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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백인천은 19홈런, 20도루로 ‘20-20’클럽에 가입할 뻔 했던 호타준족이었다
4월 1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 이승엽(32)이 2군으로 내려갔다. 이승엽을 응원하던 많은 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65살의 사내도 있었다. 사내도 지금 이승엽의 나이 즈음 일본프로야구에서 2군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음해 퍼시픽리그 타율 1위에 올랐다. 잠시 뒤 사내는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받는 이는 ‘사랑하는 제자, 승엽’ 보내는 이는 ‘스승 백인천’이었다.
백인천 혹은 하쿠진덴(백인천의 일본어 표기). 1982년 이후의 백인천을 모르는 야구팬은 없다. 그러나 이승엽 이전에 배트 하나로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하쿠진덴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한국야구출신 선수 가운데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화려한 성적을 거뒀으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1982년 이전의 백인천을 그의 육성을 담아 소개하고자 한다.
젊은 날의 꿈과 야망 그리고 장훈과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4번 타자 시절, 퍼시픽리그 타율 1위 등극과 2천 안타의 좌절. 여기다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이 되야했던 백인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야구를 떠나 인생의 소중한 교훈담이 될 것이다.
올해로 실질적인 야구 데뷔 50주년을 맞는 백인천의 1982년 이전 현역시절의 이야기는 총 3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1편에 이어)
젊은 날의 꿈과 야망 그리고 장훈과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4번 타자 시절, 퍼시픽리그 타율 1위 등극과 2천 안타의 좌절. 여기다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이 되야했던 백인천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야구를 떠나 인생의 소중한 교훈담이 될 것이다.
올해로 실질적인 야구 데뷔 50주년을 맞는 백인천의 1982년 이전 현역시절의 이야기는 총 3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일본행이고 뭐고 이럴 바엔 야구를 때려 치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김성근, 배수찬 그리고 김영조 감독이랑 나, 대한야구협회장이 5.16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방문하게 됐어. 지금 미국대사관 있지? 거기가 옛날 국가재건회의가 있던 자리라고. 그때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부위원장 겸 대한체육회 회장이 이주일(작고)준장이야. 그 양반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수고했다고 우릴 부른 모양이야.
이준장을 만나기 전 야구협회장이 날 불러서 “너, 이 자식 일본에 가겠느니 뭐하니 입도 뻥긋하지 마라. 네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우리 모두 모가지”라고 사인을 줬어. 겉으로야 “알겠다”고 했지.
그때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씨가 이주일 준장 참모였다고. 수고했다면서 금일봉을 주기에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를 선물로 건넸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앞으로 애로사항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하라고 하더군.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 “저기”하고 손을 들었더니 야구협회장 인상이 노래지는 거야(웃음).
이준장이 “뭐냐?”고 묻더라고. 대뜸 “저 좀 일본에 보내주십시오”라고 했지. 그분들은 이미 일본신문을 통해 나와 도에이의 계약건을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야구협회장이 끼어드는 게 아니야. “백군이 나이가 어려 사리분별을 못합니다. 저런 선수는 더 성장해 일본과의 국제경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하면서 재를 뿌리는 거야. ‘아이고, 이제 정말 일본행은 물 건너갔구나’하는데.
이준장이 정색을 하면서 “아니 당신 무슨 소리 하는거냐”말이지. “어린 선수가 꿈을 품고 있으면 그걸 키워줘야지 방해를 하면 쓰겠느냐"고 하는 거야. 옆에 있던 이후락 씨 보고 당장 여론조사 착수하라고 지시를 내렸어. 나중에 국민 80%가 백인천의 일본행을 찬성한다는 신문기사가 나왔지 뭐야. 뭔 말이 필요하겠어. 1달 만에 수속 다 끝내고 1962년 2월 2일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고. 꿈만 같았지. 꿈. 꿈 말이네.
옛날 야구 이야기
내 이야기만 했더니 지루하지? 아까 자네가 1950, 60년대에는 어떻게 훈련했는가 물었지. 내 알려줌세. 잘 듣게.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사실 훈련프로그램이란 게 따로 없었네. 타이어에 배트 후려치고 아니면 타이어를 어깨에 메고 운동장을 뛰는 게 다였어. 내 경우는 뜀박질을 많이 했네. 노는 날에도 늘 혼자 북한산에 갔지. 그때 영양식이 어디 있어. 벤또(도시락)는 무슨 벤또. 산에 가서 배고프면 산딸기 따 먹고 하는 거지. 상당히 자연적인 훈련을 많이 한 셈이야(웃음).
