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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제목은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 풀이할 수 있고, 이 제목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추리할 수 있다. 금오산은 경주 남산을 말한다. 김시습(金時習)은 19세 때 서울의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책을 모두 불사르고 강원도 김화로 들어가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한동안 은둔한다. 24세 때인 1458년부터 관서, 관동, 호서, 호남 등지를 유람하다 1462년 잠시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문 적이 있고, 31세 때인 1465년에 남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남짓 정착 생활을 한다. 제목에 금오산 이름을 쓴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금오신화』를 창작한 것으로 추정한다.1)
신화(新話)란 이름 그대로 새로운 이야기란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란 말인가? 소설집에 '신화'란 이름을 쓴 선례로는 김시습도 재미나게 읽은 바 있고, 그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바 있는 중국 명(明)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들 수 있다. "등불의 심지를 잘라가며 불을 밝히고 밤새 읽을 정도로 재미나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다분히 상업적인 제목이다. 김시습이 이 『전등신화』를 의식하여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국내외에 유행하던 소설과 비교하여 새로운 이야기임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기존의 이야기에 비해 새로운 이야기란 중국의 당(唐)나라 때 발흥하여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창작되고 향유되어온 전기소설(傳奇小說)들과 비교하여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전등신화』역시 전기소설집이거니와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부터 중국의 전기소설을 수용하여 읽어왔었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전기소설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광범위하게 모은 『태평광기(太平廣記)』가 중국에서 수입되어 읽혔고, 조선시대 이후로는 『전등신화』가 널리 읽혔다.2) 중국 전기소설의 수용과 아울러 국내에서 창작도 이루어졌는데, 조선시대 이전의 작품으로는 「최치원(崔致遠)」3), 「조신전(調信傳)」4) 등의 전기소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금오신화』는 소설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국내외의 전기소설의 창작과 향유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摴蒱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5편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들이 '갑집(甲集)'으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작품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중국 대련(大連)의 대련도서관에 윤춘년이 명종 때에 간행한 것으로 보이는 목판본 『금오신화』5)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갑집 뒤에 적다"는 뜻의 "서갑집후(書甲集後)"라는 제목 아래 소설의 창작과 관련한 김시습의 시 두 편을 실어놓고 있어서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금오신화』는 창작될 당시에는 꽤 알려졌던 것 같으나 그 뒤 널리 읽히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 17세기 중엽의 명유(名儒) 김집(金集)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신독재수택본 전기집』에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 필사되어 있는 것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자료이다. 반면 『금오신화』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 간 뒤 1653년 이래 1884년까지 모두 4번 출판되었다. 그만큼 일본 지식인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전기소설 창작에 영향을 끼쳐 천정료의(淺井了義)의 『도기보오코(伽婢子)』(1666) 속에는 「용궁부연록」의 번안작이 들어있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작품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평가 받았으나 근래 학계에서는 이 이전에 나온 「최치원」, 「조신전」 등을 소설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금오신화』는 현재까지 알려진 소설 자료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소설집(傳奇小說集)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기소설집으로는 신광한의 『기재기이(企齋記異)』가 그 뒤를 잇고 있고, 전기소설로는 권필의 「주생전」, 작자 미상의 『운영전』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이 점에서 『금오신화』는 우리 소설사에서 초기의 주류를 형성한 전기소설의 흐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영향 관계의 측면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 특징의 측면에서 중국의 『전등신화』 및 일본의 『도기보오코(伽婢子)』와 비교하여 이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전라북도 남원을 배경으로 한 우리 고전소설이 3편 있는데, 모두 명작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摴蒱記)」와 『최척전(崔陟傳)』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이다. 『최척전』은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걸치는 긴 전란의 시기에 최척과 그 가족이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사연을 그린 것이다. 이 세 작품 모두에 등장할 정도로 만복사는 남원 지역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광한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원의 서쪽에 지금 그 터와 유물 몇 점이 남아있어 누구나 답사할 수 있다.
