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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RESEARCH 개요
1) 대상 : 강원도 춘천시
2) 기간 : 6월 9일 월요일 - 6월 21일 토요일 13일간
3) 참가자 : IN조- 석 미 정. 김 현. 황 해 인. 전 명 숙. 장 소 영. 이 정 호
4) 목적 : 춘천의 복음화
춘천의 영적 회복과 부흥
5) 목표 : ① 춘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발견
② 춘천에서 활동하는 원수의 활동과 목적이해
③ 춘천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활동과 비젼 이해
④ 하나님의 Vision과 영적 회복을 위한 기도와 자료 전시
⑤ 7 Mind Molders 중 1개 영역에 대한 선택적 Research
6) 행동방침 : ① 기도
㉠ 춘천에 대한 하나님의 Vision이 계시 되도록
㉡ 영적 분별력과 조사를 통해 원수의 계획과 전략을 별할수 있도록
㉢ 하나님의 Vision과 영적 회복을 위한 효과적 사역을 발견할수
있도록
② 역사적 자연적 영적인 조사
㉠ 해롤드 목록을 이용하여 기초 자료를 작성
㉡ 각종 지도와 현장Research를 통하여 High-Places
와 Strongholds를 찾음
③ Spiritual Mapping
㉠ 춘천을 위한 기도 pro-file제작
ⓐ 하나님의 Vision
ⓑ 원수의 활동들
ⓒ 하나님의 활동
㉡ 자료의 지도화를 통해 영적세계를 가시적으로 표현
㉢ Mapping에 주요 표기 사항
- Strongholds & High-Places
- 주요 정사와 권세를 잡고 있는 지역과 건물
- 악령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지역
- 주요 교회와 선교기관의 위치
- 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
④ 전략수립 : 하나님의 Vision과 영적 회복을 위한 효과적인 사역을 발견
역사적인 조사
A.도시의 설립 이전의 역사
A-1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1> 전설을 살핌 - 팽우 혹은 팽오라는 이름의 인물 추적
1. 규원사화(북애(조선 숙종2(1675년)지음)의 기록
: 단군왕검의 충성스런 부하로 자연을 관장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 나라안의 큰 홍수가 났을 때 이를 다스리어 이 땅을 사람 살만한 곳으로 평정함.이후 이지역을 다스림.
2. 동국역대총목의 기록
: 우수주 맥국터(쇠머리 고장)에 단군신하 팽오의 통도비를 세운 기록이 있음.
-홍수를 평정하여 단군과의 길을 연 인물. 고대의 이 지역과 단군역사(고조선)와의 연계성 위한 이야기로 추정됨.
3. 우수주를 개척한 팽우가 단군왕검의 신하가 아니라 부루 또는 부우의 변용일 가능성
: 부루는 고조선의 역대 47대 임금중 제 2대 임금<춘천의 인맥 中 고대편 p.43~46>
4. 일제의 왜곡사
: 일본인의 조상(스사노오미꼬도)이 고대 춘천지역에 살았음을 주장.
소시모리라는 조상이 소슬뫼지역(현 우두산)에 실존했음을 주장하여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함.
일제가 "한반도 침략설"이 아닌 "영유권 회복"에의 궤변을 주장하기 위한 왜곡된 주장.
<춘천문화대전><춘천의 역사와 문화><강원도 선사문화>
2> 춘천의 형성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주요한 주장이 있다.
1. 중국 이주민설 : 중국 북부에서 출발한 "예맥"족의 춘천 정착설<강원도의 선사문화 88>
2. 한민족 통칭설 : 중국역사속의 동이족(東夷族-한민족)을 칭하는 보편적 특수 명칭으로 예,맥, 예맥이라 부름 <춘천의 역사와 문화28>
- 도우미 -
고대사와 유적의 흔적 :
1.천전리-발산리-삼악산의 유적과 기록에 근거-맥국의 춘천지역 건립설의 뒷받침
2.삼국사기의 기록 ① 신라 유리니스금17년(40) 맥국의 추장과 연합기록
② 맥국의 추장의 사냥예물 헌납기록
③ 백제 책계왕13(297)의 전사(한과 맥의 침입)기록
3.637년 신라편입전의 맥국(춘천지역)은 고구려에게 공물을 바치며 자주국을 지킴(예속화 안됨)
<강원도 선사문화 p.92>
A-2 도시 설립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당시 지도자들의 철학이나 신앙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나?
도시의 대한 비젼은 무엇이였는가?
1. 전설 : 팽오의 자연 평정-단군의 자연을 다스리는 힘을 가졌던 충직한 신하였던 팽오가 홍수를 다스려 사람 살곳으로 터를 닦았음을 시사.
2.고대사의 기록 : 삼국의 권력팽창의 주요지역으로 신라 예속이후 군사주둔지 및 정치적 행정 중심지의 성격을 가짐. 토산물과 세금보다 지역적 중요성이 이후 강조됨.
<춘천문화대전><강원도 선사문화><춘천의 역사와 문화>
A-3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어디에서 시작하였으며 그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름이 바뀐적은 있는가?
이름이 무엇과 연관이 되었는가?
이름이 혹 마귀적이거나 주술적인 것이 연결되었는가?
이름이 축복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저주를 의미하는가?
1. 고대 : 맥 - 부족국가중심지(현 춘천군 신북면 지역)
2. 이후의 연혁: 637 우수주(신라 선덕왕 6-삼국사기 37권 고구려지리지 기록)
757 삭주 (신라 경덕왕 16)
940 춘주(고려 태조 23)
1413 춘천국(조선 태종 13)-춘천이라 첫 명명
1946 춘천읍→춘천부 춘천군→춘성군
1949 춘천부→춘천시
1992 춘성군→춘천군
1995 춘천시 + 춘천군 통합
3. 기타 : 우수주(牛首州) 수약주(首若州) 오근내(烏根乃) 조근내(鳥根乃) 수차약(首次若) 삭주(朔州) 광해주(光海州) 춘주(春州) 안양(安陽) 과 별칭으로 수춘(壽春), 봉산(鳳山)등이 있음
- 도우미 -
1. 우두지역의 명칭 - 고조선과의 연계성을 강조
우두는 백두산의 토칭으로 옛 춘천은 쇠머리고장으로 불림.
백두산은 으뜸산 혹은 頭嶽이라 부르며 마리산 머리산 마니산에서 유래됨.
머리산은 쇠머리산 소머리산 소슬뫼로 변하기도 함.(쇠머리산을 한자로 표기하면 우수,우두)
따라서 춘천의 옛이름이 쇠머리고장이라 불렸던 것은 현 백두산,마니산,우두산을 같은 뜻,같은 뿌리의 전통으로 보고 단군조선시대부터 머리산의 신앙을 가진 백두산족,백산족이 살던 고장임을 나타내는것. 춘천에 단군조선시대부터의 역사가 잔존해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현 우두산으로 단군조선시대이후 열국시대때 춘천지방에는 맥국이 자리를 잡게되었음. 또한 춘천전체가 소머리 형상을 띔으로 유래되기도 함.
