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빨간 장갑>
김이태
경화.
칼은 피를 먹고 자란다. 작은 폭탄들이 터지며 방금 베인 손가락을 간질이고 있다. 피 묻은 칼이 싱크대 위에 놓여 있고 아픈 것보다는, 칼이 지문(指紋) 새겨진 살덩이를 갈라내는 감촉에 더 불쾌해진다. 나는 점점 더 엄마를 닮아간다. 무를 턱없이 너무 얇게 썰려고 했다. 엄마 역시 사과 껍질이 두텁게 잘려지는 걸 참지 못했다.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지? 나 역시 그녀처럼 허구한 날 같은 걱정을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생활의 습관이다.
모처럼 근사한 식당에 가도 우리가 내든 딴 사람이 내든 항상 값부터 본다. 오후 세시부터 저녁하기 전까지 어느 시간대에 꼭 십 분이나 이십 분 낮잠을 잔다. 서태후, 태평공주 같은 스무 권짜리 비디오 시리즈를 차례로 빌려 보고 남편이 볼 때 같이 또 보면서 주석을 달아준다. 당신은 그렇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자꾸 사람 이름을 물어보냐며 귀찮은 척 상세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준다. 그는 꼭 우리 아버지처럼 삼분의 이쯤 보다가 쿡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한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고 마루로 가서 담요를 두르고 소설책을 본다. 가끔 그러다가 새벽이 당돌하게 밝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점점 우리 부모처럼 되어간다.
오늘 아침에는 남편이 일어나자마자 내 발가락을 깨무는 바람에 찰흙처럼 끈적한 새벽잠에서 건져졌다. 날카롭지만 아프진 않았다. 이불 밑으로 해서 그를 끄집어올렸다. 섹스를 한 아침은 그가 직접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만든다. 아버지도 그랬을까? 그리고는 푸스스 우그러져 있는 나의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오늘 그는 여덟시에 출근했다. 내게는 다시 열두 시간이라는 하루가 턱 놓였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세제를 한 스푼 넣고 뜨거운 물을 틀어주면 세탁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잘도 돌아간다.
“네가 집안에 들어앉을 줄 정말 몰랐어, 정말.”
내 자신을 변명할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당황스럽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그 돈 잘 버는 신랑 잡은 내가 대견해서? 조만간 여차하면 아이를 갖게 될 것 같아서? 그 말을 한 민숙이 항상 내게 그 어떤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어서?
어제였다. 전화가 왔다. 휴강인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며 맥주 두 병을 사들고 오겠다고 했다. 막 빨래를 넣고 있던 참이었고 놓여진 시간이 상큼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며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때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두세 시간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어쩌면 사람 만나는 일이 적은 내가 지나치게 민감해졌는지도 모른다.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서 투명한 유리 그릇에 고추장과 땅콩과 마른 새우를 담아 내왔다. 남편 친구들이 오면 으레 하는 것처럼. 그녀가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살림하는 여자로 순식간에 둔갑을 한 대학 동기를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
오징어를 잘게 찢어 이쁘게 담아가는 여자가 어떻게 아도르노를 읽는 여자와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대학교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파마를 하고 연한 분홍색, 주황색, 보라색으로 치장해서 바르던 그녀가 대학원을 들어가면서는 일체 화장기가 없어졌고 무채색의 헐렁한 스웨터만 걸치고 다닌다. 머리는 물론 생머리 단발을 했고 안경도 은테에서 까만 뿔테로 바뀌었다. 단단히 지적인 여자가 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학교는 어때?”
“학교가 아니라 주차장이야. 벤츠도 있어.”
그리고는 별다른 얘기 없이 현관을 들어올 때와 똑같이 약간 등을 구부정하게 해서 나갔다. 니네 신랑하고는 별 할말이 없다며…….
민숙, 다시 도서관에 들어와 있다. 마주 보게끔 이인용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앞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이 황망하게 책보를 도로 싸들고 나간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코트를 걸쳐놓았다. 의식에 잡티를 일으키는 그 어떤 타인도 용납하기 싫어서였다. 들어가는 문이 너무 작고 물건에 먼지가 가득 앉은 허술한 문방구에서 타는 듯한 붉은빛의 노트 한 권과 검은 볼펜 한 자루를 샀다. 쓴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쓰지 않고 있었고 마치 오래 전에 능숙하게 한 적이 있었던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법을 뜻밖에 잃어버린 사람처럼 당황해하고 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하는 간지럽고 안타까운 느낌. 갑자기 기억할 수 없었던 더스틴 호프만, 이란 이름처럼 얼굴은 빤한데 하도 막막해서 고통스럽기조차 한 느낌. 너무 안일하게 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쓰기는 써야 하는데 무엇을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 는 것이 말이 되나. 아니면, 무언가 쓰고는 싶어 죽겠는데 그게 무언지 통 모르겠다, 는 것이 말이 되나.
