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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 나주출신 금성:나해철
영산포 가야산 왕곡면 운곡리 출생
1.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2.개산 큰집의 쥐똥바퀴새는
뒷산 깊숙이에 가서 운다
병호 형님의 닭들은
병들어 넘어지고
술 취한 형님은
강물을 보러 아망바위를 오른다
배가 들지 않는 강은
상류와 하류의 슬픔이 모여
은빛으로 한 사람 눈시울을 흐르고
노을 속에 雲谷里를 적신다
冷山에 누운 아버님은
물결 소리로 말씀하시고
돌절벽 끝에서 형님은
잠들지 않기 위해 잡풀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어머님 南平아짐은 마른 밭에서
돌아오셨을까
귀를 적시는 강물 소리에
늦은 치마품을 움켜잡으셨을까
그늘이 내린 九津浦
형님은 아버님을 만나 오래 기쁘고
먼발치에서
어머님은 숨죽여 어둠에
엎드린다.(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국내산 홍송(紅松)이 주재료로 사용된 왕건호는 97t급 2층 구조로 규모는 길이 29.9m에
너비 9.9m, 높이는 3.16m이나 주 돛대를 포함한 높이는 18.2m로 선원 3명을 포함해 최대
96명이 승선할 수 있다.
전남 나주시 영산포는 드넓은 나주평야를 끼고 있어 고려 때부터 물자교역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곡물 수탈기지가 되면서 일본식 대저택과 은행, 정미소, 창고 등이 들어섰다.
수십 척의 대형 화물선이 드나들어 목포항보다 훨씬 호황을 누렸고
하지만 1978년 영산강 하굿둑 건설로 뱃길이 끊기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삼백 리 영산강 뱃길의 영욕을 간직한 영산포가 왕건호 등장으로 새롭개 변신을 했다..
왕건호는 영산포에서 다시면 회진리까지 10km회항중
영산강 처녀 (천지엽 작사 송운선 작곡 성민 노래)
영산강 구비도는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간 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못 믿을 세월 속에
안타까운 청춘만 가네 길이 멀어 못 오시나
오기 싫어 아니 오시나 아아
푸른 물결 너는 알지 말을 해다오
유달산 산마루에 보름달을 등불을 삼아
오작교 다리 놓고 오작교 다리 놓고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밤이슬 맞아가며
우리 낭군 얼굴 그리네 서울 색시 고운 얼굴
정이 깊어 아니 오시나 아 아
구곡간장 쌓인 눈물 한이 서린다.
글/ 나천수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영산강의 의미와 나주8경, 8진미, 8품, 8정의 시사점
정부의4대강 살리기 정책으로 영산강이 부각되고 있다.
영산강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영산강은 남도의 젖줄이다. 강의 유역에 펼쳐진 끝없는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남도사람은 물론 이 강토의 사람들 생명을 이어주는 먹거리가 되었으니, 땅 파먹고, 갯벌 뒤집어쓰고 살아온 지난 흔적들에서 이곳 사람들은 갯땅쇠가 되기도 하고 마당쇠가 되기도 하였다. 권력의 그늘에서 억압과 수탈의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주로 이런 농경문화뿐이다. 그러나 숨은 향토사를 들춰보면 영산강 유역이 다만 농업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산강의 중류에 위치한 마한(馬韓)문화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金冠)에서 이곳은 범상치 않은 지역임을 예견할 수 있으며, 903년 태봉국의 수군장 왕건(王建)이 영산강의 나주로 출진하여 918년 고려를 개국하기까지 영산강이 왕건의 왕업(王業)을 쌓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뿐이랴, 과거 역사 기록을 찾아보면 영산강에 위치한 항구가 우리나라 대표 항구로서 국제교류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는 역사를 들춰 내고자한다. 영산강 유역은 나라를 개국시킨 정치적 요충지요, 국제교류 항구로서의 교통의 요충지요,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지석묘에서 고대문화의 산실이요, 농경문화의 산실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가 당나라로 들어갈 때는 배가 모두 영암군(靈岩郡) 바다에서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하루를 타고 가면 홍의도(紅衣島)에 이르며, 또 하루를 타고 가면 가계도(可佳島)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풍으로 사흘을 타고 가면 곧 태주령파부(台州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이르고, 만약 순풍이면 하루에 이른다. 남송(南宋)이 고려와 통하는 데도 또한 정해현 해상에서 배를 출발시키어 7일에 고려 국경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이 곧 영암군이다. 당나라 때 신라인이 배를 타고 당(唐)에 들어갔을 때도 강나루를 통한 중요한 나루터와 같이 선박의 왕래가 계속 되었다 ”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영산강의 하류에 있는 영암은 신라 때의 국제항구이었던 것이다. 고려와 중국 송나라간 국제교류 항구가 영산강에 위치하였다는 기록은 송나라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영산강 중류에 소재한 나주 회진(會津)이 중국 대륙으로 가는 중요한 항구였다는 기록은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1122년 5월 명주(중국 절강성 영파항)를 출발한 송나라 사행(使行)들의 항해 노정(路程)에 나주 회진과 항도(航渡)상 연결되는 흑산도가 기록된 것으로 확인된다. 당나라 때인 신라 말에는 완도가 당으로 가는 항구이고 장보고가 죽은 이후에는 영암군이 당(唐)으로 가는 항구였으며 송나라 때인 고려 시대에는 나주 회진이 송나라로 통하는 항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산강의 기능을 살리지 않으면 나주는 물론 전남의 미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903년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나주로 진출할 때의 영산강은 사실 강이 아니라 바다라고 해야 옳다. 지금은 완전 육지 내부인 나주 세지면에 배를 멘 돌의 유물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방으로 막아 놓은 안쪽만 강이 아니라 제방이 없다고 보면 얼마나 넓은 백사장과 호수 같은 강물이 흘렀겠는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시인묵객들의 문학이 얼마나 많으며, 강변 8정, 어팔진미, 소팔진미가 정착되었겠는가.