<춘천의 지명유래 서문 & p.27>
2. 오근내 혹은 조근내라는 명칭은 옛사람들의 새 신앙을 나타내는 지명
3. 춘천이라는 이름의 연루 : 강의 흐름을 낀 삼각주의 화려한 봄의 지방색을 말함 <김연기씨 인터뷰>
4. 이땅의 지명은 그 유래가 소단위 부락적으로 자연적이거나 부락의 수호신,숭배하는 산과 연결된
지명들이 대부분으로 <춘천의 지명유래>를 참고하기 바람. 예수전도단 지부가 있는 '근화동'만 참고로
언급한다. : 춘천읍의 앞뜰(혹은 진산인 봉의산의 앞)이라는 의미로 전평(前坪)이라 했고 영락정으로
불림. 무궁화가 많은 지역이라 '근화동'으로 명명.옛 명으로 '대바지'(한자표기 竹田里)가 있는데 이는 봉의산 봉황이 이곳의 대나무순을 먹고 산다고 하여 대밭을 잘 보호함. 전설속의 말무덤터
(고고학적으로 밝혀진바 고총) 있는 곳이며 조선지대 세를 받치던 세뭇(석동)지대였음. 춘천지방의
유일한 당간지주(고려시대)도 이곳에 남아있다. 현재는 춘천역과 미군 캠페이지, 하수처리장, 공지천 유흥가와 용신제터, 빈민가, 사창가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B. 도시의 후기의 역사
B-1. 이 도시는 나라 전체의 생활, 특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
1. 삼국시대 영역 확장 경쟁지역:한강유역에 근접하여 백제-고구려-신라순으로 영토 유입
<강원도의 선사시대91>
2. 통일신라: 삭주(朔州)의 중심지(12개 군, 27개 현의 치소(治所)
3. 고려시대 : 군사적 전략기지의 주요지점이자 교주도-행정중심지(도청소재지)
<춘천의 역사와 문화31>
보승 133명 정용 776명 일품 572명 총 1481명 주둔 전체 교주도에는 4457명 군사 배치
∴ 항전사(抗戰史)의 주요 격전지
4. 조선시대 : 태조 15년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행정적 중요지)
<춘천의 역사와 문화 37>
① 유배지의 기능-사북면 신포리 살구골옆의 깊숙한 골짜기. 원한으로 인한 귀신의 장난이 심하여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정부에 수차 진정하였으나 탄원되지 않아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음. 현재 지역골은 지옥골의 변천된 이름.
② 조선 고종 25년(1888) 춘천 이궁 건립
- 위급시의 피난궁 역할 (화서학파의 근거지이며 척사위정의 강력한 고장이 원유가 됨) → 강원도청소재지가 되는 중요조건이 됨(실제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음) <춘천의 역사와 문화38>
5.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한가운데 위치. 중앙정부의 계획 의도대로 계획,조성되어짐.수도권의 이해 관계와 힘에 의해 정책이 좌우됨. 정부는 대규모산업시설을 확충하고 도시를 확대해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대신 수도권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묶어 두면서 그 범위 내에서 수도권의 일일관광 휴양지로 활용하려 하여왔다. 최근 20년간 '잠자는 도시'로 칭해지며 민의와 무관한 개발제한으로 1973년 이래
지역경제 저속성장. 89년 청평사 관광지 조성계획이후 관광산업이 활기를 띄고 있으며 기타 지역 경제
및 문화 활성화 작업이 수행중.
<춘주문화> <월간 춘천 96년 7월호 프리랜서 최종인의 글>
B-2. 이 도시에서 특출한 지도자가 나왔는가?
이 도시에 대한 그의 비젼은 무엇인가?
(지역 자체를 일으키기 위한 지도자는 아니나 지역성을 알 수 있는 지역인물을 살핌)
박 항 : 춘천박씨의 원류.춘천 신북면 발산 2리 . 학문진흥에 힘쓴 대표적인물. 원과의 탁월한 외교.
몽고군의 봉의산함락시 부모시신을 찾지 못하여 부모와 얼굴이 비슷한 300구의 시신을 장례하였다함. 몽고군과 몽고인의 횡포를 막는데 철저. 조정내 부패척결에 앞장섬.
이후 샘밭 사랑마을(박항의 은혜를 기리기위한 마을 사람들이 붙임 이름)에서 학문설파에 힘씀.
현 율문리를 문정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박항의 학문진흥의 기풍이 넘쳐 "문정"으로 일컬어짐.
유인석 : 1842(헌종8년)년 남면 가정리에서 출생. 호는 의암. 양평에서 유학을 섭렵.
내우외환으로 점철된 민족의 역사가운데에 의병봉기와 독립투쟁을 이끈 인물. 의병봉기를 대표하고 관서지방,만주,연해주까지 독립운동을 지도함. 1895년 을미의병으로 애국활동을 전개한 때로부터 1915년 만주 망명지에서 독립투쟁을 할떄까지 20여년동안 의암의 일생은 독립과 중흥의 길에 매진함. 고종31년 갑오경장이후 친일내각 적근 반대 .민비시해사건후 의병활동. 팔도 의병 대장으로 추대받음. 집안현에서 후세 교육하던 중 1899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귀국하여 후세 교육에 이바지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체결후 방문을 보내면서 의병을 기세를 돋움.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조직체를 결성하여 지도함. 헤이그 밀사 이상설과 같이 성명회를 조직, 회장이 되었고 세계만방에 호소문을 전달하여 해외독립운동을 본 괘도에 올림.
유홍석 : 유학자,의병장,고병전가사의 작가로 널리 알려짐. 초기 위정척사 후기 독립사상 가짐.
남면 발산리에 살았으므로 발산리 사람으로 부름(출생지는 교동) 김평묵의 제자.
춘천의 을미의병 발생시 주도적 역할. 춘천 정미의병을 일으킴.가정리에 천여명의 의병
여의내골 훈련장 화약제조등의 활동. 1910년 한일합병이후 중국 요동 회인현으로 이주.
유인석,이소응등과 함께 독립운동 전개.
이소응 : 유학자,철종3(1852년) 남면 하방송리 출생. 남산면 창촌에서 생활. 춘천 의병대장역임후
1898년 만주 요동에서 의병기지 만드는데 힘씀. 1900년 의화단을 일으키ㅗ 1910년-20년대 만주독립운동 지휘. 춘천 을미의병 봉기 주도.
이정향 : 신북면 천전리 위샘밭에 사당이 있음.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키고 병조참판,동내부사등의 관직 역임. 정묘재란때 연안을 지킨 공으로 성무공신 2등이 됨.
윤희순 : 의병장 유홍석의 며느리.19C-20C 여성의병 일으킴. 1860년 한양출생.을미의병,정미의병 그리고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를 적극 도움. 여성의병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활동방향 승리의 소망을 표현하고 권유하며 지원한 여러기록을 남김. "의병가"는 최초 힌글 의병가이며 여성 의병가. 남녀분별이 각별하던 시대에 구국전선에 여성이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 의병가 말미에 조선 안사람으로 친일자에게 경고하는등의 적극적인 성격의 인물로 가사에도 탁월한 여인.
여성사회참여의 선두적 인물.
김유정 ; 1908년 1월 11일 신동면 증리(실레)출생. 한국문학사의 새장을 일으키는데 일익을 담당. 토속적인 소재의 문학작품이 주류. 조부 김익찬은 김평묵의 제자임. <봄봄><소작비><만무방> <봄과 따라지><동백꽃><두꺼비><산골>등의 토속적이고 고향의 정서가 가득한 작품 남김.
김평묵 : 근세 춘천 학풍을 세우는데 큰 영향력을 줌.이항로의 수제자이며 화서학파의 학통을 세움.
증리 독서당개설은 춘천 유학발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을뿐아니라 후에 제천의병춘천의병의 정신적 지주를 세우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침.
기타 영향력을 끼친 인물 : 신흠 (유학자. 유배시에 이 지역의 유교를 일으킴)
이항로 (화서학파의 대스승. 춘천유학자들을 가르킴)
<춘천의 역사와 문화p.56-76> <춘천문화대관 p.126-155>
B-3. 이 도시의 정부나 정치적 지도층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적이 있는가?