이곳은 적당히 따뜻하고 아주 조용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왜 몽유병자처럼 가는 곳마다 도서관을 가는가. 그 숨 막히고 아둔한 분위기에 매번 질식할 듯해서 헥헥거리며 도망쳐 나오면서…… 담배를 무리하게 끊은 사람처럼 다시 허전해서는 그곳을 찾는다. 고요하게 뻗어 있는 시간? 혹은 이마를 벌에 쏘인 듯 집중된 의식? 그런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타인의 시선이 가져다주는 긴장이 자기가 무엇인가 되게 거창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까.
혼자 방안에 있으면 곧잘 의미의 전체 단위가 통째로 잘려져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기본 욕구만 충족시켜주면 그만이다. 밖에 나오면 자기가 투영하는 자신의 상에 동기도 생기고 의욕도 생기고 하물며 오기까지 생기지만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진공 같은 내 방에 앉았노라면 줄곧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도대체 산다는 것,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되고 몽롱하게 한 개체의 종말을 상상한다. 이 느낌은 이슬처럼 가차없고 흩어지기 쉽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나는 점점 할말이 없다는 것만 깨닫고 있다. 할말이 없다. 몸 간수 잘하고 돈 아껴 쓰고 독어 공부 열심히 하고 졸리면 좀 자고. 그러다 다시 여섯시쯤 되면 목동으로 가서 인수를 두 시간 가르치고 그리고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학회지 따위를 읽다가 열시가 넘으면 이불을 깔고 그 안에 몸을 녹이며 열두시 종소리를 기다리다 자거나 말거나……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의욕이 통째로 오랫동안 사라질 수 있을까. 겨울 볕이 들었다 사그라졌다 하면서 시선을 취하게 한다. 엎드려 자기나 해볼까, 잠 자다 깨인 아이처럼 시큰둥해서 웅웅거리는 머릿속을 털어내려고 기를 쓰고 있다. 지금 내 생활이 너무 안이해서인가. 아니면 욕심을 내지 않고 게으르니 자연 퍼지고 무감각해지는 걸까. 계속 얼굴이 달아오르고 졸린 느낌이 든다. 깨어날 생각도 않는다. 허공에다 담배 연기로 그림을 그리듯 비몽사몽 머릿속에서 연기를 끓여내고 있다. 차라리 논노를 보며 담배를 피우러 갈까. 누군가 그랬던가. 나이를 먹으면 잡생각이 들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공부하는 머리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졸린 것일까. 임신을 해서 그런가.
나는 여기까지 쓰고 나서 노트를 덮었다. 실내 공기가 메스꺼워졌다. 경화네 집 흰 냉장고 생각이 났다. 우리의 상황은 왜 이처럼 뒤바뀌기만 할까. 우리는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 그녀가 박사 과정을 밟고 내가 집에서 불러오는 배를 흐뭇하게 껴안고 있어야 했다. 우리가 만약 일란성 쌍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방이 부러울 때마다 살짝살짝 바꿔가며 살 수 있다면 이토록 짓눌리게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와 세 번을 같이 잤을 때 내게 어떤 악의가 있었나? 그것은 악의가 아니라 단지 쾌락을 얻기 위한 것 혹은 되는 대로 가보지, 하는 방심이었다고 장담하지만 맨살의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그곳이 불륜의 현장인 호텔 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안방인 것처럼 푸근하게 여겨졌다. 아이를 기다리는 젊은 부부처럼 우리는 부드러운 섹스를 했다. 내가 그들의 결혼 생활을 방해할 어떤 의도도 없고 더군다나 그를 사랑하고 어쩌고 따위는…… 땅콩. 그는 내가 자기 아내의 친한 친구라는 데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고 우리가 세 번 자게 된 것은 우연이 흩뜨려주는 작고 화려한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그의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고 마침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고 저녁을 같이 먹었고 경화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가 같이 있다는 것을 일러주지 않는 것을 보며 짧고 순간적인 정사를 가진 것뿐이었다. 어딘지 초연하고 쇠 냄새가 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 그 역시 내게서 그런 비슷한 냄새를 맡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부담이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두들 도덕 관념이란 공인된 변명거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임. 의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리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큰 피해가 오지 않는 한 모든 것은 허용되어도 좋다. 경화에게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어느새 자신이 협박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그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유산(流産)을 했을 것이다.
경화.
민숙이 왜 왔다 간 것일까? 민숙은 여자 친구들간의 수다에 서툴기 짝이 없고 친구들 역시 민숙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한다. 말 중간중간에 잠시 멍해지는 그녀의 표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섣부르게 모든 걸 일반화시키고 싶어하는 정신적 습관이 출구를 못 찾고 얽히기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왜 여자들만 이런 잡사에 혼을 빼놓아야 해? 남자들도 마찬가지야. 헤어 스타일 가지고 세 시간을 떠든다고? 쓸데없는 장성들 얘기로 밤을 밝히잖아? 상관도 없으면서.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정치가 돌아가는 데 힘깨나 쓰니까 그렇다고 쳐. 그렇다고 나라 걱정하는 남자들이 진짜 나라 걱정하는 줄 알어? 병정놀이 하는 거라구. 대리 체험이야. 장이야 멍이야 하면서 자기들이 마치 큰 권력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서 민숙은 뭔가 아귀가 안 맞다는, 자기 머릿속에서 뭔가 잘못 걸러지고 있다는 표정을 한다.
