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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 그리스도가 이루어지기까지!
갈라디아서 4장 12절-20절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 몇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비밀을 기꺼이 그리고 철저히 지켜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결혼했다가 이혼했었습니다. 그 후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이혼한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여인을 사랑했고 그래서 자기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두 달 동안 교제를 하다 보니 자기의 과거를 밝히는 것이 더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처음에 고백할껄” 하고 후회했지만, 그 둘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행복하게 보이는 결혼생활이었습니다. 결혼생활 중, 그는 혼신을 기울여 사업에 몰두했고, 교회 봉사도 헌신적으로 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일에도 헌신적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잘 섬겼습니다. 그는 헌신적인 교회생활과 희생적인 봉사 그리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사업, 그러니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45세에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비밀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의 결혼생활이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비밀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하여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헌신적인 교회봉사와 희생적인 구제활동 등으로, 자기의 죄값을 치루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현재의 자신의 결혼, 자신의 가정’을 지켜주시는 담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자기가 이제까지 헌신적으로 일했던 일들이 모두 허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의 비밀을 고백했더라면, 처음이든 나중이든 빠를수록 좋았지만, 아무 때라도 자기의 비밀을 아내에게 고백했더라면 그는 자신과 가족을 엄청난 비극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으로부터 풀려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생활 즉 주일성수, 헌금, 봉사를 참회하듯이 했고 또 용서받기 위하여 했고, 자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을 감추기 위하여 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허탈감과 자괴감으로 엄청나게 괴로워했습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의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붙잡혀있는 삶을 살고 갇혀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4장 11절부터 20절을 통해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관하여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복음을 받아 들이고 보여 준 첫사랑, 그 첫사랑의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다음, 그 첫사랑이 어떻게 타락하여 자유가 율법으로 전락했는지 사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락한 그 사랑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사랑의 시작 : 자유(自由) (12절-16절)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의 어조가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호소합니다. “내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져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우정을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졌기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이제 너희들도 다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라.”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아라!” “너희들은 나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했다” 는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의 메시지를 처음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하거나 공격하지 아니하고 기쁘게 받아들였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바울과 영적인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합니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은 소유, 복종, 탐욕, 또는 거짓과 쾌락입니다. 자유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의 시작, 그리고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가 간질, 또는 심한 안질, 또는 척추와 관련된 질병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고통의 강도가 심하고, 그 고통의 기간이 오래되었습니다. 율법적으로 판단한다면 육체의 질병은 영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아니한 형벌 또는 징계로서 육체에 가시가 꽂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질병을 보고 바울의 믿음과 성품과 경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대에 보편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환영했고, 그의 복음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그들이 율법적 공식으로부터 자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은혜와 함께 시작합니다.
사랑을 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이고, 연약하게 보이는 그것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강하게 보입니다. 아름답고 강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섬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섬기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은혜와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의 추함과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로와집니다. 열등감과 우월감도 사라집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름답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즉 우리가 율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자유해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더 경건해지거나 더 도덕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벌써 이미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더해질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사랑에 가끔 위기가 오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 사이에 위기가 유혹처럼 슬그머니 기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불화가 생겼습니다. 무엇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갈라 놓았을까요? 그들의 사랑이 타락했습니다. 그 사랑이 왜 타락했을까요?
2. 사랑의 타락 : 율법(律法)(17-18절)
17절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어떤 사람들이 들어 와서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랑에 흠집을 냈습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입니다. 17절과 18절에 “열심을 내다”라는 동사가 세 번 나옵니다. 이 동사는 헬라어로 ‘젤레오’ zeleo 이고, 명사형은 ‘젤롯’ zelot'인데, 젤롯은 ‘열심을 내는 사람’, ‘열심당원’, 또는 그룹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 ‘셀롯이라는 시몬’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낸다’는 동사는 열성적 유대주의자들, 또는 극단적 율법주의자들, 또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전문용어, 또는 고유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이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들처럼 유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전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율법과 전통을 지켜야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이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분열시키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고, 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거나 더나아가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서로 분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으나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은 타락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국은 분열입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말은 사망입니다.
2000년 5월 21일 서울 한 쪽에서 세상이 경악한 부모 토막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부모 토막 살해 사건이었습니다. 범인의 이름은 이은석이고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비교적 중류에 속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이은석 군을 세 차례 만난 한 심리학자 교수가 그 충격적인 과정을 심리학적 조명과 함께 출판한 책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입니다. 아내와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읽어가면서 이 아이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어릴 때부터 청년까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기를 아주 꼼꼼하게 적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자기를 학대했던 내용을 조목조목 적은 놓은 항목들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어릴 때, 혼난 후 무릎 꿇고 회개 기도한 것.