장비도 시원찮았어. 자네 땐 아마추어 선수들이 죄다 알루미늄 배트를 썼지? 우린 미제 나무 방망이를 썼네. 홈런이 거의 나오질 않았어. 방망이도 방망이지만 공이 문제였어. 옛날에는 공을 치면 그냥 찌그러졌다고. 그런 공이 담장을 넘어가기나 하겠나? 지금처럼 공이 흰색도 아니고 누런 벽지 색깔이야. 거기다 실밥을 손으로 다 꿰맸다고. 그걸 풀어서 스웨터를 짜기도 했다니까(웃음). 자네 못 믿겠다는 눈치인데 정말이야.
난 예외가 아니었냐고? 그런 소리 말게. 나 역시 홈런은 많이 치지 못했어. 기록을 잘 보라고. 나를 강타자로 인식하게 된 건 국제대회에서 잘 쳤기 때문이야. 국내 대회에서 잘한 것도 재일동포팀의 영향이 컸어. 우리랑 경기를 하면 그 친구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공을 썼거든. 국산공과는 달리 어찌나 쭉쭉 타구가 뻗어 가는지.
여담인데 일전에 일본 가서 요미우리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랑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팅연습을 함께 봤어. 오가사와라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더라고. 그걸 보고 하라감독이 나한테 “선배님 지금은 옛날 공과는 질이 다릅니다. 타구가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더군.
훈련이나 용품이 그런데 야구이론이 있을 리 있겠나. 일본야구 서적을 보면서 독학하거나 재일동포팀 경기를 보면서 하나하나 배웠지. 우리가 잊으면 안 될 게 재일동포팀이 한국야구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는 거야. 배트 그립부터 수비하는 법 하다못해 경기 매너까지 다 배웠다고.
김성근 감독이나 돌아가신 배수찬 씨가 대표적인 이들이야. 국가대표 때 김감독 공을 직접 받기도 했는데 아주 뛰어난 투수였어. 특히나 배수창 씨가 일본에서 배워온 드롭 커브는 거의 마구에 가까웠다네. 그렇게 고생 고생하다가 지금은 성공했으니까 잘 된 거지.
잘 아는구먼. 맞아. 그때 투수들도 지금 같지 않았어. 죄다 직구만 던졌지. 간간히 커브를 섞어 던지는 투수들도 있었지만 많지 않았어. 나중에 슬라이더, 슈트(싱커) 던지는 투수들이 나왔지. 생각나는 투수는 누가 뭐래도 김양중 선배야. 농협 때 나랑 배터리였는데 그분 몸은 지금 선수들도 감히 따라올 수가 없어. 정말 다리가 아름다리 나무처럼 굵고 단단했어. 마음만 먹으면 공 던지고 몇 시간이라도 한발로 서 있었을 양반이야. 단단한 하체에서 뿜어 나오는 김양중 선배의 강속구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잡지 않았나.
그렇게 던지면서도 뭐 어디 아프다는 소릴 한 적이 없다고. 얼마 전에 뵙는데 연세가 있으셔서 그렇지 야구원로들 보면 정말 강질이야. 강질. 장태영 선배는 실업야구 때는 주로 외야를 봐서 투수로서는 잘 기억이 안나.
김영덕 씨? 내가 도에이 입단했을 때 그분은 난카이 호크스 2군에 있다가 그만뒀어. 하루는 나한테 전화가 왔다고. 한국에서 야구를 하려는데 팀을 소개를 해달라고 말이야. 마침 고교 은사였던 김일배 감독님이 대한통운팀을 맡고 계셔서 그쪽을 소개했지. 그런데 일이 꼬였지 뭐야. 김영덕 씨가 대한통운에서 너무 잘 던지니까 상업은행에서 데려간 거야. 그 통에 대한통운 야구단이 아예 해체됐어.
한 번은 도에이가 방한해서 한국실업선발팀이랑 경기를 벌였는데 투수가 김영덕 씨였다고. 장이형(장훈)이랑 나랑 아주 박살을 냈어. 내가 소개해주고 아니고는 문제될 게 없어. 본인도 어려웠을 테지만 자기 때문에 팀이 사라진 걸 모르고 있더라고. 장이형이 경기 끝나고 한 소리 하기도 했는데.