그녀가 왜 왔다 간 것일까? 맥주도 마시지 않고 연신 땅콩만 손가락으로 으깨고 있었다. 애 안 가지니? 응, 아직 생각 없어. 애 낳고 나면 하도 끝장이라고 해서 다시 잡지사에 들어가서 터를 좀 닦아놓든지 아니면 뒤늦게 대학원이라도 들어가서 만학도라도 되든지 뭐든 내 할일을 좀 마련해놓고 가질려구.
“넌 뭐든지 다 가지려고 하는구나.”
민숙은 그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드문 일이다. 순간 의아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제삼자가 아무런 관심도 없이 뭉툭하게 내뱉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아니면 아주 가까운 언니나 동생이 시기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갈겨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내가 가진 게 뭐가 있니?”
라고 말을 해놓고도 등을 기대고 있는 소파에 잔잔한 꽃무늬가 놓인 것을 의식했다. 그래, 생전 치지 않는 피아노며 레이저 디스크며 양탄자 같은 것들이 있지.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야. 그가 이런 식으로 안정을 찾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누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는지는 몰라도 감사해야지. 내가 담배를 피워물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담배 끊는 약을 먹었니? 골초가 담배 연기에 인상을 쓰게?” 그녀는 요즘 들어 노처녀로 틀을 잡는지 신경이 예민해졌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 만나야지.”
나는 여보세요, 그럼, 이만, 처럼 그 말을 덧붙였다.
민숙……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다. 입덧이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왜 그날 갑자기 미혼모가 될 생각을 하며 의미심장한 궁리를 했을까. 그것도 죽자 살자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도 아닌데. 스물아홉. 대학 강사 미혼모. 뭔가 아귀가 안 맞다. 열일곱. 중학교 중퇴. 내가 그 집에 갔다 온 것은 단순한 심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나한테 잘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두고 보라구. 그들이 대상이 된 건 단순한 우연이다. 그러나 단순한 우연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가를 헤아려보면 나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사나운 운수를 탓해야 할 것이다.
민숙은 꼭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귤을 까서 우물우물 집어먹었다.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비틀리고 있는지 몰랐다. 단지 너무나 편안하고 자신만만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자기처럼 진지하지도 않고 인류에 대한 동정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을 구기고 싶었다. 그녀는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사 년, 이 년, 일 년. 띄엄띄엄이지만 이 동네에 산 지 칠 년이 된다. 징그럽다. 어떻게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훈훈하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보금자리의 냄새이다. 그런 그 달짝지근함에 그녀는 냉수를 청해야 했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샘물. 말갛게 혓바닥을 적셔주는 고급스러운 물을 마시며 그녀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갑자기 이토록 풍요롭게 살 수 있는가. 똑같이 방황하고 똑같이 사상에 매혹되어 숱한 시간을 집어먹었는데…… 이것이 단지 그들 부모의 덕일까.
그녀의 하숙방은 냉기가 돌았다. 전기 장판을 꽂고 나서도 그녀는 계속 방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옅은 어지럼증이 흩어진 책들 사이로 연기처럼 번져나간다. 여긴 너무 공기가 희박해. 활자(活字)의 세계. 나는 마치 수녀처럼 정갈한 척 단순하게 살아가고 그러면서 무감각하게 아이도 낳으려고 하고 있어.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노란 알약 네 개가 담긴 약국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 개월까진 이걸로도 된다고. 이것만 집어삼키면 모든 것은 곧이곧대로 흘러간다. 그들은 그들대로 그들의 예정된 삶을 살아가고 나는…… 미학 개론이라고 적힌 강의 노트가 보였다. 아, 저 세계. 마치 진리가 저만치 네모 동그라미로 만져질 듯 추상의 벽돌을 쌓고 그것이 비누든 두부든 감격하기조차 하는 세계. 젊고 무지한 얼굴들. 그리고 섣부른 꿈을 꾸는 얼굴들. 그녀는 다시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니면 내가 조로하는 것일까. 이곳은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른 나이대로 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회색 울 스커트가 갑옷처럼 느껴졌다. 벌써 배가 불러오는 것은 아닐 텐데. 그녀는 라디오를 틀려다 다시 그 아파트 안의 미니 콤포넌트를 기억하고는 테이프를 보이는 대로 마구 던져버렸다.
경화, 그녀는 작은 시한 폭탄들을 감지하려고 했다. 저 혼자 별난 줄 알고 있다가 자기 역시 숱한 사람들이 겪어간 그 길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순 깨닫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집안에 틀어박히면서부터였다. 여성잡지에 나오는 것 같은 신혼 생활을 꾸미려는 무의식적 노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중이 정해놓은 표준치의 모범. 아니면 여성잡지들이 멋대로 정해놓은 기준치를 생각도 안 해보고 무장적 혀 빼물고 따라가려는 대중. 그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수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남몰래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여유롭게 살림만 하는 주부. 전자레인지 광고에 나오는 정도의 부엌. 그 부엌을 갖출 수 있을 만큼의 아파트 평수.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려면 부모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받고 시작하든지 아니면 남편의 월수입이 최소한 사백만 원 이상이어야 하는데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의 남성 중 월 사백만 원 이상을 버는 사람은 전체의 3퍼센트가 될까 말까 하니까 결국은 구십 프로 이상의 여자들이 그 수준에 못 미치는 생활을 영위하며 잡지를 뒤적거리고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부모 탓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논리를 혼자 내세워보고는 피식 웃었다.
