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갑자기 다가온 환경의 변화 와 시련 앞에 사람들은 고통이나 슬픔에 잠기고 견디지 못하여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련을 이김으로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되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역전을 거머쥐는 인생들도 있다.
우리 가족에게 시골로 이사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겪는 큰 변화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또는 망설임의 끝에 시골에서 살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시골 생활이라야 40대 후반의 나이에 동경과 이상은 아니었다. 쉽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담담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10번째의 이삿짐을 꾸렸다. 워낙 잦은 이사에 단련된 아이들이라지만 환경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인데도 아무도 가야하는 것에 대해서 불평이나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아빠 엄마의 미션 수행에 앞장서는 것처럼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드디어 후줄근한 이삿짐 두어 트럭이 내려지고 우리의 전원생활은 시작되었다. 특별히 아름답게 묘사 할 것이 별로 없을 만큼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서 산에는 과수나무가 심겼고, 그 자락 아래 옹기종기 모여 동네를 이루어 논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흔히 볼 수 있는 시골마을 그대로였다.
일상은 쉽게 적응하기가 좀은 힘들었다. 도시에서의 생활과는 너무 다른 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바쁘고, 언제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피곤한 도시였다면, 전원에서 어정쩡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농촌 생활의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서 열외였다. 모두 농사로 바쁜 틈바구니에서 사람구경이 힘들었다. 고요하고 조용함도 며칠은 좋았는데, 도시와는 정 반대의 생활은 나의 정체성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이제까지의 나는 직장, 가정, 교회에서 시간에 쫓기면서 너무 바쁜 사람,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이젠 조용히 소외 된 것 같은 외로움이 첫해 겨울을 괴롭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무뚝뚝하고, 조용히 혼자 숨기 좋아하는 인생인줄 알았었다. 내 속에 많은 사람들의 사이를 수다로 헤집고 다니면서 조직과 일을 좋아하는 사회성이 나를 점령하고 있을 줄 몰랐다. 생각보다 남편은 적어도 옆에서 보기에는 잘도 견디는 것 같았다. 사실 적응이 힘든 것은 남자들일 것 같은데 그 참 신기하단 생각에 토닥거리기도 하였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봉사활동, 실습이란 명목으로 집에서 나와서 정해진 시간에 나가고 사회활동을 하니 좀 살 것 같았다. 차츰 회복을 해가니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조용하던 논과 밭에서 경운기 소리가 들려오고 햇볕 쪼이는 바깥 활동이 많아지는 봄날이 되었다. 복숭아 종류의 과수가 많은 우리 동네는 처음 보는 내겐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선인들의 무릉도원이란 문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선명하고 예쁜 꽃망울을 보면서 행복했었다. 어느 날 불쑥 이웃분이 자기 밭에 채소 농사를 지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무조건 덤비기 좋아하는 나는 좋아하면서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했다.
시골에 살면서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을 자주 이용하는데, 장에 가면 좋은 농산물들을 많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흔해 빠진 채소나 과일 까지도 일일이 돈을 주고 다 사서 먹는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경제적인 비용이 돌아 보이기도 했다. 가끔씩 풍성한 채소를 나누어 주시는 이웃들이 계시지만 막상 채소가 먹고 싶고 채소가 꼭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 마다 가서 이것저것 달라고 하기는 또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그 분들 조석으로 논밭에 나가 땀 흘리고 수고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없었지 않나? 땀 한줄기 식혀 준적 없으면서 바라기만 하기는 우습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도 한번 농사를 따라서 해보기로 했다. 근데 아는 게 있어야지 우선 거창하게 농기구 몇 가지를 사고 채소 가꾸기에 관한 책자를 사서 살펴보았다. 먼저 밭고르기를 하였다. 잡초 뽑기와 땅파기는 이미 시골에서 기계로 다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손수 삽과 호미를 들고 해야 하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은 땅을 만들고 싶어서 낫과 호미로 풀을 베어 내고 삽으로 땅을 깊숙이 파헤치느라 여러 날이 걸렸다. 일주일에 며칠정도 날을 정하고 오전에 운동 삼아서 두 세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밭둑에 앉아 있으면 따스한 햇볕과 바람이 이젠 제법 살갗을 태울 정도로 볕살이 두꺼워 졌다. 끙끙대면서 일해 잡초가 없어진 밭, 엉성하게 흙덩이 채로 파헤쳐진 밭을 보면서 흐뭇하고 이것저것 심고 싶은 것도 많아 졌다.