프로야구 원년 때 OB 감독하면서 그 양반 딴에는 선배라고 날 새까만 후배취급 하려다가 나한테 반발을 사기도 했어. 막말로 일본프로야구 실적은 내가 그분보다 훨씬 앞서거든. 그럼 나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지. 다 지난 이야기이니 곡해해서 듣지 않기를 바라네. 그렇게 치열하게 살 때도 있었다는 것만 알아두면 돼. 나도 젊었을 때가 있었다는 뜻이야.
좌절과 성장 그리고 추억
그래 이제 본격적인 일본프로야구 이야기를 해보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야구선배들 한 말이 귀에서 자꾸 울리더라고. 일본 가기 전 인사 차 들렀을 때 선배들이 격려도 했지만 걱정을 많이 했거든. 특히나 “김성근, 배수찬처럼 일본에서 잘하던 선수들도 한국으로 오는 판에 네가 성공할 것 같으냐”라고 하는 분들이 있었어. 그 생각이 떠올려지니까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 그래도 내가 일본행을 고집한 건 그런 소리를 듣고 좌절하기보다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야.
일본에 도착하고 수속 다 끝마칠 때까지 뭐 꿈이었지. 꿈. 그런데 입국장에 들어서니까 2백여 명이 되는 취재진이 카메라 플래시를 ‘펑펑’ 터트리는 거야. 그땐 한국기자들 카메라에는 플래시라는 게 없었다고. 그때 꿈에서 깨어났지. 슬슬 불안해졌어. 호텔에서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서 온 백인천 어쩌고저쩌고’ 써져 있는데 갑자기 ‘내가 정말 이런 환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선수인가’ 회의가 들기 시작하더라니까.
![]() 1990년 초반 백인천의 지인들이 만든 기념패 |
다음날은 푹 쉬고 기차로 도에이 스프링캠프가 있는 다마카와로 이동했어. 그때가 2월 24일이야. 팀 스프링캠프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지. 캠프 도착해서 유니폼을 받았는데 등번호가 68번이야. 선수단과 서로 인사하는데 가장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역시 장이형(장훈)이었어.
구장 안으로 들어가니까 이건 순 새하얀 공이 그라운드에 잔뜩 깔려있는 거라. 그 공들을 보면서 황홀경에 빠졌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코칭스태프 가운데 한분이 나보고 배팅케이지에 들어가 공을 쳐보라는 거야. 난 연습이 전혀 안된 상태였거든. 공이 맞을 리 있나. 배팅볼 던지는 투수도 어찌나 공이 빠르고 제구가 정확한지 한개도 못 쳤어.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내다가 러닝을 하는데 다마카와 바람이 무척 거세요. 생전 그런 연습을 해보기나 했나. 발이 고장난거야. 훈련하다가 부상당하는 것도 첫 경험이었지.
3개월 정도 재활하면서 숙소에 혼자 있는데 ‘내가 여기 왜 왔나’ 싶은 거라. 아무리 야구하고 싶어 일본까지 왔다지만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나 싶은 거야. 부모님 생각도 나고. 형님 얼굴도 떠오르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그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네. (자세를 바로 잡은 뒤)그렇게 1년이 지나갔어. 통역? 이 사람 그때 통역이 가당키나 해. 그냥 주워들으면서 일본어 배우는 거지.
그해 11월 도에이와 고쿠데스 스왈로스(야쿠르트의 전신)가 한국에서 2차례 초청경기를 벌였네. 근래 요미우리가 한국에서 센트럴리그 개막전을 치르고 싶다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퍼시픽리그 도에이와 고쿠데스가 서울에서 개막전을 치를 뻔 했어. 결국 무산됐지. 초청경기는 그 개막전이 성사되지 않아 아쉬운 데로 열린 경기였네. 어쨌거나 그땐 그런대로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프로야구에 많이 적응을 했나봐. 고국팬들에게 예전보다 높은 수준의 야구를 보여드릴 수 있었거든.
꿈의 데뷔전
내 데뷔전이라, 기억을 더듬어 보자고. 그렇지. 1963년 5월이었을 거야. 2군리그인 웨스턴리그에서 뛰고 있는데 내가 전날 끝내기 홈런을 쳤어. 그때는 2군 선수라도 오전에 2군 경를 뛰면 1군 야간경기에 나가 보조 포수를 봐야했다고. 그날도 코치가 나더러 2군에 있다가 진구구장 난카이전에 보조 포수를 보라는 거야. 달랑 포수 글러브 들고 2군 경기 끝나자마자 진구구장행 버스를 탔어.