‘왜 저런 몸을 해가지고 억척스럽게 일을 하나 모르겠어. 암만 살기가 힘들대지만.’ 남자도 아닌 여자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을 때 그녀는 그 말에 반쯤 동조했다. 배부른 동료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여자는 은근히 결혼을 인생의 굴레라고 뻔뻔하게 주장하는 노처녀 상사였다. 자신의 선택을 항상 내보이고 왜 그 선택이 올바른가를 틈만 나면 증명해야 하는 그녀의 처지도 딱했지만 사실 하루종일 힘들어 보이는 그 동료의 얼굴에 연민보다는 짜증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 년이 지난 뒤 지금 문득 그 일을 돌이킨 그녀는 그때 왜 그 노처녀의 따귀를 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화가 뒤늦게 치밀었다. 누구도,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모습을 비웃을 권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바득하는 사람들이 서로 나눌 수 있는 신뢰감은 얼마나 견고한가. 그녀는 가계부를 적지 않는 자신을 생각했다. 엄마도 언제부터인가 가계부를 적지 않았어. 나는 그녀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기 시작한 것일까? 돈 잘 버는 남편을 가진 할일 없는 여자의 길. 그녀의 몸에 작은 소름이 돋았다. 민숙이 나를 판단하는 그 시선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이미 조건지어져 있다. 그렇다면 내가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식 위로조차 꺼내기 싫어하는 두 개의 잠재성. 그녀는 그 둘 중 어느 하나가 조만간 자신을 후려치리라는 생각에 슈퍼에 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계속 마늘만 다지고 있었다. 커피병을 깨끗이 씻고 말려서 다진 마늘을 가득 채워두는 것. 이것도 어느새 엄마에게 배운 것이고 국이나 찌개에 넣을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봉지봉지 잘게 싸서 두는 것도 따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 갖은 애교를 떠는 것은 어디서 배웠을까? 엄마는 무뚝뚝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부지런하고 곧이곧대로인 성격. 앙탈을 부리는 법도 암내를 풍기는 법도 없다. 그녀는 자기에게 내재된 또다른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어두운 미래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기억. 그곳은 항상 쇠못으로 단단히 박힌 창고처럼 열어보아선 안 될 금지된 구역이지만 언제 그 유전의 지뢰가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 앞을 두리번거리게 했다.
민숙.
민숙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그녀는 계속 어떤 아이를 안고 기차를 타고 내리고 다른 기차를 기다리고 지나쳐버리는 기차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꿈을 꾸었고 어느새 자기가 자리를 깔고 누웠을까, 누군가 들어와서 자기를 자리에 눕혔을 리도 없다, 애비 없는 자식을 낳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또다른 꿈을 꾸고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 역시 꿈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단지 실수했던 것뿐이다. 실수했던 것을 사건으로 번지게 하려는 이 심리가 대체 뭐야. 아무런 건덕지도 없으면서. 단지 외롭고 심심하니까?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비난의 눈초리 속에 머리카락 쥐어뜯기고 사는 게 나을 성싶어서? 사람들은 노처녀가 되는 것이 마치 무슨 굉장한 논의거리라도 되는 듯이 흰눈을 하고 보는데 인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지. 어떻게 살다보니 이렇게 됐어요. 저도 왜 혼기를 놓쳤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그렇게 미친 듯이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가끔 인사말이 얼마나 난폭하게 들리는지 모르고들 한다. 시집 안 가요? 얘, 누구는 벌써 애가 둘인데, 넌 뭐 하느라고 시집도 안 가고…… 시집가서 애 낳는 게 뭐 그리 장한 일이라고, 시집 안 간 사람은 마치 어디 병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놀리기만 할까. 그런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은 시집가서 애 낳는 게 정말 장한 일처럼 여겨진다. 남편 있고 애 있으면 굳이 자기 삶에 관한 치사한 합리화가 필요 없지 않을까. 난 왜 이런 식으로 살고 있는가. 과연 생에 보람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가 따위. 이런 말들은 다 새삼스럽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 혼자서 자신있게 사는 여자…… 그들이 유지해야 하는 긴장의 무게. 그 무게를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아이를 먼저 가지고 아이 아버지를 찾는 것. 그것은 서양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내가 돈을 아주 잘 버는 여류 변호사도 아닌데…… 그녀는 다시 노란 알약을 꺼내보았다. 반짝거리는 알약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이 자살하는 약이라면 하는 상상을 했다. 사람은 자살을 하기 전에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이것저것 짚어보고 혼자 히죽거리고 할까. 