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겨울호를 펴내면서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인간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달걀이 먼저이냐, 닭이 먼저이냐’라는 말과는 매우 다른 말인데, 왜냐하면 인간이 없으면 어떠한 책도 탄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달걀이 먼저이냐, 닭이 먼저이냐’는 닭이라는 종의 기원을 성찰해 보는 수수께끼이며 영원히 그 해답이 주어질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인간이 책을 만들고 책이 인간을 만든다’라는 말은 ‘인간이 먼저이냐, 책이 먼저이냐’라는 수수께끼의 문제로 비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책은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며, 따라서 그 책에는 그 저자의 이름이 삭제할 수 없는 지문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책에는 이 세상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저자는 그 삶의 지혜의 연출자(창작자)로서의 그 책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지혜란 우리 인간들을 지상낙원으로 인도해 주는 진리를 말하고, 우리 인간들은 그 진리를 연출해낸 사람들을 향해서, 마치 부처나 예수처럼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성자의 반열에 든 인간들이고, 공자, 맹자, 셰익스피어, 아인시타인도 성자의 반열에 든 인간들이다. 우리 인간들이 이러한 저자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저작권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만약에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은 문화 이전의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란 새로운 진리의 창조자이며,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스승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어느 때부터 이러한 저자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그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악한 인간들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른바, ‘저자의 죽음’을 부르짖고 있는 롤랑 바르트나 앨빈 토플러가 바로 그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도 있고, ‘생산자(창작자)와 소비자(독자)의 분업이 해체되고 재결합되는 프로슈밍prosuming이 부의 원천이 된다’는 말도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모든 책들은 그 경전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고,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웹 2.0이나 위키피디아’처럼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불경이나 성경, 또는 코란이나 공자의 {논어}, 또,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좀 더 엄격하게 따져보면 익명의 제자들이나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편찬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들은 그 익명의 저자들이 포함된 대표 저자로서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와 공자와 사마천과 김부식을 향하여, 마치, 우리 인간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표해 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저자와 저작권은 근대 이후, 즉, 자본주의 시대에 형성된 개념이며, 그 산물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책을 쓴다는 것은 돈이 될 수도 없었고, 따라서 대다수의 책들은 무명(익명)의 저자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도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쓴 것이며, 불경도 수많은 부처의 제자들이 쓴 것이다. 호머도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셰익스피어도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옛날에는 대량으로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은 커녕, 이 책의 원료가 되는 종이의 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더군다나 이 책을 읽어줄 수 있는 독자들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책이란 양피지나 목판에 씌어진 것이며, 따라서 몇몇의 소수의 귀족들만이 그 독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에 의하여 인쇄술이 발달하고, 그 문자의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출판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며, 바로, 이때에, 저자와 독자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책을 쓰는 사람이며, 독자는 그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다. 생산자(작가)가 있으면 소비자(독자)가 있게 마련이고, 소비자(독자)가 있으면 생산자(작가)가 있게 마련이다. 생산자는 자기 자신의 작품(물품)을 판매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비자는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을 유지하지 안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지위는 고정불변한 지위가 아닌 데, 왜냐하면 작가는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생산자이지만, 그의 생활의 대부분은 소비자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 모두는----그가 농부이건, 학자이건, 제조업자이건, 상인이건 간에----생산자이면서도 소비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상업행위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이며, 사유재산제도가 양성화되어 있는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시장제도와 사유재산제도는 그 문제점이 엄청나게 크고, 그 첨예한 예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빈부의 격차’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시장제도와 사유재산제도는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그 개선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시장제도와 사유재산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시장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하면 물물의 교환이 어렵게 되고, 또한, 사유재산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하면 인간의 창의성이 쇠퇴하고, 그만큼의 근로의욕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가 더 이상 그 이상적인 체제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국적 자본이든, 그 무슨 자본이든지간에, 경제적 강자가 경제적 약자를 함부로 못잡아 먹게하는 선에서 자유시장제도도 그 보완대책이 시급하고, 또한, 무한대의 자본의 축적과 부의 세습을 방비하는 선에서 사유재산제도도 그 보완대책이 시급하다.