자네 미즈하라 시게루라고 들어봤나? (고개를 끄덕이자) 그래? 미즈하라는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인물일세. 게이오대 출신에다 요미우리 선수로 명성을 날렸지. 하지만 일본이 일으킨 제2차 대전 때 군에 끌려가 소련군 포로가 됐다네. 아마 내 기억에 1949년에서야 소련 수용소에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온 걸로 아네. 그 뒤 요미우리 감독으로도 맹활약을 펼쳤는데 이 감독이 1962년 도에이 감독으로 온 거야. 그해 도에이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않았나. 검증된 명장이었지.
이번에도 말이 길어졌는데 미즈하라 감독이 보통 4시30분에 구장에 나와. 그날은 무슨 일로 날 보더니 “배팅케이지 들어가서 방망이 한 번 쳐봐”하는 거야. 당연히 보조 포수로 왔으니까 내가 무슨 배트가 있겠나. 장이형 배트 빌려서 타석에 섰지. 1군 타석에 처음 서니까 얼마나 신기해. 공을 ‘딱딱’ 치는데 신이 날수 밖에. 미즈하라 감독이 “됐다”고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들어가 쳐봐”하는 거야. 또 신나게 쳤지.
내가 그러고 있으니까 장이형이 궁금했나봐. 내편으로 막 달려오더라고. 그때 미즈하라 감독이 장이형한테 뭐라고 귀띔을 했어. 타석에서 나오니까 장이형이 이러는 거야. “너 오늘 경기 나간다”고. 그때는 출전선수명단을 미리 짜는 게 아니고 그때그때 적었거든. 기쁘기는 하지만 내가 뭘 가져온 게 있나. 장이형이 “내 방망이 들고 치라”고 해 그나마 안심했지.
예상치 않은 데뷔전이었네. 그래 꿈의 데뷔전이었어. 마침 우리팀 투수도 나랑 2군에서 한솥밥을 먹던 이시가와 료조였네. 첫 타석에 들어서는데 공이 포수 미트로 가는지 빠지는지 도통 모르겠는 거야. 공이 잘 들어왔나 보려고 슬쩍 뒤를 돌아봤지. 당연히 심판이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안 묻겠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둘러댔지. 그러다 일부러 심판 발을 스파이크로 밟았어. 깜짝 놀라면서 “왜 발을 밟느냐”면서 껑충 뛰더라고.
미안하다고 했지. 왜 그랬냐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을 해봐야 할 거 아니야. 그렇다고 내발을 밟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웃음). 우리팀 더그아웃에서 선참들이 “공 잘 보고 치라”는 소리는 들리지, 긴장은 했지 하필 거기다 포수가 노무라야. 문득 장이형이 나한테 한 소리가 생각나더라고.“인천아, 그냥 후려쳐라.” 내가 장이형한테 “딱 3번 휘두르고 들어오겠다”고 했어.
볼카운트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공이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왔다 싶으면 냅다 배트를 휘둘렀어. 그런데 놀랍게도 배트에 공이 “딱”하고 맞지 뭐야. 걸음아 나 살려라 1루를 돌아 2루까지 뛰었어. 그런데 2루 심판이 날 보더니 “아웃”그러는 거야.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데 관중이 웃고 난리가 났어. 그때까지 영문을 몰랐지. 동료 선수가 포수 장비를 달아주다가 묻더라고. “인천아. 진짜 타구 아까웠다. 그런데 넌 인마 공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2루까지 뛰어?"”그래서 내가 “몰랐다”했더니 이 녀석이 더그아웃에 들어가 내말을 전했는지 다들 배꼽을 잡고 웃는 거야.
그날 안타를 치긴 쳤네. 4타석 때였지. (눈을 감으며)그게 지금도 꿈인가 싶어. 당시는 오죽했겠나. 숙소에서 잠이 안 오는 거야. 아침 신문을 봐야 믿겠더라고. 물론 다음날 신문에 이름이 나왔네. ‘백인천 데뷔 첫 안타’라는 기사가 나왔지. 팬들에게 축전도 오고. 그런데 정작 중요했던 날은 다음날이었네. 공교롭게 이날 1천 경기 출전, 1천안타를 기록한 선참 선수에 대한 기념식이 열렸어. 그걸 가만히 지켜보니까 새로운 목표가 생기더라고.