그녀는 문득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별로 심각해지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성실성이며 진실된 인간성 따위를 측정받고 있다는 의식 때문에 숱하게 심각한 얼굴들이 나타나는 법이다. 혼자 있을 때도 심각해지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찬물을 들이켰다. 그녀는 늑대가 나온다고 거짓말을 하는 양치기 소년처럼 알약을 먹을 듯이 찬물을 들이켜놓고는 눈빛만 반짝거린 채 알약을 도로 봉투에 집어넣고 서랍 한구석에 가만히 놓았다. 마치 경화 부부가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 듯했다. 제발 그걸 삼켜, 왜 엉뚱한 짓을 해서 사람 골병 들게 하려고 하니, 이건 너무나 억지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그들이 날뛰고 기막혀하는 표정을 그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미쳐가고 있는 걸까. 그녀는 문득 신문 기사조의 비난 소리도 들었다. 고귀한 생명을 가지고 멋대로 놀음을 하는 파렴치한 대학 강사…… 내가 그냥 막바로 생명예찬론자가 되는 것도 괜찮겠지? 어떤 이유고 사정이고 고귀한 생명을 칼질하는 낙태란 있을 수 없다. 저주를 받든 축복을 받든 일단 점지된 아이, 우선은 낳고 보겠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유혹이야, 어쩌자고? 그들에 대한 심술? 그렇지만 엉망이 되는 건 너 자신이야. 학교에는 붙어 있을 것 같아? 모가지가 날아가도 열댓 번은 날아가겠다. 낳고 나면 혼자서 키울 거야? 어떻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걷잡을 수 없어 하숙집 부엌으로 갔다. 반찬 서너 가지에 상보가 씌어 있었다. 국 뎁혀 드려요? 일하는 아이가 젖은 손을 엉덩이에 문지르며 물어보았다. 차라리 무지해서 배가 남산만해지도록 모르고 있기라도 했으면…… 그녀는 도무지 이 강렬한 욕망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나 상상 다 제쳐놓고 마음이 여려서 그런가? 분명히 감상적인 타입은 아닌데 어딘지 군지렁거리기 좋아하는 점액질이어서 그런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 멸치볶음 왜 이렇게 다니?”
“단 거 좋아하잖아요? 일부러 설탕 잔뜩 처넣었는데…….” 아이는 괜한 투정을 한다는 식으로 우거지국을 흐칠 듯이 퍼서는 그녀 앞에 갖다놓았다. 국을 한 숟갈 뜨자 콤콤하게 썩은 행주 냄새가 났다. 그녀는 숟가락을 놓고 망연히 식탁 위의 물컵을 바라보았다. 벌써 나를 지배해오기 시작하는구나. 이개월이면 아직 사람 모양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자기에게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힘겹게 되새겼다.
경화, 꽤 많이 마셨는데도 취한 티를 내지 않는 남자는 독하다. 남편의 소독약 냄새 풍기는 양복 저고리를 옷장 안에 걸며 경화는 자기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남자를 택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아지는 남자에 다시 기괴해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비슷비슷하게 살다 가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남자도 우리 아버지처럼 적어도 바람을 피우지는 않겠군. 날 들들 볶을 정도로 성실해서 결국은 내가 제풀에 나동그라지게 만들지도 몰라. 그는 몇 마디를 나지막이 횡설거리며 곧장 이부자리로 기어들어갔다.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하루종일 남편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이렇게 다시 남게 되는구나. 그녀는 자기가 지나치게 빨리 모든 것에 끝장을 보려고 달려드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성격이 급한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밤과 음악 사이로>란 프로그램에 채널을 맞춰놓고 경화는 무공해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해장국을 끓여주기 위해서였다. 해장국 콩나물은 꽁지를 따지 말 것. 숙취를 풀어주는 무슨 성분이 꽁지에 제일 많다고, 그래서 역시 우리 조상은 현명하기 짝이 없다고. 이규태 코너에서 배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남편을 모시게 될 줄 누가 알았어? 맞벌이를 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뭐가 답답해서? 아이나 가지지 그새를 못 참고…… 별 대단한 일도 아니고 대단한 수입도 아니면서 괜히 일한다고 티만 내며 실속 없이 설쳐댄다…… 결혼 생활 이 년이 마치 이십 년처럼 다가왔다. 결혼을 함과 동시에 그녀는 뭇 사람들이 얘기하는 모든 상식, 습관, 도덕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보며 놀라워했다. 내가 현모양처가 될 작심을 하고 시집을 온 것도 아니고, 직장은 하도 거지 같으니까 미련 없이 그만둔 거고, 직장 그만두고 막상 결혼하게 되니까 이래저래 잔재미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거고, 이제 다시 일을 찾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모든 논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입구를 틀어막고 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녀는 콩나물을 생으로 씹고 있었다.
“나야. 민숙이. 내일 만날래? 할 얘기가 있어.”
며칠 전 왔을 때 분위기만 잡더니 결국 할 얘기를 못한 모양이다.
“너, 무슨 문제 있니?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니, 이 야밤에 무슨 소리니?” “만나서 얘기해.”
