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에게 길을 묻다

[산자락]

명작에게 길을묻다

2012.7.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다 보니 책 가판대가 있다. 시골 마트에서 파는 책이야 토정비결이나, 위인전, 아이들 그림책등 크게 기대할 것도 없어서 그냥 무심히 들여다 보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집어 들었다

. "명작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이었다. KBS 1 FM에서 동 명의 책 소개 프로가 있었던 것 같고, 작가가 그 프로의 방송작가였던  것 같다. 군데군데 들어있는 삽화는 고교 2학년생이 그린 것으로 그 책의 내용에 알맞는 그림으로 책의 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일요일,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기도 싫어서  베란다 티테이블에 앉아서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며  책을 읽다가 점점 빠져들게 되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토마스 하디의 테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등 여학교시절 내마음을 온통 흔들었던 작품들의 소개가 모두 있었다. 사춘기 여학생때 그 책들을 읽은 밤이면 기쁨과 감동에 들떠 백목련 핀 뜨락을, 아니면 하얗게 눈이 내린 마당을 밤새 잠 못이루고 서성대곤 했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아마 중학교 2학년때 온 반애들이 다 돌려본 것 같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다"

아프락삭스가 무엇인지 몰라도 한참 사춘기 여중생인  우리에게는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얘기에 더욱 열광한 것 같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수업시간에도 책상 아래에 책을 놓고 고개를 구부려서 책을 보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 푹 빠져서 밤을 새워서라도 그날 다 보아야했다. 그러곤 감격에 떨면서 마당에 나가 목련나무 아래를 걸으며 달님과 대화하곤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는  여고때 영어 선생님이 테스 이야기를 해주셨다. 서울대를 나오신 그 선생님은 어눌한 말투로 순결한 여인 테스 얘기를 하시고 감수성이 최고인 여학생들은 " 어머, 그래서요, 그래서요, 불쌍해서 어떻게해요" 하곤했다.

우리 여학교때는 극장에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단체 관람을 했는데, 안소니 퀸과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주연한 "노틀담의 꼽추 " 영화가 들어왔다.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그당시 최고의 미녀배우로 허리가 16인치라고 했다. 영화를 본 다음날 영어선생님은 또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 꼽추 얘기를 해주시며  노틀담 성당의 벽에 ANYAK (숙명)이라고 쓰여 있다고 하시며 칠판에 ANYAK 을 쓰셨다. 나는 언젠가는 파리의 노틀담 성당에 가서 그 글자를 확인하겠다고 했고, 몇년 전 딸들이 영국에 있어서 같이 유럽 여행을 할때 노틀담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러나 그 글자는 확인을 할수가 없었다.  안타까이 글자를 찾아다니는 나를 보며 딸과 남편은 어디 벽같은 데다가 살짝 써놓으려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와서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빅토르 위고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재수할때 읽었던 것 같다. 그날 중으로 해야할 공부가 있는데 책이 궁금해서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아! 라빅크의 냉철함, 절망에 빠져 밤을 꼬박 새우고  그 운명적인 아름다운 사랑,  어둠속 한줄기 빛과 같은 사랑에 가슴을 떨었다. 그가 클럽에 가서 마셨던 칼바도스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곤 결심했다. 내가 대학에 가서 시간이 나면 이 책들을 마음껏 보리라, 덕분에 다음해 대학에 가서는 딴 친구들은 공부하는데 나는 책만 읽고, 그동안 못했던 등산이나 서클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학년 중간 고사에 쏟아지는 재시험 공고.........지금도 대학 성적표를 떼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리처드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나,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좇아가는 시겠바늘이다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프랑소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등은  대학생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내가 입었던 여름 티셔츠의 무늬도 갈매기 그림이었다. 긴머리를 휘날리며 갈매기 그림의 티셔츠를 입고 대전의 번화가인 은행동 거리를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 세상이 온통 내것 같았다. 둘다섯의 "긴머리 소녀" 노래는 나를 두고 하는 노래같았다.

그때는 명작을 영화화한 작품이 많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등을 영화관에서 보며, 또 책으로 보며 그들의 사랑, 안타까운 인생등에 취해 같이 울고, 같이 웃곤했다. 우리집엔 여고를 졸업하고 취업한 언니가 월부로 사온 그때 유행하던 삼성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 세계사상전집등이 있어서 이해되지도 않는 니체의 "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들을 머리를 싸매고 읽곤했다. 얼마전까지 그 전집책이 있었는데 몇년전 새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망설이다가 버려버렸다. 옛날 책이라 문단이 세로로 되어있고 글자도 아주 작아서 읽기 어렵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때처럼 주말내내 책을 읽으며 "내게도 이렇게 사랑에 가슴 절절하던 때가 있었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들을 읽으며 밤을 새운 때가 있었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던 시절, 집으로 전화를 하면 아버지가 받으셔서 " 그애 지금 서울갔는데요, 왜 그러시죠?" 하면 말도 못하고 끊고는 가슴앓이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 잘난 맛에 취해 하도 톡톡 거리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고는 떠나간 사랑에 울며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참 이상한 것이 어느날 꿈에 그 사람이 사모관대를 입고 있었는데 바로 그날이 그 사람의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감동할 것도 없고, 오늘이 내일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오늘도 통장의 잔고를 다시 확인하고 연금을 따져보며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계산하다.  둘이 같이만 있어도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딸애한테 " 남자네서 집 못사준대니? 그냥 치워뻐려라" 를 망설이지도 않고 말해버린다. 세월이 사람에게 하는 가장 몹쓸 짓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늙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니, 세월이 나를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늙게 해서, 좋은 것을 봐도 감동도 안하고, 그저 관심꺼리라고는 돈과 건강뿐인 중년도 지나 할머니가 되었다.

오랫만에 옛날을 생각하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중 캐서린이 딸을 낳다가 죽자, 그녀의 집앞 숲속, 고목이된 물푸레나무에 기대어서 외쳤던  히스클리프의 절규를 따라해본다.

" 난 한가지만 기도하겠어, 내 혀가 굳어질 때까지 되풀이하겠어!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편히쉬지 못해!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날 찾아와!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있어만 줘!"

아! 아름다운 시절이여! 그 때가 그립다.

[김용호]

명작에게 길을묻다
- 제목도 좋고 소녀적 회고하는 모습도 솔직하고 좋네요..

[임종본]

명작이 명작을 낳았네요^*^
지금도 충분히 멋진 할머니이고 아름다운 시절이유~~
지난번 세심천 노천탕에 동행 못하게 밀려온 손님들을 야속해하믄서 아직두 아쉬운맘이예요>>**멋진 중년 화이팅!!

[구행모]

멋진 명작속에 저도 빠지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