고대부족국가 맥국의 신라 편입이외에 급격한 변화 없음.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전 국가가 몽고의 지배체제 아래에 들어가게 됨으로 영향을 받음.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 침략기로 일정의 지배를 받음.
6.25동란으로 도시내 지도부의 이동하에 지도체제 空洞과 혼란의 시기가 있음.(공산권과 민주권)
B-4. 이 도시의 경제생활에서 의미심장하거나 갑작스런 변화들이 있었는가?
기근이나 경제공황이 있었는가?
기술혁신이나 천연자원이 개발된적이 있었는가?
1. 전체적인 경제의 기반 : 씨족국가의 집단성의 영향-낮은 사회발전지수 <강원도의 선사문화 89>
2. 잦은 천재지변 : 2년주기의 기근과 재해로 세금 감면을 위한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고 기우제 또한 자주 열림. 최근 1973년 7월 3일 가뭄에도 기우제 올림.
3.경제적 혁신 : ① 소양강 - 1967년 4월 17일 착공 ~ 73년 10월 15일 완공
춘천내륙수운시대 개막. 내수면개발과 호수관광의 원조가 됨
신북면 천전리에서 소양강을 막아 만들어진 사력댐(모래와 자갈로 쌓아올린)으로 소양댐 수력발전소용량은(이십만킬로와트) 우리나라 수력발전용량의 1/3을 차지함.
② 의암댐 - 신영강의 삼악산 계곡막아 건설 1967년 12월 준공.
중도/위도 섬화. 의암호 발생. 호수문화의 발달과 호반의 도시명명
신동면 의암리에 북한강을 막아 조성. 의암수력발전소 용량은 사만오천 킬로와트.
③ 춘천댐 - 1965년 신북면 용산리에서 자양강을 막은 댐.
일억오천만톤쯤의 물이 담긴 춘천 저수지가 생김.
발전용량 57600킬로와트인 춘천 수력발전소가 들어섬.
4. 천연자원의 개발 :
춘천옥 - 옥석은 1970년 5월 춘천군 동면 월곡리 소재 김씨종중산에서 발견.
70년이후 현대까지 월곡리에서 발견된옥석은 백색,청색,황색,갈색,녹색,검은색등 다양한 빛깔이 발견. 품질과 경도가 높은 것은 백옥으로 우수성이 익히 입증됨.월곡리에 매장된 옥성의 양은 1만여톤으로 추정. <춘천문화 대관 p.324-325>
5. 경제적 손실과 관련 : 6.25로 인해 도시가 초토화됨.
6. 재건 : 1980년 소년전국체전 준비관계로 거리모습의 현대화 추진.
B-5. 이 도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주민들이 있었는가?
이주민들은 도시의 어떠한 영향을 끼쳐는가?
삼국중 고구려의 영향큼 → 건축양식과 기질 <선사시대의 강원도 p.91>
영조(1755)때 몽협(夢協)과 봉성(鳳星)의 역모로 지역의 행정적 위치가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
(영조31년에서 영조40년까지)
<춘천의 역사와 문화 p.37>
1961년 5.16이후 정부에서는 62년 3월 의암댐 춘천댐 건설을 시작하여 10여년간 많은 노무자들의 춘천 유입 이루어짐. → 춘천 전체가 경제적인호황을 누리게 됨.
6.25이후 미군부대의 이동으로 3차 산업과 사창가등의 저속 문화 유입
미군 부대의 시내 이전으로 (대룡산에서 현재 근화동) 화전민 유입.
B-6 이주자들은 소수민족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민족이나 종족집단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살아왔나? 인종차별을 합리화 시키는 법률이 있었는가?
이 지방의 일반적인 씨족은 다른 씨족의 이주시 오히려 이주민에 동화되는 특성이 있는데, 천전리의 경주이씨 문중만은 외래씨족을 극단적으로 배타하여 이 마을의 경주이씨 외에 다른 씨족끼리 이웃사촌계를 만들정도였음.
<춘천의 어제와 오늘p.174-175>
20C초 일정의 민족차별정책 시행
70년대 초 정부의 화전정리 정책 사업에 따라 산골 주민(사암 3리지역의 경우)의 많은 수요가 생계수단을 바꾸어야 했고 생활터전을 잃었음.
B-7. 이 도시의 지도자가 약속을 어긴것이 있나? 그 내용은 무엇인가?
정치적 공략으로 많은 지도자들의 도시 개발과 시민 생활에 대해 보장하였으나 실천적이지 못했음. 최근 30년간의 타지역과 비견될만큼 경제가 근대화되지 못함.
<문선진 강원일보사장 인터뷰><월간 춘천 창간호에서>
B-8. 이 도시가 전쟁의 직접영향이 있었나? 전투가 벌여진 적 있나?
피흘림이 있었는가?
1) 삼국시대:삼국의 영토확장위한 징출지역
2) 고려시대: 군사적 전략기지로 항전사의 중요지역
① 글안족침입(고려 고종4(1217년))-봉의산 항전
② 몽고족의 침입- 제4차(야굴군) 고종40(1253년) 몽고침입시 봉의산 항전-주민 전멸하는 혈전
<춘천문화대관 p.53>
3) 1592년 선조25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조방장 원호장군의 증리 진병산 혈전
4) 1896 년 1월 20일 의병봉기 : 화서학파 중심 이소응,홍시영 외9명 5천~6천명 척양척왜
그이전 김평묵,유중교,유인속,홍재학 등의 화서학파 척사위정실천철학
5) 항일투쟁: 1908년 11월2일 지용기의병장과 의병군 13명이 전사. 정미의병의 항전장.
약사원 백사장-의병들이 친일인물을 처형한 곳
1907년 증리 진병산 전적비 구한말 의병들의
정미의병때 이강년의 부대 1907.12.13 도연합의병의 서울진격작전중 진병산에서 격전
< 춘천의 지명유래 신동면편 133>
6) 6.25의 영향으로 잦은 전투 발생. → 자연적 조사의 11번 참조
- 도우미 -
1. 1919년 미온적 3.1운동 → 일제의 민감한 경계(도청소재지),교통시설취약(3.1.전파 느림)
3월 12일부터 일제 보병 제79연대의 병력 1개중대 주둔
→ 서울의 3.1운동 참여한 천도교인 유입으로 3.27,3.28일에 발생
2. 을사보호조약후 춘천군 남면 서천리 근방 명퇴산 의병항쟁
3. 1926년 1ㅇ월 8일 춘천고보 동맹휴업
1929년 12월 19일 20일 춘천고보학생들의 교내 만세운동
4. 남면 가정리는 의병장을 많이 배출함
B-9. 이 도시에서 가난한 자나 소외를 느끼는 자들은 어떠한 대우를
받아왔는가? 정치, 경제, 종교지도자가 탐욕스럽고 부정을 자행하고
있는가?
- 1940년대 일제는 춘천군에서 청년 200명을 불러 그중 100명을 군수공장과 전쟁터, 탄광등지로 징발 해감. (정부의 사욕을 위한 노동력의 착취)
- 70년대 초 정부의 화전정리 사업 시행.사암 3리의 미군부대 이전으로 이곳에 주거하던 화전민과 산골주민들이 갑작스럽게 생계수단을 잃음.
- 도시화에도 불구 공직자의 부정이나 부패가 없어 공인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가 높으며 근간 이지역의 주요 인사 및 기관장들이 기독교인으로 도시전체의 기초질서와 도덕률 높이기에 힘쓰고 있다.