그들은 대학교 앞 카페 루이자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다시 경화가 모처럼 대학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구내 식당 햄버거 쌓아놓은 데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다 결국 경화는 괜히 쪽 팔리는 것 같애, 라며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민숙과 경화……
가파르게 올라가는 계단은 세월이 한참 지나 더 삐그덕거렸고 짙은 갈색의 나무 문만이 부지런한 여주인에 의해 기름을 잔뜩 먹고 따스한 윤택을 발했다. 경화는 창가에 앉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 민숙이 드디어 나나 무스쿠리 티가 난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은 이 집 여주인처럼 부드럽고 완강하게 살이 찔 거라고 생각했다. 알약은 티슈에 싸여 민숙의 지갑 속 동전들 틈에 끼여 있었고 민숙은 다시 할 얘기를 바꿔버렸다. 경화는 고작 할 얘기란 게 다음주 수요일 누구네 백일 가야 한다는 거냐며 스트로로 맥주를 소리나게 빨아 마셨고 이왕 나서는 김에 아예 동창회장 하면 되겠다고 했다. 민숙은 전날 밤 혼자 있을 때처럼 다시 피식 웃었고 무조건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경화는 다시, 이왕 들은 얘긴데 애 얼굴이라도 보고 오자고 했다. 민숙은 니네 애기 생기면 내가 대모 해도 되니, 하고 물었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대모가 뭐냐는 말에 그냥 멋있잖아, 대부. 대모. 너나 빨리 짝 찾으라는 말에 신문광고라도 내볼까, 라며 또 피식 웃었다. 민숙은 자기의 주머니 안에 든 지갑을 만지작거렸고 한 손으로 지갑을 열어 그 안에 있는 티슈를 벗겼다. 알약의 매끈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녀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예고를 하고 닥치는 재난은 없는 법, 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지 조금 외롭게 느꼈다.
민숙!
“날이 언제 이렇게 추워졌지?”
그 사람은, 무슨 소리, 꽃샘 추위인데, 라고 말했다.
Nothing really matters…… 퀸의 노래가 들려왔다. Oh, Carry On.
저 사람, 내 앞에서 순한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저 남자. 우리 둘을 같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할 것이라 알고 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는 순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웃지 마세요, 정말 뭘 좀 물어보려고 해요.”
그녀는 맹물을 좀 마셨다.
“요셉 알죠, 마리아의 남편.”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알죠, 알아듣겠죠, 나랑 결혼할 수 있어요? 나는 그 순간 용기를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대쪽 같은 선비님. 아버지가 인삼 농사를 한다고, 인삼을 많이 먹어 체력 하나는 장담한다고,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냐고, 자기를 믿으라고, 떡이 되게 술을 마신 날, 오바이트할 때 등을 쳐주며 내 옆에 쭈그리고 같이 앉아 있던 이 서른 후반의 남자, 아침에 해장국을 사주러 나온 남자. Hold On.
우린 아주 고상한 교수 부부가 되겠죠. 당신을 따라가면 나도 떵떵거리겠죠. 아주 우아하고 권위 있게. 당신에게 기대는 내 어떤 마음을 알죠, 푸근한 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성냥팔이 같은 여자의 속마음을 당신은 알고, 그걸 자만하고 있죠, 인삼집 둘째 아드님.
어두움, 형광등도 꺼버린 독서실 책상 위의 어두움 속에 빛도 필요 없이 무조건 써나가는 이 어두움을 알고 있단 말이죠? “잠깐.”
민숙은 화장실로 갔다. 두터운 나무 문이 짤깍하고 질 좋게 저절로 닫혔다. 화장한 얼굴을 찬물로 문질렀다. 세수, 세수. 벌써 네번째 화장실로 왔어요. 이 생리(生理)를 버얼써 알고 있다고? 그럼 얘기해, 이 아이를 같이 키우자고.
포도주 한 잔을 마셨는데, 왜 이렇게 취기가 돌지? 더 마시면 안 돼. 그녀는 양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 작게 박힌 작고 센 전구. 호두만한 것이 한 평 반의 화장실을 비추고 있었다. 왜? 모든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냥 떼버려. 사랑이 낳는 아이가 아니잖아. 사랑으로 낳은 아이들도 장담 못 하는 판국에…….
이 디제이는 어쩌자고 같은 곡을 계속 틀지?
마마, 우우우, 케리 온.
경화, 남편은 수술 뒤처리 때문에 다시 늦는다고 했다. 모닝 글로리. 의대를 십 년 만에 졸업한 그가 꿰매는 재주에 애착을 보인 건 결혼한 후이고 그는 사람의 살을 잘 꿰맨다.
다 연습이야. 왼손으로 바늘을 들고 방석 하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지만 그의 바늘땀은 일 미리 정도로 보는 사람을 감탄케 했다.
“그래, 성형외과는 돈 잘 번다더라.”
“난 어떡하지?”
“뭘 어떡해?”
엄마가 저 싸가지 없는 사위를 예쁘게 보는 이유. 날 호강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느이 아버진 멋있는 사람이야.”
“못산다고 그럴 땐 언제고?”
“못 되긴 해도 멋이 있다.”
“꼴불견이네, 다 늙어서 멋있고 어쩌고.”
나는 엄마가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독재자라고, 나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라고, 편한 사람 만나라고. 아, 이 모든 게 잘난 남편 욕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돈 많으면 향수 뿌리고 정신과나 다녀, 그게 유행이라며. 너도 뭔가 심리적 불만이 있을 거고.” “돈 받고도 안 하는 내 얘길 왜 돈까지 줘가며 해?” “시간 때우기 좋잖아.”