이 만복사에서 벌어진 저포 놀이로 생겨난 사연을 이야기한 것이 「만복사저포기」다. 부모를 여의고 또 장가도 들지 못한 채 만복사에 사는 양생(梁生)은 배필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과 저포6)로 내기를 하여 이기고는 처녀 귀신을 만나 사랑을 이룬다. 처녀는 왜구가 침략했을 때 절개를 지켜 죽은 여성이다. 다음 날 개녕동에 있는 처녀의 집 - 사실은 무덤 - 에 가서 3일을 함께 지내고 이별할 때는 그녀와 같은 처지의 이웃 여성들과 시를 주고받는다. 그 이튿날 처녀의 부모를 만나 보련사에서 그녀를 위한 천도재에 그녀와 함께 참여한다. 그 뒤 처녀의 부모로부터 받은 전답과 가옥을 다 팔아 그녀를 위해 재를 올리고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다.
살아 있는 남자와 여자 귀신 사이의 애정은 기이한 일에 속한다. 그런데 김시습은 이 애정을 기이한 일로만 그리지 않는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그렸다. 작중 공간인 남원, 만복사, 개녕동, 보련사 등이 실재하는 곳이고, 고려시대 말 남원 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심해 이성계가 남원 옆 운봉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황산대첩을 거두기도 했던 곳이어서 왜구에 맞서 정절을 지키다 죽은 처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7) 또 남원이 본관인 양씨가 실제로 있다.
작중 세계의 차원에서도 양생과 처녀는 현실성을 갖는다. 양생은 고독한 인물로 만복사에 기거하고 있으나 처녀와 함께 처녀의 집을 갈 때 마을 사람이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보아 남원이라는 지역 공동체의 한 사람이다. 처녀 또한 양생이 그녀의 부모를 만나 그 존재와 죽음을 확인하였으므로 정체불명의 귀신은 아니다. 그러므로 양생과 처녀 귀신은 현실성을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양생이란 인물이 있다는 것, 원통한 죽음을 당한 처녀가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기이한 일은 이 두 인물이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 사랑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과 그 일로 인해 양생이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다. 두 세계에 속한 인물들의 만남으로 기이한 일은 일어나고, 그 결과 이승에 속한 양생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양생을 중심으로 보면 기이한 일은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일어났고, 또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기이한 일이란 현실과 다른 별개의 일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속에는 항상 기이한 일이 있거나, 아니면 기이한 일이 현실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저포 놀이를 계기로 양생과 처녀가 만나면서 기이한 일이 생겨났지만 이 두 인물은 모두 분명한 현실적 존재들이다. 물론 양생은 이승의 세계에, 처녀는 저승의 세계에 속해 있어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두 인물이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기이함을 형성하지만 이 두 인물의 현실성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처녀의 현실성이 특히 문제인데, 사실 이 작품은 양생과의 만남을 통해 처녀의 사연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본래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처녀가 법당에 나타나 부처님께 자신의 사연을 글로써 하소연하는 것도 그렇고, 천도재를 지낼 때 양생에게 이별을 슬퍼하면서 자신의 사연과 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는 것도 그렇다. 청춘의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 남녀 사이의 진정한 애정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고 또 양생과의 만남이 너무 빨리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한탄하는 것도 그렇다. 처녀의 이웃 여성들이 읊는 한시가 길게 인용되고 있는 것도 이 작품이 처녀, 또는 처녀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한스러운 사연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잘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 태어나 정상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추구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불의에 죽은 것은 그 당사자에게도 원통한 일이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난 세상에게도 언젠가는 풀어야 할 짐인 것이다.
한편, 양생은 이러한 처지의 여성을 만나 짧은 기간 동안 사랑을 하고, 운명적으로 헤어지는 체험을 하면서 두 가지 의미 있는 변화를 보인다. 하나는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처녀의 자태에 반하고, 배필을 만났다는 사실에 즐거웠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는 이승과 저승을 넘어서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또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장례를 치르면서 쓴 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다른 하나는 양생이 처녀가 떠나간 후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점이다. 이 결말의 의미는 매우 함축적인데, 처녀와의 사랑과 이별이 그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양생은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인식했다고 할 수 있고, 양생이 사라지는 결말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에는 현실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만복사저포기」의 처녀가 생전에 양생과 만나 애정을 이룬다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그 가능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다.
