 동네쯤으로 이해된다. 논골 주변에는 15채의 집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주말 주택으로 이용하고 있어 평소에는 문이 잠겨있다. 그만큼 논골마을에서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원주민은 5가구에 불과하다. 오지인데다 주민들이 고령이라 농사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텃밭을 가꾸거나 산나물을 채취해 밥상에 올리고, 조금씩 내다판다.
천석 수확한 들판 이젠 황무지로 변해 김태일 이장에 따르면 논골의 면적이 247마지기라고 한다. 어떻게 끝자리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1마지기를 200평으로 환산하면 4만9400평이라 자그마치 16만3300㎡에 달한다. 옛날에는 논골에서 벼 천석을 수확했다고 한다. 논골 전체에서 천석을 수확했다면 백석지기 부잣집도 몇몇은 있었으리라. 해발 500m에 있는 오지 논골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산 줄기에서 뻗은 높고 깊은 산에서 사철 맑은 물을 아낌없이 쏟아주는 자연의 덕택이다. 하지만 지금 들판은 나무와 긴 풀로 뒤덮여 논의 형체마저 희미하다. 사람이 살았을 듯한 터에 집들은 허물어져가고, 마당의 절구통만 긴 세월을 버티고 있다. 논골이 황무지로 변한 데는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도 크게 작용했다. 토지 대부분이 외지인들의 소유라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논골마을 주변 곳곳에도 펜션이며, 산방이며 하는 표지가 달린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를 닦고 있어 오지라는 이름이 무색해지고 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잿빛 하늘이 내리는 지리산 오지 논골마을을 내려섰다.
논골마을에서 만난 자연을 닮은 사람들
① 한우 40마리 기르는 논골 토박이 김태일 이장과 김쌍남 씨 부부 김태일(65) 이장은 누에고치에서 실이 풀리듯 부인과의 러브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중이리에서 태어나 청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김쌍남(59) 씨와 연애결혼해3남을 두었다. 장남은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밑에 아들 둘은 해병대에서 장기복무 중이라며 애국자라고 자랑한다. 김태일 이장은 경력도 화려하다. 새마을지도자 10년에 면사무소 총무를 18년이나 했단다. 논골마을 이장을 맡은 지 14년째다. "장기집권이네요"라고 했더니 "자꾸 맡기던데"라며 '허허' 웃었다. 부부가 한우 40마리를 기르며 논골마을을 지키고 있다.
② 17살에 시집와 73년째 살고 있는 이맹상 할머니 발걸음을 옮기면서 보는 논골은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다. 오래된 시골집 모습 그대로인 옆집에는 이맹상(90) 할머니가 살고 있다. 마당에 펼쳐놓은 그물망에 늘어놓은 게 산에서 채취한 다래 순을 삶아 말리는 것이란다. 할머니는 17살에 논골로 시집와서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중국에서 잠시 산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 하동읍내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아들 부부 이봉춘(59)·박정님(56) 씨가 노모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짓기 위해 와 있었다.
③산·물 좋은 곳에 살고자 진주서 온 김강봉 씨와 정숙선 부녀회장 부부 중이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김강봉(73)·정숙선(66)씨 부부가 운영하는 아담한 '청학동산장'이 있다. 부부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살고 싶어 23년 전 이곳 땅을 사 집을 짓고 진주에서 오가며 살고 있다. 몇 가구 안 되는 동네지만 정숙선 씨는 부녀회장을 맡아 봉사한다.
④요양 차 왔으나 사람이 그립다는 정태영·김서운 씨 부부 집 앞 평상에서 따뜻한 볕을 쬐고 있던 정태영(79)·김서운(77) 씨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부산에 살았다는 정 씨는 "몸이 아파 10여년 전 논골마을로 이사를 왔으나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다"며 "사람이 그립다"고 푸념했다. 젊은 시절 목수로 일했는데 논골에서 텃밭을 일구고 화단을 가꾸며 산다. 부인 김서운 할머니는 사진을 찍는 것을 사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