그런데 역사 이래 영산강은 퇴적물로 강바닥이 메꾸어저 갔고, 더더욱 하구언의 공사로 모든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뱃길도 열지 못하고, 수자원으로서의 기능도 점차 없어지고, 수질은 최하급수로 치닫고, 영산강 어(魚)8진미 해산물도 사라지고, 영산강 8정(亭)도 빛을 잃었고, 시인묵객들이 영산강을 떠났으며, 영산강 백사장의 갈매기도 죽었고, 사람의 발길마저도 끊어져 있다. 오직 오는 것은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쓰레기와 슬러지가 밑바닥에 두껍게 쌓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영산강이라는 오염의 덩어리가 내륙에 턱 버티고 이 지역을 공동화 시키면서, 쓸모없는 물건이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형상이다. 물론 공사 착공당시에는 수자원으로서 농업용수 확보나 홍수 조절 기능, 새로운 농토 확보 등의 이유가 있었겠으나, 수질이 거의 4급수에서 5급수로 치닫는데, 5급수로서 어찌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산업구조의 변화로 농업은 이제 기피산업이 되었고, WTO체제 하에서 경쟁력을 상실하였다. 이즈음에 와서 하구언의 역할이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농업용수를 위해 하구언을 존치하기에는 명분이 약해져가고, 하구언의 문을 열어야 수질문제, 뱃길 복원문제, 문화관광 창달문제 등이 하나하나 해결되지 않겠는가. 만약에 바닷물이 나주 내륙까지 들어온다면, 나주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다면 나주의 운명은 오늘처럼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 정부가 궁여지책으로 강 살리기 일환으로 역사 이래 퇴적되어온 강바닥을 파내는 것도 정치 논리로 찬반이 엇갈렸었다.
요즈음 지방화 시대에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는 방편이면서 관광의 자원화를 위해 8경, 8미, 8품 등으로 특색을 돋보이려 하고 있다.
원래 8경은 중국 호남성 소상팔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명승지로 손꼽히는 곳 중에 하나가 장강(長江: 양자강) 하류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에 양자강의 지류인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이른바 소상강(瀟湘江) 지역이다.
소상팔경은 산시청람(山市靑嵐). 소상야우(瀟湘夜雨). 어촌낙조(漁村落照). 원포귀범(遠浦歸帆). 동정추월(洞庭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연사만종(煙寺晩鐘). 강천모설(江天暮雪)의 8가지 경치를 말하며 이후로 강산의 승경을 이를 때 팔경으로 정하는 실례가 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특색을 부각시켜 관광 자원화 하기 위해 8味, 8景, 8品, 8亭 등을 지정하고 있다. 나주는 다행스럽게도 예로부터 영산강 8亭이 전해지고 어팔진미(魚八珍味)와 소팔진미(蔬八珍味)가 있다. 어팔진미(魚八珍味)는 영산강이 막히면서 완전 사라졌지만 조금물 또랑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 황룡강 자라, 수문리 장어, 복바위 복어이고, 소팔진미(蔬八珍味)는 동문안 미나리, 신월 마늘, 흥룡동 두부, 사매기 녹두묵, 전왕면 생강, 솔개 참기름, 보광골 열무, 보리마당 겨우살이이다. 모두다 웰빙 식품들이다.
나주는 앞으로 8경 8품 등을 정하는 문제를 남겨두고 잇다.
8경의 지정도 시인묵객들이 시를 지을만한 풍광을 지정해야한다고 본다. 우리는 자칫 기이한 풍경, 기이한 암석을 경(景)으로 지정하는 우를 범한다.
영산강 중류지역인 나주는 동강에서 노안까지의 아름다운 강변을 가지고 있다.
나주팔경은 예를 들어 동강청람(洞江靑嵐). 영산야우(榮山夜雨). 앙암낙조(仰巖落照). 황포돗배(黃布歸帆). 몽탄추월(夢灘秋月). 곡강낙안(曲江落雁). 다보만종(多寶晩鐘). 지석모설(砥石暮雪) 등 이런 식의 8景을 정해야 한다.
나주8亭도 현재 보존된 정자를 중심으로 새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장춘정, 석관정, 월계정, 영모정, 벽류정, 금강정, 기오정 등.....
영산강의 하구언이 농업용수로서의 기능이 필요치 않고, 홍수 조절 기능만 있다면 하구언을 구태어 존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오염된 시화호를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하여 살려냈듯이 영산강을 살려 내기 위해서는 언젠가 하구언의 문을 열어 바닷물을 다시 들어오게 하면, 영산강 8亭도, 魚팔진미도, 蔬팔진미도, 8景도 모두 살아 날 것이다. 더 나아가 나주가 살고, 전남이 살아날 것이다.
첫댓글 자료 올리는중
나해철 시인은 금성인
자~ㄹ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