이생(李生)이 담 너머로 처녀를 엿본다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생과 최씨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이다. 이생은 고려의 국학(國學)에 다니던 학생이었고, 최씨는 귀족의 딸이다. 당시 송도 - 지금의 개성 -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최고의 남녀로 손꼽았다. 둘은 부모의 허락 없이 사랑을 나누는데 눈치를 챈 이생의 부친이 그를 울산으로 쫓아 보낸다. 상사병으로 죽을 지경이 된 최씨 집안에서 사정을 알고는 적극 청혼하여 둘은 결혼한다. 이생은 벼슬을 하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데,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략해 와 피난 가던 중 최씨는 겁탈하려는 도적에 항거하다 죽고 이생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최씨의 집에서 이생과 최씨는 재회하여 여러 해 동안 두문불출하고 오직 서로 사랑하며 지낸다. 그 뒤 환생의 기한이 차서 최씨는 사라지고, 뒤이어 이생도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죽은 부인이 환생(幻生)하여 남편과 살았다는 것 자체는 기이한 일이다. 이것은 「만복사저포기」의 사연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두 주인공이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이 작품의 전반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전반부의 두드러진 특징은 여성이 애정의 성취를 주도한다는 데 있다. 「만복사저포기」의 처녀도 그러하지만 최씨는 더욱 적극적이다. 이생은 두 사람의 밀회가 누설될까봐 걱정을 감추지 않으나, 최씨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문제가 되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한다. 이생을 몰래 자기 방에 끌어들여 애정을 나누고 죽을 결심으로 이생과 혼인하겠다고 부모에게 주장하는 그녀의 행동은 오늘날의 세태에 비추어보아도 놀라울 정도다.
여성이 애정 성취에 적극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은 당(唐)나라의 애정 전기(愛情傳奇)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것은 일종의 애정전기소설의 서사문법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시습이 최씨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애정 추구를 그린 것은 고려시대의 애정 풍속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情)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는 「만전춘별사」의 화자처럼 고려가요에서 우리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남녀를 거듭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의 동의를 받기 전에 동침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어찌 보면 애정의 자유를 구가하는 듯한 이 두 남녀가 오직 서로만을 사랑하고 혼인한 뒤에는 부부의 예를 철저히 지키며 서로에게 절개와 정절도 역시 철저히 지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로가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이룬 사랑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임을 이 두 사람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교(禮敎)로써 애정 윤리를 규범화하기 이전에 진정한 사랑은 그 자체가 도덕적임을 이생과 최씨는 실천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홍건적의 겁탈에 맞서 절개를 지켜 죽은 최씨가 못다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현세에 돌아오면서 이 작품에서 진짜 기이한 일이 전개된다. 이생은 그녀가 죽은 줄 알면서도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오직 부인과 함께 금슬 좋게 사는 것을 추구할 뿐이다. 이생은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진 채 자기 집에서 오직 환생(幻生)한 부인과의 애정만 추구하다가 부인이 영원히 떠나가자 그리움에 병이 들어 뒤이어 죽는다. 그래서 이생과 최씨가 좌절된 사랑을 지속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기이의 세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이한 일은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하는 지극한 열망에서 형성되어 현실의 새로운 연장(延長)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기이의 세계가 한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데 비극이 있다. 사랑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자 이생이 병들어 죽고 마는 것은 이 세상은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곳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앞의 「만복사저포기」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에서 『금오신화』의 기이의 세계는 일변한다. 앞의 두 작품이 남녀의 애정이 중심이라면 여기서는 상고의 우리 역사를 화제로 하되 남녀의 애정은 암시적이다.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놀다 생긴 사연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뜻처럼, 송도에 사는 홍생(洪生)이 평양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취흥이 일어 혼자 부벽정에 가 평양을 무대로 한 우리의 고대사를 회고하면서 시를 읊는 것으로 사건은 전개된다. 그 때 기자조선의 공주가 나타나 홍생의 시에 화답하고 자신의 내력을 말한다. 다시 공주는 시를 읊은 뒤 하늘로 올라가고 홍생은 이별을 안타깝게 여기며 돌아온다. 그 뒤 홍생은 공주를 연모하다가 병이 들었는데, 꿈에 어떤 미인이 나타나 옥황상제가 홍생을 하늘로 불러 일을 맡긴다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생은 죽고,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작가는 평양이 옛 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이었음을 말하고, 특히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이곳에 봉하면서 신하로 삼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여 중국에 대하여 우리의 상고 문화가 대등했음을 내세웠다. 작가의 이러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홍생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및 고구려의 흥망을 회고한다. 그러면서 지극한 감회에 사로잡혀 그러한 느낌을 공유할 사람을 바랐고, 그때 어떤 여인이 나타나 우울한 심정을 함께 풀자고 제의한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회고와 그로 인해 생겨난 감회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이다.