< 문선진 강원일보 사장 인터뷰>
- 도우미 -
근간 시정의 복지정책 : 재가 호스피스 간호사업 확대, 가정방문 건강 상담재운영,
골다공증 무료검진 사업 개시(저소득층 대상), 농촌 물리 치료 시범사업,노인종합복지타운 건립과 장애인 재활센타건립, 취업여성을 위한 보육시설 운영등
97년 선정 "살기좋은 도시"(복지,경제등 전반적인 사한 고려) 3위권(97년 6월 9일자 각종 일간신문)
B-10 이 도시에 영향을 끼친 자연 재해는?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14C부터 평균 만 2년마다 풍재,수재,충재,우박,지진등등의 여러 가지 재해로 인가가 표몰되거나 인명피해,마소가 유실되는 일이 계속 발생. 그래서 지방행정관이 조세감면이나 구제의 탄원을 조정에 계속적으로 상소함. <조선왕조실록>
B-11. 이 도시의 표어나 모토가 있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1995년 춘천시와 추천군의 통합 광역화로 시/군으로 나누어 정리함.
춘천시>>
시화 : 개나리 (노란색은 평화애호사상/시민의 불굴의 투지와 단결,전진적자세상징)
시목 : 은행나무 (순결하고 바르게사는 시민상)
시조 : 산까치 (소박하고 아름답게 사는 시민상)
시기 : 흰색바탕 (시민의 순수/청순/솔직함과 민족혼상징)
산 (봉의산을 중심으로 시민의 푸른 정기와 자연을 바탕으로 비약하는 시의 발전상과 기상을 상징)
자연과 물 (봉의산을 중심으로 춘천시를 둘러싸고 있는 소양강 물줄기 및 호반의 도시임을 상징하며 관광 /문화의 도시로 발전할수 있는 무궁한 자연의 포용력을 상징)
춘천군>>
군화 : 철쭉꽃
군목 : 대추나무
군조 : 청둥오리
군기 : 흰색바탕 (백의민족의 민족혼과 군민의 순결성을 상징)
소형상 (군 지형의 소머리와 비슷하여 본군의 근원을 밝혀 소머리를 표시 또한 큰원과 작은원의 일치로 군민의 평등과 단합의 상징)
빨간색 (뜨거운 군민의 정열과 재반건설의 원동력이 되는 전원이 풍부하여 건설의욕이 넘침을 상징)
푸른색 (군 산업의 대부분이 농업이므로 농산물의 색을 택하여 식량의 풍족함과 증산의욕을 상징)
- 도우미 -
춘천시의 '97 세계화 전략>> 1. 취약한 산업구조 조정
2. 환경 모범도시 건설
3. 획기적인 도시면모 일신
4. 지역경제 활성화
5. 도,농 통합에 따른 농업구조 개선
6. 수준 높은 문화예술 도시
7. 명소와 이벤트가 어우러진 관광산업 도시
8. 체감복지를 실현하는 도시
<춘천시 '97 시정보고>
주요시정>> 21C 관광/통신/교육의 도시
: 춘천 호반텔(컴퓨터 통신) 조성 <강원 정보문화 3월호>
: 89년 청평사 관광지 조성 계획
/ 96 현재 관광 현황- 유원지.공원.비지정관광지(133개소) & 소양호,의암댐등 자연자원 44개소 <월간 춘천 '96. 6월호>
: 96년 전국체전등 행사유치
: 애니메이션타운건립 (민관합작 벤쳐 캐피탈회사 '춘주멀티미디어'설립 & 멀티미디어 벨리조성) 의암호의 상중도에 40만평에 달하는 테마파크인 워터랜드와 영화 오픈 세트장 건설,
소양강 주변에 애니타운 건설, 멀티미디어 기술 지원 센터 건립, 멀티미디어 예술 전문대학 건립 상설 전산교육장 운영, 호반텔등의 통신망과 인터넷 구축 및 만화축제 개장(97년 7월 25일부터 8월 3일)
: 멀티미디어 영상 산업 도시화 (국내 최초 다중화상회의 시스템 구축. 춘천-강릉-원주를 잇는 골든 트라이앵글 정보화 체제 구축.)과 정보화 산업계획(강원대학교 공동 통합 물류 정보 시스템 연구소 설치등 산업화의 저해요소를 정보화로 바꾸는 계획) :97년 6월 7일자 조선일보 굿모닝 디지틀 34면 상단)
B-12.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즐겨 듣는가?
그 음악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B-13. 오늘날 이 도시의 대부분 사람들이자기들의 도시의 긍정적인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이 도시의 부정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참고>> 강원대 명예교수 최승순의 글-산이많아 (살림이) 궁벽하고 산자수명의 으뜸이며 인성순후
<동트는 강원 7호 발췌>
강원일보 사장 - 영서의 경우 지리적요인으로 진취적 기상이 있으나 강원정서를 대표하는
춘천의 경우 소극적이고 보수경향이 짙다. <97년 6월19일 인터뷰>
부정적인 면>> 경제적 기반 취약 (살고싶으나 살기 힘든 동네)/젊은이의 도약 발판이 없음/애향심결여.
/ 현실안전주의. /너는 너,나는 나의식.
긍정적인면>> 문화와 교육의 도시. 뛰어난 자연경관.
도시의 종교 역사와 현재
A. 비 기독교적인 종교
A-1. 이 도시가 건설되기전 이 지역에 살고있던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습이나
견해들은 무엇인가?
고인돌과 같은 조상숭배적 집단적 인것과 전 한반도에 걸쳐 행해지던 애니미즘, 농경생활지의 특성인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함. 특별히 부락적으로 다양한 수호신에게 제를 지냈고 마을과 관련된 산을 숭배함.
A-2. 이 도시의 건설에 있어서 종교적인 사항을 중요하게 고려했는가?
백두산-우두산-마니산으로 연결되어 도시형성전부터 제를 지내고 우상을 숭배해옴.
고인돌 유적의 혈거지에서도 제를 지냄.
< 역사적 질문 A-1,2,3 참조 >
A-3. 비기독교인들이 대단위로 이 도시에 이주한 적이 있는가?
1961년 5.16이후 정부에서는 62년 3월 의암댐 춘천댐 건설을 시작함. 많은 노무자들의 춘천유입있었고
춘천 전체가 경제적인호황을 누리게 됨.
A-4.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 사교집단이 이 도시에 있는가?
A-5. 이 도시에서 무당들, 사단주의자 집단 또는 그런유의 다른 이단들이 활동한 적이 있는가?
- 일제기 : 우두산에서의 강압적인 신사 참배의 기록이 있다.(A-1 참조)
- 천도교 : 일제시기 민족자주적 정신으로 항일운동에 영양을 미침 <춘천의 역사와 문화>
- 여호와 증인 : 현재 한국전역에 1370개교회 8만여명의 활동적인 증인이 있음.
1956년 6월 7일에 여호와 증인 춘천회중이 설립. 현재 운교동 172-5에 위치하고 있는
왕국호관을 중심으로 활동. 춘천시에는 5개회중있고 신북과 창촌에 각각1개소,전체
380명의 신도를 가짐.
-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지역장 스펜서 HILL에 의해 1969년 교회설립. 강원지역 등록교인 1395명
춘천와드에 등록교인은 약 200명.
- 통일교 : 1956년 1월 29일 효자동에서 남궁철이 개척전도를 시작.
현재 효자2동 700-5로 이전 창립. 교인수는 약 280명.
- 천도교 : 강원도에 천도교전파 1869년의 일.3.1.만세운동떄부터 민족운동으로 힘을 발휘.
만세운동가인 천도교인은 이름이 밝혀진 사람만도 수백명에 이름. 1919년 3월 당시 춘천
교구실은 동면 만천리에 있음. 1979년 강원도 총괄하는 춘천교구성립 95년 강원교구로
바뀌어짐.