2. 무릎 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
그의 부모는 아들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열심히! 도덕적으로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리원칙주의자라서 인간관계가 미숙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자식을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친답시고 애정표현과 사람과의 친교를 게을리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은석 군을 철저하게 교육하면 할수록 은석 군은 성장하면서 마음 속에 증오를 키워왔습니다. 결국 이것은 율법, 율법적 교육, 율법적 신앙, 율법적 도덕이 사람을 파괴시킨 또 하나의 비극입니다.
물론 이 은석 군의 이야기는 아주 극단적입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들이 들려 주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놀랍니다. 한 마디로 부모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아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친구들이 자기 부모에 대하여 심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나중에 내가 크면 부모를 OOO 하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다만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을 내서 공부시키고, 열심을 내서 아이들을 성공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의 열매는 분열과 이간과 증오와 사망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타락이고 사랑의 타락이고 자유의 죽음입니다.
스티픈 아터버언은 그의 책 “상처주는 신앙, 치유하는 신앙: 건강한 신앙과 영적 학대 사이에 그어지는 미세한 선”에서1) 해악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에 잘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 네 가지를 들었습니다. 즉 완고하고 엄격한 부모(Rigid Parents)와 실망적인 경험(Experience of Disappointment)과 낮은 자존감(Low Self-worth)과 학대의 희생자들(Victims of Abuse)입니다. 엄격하고 완고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 즉 율법적 사고와 율법적 신앙과 율법적 도덕을 가르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해악한 신앙과 종교적 학대와 파괴적인 성격에 빠지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이 자기들은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타락입니다. 부모는 사랑이라 생각하고 믿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랑과 행복의 탈을 쓴 증오와 불행과 죽음입니다. 율법의 자유의 타락이고, 이것은 곧 사랑의 몰락이고, 이것은 곧 죽음입니다.
3. 사랑의 회복 : 성화(聖化)(19-20절)
그렇다면 이와 같이 타락한 자유와 타락한 사랑, 즉 율법의 저주로부터 어떻게 다시 해방될 수 있습니까?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부모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심장으로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분만의 고통을 다시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낳는 고통이며, 또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이 어머니의 심정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소망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원한다는 마음을 여러 곳에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롬8:29)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우리가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목적과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기 위하여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또 언젠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둘째, 바울은 그 희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합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통하여 타락한 자유가 회복될 수 있고 타락한 사랑이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은 은혜입니다. 아이가 태안에서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해산의 수고를 합니까? 그렇다면 어머니의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해산의 수고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해산의 수고라는 이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율법과 형벌, 그리고 채찍과 매질로 애완동물을 길들이고 훈련시킬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적 방법으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유의 사랑, 사랑의 자유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누군가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가 “멘토링으로 성장하는법: 변화하는시대에 적응하기” 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는 달라스 신학대학원의 저명한 교수이자 크리스천 리더십 센터의 회장입니다 . 그는 전 세계 60여 개국을 다니며 하는 강연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이 시대 교회와 영적지도자들에게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워드 박사는 이 책에서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 두 분 모두 그의 영적상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가 죽든 살든 지옥에 가든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열 살 정도일 때 어느 날, 구슬치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을 때, 키가 190센티나 되는 거구인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사람이, “교회학교에 다니지 않을래?” 하고 물었을 때, 하워드는 학교라는 말이 기분 나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구슬치기 할래?” 하고 물었고, 하워드는, “물론이죠.” 하고 말했습니다. 게임의 결과는 그 사람이 모두 이긴 것이었습니다. 최고 구슬치기였던 소년 하워드는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자기와 게임을 한 것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하워드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월트이었고 근처에 있는 교회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월트는 하워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월트는 매번 하워드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교회학교 하이킹에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함께 온 숲을 뛰어다녔는데, 월트 선생은 자기 심장이 좋지 않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하워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첫번째 사람이었다.”
교회학교에서도 월트는 언제나 공과공부를 성실히 준비해왔습니다. 월트는 교회학교 교사로서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교사였습니다 . 그는 금속으로 틀을 짜는 ‘금형일’에 종사하였는데, 교회에서 가르칠 때에는, 창조적이면서 부지런하였고 언제나 아이들을 배움의 길로 이끌어내는 방법들을 궁리하였습니다. 하워드 박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월트는 나에게 있어서 성육하신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 동네의 다른 열세명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했다. 아이들 중 아홉은 나처럼 결손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열한 명은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다. 월트 자신은 겨우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일에 쓰임받는 데엔 박사학위가 필요없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해산의 수고를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해산의 진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값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안에 그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서로를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가족입니다.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