난 일본에서 1경기만 뛰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해왔어. 당시 한국야구출신 선수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뛴다는 건 상상도 못할 때 아닌가. 그런데 선참의 시상식을 보니까 ‘아, 나도 999안타, 999경기를 채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 훗날 1천 안타, 1천 경기 그리고 1천500안타, 1천500경기 다 채웠지만 한국프로야구에 참여하는 바람에 2천 안타, 2천 경기는 기록하지 못했네. 자네도 잘 듣게. 인생이 그런 거야. 젊을 때 꿈을 꾸지 않으면 결국 꿈으로 그친다네. 그게 이뤄지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나중에 판단할 문제야. 도전하게. 도전하면 후회가 덜해.
‘제2의 노무라’를 꿈꾸던 포수 백인천
물 한잔 마시고 다시 하지. 그래 뭐든 물어보게. 뭐? 내가 2006년 니혼햄 파이터스(도에이 후신)팬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팀 포수 가운데 3위에 선정됐다고? 이거 영광이네그려. 음, 아주 좋은 포수는 아니었을 테지만 어깨는 좋았어.
일화를 하나 소개하지. 난카이에 히로세 요시노리(주:통산 도루 596개)라는 선수가 있었다고. 거짓말 같겠지만 10번 뛰면 9번이 도루성공이야.(주:1964년 도루 72, 도루자 9)이때는 지금처럼 투수보크가 엄격하지 않았어. 세트 포지션으로 투구할 때는 두손을 모은 상태에서 한번은 정지를 해야 하잖아. 그땐 투수가 그냥 획하고 던져도 됐다고. 당연히 도루하기가 더 힘들었지. 그러니까 이 친구가 대단한 선수라는 거야.
히로세를 잡기 위해 늘 준비를 해뒀어. 경기 전 투수한테 항상 1루 견제한 다음 히로세가 생각할 틈을 주지 말고 바로 투구하라고 일렀지. 어느 경기에서 5회인가 녀석이 도루를 시도하다 나한테 잡혔다고. 내편에 운이 따른 게지.
그러다 9회말 2사까지 왔네. 1-0으로 우리가 난카이를 앞서고 있었지. 그런데 하필 투수가 히로세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거야. 손에 땀이 흐르더군. 분명 녀석은 뛸 테고 난 녀석을 잡아야 하는데 확률로 치자면 내가 불리했거든. 왜냐? 난 이미 1번을 잡지 않았나. 이젠 녀석이 성공할 차례였던 거야. 설마 9회말 2사인데 뛰겠냐고? 야구는 사람이 하는 운동일세. 데이터나 작전보다 자존심이 우선할 수도 있는 걸세. 5회 도루자를 기록한 녀석이 도루를 포기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네. 난카이 감독도 ‘설마 이번에도 죽겠나’했겠지.
그때 역시나 녀석이 투수가 공을 던지자마자 뛰더군. 난 엉덩이를 들 사이도 없이 2루를 향해 공을 던졌네. (고개를 숙이며)누가 이겼을 것 같나? (천천히 오른손을 아래서 위로 향하며) 2루심의 입에서 “아웃”하는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지더군. 히로세가 1경기에 같은 포수에게 2번이나 도루자를 기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네.
그런데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이유가 뭐냐고? 일단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그해 2군에 있는데 이마에 뾰두라지가 났어. 마스크를 못 쓰겠는 거야. 2군 사쿠라이 감독이 하루는 날 외야수로 내보내는 거라. 이때도 9회말 2사 주자 풀베이스 상황이었네. 우리가 상대팀에 4-3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한방이면 언제든 역전당할 위기였지. 내가 좌익수를 보고 있는데 이거 안 되려니까 타구가 내편으로 오지 뭔가. 그냥 공은 보지도 않고 뛰었다고. 운이 좋았는지 펜스를 기대 가까스로 타구를 잡았어. 동료들이 좋아 죽지. 안 그렇겠어. 외야 훈련 한 번도 안한 내가 허슬 플레이를 보였으니 좋아들 하지.
그날 경기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사쿠라이 감독이 1군 미즈하라 감독한테 가서 보고를 했네. 나를 외야수로 썼는데 허슬 플레이를 했다는 말을 했나봐. 포수가 마땅치 않으면 외야수로 써도 괜찮겠다는 사족을 달기도 했다는데 미즈하라 감독이 크게 역정을 냈다 하더군. “백인천은 발 빠른 포수로 키워야하는데 쓸데없이 외야수를 뭐 하러 시키느냐”고 말이지. 그러고 나서 날 외야수로 절대 못쓰게 했다고.