- 원불교: 원불교 춘천교단에 소속되 있는 신도수는 1987년 12월 31일 현재 남자 158,965명 여자 210,266명 으로 도합 369,231명이다. 1996년현재 춘천시 원불교 교도수는 출가교역자 23명 신도 13,000여명이다.
<춘천 백년사 하편 p. 1752-1755>
- 무속신앙은 정확한 파악은 어려우나 시내 곳곳에 산재하며 신한국당 중앙당 상무위원으로 송죽법사
라는 이가 활동하고 있다.
B. 기독교적인 조사
B-1. 이 도시의 기독교가 언제 들어왔는가? 또 어떤 상황에 들어왔는가?
1897년 10월 8일 서울개최 제1회 조선남감리교선교회에서 춘천을 선교대상지역으로선정
그 이전부터(1800년대 말) 일찍이 경성교인 나봉식과 정씨라는 이가 춘천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이어
거랑포교인 이덕수,김진수씨가 전도. 경성주재 무야곱(J.R.MOOSE)선교사도 이 지역을 순회전도 .
1902년 순회전도사 김기순의 활동.
1902년 이덕수전도사가 봉의동에 초가 다섯칸을 매입 사랑채 두칸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며 전도활동
개시. (지금의 춘천중앙감리교회)
<춘천100년사 하권 1704-1707)
B-2. 과거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이단에 빠진경우가 있는가?
물의를 일으킬 만한 일이 없는 것으로 기억됨 < 조남진 강원일보사장과의 인터뷰 >
B-3. 기독교공동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또 이것으로 변화는 있었는가?
- 일제침략기에 감리교회와 미국선교부와 부설병원,→향토적 3.1.운동의 근간 <춘천의 역사와 문화>
- 1909년 리드의료선교사 시료소를 세움.
1920년 병동신축/확장으로 강원 중부의 유일한 병원 1926년 폐지
1910년 Miss. L.EDWERD가 유치원,성경반등 여자관을 개관 이후 여러 여선교사들의 활동이어짐.
총독부 인가 5교학교설립
1920-23년 도마련선교사 다달이 발행한 세광잡지는 유명한 월간지로 지금도 남아있음.
<춘천 백년사>
- 현재에도 다양한 사회봉사운동을 교회가 하고있음
선명회의 두곳의 복지관 이력/재력적 후원, 한국 복지제단 지원, 효자복지관 지원(신성감리교회),
북한 돕기 사업(선명회나 교단을 통한). 또한 성시화 운동본부에서 이벤트적인 일들과 기초질서회복에 관한 일을 하고 있음. 지역주민적 특성으로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는 편이나 기독교단체의 영향이
다소간 작용하고 있음. <조남진 강원일보사장, 차성도 강원대교수,성시화운동본부 간사 인터뷰>
B-4 이 도시에 있는 기독교는 발전하고 있는가? 정체상태인가?
감소상태인가?
교단이기주의적 양적 팽창이 다소간 있으나 근간 인구이동으로 인한 개척교회가 크게 일어나고 있고
(약 270여개 교회 산재) 성시화 운동과 각종 교회의 교육/사회활동들이 변화를 가져오고 있음.
C. 관계
C-1. 이 도시에서 종교들간에 알력이 있었는가?
C-2. 기독교인들간에 알력이 있었던 경우가 있는가?
알력이라기 보다 교단적인 약간의 경쟁관계(교회재건축과 개척교회 설립,사회운동간) 존재.
그러나 상호 이해관계증진과 연합움직임.
C-3. 이 도시에서 교회가 분열된 역사가 있었는가?
약 20여년전 목사 추대문제로 중앙감리교회에서 제일감리교회 분리. 목사 후임자 문제로 제일 감리교회에서 평화감리교회가 분리, 독립하여 현재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로 성장.
<조남진 강원일보사장 인터뷰>
자연적인 조사
1. 이 도시에 대한 여러가지 지도를 찾도록 하라. 특히 오래된 지도를 찾도록 하라. 이 도시의 외형적인 특징과 관련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 났는가?
1) 삼국시기로부터 북방세력의 남하기지, 서방세력의 동진기지, 남방세력의 북진기지로서 중요시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다. 북방세력의 춘천을 장악할 경우 홍천, 횡성을 거처 원주등으로 나아갈 수 있고, 남방세력이 춘천을 장악할 경우 북한강 줄기를 따라 화천, 양구, 인제, 철원등으로 나아갈 수있다. 서방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할 경우 춘천으로 부터의 서진을 박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上記의 兩지역으로 모두 진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에 언제나 춘천은 여러 세력들의 침입을 받았다.
(95년 10호 특집 춘주문화- 춘주문화원 발행)
2) 춘천시는 흔히 호반의 도시로 불린다.그 말이 가리티듯이 이곳은 폭이 500미터 넘는 의암호를
서쪽에 끼고 삼악산,국사봉,안마산,청평산,우두산이 서로 꼬리를 물고 둘러싼 태백산맥 서쪽의 침식 분지에 물에 잠길 듯이 길게 누어 있다.
1967년에 북한강을 막아서 그언저리의 홍수를 없애고 춘천지방과 경기도와 서울에 까지 전기를 데려고 춘천군 신동면에 만든 댐이 의암댐이다. 의암 저수지가 생김으로써 춘천시가 호반의 도시가 되었다.
춘천의 댐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널리 알려진 댐은 소양댐인데 춘천시에서 양구군이나 인제군으로 가는 찻길이 물속에 잠겨서 뱃길로 바뀌었고 마을과 농경지가 많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제 집과 땅을 잃고 춘천시를 포함한 다른 지방으로 삶의터를 옮겨가야 했다.
논밭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땔나무를 하러 오르내리던 산중턱까지 물이 차오르자 더러는 저수지 가운 데에 섬이 생기기도 했다. 소양댐 선착장에서 인제군 인제읍에 있는 군축형 선착장까지 백륙십리 길을 배를 타고 가다보면 그런섬이 띄엄띄엄 눈에 띄는데 그것들은 모두 그전에는 꼬리를 물고 늘어섰던 산이었다.
(1983. 강원도 -뿌리깊은 나무)
2. 이 도시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의 처음 설계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의 종교와 사상(신조)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도시설립은 자연 발생적 이다.따라서 춘천도 설립자에 대한 기록은 볼수 없다.
- 도우미 -
선사시대 이후 춘천 부근의 주요씨족이 주로 춘천 분지의 북쪽에서 먼저 촌락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비옥한 충적지 이며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북부의 문화권인 이곳에는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종족의 하나인 예족이 있어 그의 풍속은 산천을 중시하고 산악을 숭배하던 전통이 있었음이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1992.2 강원문화연구 -강원대학 강원문화연구소)
3. 이 도시의 대한 원래의 설계도나 배치도에 어떤 의미있는 구조물이나 상징물이 첨가되어 있는가?
이 도시는 자연발생적이기 때문에 설계도나 배치도는 없고 다만 춘천시의 진산인 봉의산은 그 모양이 내맥이 없이 하늘에서 봉황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한 형국의 산으로 산명이 봉의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례되었다
(춘천백년사-123P)
4. 중요한 건축물들의 건축양식이나 장소나 위치적인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히 이 도시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적인 세력들을 나타내 주는 건축물들이 있는가?
도청: 조선 고종 25년 避難宮(피난궁)으로서 離宮(이궁)이 있던 자리였다.