여인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의 공주로서, 위만이 나라를 차지하자 고난 속에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켰으며, 단군이 그녀를 이끌어 신선이 되게 했고 나아가 달나라 항아의 시녀가 된 인물이다. 공주는 고국 생각이 나 잠깐 찾아왔던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남녀가 만난다는 것과 여성이 난리 속에 절개를 지켰다는 것은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남녀의 만남이 애정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회고로 이루어졌다는 데 특징이 있다. 남녀의 애정이 사랑의 감정에 이끌려 이루어지는 것도 있으나 의식이나 가치관이 같아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듯이 이 작품의 남녀의 만남과 애정도 민족사에 대한 공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미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성의 내력을 통해 현실과 연계된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작가는 공주의 회고를 통해 역사이면서 동시에 기이한 세계를 보여준다.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의 교체가 그 역사적 사실이라면 위만의 침탈에 맞서 공주가 절개를 지킨 행위는 여성으로서의 정절 의식만이 아니라 기자조선이 상징하는 바, 문화적 자긍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아울러 신선이 된 단군이 공주를 구원하여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보이는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의 발로이기도 하다. 즉,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다른 층위에서는 현세적 시공간을 초월한 신선 및 신화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홍생은 상고시대의 무대인 평양에서 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 민족사를 재확인하고 또 그 위에 펼쳐진 선계(仙界)를 만난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의 이러한 면모는 김시습이 관서지방을 유람한 것과, 그가 도가(道家)의 주요 사상가였다는 점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8)
「만복사저포기」에서 처녀 귀신의 존재가 무덤에서 그녀가 준 주발이라든가 그것을 알아본 그녀의 부모와 함께 왜구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인정되었듯이, 이 작품에서 공주의 존재는 평양에 남아 있는 역사적 유물 및 공간과 함께 상고의 역사에 의해 인정된다. 즉, 삶과 죽음으로 경계가 구획되는 세계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로 구획되는 세계들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들 역시 개개인에게 관여하고 있음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다시 말해 역사는 흘러가버린 과거형이 아니고 언제든지 개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현재형임을, 이 작품은 공주를 만난 홍생이 신선이 되어갔다는 삽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현재 흐르는 시간만이 지배하는 평면적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여러 층위로 쌓여 있는, 즉 시간적으로 입체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바로 그 공간이 기이의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홍생이 평양을 옛도읍으로 재인식하는 순간 그는 그때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공주를 만나 서로의 지취(志趣)를 확인하면서 연모의 정을 갖게 되어 결국은 신선이 되었던 것이다.