그렇게 4년 정도가 흘러 1966년 정규시즌 난카이전이었어. 그때 난카이 선발투수로 하야시 도시히로(주:1965년 17승3패 평균자책 2.25 기록)가 나왔어. 정말 훌륭한 왼손투수였네. 그런데 우리팀이 포수는 많은데 쓸 만한 외야수가 없는 거라. 내가 왼손투수 공을 무척 잘 쳤거든. 미즈하라 감독이 난데없이 나보고 좌익수를 보라는 거야. 나갔지.
6회 이후일 거야. 히구치 쇼조라는 난카이 선수가 무척 발이 빨랐다고. 하지만 난 포수니까 저 친구 타구가 어디로 많이 가는지 잘 알잖아. 좌익선상으로 수비위치를 이동했지. 누가 히구치 아니랄까봐 좌익선상 안타를 쳤는데 아, 글쎄 2루까지 뛰는 거야. 아마 내가 포수니까 ‘지 까짓 게 수비를 제대로 하겠나’ 싶었겠지. 반대로 포수니까 강견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나봐. 노바운드 송구로 히구치를 잡았어. 뭐, 다들 깜짝 놀랐지.
경기가 끝나고 미즈하라 감독이 호텔에서 날 불러. 갔지. 대뜸 “이참에 외야수로 전향하는 게 어때?”하는 거라. “전 포수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정중히 사양했네. 자네도 생각해 보게. 데뷔 4년 만에 이제 주전포수가 돼서 한창 재밌게 야구하고 있는데 외야수 가라면 가겠냐고. (고개를 끄덕이며)그랬네. 미즈하라 감독은 완강했어. “외야수로서 넌 충분한 자질이 있다. 포수보다 외야수가 선수생활도 오래 할 수 있으니까 너만 괜찮다면 내가 밀어 주겠다”하더군. 사실 미즈하라 감독이 포수를 외야수로 전향시켜 성공한 사례가 많았거든. 결국 다음날부터 중견수로 출전했네. 돌아보면 19년 동안 일본프로야구에서 뛸 수 있었던 건 이때 포지션 전환이 성공했기 때문인 것 같아.
하리모토 이사오, 장훈, 장이형
하리모토 이사오. 그래 장훈은 대단한 실력자였네. 장이형을 보면서 야구에 대한 열의, 노력을 많이 배웠지. (눈을 감으며)장이형의 노력, 정말 대단했네.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야구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불살랐는지. 머리도 상당히 비상했어.
![]() 1960년 도에이 시절의 장훈. 그의 영혼은 아직도 투쟁중이다 |
도에이에 입단했을 때 장이형이 그러더군. “인천아, 뭐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특히나 너 운동하는데 방해되는 녀석들이 있으면 당장 말해.” 잊지 못할 말은 이거였어. “혹시 주위에서 널 가리켜 '조센징'이라는 놈 있냐. 있으면 내 이 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
안타까운 건 그 정도 야구실적이면 어디서든 감독이든 뭘 하든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그게 안 된 거라. 자네도 알겠지만 감독은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나. 야구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을 만큼 대단한 야구선수였지만 어느 팀에서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네.
그래 장이형의 반골기질 때문이었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살며 숱한 서러움과 비난을 받다보니 반골기질이 몸에 배 있었어.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야구선수가 됐는데도 일본인을 대할 때 거부감을 나타냈거든. 옆에서 보면 본인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그런 성향이 흘러나왔네. 일본인들도 장이형의 반골기질을 이해하지 않고 받아주지 않았지. 만약 장이형이 타이완계인 오 사다하루(주:오는 중국계 일본인)처럼 두루 뭉실한 성격이었다면 미래는 달랐을 거야.
1975년 내가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전신)로 트레이드될 때 장이형도 함께 가는가 싶었지만 좌절됐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나? "장훈은 반골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다이헤이요의 방침 때문이었네. 요즘이야 일본도 많이 좋아졌지. 외국인 차별 그 가운데 한국인 차별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네. 위대한 야구인 장훈의 영향 때문인지 나도 현역 때 그렇게 심한 차별은 받은 적이 없네. 물론 나 역시 장이형처럼 일본프로야구팀에 입단할 미래의 후배들을 위해 항상 자세를 똑바로 했네.
자네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게 있어. 지금도 장이형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걸세. 그 싸움이 끝날 때 즈음이면 장이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장훈을 기억해주게. 예전이나 지금도 그는 늘 혼자이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