이미 봄을 준비하고 농사일을 시작한 이웃어른들을 따라서 그분들이 고구마를 심으면 나도 고구마를 심고 그분들이 고추를 심으면 따라서하고 오이, 가지, 토마토 등의 모종도 심었다. 이것저것 심고 싶은 것은 많은데 때를 놓쳐 버린 것도 있었다.
농사에 초보인 일군이 심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고구마라며 고구마 순을 얻어다. 비닐로 고랑을 덮고 꽂아 두었다. 여린 고구마 순 한줄기를 저렇게 흙속에 꽂아 두어도 살아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니 시들하게 마르는 것이다. 그냥 두면 시간되면 잘 산다고 걱정 말라는 도움의 말도 귓등으로 듣고 여긴 왜 비가 자주 안 오냐고 투덜대면서 매일 밭에 나가서 물을 주고 다른 일을 시작하였다. 다른 밭과 비교해 보니 역시 물을 준 우리 고구마가 훨씬 더 싱싱하게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식물들도 교감을 하는 것이 신기 하여서 물을 줄때 밭에 가서 식물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잘 자라길 당부하기도 하는 어린아이 같은 짓도 하면서 즐거워하였다.
고추는 때마침 고추를 심는 계절이라 커다란 밭에 한가득 고추를 심는 농부들을 보면서 싱싱한 풋고추와 붉은 고추를 떠올리며 50포기를 심었다. 심을 때는 농사 책에서 시키는 대로 잘 하였다. 퇴비와 시비를 해야 한다고 해서 퇴비를 넣고는 시비를 할 때 적당한 양을 모르니 큰 주먹을 두 주먹씩 비료를 넣었더니 고추모의 삼분의 일만 남고 다 시들어 죽어버렸다. 지주를 받쳐주고 잎을 따주고 마르지 말라고 매일 물을 준 것을 생각하니 어찌 아까운지, 근데 밭주인이 고추는 농사짓기가 너무 까다로워서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니 차라리 잘된 일이란다. 남아 있는 고추들에게 끝까지 잘 살아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조금씩 키워 나갔다. 어떤 녀석은 시들하게 말라 가더니 비가 흠뻑 내리고 나니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살아있다는 것이 어찌 반가운지 ‘이젠 시들지 말고 잘 자라라.’고 다독여 주었지만 역시 뽑을 때까지 시들하게 있었다. 인생이나 식물이나 처음이 참 중요한 것 같다.
그럭저럭 밭에 식물들이 조금씩 파랗게 채워지고 있었다. 이젠 제법 밭 같다고 하면서 계속 하나씩 식물을 심어 갔다. 3월 말에 시작하여 5월이 되니 이미 다른 밭에는 콩을 심고 계셨다. 우리 식구들은 콩을 좋아한다. 집에 볶아먹고 남아 있는 콩을 조금 심어 보기로 하고 목초액에 담갔다가 고랑에다 심었다. 날씨는 더워 오는데 비는 많이 오지 않고 아직 느긋하게 기다리는 법을 몰랐던 나는 콩이 빨리 싹이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매일 물을 듬뿍 주었다.
다른 집 밭에서도 새들과 농부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콩의 싹이 올라오면서 새싹을 새들이 따먹는 것이다. 아예 떡잎이 나도록 키워서 심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고 매일 밭에 가서 지키기도 하셨다. 매일 물을 주면서 3일 정도를 기다렸다. 신기하고 놀랍게 어느 날 통통하게 불어서 병아리의 날개 짓처럼 떡잎을 살며시 내밀면서 땅밖으로 나오는 싹튼 콩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나하나 다독여 주면서 올라오지 않은 자리에 옮겨심기도 하고 새가 쪼아 먹은 것은 뽑아버리기도 하면서 생명의 탄생을 즐거워하였다.
흙의 생명력이 참 신기하다. 어째서 심는 것에 따라 그 각각의 모습으로 생명을 피워내는지 조물주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 하면서 땅을 딛고 올라오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아이가 유치원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들떠서 들여다보며 좋아 하였다. 도시 콘크리트 벽속에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명들을 매일 교감 할 수 있다는 것은 탁월하고 필요한 선택인 것이다.