-.정치 : 도청,시청,법원,미군부대
-.경제 : 은행,
-.교육 : 강원대학교, 한림대학교 , 한림전문대학, 춘천교대
-.종교 : 춘천 향교
5. 이러한 건축물이 하나 또는 그 이상에 있는 땅 중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가? 처음에는 누가 그 땅을 소유 했는가?
현재 도청이 있는 자리는 조선 고종 25년에 留守郡 (유수군)이 설치된 자리이다.
개항의 위협을 받던 시절 피난수도를 조성할 필요를 느낀 조정에서 避難宮(피난궁)으로 춘천 유수부를 중앙직할의 別都(별도)로 설치하였는데 그 離宮 (이궁)이 있던자리가 지금의 도청자리이다.
6. 이 도시의 공원과 광장이 축조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가?
누가 그것을 조성 하였으며 그것들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대었는가?
그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1. 봉의산 공원
2. 우두산 공원
3.효자 제1공원
4.효자 제2공원
5.금강공원
6.공지공원
7.석사 공원
8.후평 공원
9. 퇴계 공원
10.석사 제 2공원
11.석사 제 2공원
12.퇴계 제 3공원
13.의암 공원
14.어린이 공원
15.체육공원
이름의 유래: 대부분 지역이름을 따라서 지었다.
목적: 녹조 보존과 쾌적한 도시 환경, 건전하고 문화적인 공간 확보와 복리 증진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
재정: 시의 재정으로 충당 되었다
7. 이 도시의 조각상과 기념탑의 배경과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들중에는 마귀적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있는가?
1) 충렬탑 : 한국전 동란시 순국한 도내 국민의 호국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당시 29사단의 주관으로 최헌길 강원도지사,육3군단장 송요찬,29사단 문교사회국장
성동준,병사구 사령관 강이욱 대령등이 건립추진
2) 유인석 동상 : 왜군과 대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 10월 8일 기공식을 갖고 12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유인석 : 1842년(헌종8년) 춘천군 남면 가정리출생.
8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다가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옛땅인 만주 줍안현으로 피신 후세를 위해 교육울 시작하다. 1899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개천과 용천에서 다시 황해도의 평산과
은표에서 후세교육에 힘쓰다.)
3) 이디오피아 참전 기념비 : 한국전쟁시 우방국인 이디오피아군의 참전을 기리고 자유 우방국의 승리를 상징하기 위하여 만들고 1968년 한.이 문화협정 체결차 방한한 이디오피아 황제인 히이레 셀라시에 1세 의하여 제막 되었다.
(한국 동난시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의 우방 16개국중 주로 화천의 산양리,
인제의 문등리와 철원 김화 등지에서 253회의 전투를 치른 이디오피아군
(1개대대)의 참전기념과 자유우방의 승리를 상징을 위해 유엔 한국참전국 협회와 춘천시민이 건립주관,대한민국 재향군인회,전국경제인연합회,대한 금융단이 헌납)
4) 자유의 수호탑 : 6.25당시의 우세한 화력으로 공격 해오던 북한군을 맞서 소수의 병력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3일간 지연한 호국 연령을 기리며, 자유의 소중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북괴 2사단,12사단을 우리군 7연대의 소수병력으로 저지. 춘천시민의 건립을 주관, 각계의 성금으로1975년6월25일착공 9월28일 준공 (春川文化大觀)
5) 국사봉 망제탑 : 고종의 국상때 춘천의 선비들이 태극기를 모셔놓고 고종의 망제를 지내던곳 또
춘천의 우국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결행 하던곳이기도 하다.
(春川 文化 大觀 中)
6) 장승: 마을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데 특히 동산면 조양리 전치곡 마을은"거리제"를 지내는 풍습으로 유명하다. 매년 나무를 깎아서 만든 장승을 마을 어귀에 세우고 삼월 삼짇날에
마을의 안녕을 위해 거리제를 지낸다.
7) 김유정 문학비 ; 공지천 조각공원내.
8. 이 도시의 특징을 이루는 다른 예술품이 있는가? 특히 공공건물의
안팎이나 박물관 또는 극장안에 그런 것이 있는가?
- 이 도시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예술품으로는 춘천 옥을 들 수 있다
동면 월곡리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가장 품질이 좋다는 백옥의 우수성은 이미 입증된 바가 있다.
9. 이 도시에는 고고학적으로 유수한 지역들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들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1) 당간지주(보물 제76호)
위치:춘천시 근화동 14번지
불교의식이 있을때 사찰 문전에 당을 달아 두는 큰 장대를 말한다.
2) 칠층석탑(보물 제77호)
위치:추천시 소양로 2가 49번지
3) 위봉문(지방 유형 문화제 1호)
위치:강원도청 앞
조정이 위급할때 쓸 세자궁으로 고종29년에 지으라 명함
4) 조양루 (지방 유형 문화제 2호)
위치: 춘천시 우두동 우두산
5) 소양정(비지정 문화제 1호)
위치: 춘천시 소양로 1가 산 1번지
6) 헐거유지(지방 기념물 1호)
위치: 춘천시 후평동 산 15-10
7) 적석총(지방기념물 19호)
위치: 춘천시 중도동 27번지
8) 춘천향교(비지정 문화제 49호)
위치: 춘천시 교동7번지
유생들을 길러내던 학교
9) 봉의산성(지방기념물 26호)
위치: 춘천시 소양로 산 1번지
사라진 왕국인 맥국의 성터
10) 삼국시대 고분
위치: 후평동
10. 낙태시술의원, 음란물서점이나 극장, 매춘지역, 도박장, 술집,
동성연애행위등과 같은 매우 가시적인 죄의 거점은 어디 인가?
1) 극장가
시청을 중심으로한 옥천동지역: 피카디리,아카데미
중앙로 중심으로한 육림극장,브로드웨이
2) 매춘지역
-. 춘천역앞 : 난초
-. 미군부대→중앙로쪽 소방서 뒤 : 장미
-. 3년전 사라진 지금의 미도파자리 : 개나리
3) 유흥업소
-. 요정술집 : 국민생활관지 /검찰.법원앞 /요선동둿골목 /소양로 신동아 옆
-. 일반술집 : 강대후문 /명동,요선동 /후평동4단지 /공지천 포장마차촌
-. 여관 밀집지역 : 팔호관장 운교동(외환은행 뒤) / 터미널 / 낙원동(안기부 옆) /후평로타리 부근
11. 탐욕, 착취, 가난, 인종차별, 폭력, 질병이나 작은 사고가 반발하는
곳은 어디인가?
1) 범죄지역
: 춘천시민의 인성이 다른 지역보다 여리므로 범죄가 거의 없지만,수도권과 가까이 있어 그 영향을 받아 나빠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울 사람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기도하다.
범죄는 유흥가 밀집지역에서 많다.
2) 빈민지역
: 춘천은 지역별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춘천은 부유한 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비교적 부유한 지역은 교동, 퇴계동, 후평동 일부지역이며, 낙후된 곳은 요선동과 외곽
지역들이다.
3) 다음은 춘천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통해서 조사한 내용임
- 범죄가 많은 지역
요선동 22.91%, 삼천동 13.54%, 후평동 11.45%, 근화동 6.25%, 기타 45.83%
- 빈민 지역
요선동 11.45%, 사농동 8.33%, 우두동 6.25%, 삼천동 5.2% 기타 68.75%
12.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학살이나 전투나 살인을 통하여 피를 흘린 장소는 어디인가?
봉의산 : 1.거란족의 침입
2.몽골 항쟁 당시 봉의 산성을 중심으로 항거하다가 마을사람 전체가 몰살당했던 역사가
있었다.(몽골의 4차 침입) < 춘천의 역사와 문화 (김영기저 , 춘천 문화원 발간)>
약사동 : 춘천 의병들의 학살이 있었다.