『금오신화』의 기이의 세계는 「남염부주지(南炎浮州志)」에 와서 또 변한다. 남염부주라는 기이한 세계를 꿈속에 여행하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경주에 박생(朴生)이 있었는데, 그는 승려와 무격의 귀신설을 비판하고 천하에는 하나의 이치만 있을 뿐이라는 '일리론(一理論)'을 짓는다. 꿈에 그는 남염부주에 이르러 염마왕을 만나 유교와 불교, 귀신, 천당과 지옥, 천도(薦度)와 대속(代贖)을 위해 재를 올리는 것, 윤회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삼한시대에서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흥망을 소재로 하여 백성을 폭력적으로 통치하는 왕을 비판하는 의견을 교환한다. 염마왕은 박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조서를 내린다. 꿈에서 깬 박생은 몇 달 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이웃사람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박생이 염라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외에 또 다른 세상이 없다고 보는 박생이 전생에 악행을 일삼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염마왕의 초대를 받아가서 결국은 그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逆說)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작품의 모순이라기보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소설적 장치로 볼 수 있다. 주인공 박생은 '일리론'을 지을 만큼 유학에 일가견이 있고 인품도 훌륭한데다 위세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대할 때는 순박하고 성실한 인물이다. 유학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박생이지만, 사실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뜻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박생은 염마왕에게 질문하여 그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세계의 이치와 풍속과 정치 등 제반 양상에 대한 자신의 평소 견해와 비판 의식을 마음껏 토로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들을 바로잡는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역설적 장치를 통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나라는 백성들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염마왕이 왕위를 물려주는 글에서, 박생은 모든 백성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니, 백성을 지선(至善)의 경지에 들게 하고 세상을 태평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데서 작가가 현실의 제반 모순을 극복하여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열망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 전개된 기이는 공포를 유발하는 남염부주의 기상천외한 모습과, 박생이 염마왕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기이의 세계인 남염부주는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염마왕은 전생에 부모와 임금을 죽이는 등 간교하고 흉악한 짓을 한 인물들을 교화하고, 남염부주는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기이한 세계'란 곧 현실세계의 문제점이 투영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결코 기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박생이 염마왕이 된다는 기이한 설정은, 염부주라는 곳이 사실은 태평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세상이 제대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기이 역시 현실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앞의 세 작품과는 달리 당시 세계의 제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생과 염마왕은 천지 운행의 이치에서부터 인간세상의 풍습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쟁점이나 문제점들을 논의하고 평가하며 따진다. 앞의 세 작품들은 시(詩)가 등장인물들의 심정을 표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작품에는 시가 한 편도 등장하지 않고 서술 및 대화만 등장할 뿐이다. 박생의 '일리론'이란 글, 박생과 염마왕의 문답, 왕위를 선양하는 염마왕의 글 등에서 보자면 작품은 사상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용궁의 잔치에 초대받아 다녀온 이야기란 뜻이다. 고려시대의 인물인 한생(韓生)이 용궁의 초대를 받는데, 이는 용왕이 공주의 혼인을 위해 누각을 짓고 그 상량문을 얻기 위해서였다. 한생이 상량문을 짓자 용왕은 여러 강의 신들과 함께 잔치를 성대하게 연다. 한생은 용궁을 두루 구경하고 선물을 받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 뒤 한생은 세상의 명리를 떨쳐버리고 명산(名山)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다.
「남염부주지」의 남염부주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곳이라면 이 작품의 용궁은 신비하면서도 평화롭고 즐거운 곳이다. 주인공 한생도 특별히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거나 문제가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글 솜씨로 조정에까지 이름이 났기에 용궁에 초청되어 글 솜씨를 뽐내고 용궁의 신비를 구경하고 왔던 것이다. 또 한생이 용궁에서 지은 글과 노래는 물론 잔치에 참여한 인물들의 노래들 모두 찬양의 노래이다. 그래서 『금오신화』의 다른 네 작품에 비해 이 작품의 세계는 밝다. 한생은 신화적 질서의 세계인 용궁에서 벌이는 잔치를 더욱 잔치답게 만들고, 그 신화적 세계를 즐겁게 탐방하고 돌아왔으니 이 작품은 원혼이 등장하거나 우수(憂愁)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등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불만이 직설적으로 토로된 다른 네 작품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 왜 한생은 용궁에서 돌아온 뒤 세상의 명리를 떨쳐버리고 명산(名山)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던 것일까?