엄마, 인생이 이제 겨우 시작된 것 같은데…….
모든 게 어중간해진다. 몸이 우선 편하니까, 이대로 한평생 개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 이렇게 늦어?”
“씨 받을 사이나 있는 줄 알아? 걸핏하면 병원서 불러내는데.” “너, 약 좀 먹어야겠다.”
무슨 약? 보약.
이것아, 네가 아이 가지고 싶다는 걸 보여야 남자도 마음이 생기지, 딴 생각만 하는데.
그래서 보약까지 먹게 되었다. 반은 화장실에 버려버리며 냄새만 풍겼다. 남편의 생뚱한 시선.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그래도. 뭐가? 있어야 되잖아.
왜? 그냥. 그럼 미용실 가는 시간이나 줄여. 왜? 머리카락을 기르라고. 왜? 그렇게 모르면서 보약은 왜 먹니? 고량주를 두 잔 스트레이트로 마시고는, 그는 잔다. 코를 골며, 사랑스럽게 잔다. 아이의 얼굴을 하고…… 아, 오줌이 마렵다.
오(吳)민숙
하숙방으로 되돌아왔다. 약국에서 몸살 앓는 약을 한 뭉텅이나 받아들고 일 리터짜리 콜라까지 사왔다. 통경제와 몸살약. 한꺼번에 다 먹든지, 아무것도 먹지 말든지. 아이가 들어섰는데 보기만 해도 징그러울 정도로 가짓수가 많은 알약을 삼킨다는 건…… 그녀는 다시 책상 모퉁이에 엄지손가락을 누지르며 흔들거렸다. 춥고 떨린다. 이미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캄캄한 어둠과 그녀와 그녀 안에 들어선 정체 모를 한 생명체뿐이다. 누지르고 있는 엄지손가락을 축으로 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버지, 생전 본 적이 없는 아버지. 당신의 자식이 다시 이렇게 벌벌 떨며 서 있는 게 보여요?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야.
엄지손가락이 비틀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찧었다.
왜 이렇게 떨리기만 하지?
온몸에 열이 오르고 찧은 얼굴에도 날카로운 경련이 일었다.
자, 약이란 약은 모두 처먹어. 너 혼자라도 살길을 찾아보란 말이야.
그녀의 마음은 전화통에 가 있었다. 전화를 하든 전화가 오든, 전화 수화기를 붙들고 싶었다.
난 편했기 때문에,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 같아서 그 남자와 몸을 섞은 거야. 단지 따뜻한 살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서, 누군가의 품속에서 잠들고 싶었기 때문에. 한 번 자보고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또 잤어? 혹시나 해서, 익숙해질 줄 알고. 넌 바지 앞지퍼를 열고 다니는 애야, 네 인생에도 흥미가 없고 남의 인생도 무시하면서 어떻게 인생 하나를 또 낳으려 하니?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몰랐다. 자문자답이겠지.
애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피임도 안 하고, 생리한 지 일 주일 뒤가 가장 적확한 시기란 걸 알면서 애 가질 생각이 없었다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져도 상관 없을 것 같았어, 그때 내 심정이. 아쉬운 거 없어 보이는 네 친구가 그렇게 미웠니? 당장 엉망이 된 건 너 아니야.
무릎이 꺾였다.
이런 소리 듣기 싫어. 선택을 해야 하잖아? 그냥 어떻게 좀 안 될까.
그녀는 자신의 비겁과 아둔에 진절머리를 쳤다.
그냥 좀 어떻게 안 될까…… 그런 식으로 벌써 태어난 지 몇 년째 살아온 거니? 방석을 머리 위에 덮어쓰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한마디만.
식모 아이가 방문을 덜컥 열어보고는 지가 멍하니 서 있었다.
“언니, 어디 아파?”
그녀는 배시시 웃을 듯 그 아이를 쳐다보며 약봉지를 흔들었다. 묵직한 알약들.
“물 갖다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신(辛)경화
말을 접어두는 법이 없는 아이인데…….
아파트 틈 사이로 황혼이 우습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경화는 타월을 접었다. 접은 타월을 목욕탕 안으로 들고 가는데 그런 생각이 났다. 웅얼거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다하는 아이인데, 어제는 이상했어. 왜 자꾸 손가락을 콧구멍 쪽으로 갖다 대지? 인상을 찌푸리며.
You know, I love you. 라디오에서 흘러간 팝송이 자주 들려왔다.
What are you afraid of?
경화는 혼잣말로 타임, 이라고 했다. 타임이 아니라 네 자신이겠지. 생활을 잃어버린 네 자신. 언제 잃어버린지도 모르는 네 자신. 빤 빨래를 또 빨아대려는 네 자신.
그녀는 민숙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죄스러워하며 머뭇거리는 민숙의 숙인 얼굴. 그 표정이 무슨…….
갑자기 어떤 의미가 그녀의 관절을 뚫고 지나갔다. Shiver. 뒷목뼈 바로 아래, 누군가 죽창을 그리로 쑤셔넣는 것 같은 통증. 설마.