저자는 진리의 생산자이며,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스승이 아닐 수가 없다. 저자의 권위와 저작권은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논문이나 책은 재화임에 틀림없다. 거의 모든 재화에는 소유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논문과 책은 저자가 소유권, 곧 저작권을 갖는다. 저작권은 신성불가침해서 저자 스스로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 예컨대 어느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은 저자가 논문의 전부 또는 상당부분을 다른 학술지나 단행본에 중복 게재하면 저작권을 위반한 ‘범법자’가 된다. 그런 저자는 동일한 상품을 이중으로 판매한 파렴치범으로 지탄을 받는다. 언제부턴가 ‘자기 표절’이라는 말이 유령처럼 학문 세계에 떠돌면서, ‘죄의식’ 없이 행했던 지난날의 행위들이 언론과 청문회의 도마 위에 올려져 심판받는 일들이 벌어진다.
----김기봉, [저작권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법정 ‘무소유’의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쳘학과현실}, 2010년 가을호)에서
라는 역사학자 김기봉의 말은 사이비 학자의 궤변에 불과하며,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표절이란 타인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인 창작품을 가로채 가는 도둑질에 지나지 않으며, 논문의 이중--삼중의 중복 게재는 단 하나의 논문으로 자기 자신의 업적을 부풀리고, 이중--삼중으로 연구비를 수령해 가는 사기행위에 지나지 않는다.학자란 학문 연구를 통해서 진리를 생산하고, 그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성자의 반열에 올라가야 할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왜, 그런데, 김기봉은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탄생과 죽음, 또는 저작권의 생성과 그 소멸현상을 살펴보면서, 모든 저작권을 부정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또는 “디지털 사회주의”를 역설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이미 창작자(학자)로서 그 생산성을 잃어버린지가 오래되었고, 타인의 창작물에 대한 표절과 자기표절(논문의 이중--삼중의 중복게재 )의 유혹에서 자유롭지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디지털 사회주의’란 말도 하나의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고, 그 개념이 성립될 수 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웹 2.0과 위키피디아”에서처럼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구글처럼, 또는 도요다나 현대자동차처럼, 대부분이 그 지식(상표권, 특허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세인 것이다. 칸트와 헤겔과 E. H 카아와 토인비와 니체의 저작들은 어떠하고, 보들레르와 랭보와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피카소의 저작들은 또 어떠한가?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구글의 프로그램을 함부로 표절(복제)하면 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법당국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창작물에 대한 표절(복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저자의 지위는 영원하지만, 저작권이란 그의 사망 이후 50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멸하게 되어 있는 한시적인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작권이란 그 저자의 업적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우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김기봉이 소리높여 외치지 않아도 곧바로 모든 인류의 공적 자산으로 귀속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디지털 사회주의라는 말로, 또는 앨빈 토플러의 ‘프로슈머’라는 말로 저자와 저작권의 사망을 선고하면서, 타인의 창작품에 대한 표절과 자기 표절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김기봉의 망언은 우리 대한민국의 학문의 사망선고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로 사상과 이론을 생산하고, 그 사상과 이론을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을 인도해 나가야 할 역사학자가 모든 저자의 죽음과 모든 저작권의 소멸을 선언하는 현상은 도둑놈이 도둑놈의 입장에서, 그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왜, 김기봉은 저자의 죽음과 저작권의 소멸을 역설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고 그 인세와 원고료를 챙겨가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김기봉은 ‘디지털 사회주의’을 부르짖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자고는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사회주의’는 김기봉이 자기 자신의 연봉과 그 사유재산에 대한 집착에 반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공산당 선언’과도 같은 혁명의 발상이며, 또한, 자기 자신과 우리 학자들의 불성실을 호도하려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김기봉의 글, [저작권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을 실어준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한 철학잡지, {철학과현실}도 표절에 의한, 표절을 위한 잡지에 지나지 않는다.