의암리 : 의암서 앞에서 일군과 의병들간의 전투가 있었다.(춘주문화-춘주 문화원)
방동리 : 1907년 춘천군 향리였던 지룡기(본명:홍민)는 의병활동을 하던 중 380명을 모아 방동리에
대장소를 설치하여 춘천으로의 진입을 위해 포진하던중 밀고를 받은 왜병들의 기습으로
지룡기를 비롯한 14명이 죽고 20명이 생포되었으며 일병들도 대장을 포함하여 여러명이
죽었다.
증리 : 정미의병때 이강년의 부대가 1907년 12월 13일 도연합의병의 서울진격작전중 격전
내평서앞 : 6.25전쟁의 발발 초기에 내평서의 경찰관들이 밀려오는 공산군에 맞서 싸우다 대부분 전사
서부시장 부근
춘천 우두벌 전투 : 6.25전쟁 초기 남침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혈전을 벌이므로 국군이 군열을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했다.
(강원도 비사-강원일보사)
13. 나무, 언덕, 돌 또는 강의 위치가 외관상 의미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
1) 봉의산 :『춘천분지의 꽂봉우리』라고 불리운다.
봉황이 날아가는(혹은 내려앉은) 형세를 취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2) 우두산 : 우수산, 소슬뫼, 소을뫼 라고도 불리운다.
하늘에서 내려와 앉아있는 소의 머리와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강원도-뿌리 깊은 나무中)
3) 청평사의 오봉산(주봉) ; 소가 누운 형상이라하여 와우지형이라하고 또는 서울-청평간 상공에서 바라 보면 용이 구불거리다가 머리가 휘어지며 누운지형이라 한다.
4) 붕어섬, 검봉, 바리산 등은 모양새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14. 이 도시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지계표가 있는가?
팽우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우수주에 백성들이 팽우가 큰 산과 큰 물을 다스렸다는 표식비(기념비)의 뜻과 하나는 백성들이 그의 공로를 찬양 또는 추모하기 위하여 통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다고 한다.
15.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리적 지점은 어디인가?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는 축조 되었는가?(권위자들의 진술을 들어라)
춘천 시내의 지리적으로 가장 높은 지점은 봉의산으로 높이는 350m 이다. 남쪽으로는 도청이 있고 동남 쪽에는 한림대가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소양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남쪽에는 신석기 시대의 혈거
유적이 있다. 또한 7부 능선에는 봉의산성이 있고 봉의사와 소양정이 명승지로 유명하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KBS, MBC의 송신탑이 위치하고 있으며, 약간의 체육시설이 있어서 시민들이 새벽 등산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16. 이 도시의 어떤 지역이 자기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는가? 이 도시에서 특유의 영적 환경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역을 구분해 보아라.
- 천전리 경주 이씨 집성촌 (춘천의 어제와 오늘 중)
- 미군부대-춘천역-근화동을 중심으로 한 윤락문화라고 볼 수 있다.
- 관공서 중심의 유흥가와 봉의산 중심의 사찰을 예로 들수 있겠다.
- 빈민 지역의 밀집가로 근화동과 요선동을 들수 있고 요선동의 경우 범죄율또한 높다.
- 교동의 경우 주민의 80%가 공직자들인데 옛부터 향교지역으로 관아들의 마을이었다.
영적인 조사
A. 비기독교적인 조사
A-1 이 도시의 과거나 현재와 관련된 주요 신들이나 지역 귀신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 일반적인 한국의 토속신앙과 유교문화의 영향가우데 조상숭배 정신이 있음.
기타 마을마다 독특한 신주들을 모시고 있다. (A-3 참조)
A-2 주술,마술,예언,사단주의 프리메이슨,몰몬주의,동방종교,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것과 관련있는 사당,제단,신당,기념물 또는 건물은 어디 있는가?
1) 서낭당 - 동산면 조양2리(전치곡리, 음력3월 3일 아침 7시 대감의 모습띈 서낭신의 화상에 서낭대신지위라는 위패를 함께 모심)
서면 덕두리(음력 3월 3일 9월9일 마을 뒷산 입구에 있고 실타래 소지종이를 )
동산면 봉면 2리 (큰 상면암바위의 작은 당에서 제. 음력 3월 4일 오전에 제.
마을의 풍년과 질병을 주관하는 신에게 풍년 무병장수 벽사를 기원하는데 있음) 서면 방동리 (산천제를 지냄(산신에게) 10월 15일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산신인 호랑이가 와있기에 절대로 개가 짖지 않는다고 믿음)
남면 가정리 (현재는 지내지 않지만 삼리인 재골(제궁동)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치고 평화를 기원하는 산제사를 지냄. 제후 농악대와 거북이가 어울러 당집부터 마당굿을 함.)
2) 기타 이단 종파와 사당,제단,신당,기념물의 위치는 별첨 참조
A.-3 과거에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부터 우상숭배가 자행되던 지역은 어디인가?
1) 3대 기우제 - 기우제는 보통 신용연지역에서 지내나 효력이 없을 경우 제2,3의 장소로 옮겨 지냈음.
① 신용연지역. 소양강과 자양강의 합류지점 중도 남단 신용연 백사장에서 용신에게 기우제를 지냄.(춘천지역의 필요에 따른 대부분의 기우제를 지냄.) 기우제의 초헌관으로는 도호부사, 아헌관으로는 사대부중의 명망있는 인물, 종헌관으로 지역내의 비중있는 중인을 세움. 두 강의 합류지점의 소용돌이 방향에 따라 풍, 흉을 점치기도 하고 깊음의 소용돌이에 용이 산다고 믿음.
② 대룡산 정상에 제2의 기우단이 있음.
③ 가리산 정상에 제 3의 기우단이 있음.
2) 춘천 기우제 - 1973년 7월 3일 동면 지내3리 앞 현재 소양댐 가운데 있는 미역바위에서 마을 부녀자들이 메와 제주를 진설하고 지성을 기우지성을 올림
3) 봉의산신제 - 제물을 산신에게 올려 평화를 기원함
4) 술어니 거리제 - 남면 방아리 술어니마을은 2년마다 1차례, 2월1일에 장승을 새로 세우고 거리제를 지냄. 정월 하순에 제주를 선출하고 2월 1일에 제주와 제일이 결정되면 마을민은 부정을 타지않도록 금기를 지킴. 마을의 질병과 재앙을 막는 수호신적 개념이 큼.
5) 우두산제 - 우두산의 제천단은 단군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역사적 유젹으로 이 곳에서 매년 10월 남녀가 좋은 옷으로 입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함.현재 우두산에는 충렬탑이 있어서 현충일에 나라를 위해 산화한 이들을 기념하고 있음. 일제 시대에는 이곳에 신사를 지었던 적도 있음.
6) 밭치리거리제 - 춘천군 동산면 종양2리 밭치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위해 매년 3월 삼짓날이나 유월 중고일을 택하여 장승과 수살 혹은 따오기라 부르는 솟대를 세우는 거리제를 지냄. (솟대제-장대위에 새를 세우고 장승과 함께 세우는 행사)
7) 수리봉제 - 사북면 고성리 신북면 발산리 경계 높이654M의 산을 수리봉이라 하며 머리산, 마니산 이라는 뜻으로 우리민족의 천제가 행해지던 곳.
8) 키씻기기우제 - 동면 지내리. 아낙내들이 키를 몽당비로 두드리며 용왕이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함.