한생은 용왕에게서 선물로 받은 야명주와 흰 비단을 잘 간직하고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즉, 용궁 여행 그 자체를 숨긴 것이다. 그러고는 입산하여 종적을 감추었으니 그는 현실세계는 용궁과 같은 세계가 아니라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용궁 체험과 같은 행복한 체험을 지상의 세계에서는 결코 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세계 인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는 비와 바람, 우레와 번개를 조절하는, 다시 말하면 농업 기반의 세계에는 절대적인 조건인 기후를 순조롭게 조절하는 용궁은 이상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세계는 결코 그러한 이상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비극적인 세계 인식의 결과일 수도 있다. 즉, 이 작품의 기이한 세계인 용궁은 이상세계를 상징한다고 보아도 좋다. 특히 잔치를 벌이고 한생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며 노래하는 것은 인간들끼리의 완전한 화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금오신화』를 작가 김시습과 연계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특히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만큼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남염부주지」에는 김시습의 사상과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은 데 비해 이 작품에는 그의 독특한 개인사가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신동으로 이름나 세종의 명으로 궁중에 불려가 시험을 받는 것이 하나의 원체험이 되어 이 「용궁부연록」 창작의 심리적 기저를 형성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궁중에 불려가 시를 짓고 상으로 비단을 받아 돌아온 어린 김시습에게 그 궁중과 세계는 조화롭고 행복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생이 용궁에 초대되어 가 용왕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고 환대를 받는 것으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조화롭고 행복한 세계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결정적으로 훼손되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나아가 김시습에게 그 원체험은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으며 다시는 실현될 수 없는, 그렇다고 어그러져 가는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무엇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한 평생 방외(方外)의 인물로 떠돌게 된 것도 바로 한생이 명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춘 것과 방불한 것이다.
일찍이 김안로(金安老)는 『금오신화』를 두고 "술이우의(述異寓意)", 즉 "기이한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의 뜻을 그 속에 담았다."고 평했다. 우리 역시 앞에서 그 기이의 세계와 특징이 어떠한지 살펴보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탐색해왔다.
여기서는 바로 그러한 '술이우의'의 방식을 잠깐 점검하기로 한다. 문학에서 갈등을 주로 다루는 장르가 소설이라 할 때 그 갈등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데, 『금오신화』의 경우 좀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즉, 주인공들 사이에는 전혀 갈등이 없는 것이다. 양생과 처녀 귀신, 이생과 최씨, 홍생과 공주, 박생과 염마왕, 한생과 용왕 사이에 대립이나 갈등은 없다.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하면서 사랑하고 견해의 일치를 보거나 화합하고 있다. 이 인물들이 서로 만나면서 기이가 전개되는데, 그 속에 어떤 갈등도 없고 오히려 완전한 결연이나 동지적 유대감조차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갈등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곳은 「이생규장전」에서 이생과 최씨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물들 사이에 갈등은 없고 일치만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상대방과 완전한 결연 또는 합일을 본 주인공이 현실세계에 돌아오면 종적을 감추거나 또는 죽거나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결말에서 우리는, 주인공들의 만남과 결합이 그들 바깥 세계와의 갈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양생과 처녀 귀신의 결합으로 구축된 세계가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 대립한다는 것이다. 또 이생과 최씨의 사랑을 좌절시키는 세계, 박생과 염왕이 함께 비판하는 현실세계 등이 바로 이들과 대립하고 갈등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금오신화』는 이 두 세계의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직접 그리지 않고 배경으로 처리하거나 주인공이 현실세계를 등지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 또한 특징적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서사 방식이 바로 작가 김시습의 고독의 표현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뜻에 맞는 인물과는 완전한 만남을 이루되 세상과는 절대 화해하지 못하는 소설의 결구는, 세상과 불화하여 몇몇 지기가 상합하는 인물들과만 교유하고 세상 전체를 조롱하면서 평생을 부정적인 인식으로 일관한 김시습과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귀신과의 사이에서 진정한 애정을 성취하거나, 죽음의 경계를 넘어 애정을 지속하거나 또는 역사 및 알레고리적인 공간에서 뜻이 맞는 인물을 찾되 현실세계는 철저히 등지는 『금오신화』의 세계에서 우리는 김시습의 처절하기 짝이 없는 고독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김시습은 지독하게 고독했으나 자신의 고독을 마냥 이야기하고 만 것은 아니다. 처녀 귀신의 원통한 사연이 양생과의 만남을 통해 드러났듯이 김시습은 자신의 고독 속에 세상 사람들의 억눌린 사연이나 원망, 희망을 담아냈다. 지식인이 고민하는 것이 천하의 고민이듯이 김시습의 고독은 세상의 소외된 인물들의 고독과 상통하며, 그래서 그의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순된 세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지만 남들이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들의 대변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가 그려낸 기이(奇異)는 현실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신화 [金鰲新話] - 기이로 그려낸 고독과 울분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