김기봉의 글은 역사학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사망선고이자, 우리 대한민국의 학문의 사망선고에 맞닿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지의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그 사십 이 번째로 황정산의 [현대시와 영화적 표현방식]을 내보낸다. 황정산의 [현대시와 영화적 표현방식]은 ‘영화시대에 글쓰기 역시 영화적인 글쓰기가’ 되리라는 전제 아래, 시적인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영화적인 감성과 상상력이 어떻게 상호영향을 미치고있는가를 따져보는 소중한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서는 하종오 시인과 박무웅 시인, 그리고 손택수 시인을 초대했다. 하종오 시인은 195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고,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반대쪽 천국},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 타운}, {입국자들} 등이 있으며, 그의 시세계는 ‘경계인의 삶’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경계인이란 이쪽과 저쪽, 그러나 그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은 사람을 말하고, 그 경계인의 쓰디쓴 고통과 그 진정성에 의하여 이쪽과 저쪽, 혹은 남북분단과도 같은 대립과 갈등을 초극해 보겠다는 하종오 시인의 의지가 창출해낸 인간을 말한다. 박무웅 시인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고, 1995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소나무는 바위에 뿌리를 박는다}와 {내 마음의 UFO} 등이 있으며, 그의 시세계는 ‘투쟁 속의 조화’로 설명할 수가 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적이 있으면 동지가 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전쟁이 있으면 평화가 있다. 이 ‘투쟁 속의 조화’는 시의 축제가 되고, 박무웅 시인은 이 시의 축제를 위한 순교자가 되어 간다. 손택수 시인은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뒤, 부산에서 성장했고,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과 {목련 전차}와 {나무의 수사학}이 있으며, 애지문학상, 신동엽 창작상, 이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말과 사물이 일체화된 전원사회를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훼손된 대도시에서의 삶은 생존만이 최고의 삶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택수의 ‘나무의 수사학’은 ‘반어법의 수사학’이며, 치욕으로 푸르러진 삶이 그 생성의 토대가 된다. 하종오의 [저항시의 시효가 끝나고, 서정시의 시효가 끝나고] 외 4편과 장성규의 작품론 [분단의 경계, 경계의 서정}과 박무웅의 [축구공은 축제] 외 4편과 반경환의 작품론 [시의 축제], 그리고 손택수의 [나무의 수사학 1]과 김영희의 작품론 [죽어 제 그늘 위에 다시 피어나는 꽃]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는 강서완 시인과 조유리 시인의 시들을 내보낸다. 강서완 시인은 경기 안성에서 태어났고, 2008년 {애지}로 등단했다. 조유리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8년 {문학 선}으로 등단했다. 강서완 시인의 [떠도는 구두] 외 4편과 이승하의 작품론 [생의 비극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와 조유리 시인의 [원무] 외 4편과 이승희의 작품론 [정직한 몸의 상처가 주는 아름다움]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멍나무] 외 9편을 응모해온 유현서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당선작품과 당선소감, 그리고 심사평은 본문을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제8회 애지문학상 심사가 있었고, 시부문에는 김혜영 시인의 [J의 연구실]이, 문학비평부문에는 이경수 교수의 [우리는 무엇을 뒤섞고 싶었을까--2000년대 시의 혼종성에 관한 단상]이 그 수상작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애지문학상 상금은 각각 500만원씩이며, 제8회 애지문학상, 애지신인문학상 시상식은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오후 5시, 대전 유성문화원에서 있을 예정이다.
지혜사랑 33번 정연희의 {호랑거미 역사책}, 지혜사랑 34번 권순자의 {검은 늪}, 지혜사랑 35번 박정원의 {뼈 없는 뼈}에 대한 출간기념회가 지난 9월 충북 옥천에서 있었고, 이번 10월에는 지혜사랑 36번 강정이의 {꽃똥}, 지혜사랑 37번 백소연의 {바다를 낚는 여자}에 대한 출간기념회가 대전에서 있었다. 여러모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드디어 우리 {애지}는 ‘도서출판 지혜’를 탄생시켰고, 우리는 ‘도서출판 지혜’를 통하여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혁명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되고, 우리 충청도가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전진하고, 또, 전진할 것이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
제8회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혜영 시인과 이경수 교수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역대 수상자들
제1회 수상자 시부문 이대흠, 문학비평부문 장석주
제2회 수상자 시부문 함민복, 문학비평부문 유성호
제3회 수상자 시부문 손택수, 문학비평부문 권혁웅
제4회 수상자 시부문 이은채, 문학비평부문 홍용희
제5회 수상자 시부문 김선태, 문학비평부문 하상일
제6회 수상자 시부문 민경환, 문학비평부문 오형엽
제7회 수상자 시부문 윤의섭, 문학비평부문 이재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