9) 지내리의 기우제 - 신북면 지내리. 은행나무의 영력을 숭배하며 임신을 원하는 아낙내의 기원품 이기도함
10) 발치리 성황제 - 동산면 조양리 발치리에 전하는 승천한 아기장수 전설을 따라 전치곡리를 밭치리라 부름. 매년 3월에 부락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성황제를 지냄. 동산면 봉면 2리,남산면 방하리드의 장승제와 어우러짐.
11) 돌탑제사 - 거리제/건드래탑/탑고사/탑거리제/탑제라고도 부름. 음력 정월 초사흘에 가장 많이 드려지며 정월 대보름에 대개 지냄. 춘천군 동면 월곡리 돌탑,건드래마을(물이 항상 부족하다는 뜻)의 물 수급위해 쌓는 수구막이적 탑.
12) 용수제 - 일년내내 샘이 마르지 않기를 기원하는 부락제. 북산면 추곡리 낙수제가 대표적임 (추곡약수). 음력 3월1일 과 10월 1일 두 번에 걸져 제사. 춘천여인숙 함제순씨댁에서 도맡아 하며 이장과 면장이 제주가 됨.
13) 등선계곡 - 금선사는 금강산 유점사의 수도 이화웅 스님이 창건한 곳으로 감로의 약수와 함께 삼악산 명기가 모인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알려짐
14) 기타 - ① 서면의 장군봉 : 정상의 중도쪽 동굴에서 위기시에 나라를 구할 장수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음. 길 개간과 일제의 풍수지리적 위치에 시행한 말뚝박기작업등으로 지맥이 끊어졌다고 믿음.
② 동면 상걸 1,2리의 대룡산 산신제 / 동내면 거두1리의 서낭제 / 남면 가정 1리의 대궁동 산제 / 남산면 방하리 장승고사 / 서면 덕두원 1리의 산제 / 서면 안보 1리의 산제 / 서면 서상1리 노제 / 서면 방동1리의 산천제사 /사북면 오탄 2리 1반 대추나무골 산치성 / 사북면 고성 2리 산천제사 / 서면 덕두원리 주민의 왜가리 신주모시기풍습과 매년 신주를 위한 제사 / 우두산 솟을뫼에 후손을 원하는 아낙내의 기원 / 영지로 여겨져 치유와 후손을 기원하는 청평사의 연못 / 추천지방의 작두굿 / 서면 금산리의 말무덤 / 웃샘밭의 동북편에 있는 고인돌 혈을 제단으로 사용 / 정승바위에도 기원 /북산면 물로리의 기우제.
③ 효녀 우례 놀이 가운데 초흔굿등의 굿을 함. / 수레 놀이는 마을간의 흉,풍년을 점치며 마을의 안녕과 풍원을 기원하는 의미 / 봉산면 봉명리에 현존하지는 않는 (수호신적, 노신역할) 있음.
④ 풍수지리의 강한 영향
(예) 증리 금병산은 까치가 알을 품은 모양으로 명당으로 알려짐.
신숭겸묘와 청풍부원군의 묘자리, 박항도 명당으로 알려짐.
청평사는 소(혹은 용)의 머리가 누운 모양
A-4 우상숭배와 연관된 기예품이나 유물이 있는 문화센터들은 어디에
있는가?
- 어린이 회관의 전시실에 몇점의 역사적 유물(불교문화유물포함)이 전시되어 있으나 전문적인 박람시설은 97년 6월 현재 없음
- 고(古)사찰 터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근화동에 현존
A-5 이 도시의 지도자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이방인이나 정사에게
바친적이 있는가?
- 도지사급의 지방관이 봉의산제와 3대 기우제의 초헌관의 역할을 계속해옴.
A-6 이 지역에 처음 거주하였던 사람들이나 이도시 건설한 사람들이 이 도시를 저주한 적이 있는가?
- 전설을 살핌 : 여러가지 아기장수의 전설에서 유추할떄 인물이 날 경우 역적이 될까하여 마을민 스스로 인맥을 끊어버리려하는 노력들이 있었음.
- 건설자는 아니나 일제기에 이 지역의 인맥을 끊기 위해 장군봉에 쇠말뚝을 박은 기록<춘천의 역사와 문화>와 청평사의 종각석수를 막음<밀행스님 인터뷰>
B. 기독교적인 조사
B-1 이 도시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어떻게 대접하여 왔는가?
- 신유사옥으로 국가전체의 박해 혹은 일정의 민족운동의 발산지로의 탄압외에 이 지역내에 다른 박해사건 기록이 없음<춘천백년사 下 p.1687>
B-2 복음전파가 쉬웠는가? 어려웠는가?
- 춘천지역의 일반적인 유교성향에도 불구하고 처음 복음전파는 마을민은 유입자체에 별다른 반감이 없음. 특별히 젊은층에서는 기독교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일부 어른들은 연애당이라고 하며 좋지
않게 생각. <춘천의 어제와 오늘 p.185>
B-3 교회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올바른 교회는?
- 근화동/후평동/퇴계동/효자동/석사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북산면 일대는 희소한 편이다.타지역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별참자료 참고)
- 춘천지역에 비중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로는 춘천중앙감리교회, 순복음춘천교회,동부장로교회, 춘천중앙교회, 춘천중앙성결교회, 신성감리교회, 석사감리교회등이 있다. 늘푸른교회의 경우 JDM (예수제자훈련)이라는 학생선교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확산된 경우도 있다. 순복음교회의 경우
성시화운동본부에 매주 수요예배헌금을 후원하고 있다. 신성감리교회는 복지관 운영과 북한 돕기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B-4 이 도시의 교회들의 건강상태는 어떠한가?
- 일반적으로 도시민들의 지역정서가 사회참여의식이 약한 편이다, 교회에서의 사회운동이 다소간 영향력이 있는 편임. <성시화운동본부의 간사 인터뷰>
- 전체교회중 43%가 등록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교회임<춘천백년사 下>
- 새롭게 형성되는 주택지역에 기존의 교회가 개척교회를 일으킴으로 설립역사가 짧은
중소교회가 많음<차성도(강원대)교수 인터뷰>
B-5 "이 도시의 장로"로 인정받는 기독교 지도자는 누구인가?
- 양인평 법원장(기관장기도모임주도), 조남진 강원일보사장, 조은제 베드로병원장,문선진 강원대총장등
B-6 이 도시 전역에서 기도하는 일이 쉬운가?
- 기독교의 높은 인지도로 인해 기도에 제한받거나 핍박이 있는 곳은 없다고 본다.
- 참고로 영적인 영향력에 따라 기도의 집중정도등에 차이가 있다.
B-7 교파간에 기독교 지도자의 단합정도는 어떠한가?
- 아직까지 연합적인 큰 행사는 없으나 성시화운동, 기관장기도모임,126기도모임(시편 126편을 근거)과 기독교회연합회가 존재하고 있다. 각 교단간 약간의 교단 이기주의의식이 있으나 상호 이해정도가 높아지고 있다.
B-8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이 도시 지도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 주요한 기관장들이 기독교인이며 인식있는 지도자들간의 지역 사회 전반에 걸친 성시화의 노력이 계속 되고 있다. 개교회간의 인지 정도가 높아지고 있다.
C. 계시적인 조사
C-1 이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성숙한 중보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문선진 강원대 총장(교수기도모임 6그룹 각 8명 모임), 전용태 검사(성시화의 핵심),양인평 법원장
(기관장 기도모임),조남진 강원일보 사장(70년대부터 춘천 성시화와 성령운동 주도),이학규 초등교장과 조은제 베드로 병원장(70년대부터 기도와 성경공부모임)과 각 기도모임 참석 기관장과 교수등 평신도
지도자와 주요교회 목사님들
C-2 이 도시 전체를 또는 이 도시의 삶이나 지역의 어떠한 분야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주요 정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