땅이 데워지고 열기가 올라오는 여름이 시작되니 밭에는 잡초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우리 밭에 식물들도 이젠 제법 자랐다. 꽃을 피우고 잎이 자라자 방울만한 토마토가 열리고 오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연두 빛 신록이 초록의 짙은 녹음으로 산과 들이 푸른 여름 즈음엔 나는 밭에서 별로 한 것 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자연이 내게 가득 안겨준 행복 인 것 같아서 기분이 풍성해 졌을 뿐 아니라 푸른색 먹 거리로 우리 식탁이 넘쳐났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밭에 나갈 즈음 이미 해는 따갑게 내리쬐고 밭에 앉아 있으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얼굴은 불에 대인 것 같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위에 지쳐서 밭에 나오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오려 발길을 돌리면 산을 타고 내려온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땀을 씻어주며 좀 더 머물다 가라는 달콤한 유혹은 멋진 것이었다. 그 즈음엔 휴가와 방학을 맞아 전에 도시에서 알던 사람들이 시골을 찾아와 주어서 그간의 지난 이야기들을 하며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그 들에게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서툰 왕초보 농사꾼이 가꾼 채소를 대접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들에겐 어떤 좋은 음식보다도 밭에서 무공해로 기른 채소는 몸과 마음이 좋아하는 즐거운 밥상이 되어주었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내가 싱싱한 채소라고 한 바구니씩 안겨줄 수 있어서 아쉬운 이별에 좋은 선물이 되었다. 자연이 부자가 되는 풍성한 계절 여름을 따라서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어김없이 절기를 따라서 아침저녁 공기가 선선해지고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었다. 이젠 들은 가을맞이로 바쁘다. 겨울 준비를 위해 배추와 무를 심고 봄에 심은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이다. 콩 까투리가 여리고 홀쭉하더니 이젠 탱글탱글 알맹이가 여물더니 노랗게 익는다. 그동안 잘 자라 준 고구마도 이젠 땅에서 파낼 때가 되었다. 그동안 시름시름하던 고추는 농약을 하지 않아서 벌레 먹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한 바구니 정도 말릴 수 있었다. 밭둑을 따라서 늦게 서야 심었던 옥수수도 다 익어서 맛있게 먹고 옥수수 대를 걷어 내었다.
심기만 하고 거두기와 갈무리도 처음인 나는 다른 논밭에서 일하시는 순서대로 따라서 해보았다. 추수라고 해야 들깨 5되, 노란 콩3되 검은콩2되, 팥2되 정도로 농사를 많이 지으시는 분들이 보기엔 소꿉놀이 정도였다. 남들처럼 밭에 나가서 자리를 펴고 않아서 곡식도 털고, 겨울 걱정도 하면서 겨울 채소도 돌보았다. 가을 햇살은 가을만큼의 고운 빛과 가을색의 서늘해오는 바람을 안고 찾아와 주었다. 바람이 차가와 지면서 햇볕에 앉아서 나뭇잎들이 둥글게 말려서 날아가는 아름다운 비행을 보았다. 내 마음도 마른 씨앗들처럼 겨울과 봄 준비를 위해 높이 날고 있었다.
시골로 이사 와서 벌써 일 년을 살았다. 아이들은 일주년 기념행사를 해야 한다면서 식당엘 가거나 문화행사 관람을 가야 한다고 들떠서 밝게 재잘거린다. 너무 바빠서 제일 먼저 희생 타였던 가족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 이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저녁엔 딸의 하루 일과 보고 형식의 수다를 은근히 기다리며 딸의 귀가를 이제는 기다린다. 아들의 자전거가 감나무 숲길에 나타나주길 기다리는 오후가 있다. 내가 언제 아이들을 기다려 준적이 있었나? 또 다른 생의 길에서 만나는 행복이 있다.
오래도록 햇볕을 벗 삼아 바람을 벗 삼아 흙을 만지면서 자연이 살아가는 것을 들여다보고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 관절염과 오랜 골병에도 끄떡 앉고 해만 뜨면 들로 나오시는 어른들도 위로해서 말벗도 되어드리고 친구도 되어 드리면서 도란도란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