가위눌린 듯했지만 자기는 멀쩡히 세탁기를 다시 틀고 있었는데, 어떤 시커멓게 응축된 구름 같은 것이 뒤쪽에서 덮쳤다. 순식간에 세탁기의 모퉁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물 묻은 손은 매끄러운 표면을 미끄러져 세탁기의 둥근 모서리에 턱을 찧었다. 얼얼해진 턱을 괴고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
잘못 느낀 거겠지. 헛것이야.
그림자라고 하기에는 볼륨감이 있고,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전 통증은 너무 날카롭고…… 그녀는 미심쩍게 목 뒤를 매만졌지만 어디에도 아프거나 예민한 부분은 없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반쯤 배부른 상태로, 해야 할 살림도 없는데 에이프런을 챙겨 입고, 맨날 뻗기 일보 직전의 남편을 붙들고, 투정을 부리며 인생의 허무를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 몸에서 화장실 냄새가 난다. 아무리 씻어도 구정물 냄새가 난다. 그녀는 거울을 보았다. 얼굴의 탄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 혓바닥을 내밀어보았는데, 허연 태가 입 안 가득 끼어 있었다. 칫솔로 혓바닥을 한참 닦았는데도 태는 잘 없어지지 않았다.
민숙에게 전화를 했다. 아프다며 만나기 싫다고 했다. 나 할 얘기가 있어. 뭔데? 내가 좀 이상해지는 거 같아. 뭐가? 입 안에 허연 태가 마구 끼고 대낮인데 가위눌리고 그래. 그럼 병원에 가봐.
우리 둘 다 왜 이러지.
경화는 수화기를 놓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남편이 발로 찰 때까지 잤다. 웬일이야, 이렇게 뻗어 있고. 그는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질렀다. 나, 일자리를 구해야겠어.
그들은 오랜만에 잠자리를 같이했다.
이튿날 경화는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하다가 선배가 하는 산부인과로 갔다. 원래는 남편 선배인데 그냥 언니라고 부르며 공짜 진찰을 받았다. 모녀가 이대째 하는 병원이라 겉은 어수룩했지만 환자가 많았고 나이 먹은 간호사들이 편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미안해. 바쁜데.”
“괜찮아. 별 이상은 없는데, 오히려 걱정하기 시작하면 더 안 돼.” “차라리 일을 할까, 무슨 일이든”
“알아서 해. 뭐든, 오히려 몸이 고되면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지.” 사람 좋아 보이던 선배가 갑자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삼십도 안 된 게 벌써 유한 마담 타령을 해? 한창 버둥거리고 살아도 모자라는 판국에. 그래서 그녀는 많은 말, 궁금했던 말을 묻어두고 사직동 로터리 쪽으로 나와 길을 걸었다. 결혼하면 곧 임신할 줄 알고, 살림이나 잘하지 싶어서, 그러던 게 어느새 이 년이 지났고, 나는 갑자기 시간의 궁지에 몰린 느낌이고, 무엇이든 엄두가 잘 안 나고, 걸핏하면 누구 흉내나 내려 하고. 일, 일, 일을 찾아야 해. 아이 하나 낳았다고 당장 팽개칠 수 있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 그런데 내가 무얼 제대로 할 줄 알지? 자격증도 없고 취직 시험 공부라고는 해본 일이 없었잖아. 그때 누구처럼 나 몰라라, 하고 토플 같은 거라도 들어둘걸. 그때. 무얼 믿고 취직 시험 준비하던 아이들을 그렇게 비웃고 들떠 있기만 했지? 그때도 하는 일은 없었어. 장사를 할까? 저런 것? 큰 대로변에 조그만 꽃가게가 있었다. 단지 상가에 있는 꽃가게 아줌마가 말했다. 삼 개월 돈 내고 배우고 그 다음 내가 연구를 많이 했어. 삼천 원이던 국화 한 다발이 졸지에 만육천 원으로 둔갑하는 저 포장술이나 배울까? 의사 마누라가 고상하게 꽃가게 한다면 뭐랄 사람 없겠지. 어차피 이 다음에 개업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시어머니의 찌그러진 얼굴, 시집와서 한번도 펴진 적이 없던 얼굴. 당신 아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애가 어떻게 호렸을까, 하는 얼굴. 아파트는커녕 살림 가구조차 변변치 못했던.
우리 세월이 십 년이면 그쪽은 삼십 년이네.
애써 마음을 다지고 좋게 생각하려 해도 시엄마의 얼굴은 떠오를 때마다 오금을 저려놓고 꼼짝도 못 하게 만든다.
엄마 말은, 너 없었으면 그 사람 의대는 제대로 졸업했겠니,이지만 오금 저리는 것은 할 수 없다. 오금이 저린다. 가게, 꽃가게, 당최 무얼 어떻게 시작하지? 보증금, 목이 좋은 자리, 도매시장, 그런 걸 다 어떻게 하는 거지? 갑자기 작은 가게라도 옹골차게 꾸리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였다.
김이태 1965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키타큐슈 대학 대학원에 재학중.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몽유기(夢遊記)" 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중편소설에 "궤도를 이탈한 별", 장편소설에 『전함 큐브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