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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
16. 변화됨(3)(롬12:1~15:13)
[롬12:3~5]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몸의 생활을 실현하는 문제에서 변화 받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에 살려면 다른 생각을 가져야 되고 다른 입장을 가져야 되고 여려 가지 달라질 것이 있다. 우리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만 가더라도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니까 거기에 맞춰야 되고 사회풍조도 다르니까 거기에도 맞춰야 된다. 같은 인간이 사는 데도 그렇게 차이가 많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과 땅, 땅의 생활과 하늘의 생활, 하늘의 생활이 교회생활이다. 우리는 지금 땅에서 교회생활을 하지만 실제 내용은 하늘의 시민권으로서의 생활이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 그러면 누구나 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교회생활을 위한 변화를 말한다. 어떤 종교이든지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가령 우리가 유교(儒敎)에 들어간다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늘 가르치는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도를 배우지 못하면 하는데 이 말은 공부를 못하면 하는 말이다. 이 공부는 도덕을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공부를 하지 못하면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가르침, 전통이다. 그래서 유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도덕적인 인간이 될까? 하는 것이 짐승들과 구별되는 그런 인간이 될까 하는 목표가 있다.
불교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안에 들어와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들이 다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 생활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활에서 다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교회 생활은 특수한 생활이다. 그러니까 교회생활 안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냥 변호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예를 들어서 나쁜 일 하던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이것도 변화다. 싸움질 하던 사람이 안 하게 되었다는 것도 변화고, 도둑질 하던 사람이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변화다. 많은 종류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다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들이 되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생활을 위한 변화를 위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군대를 가면 군대생활을 위한 변화를 요구한다. 군대는 특수한 사회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아주 모범생이라 하더라도 훈련소에서 가면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군대는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성질이 완전히 다르니까 다른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훈련소에 들어가면 머리를 다 똑같이 깎아 버리는 것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없고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군대는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를 빡빡 깎아버리는 것이다. 머리를 길러서 있을 때는 노랑머리 빨강머리도 있다. 그런데 청년들이 생각하기는 다 자기 멋이다. 군대가면 이런 것을 봐주지 않는다. 앉혀놓고 그냥 밀어버린다. 그것이 대강 밀어버리는 것이니까 자세히 밀어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다르니까
“변화를 받아 하는~” 이 말은 교회 때에 있는 말이다. 로마서 11장까지는 이 변화라는 말이 없다. 그런데 12장이 들어오면서 이 말이 있는 것은 교회생활을 들어가면서 하는 말이니까 우리는 꼭 이것을 중심에 두고 다음 장들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비슷한 것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12, 13. 14. 15장을 읽어 가면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주 많다. 그렇지만 목적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도 다른 곳에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심지어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들이랄찌 이런 것들은 다른 신화에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같은 신화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목적으로 쓴말이니까 그렇다. 여기에 변화라는 말을 썼지만 다른 목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위해서 변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잘 살았는데 교회생활은 좀 불편하다는 이런 것도 있다. 그것은 사회가 다르니까 생긴 것이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은 세상에서 볼 때 아닌데... 교회에서는 왜 이런가? 하는 이런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들이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가? 왜 아닌 것이 여기에서는 맞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문제들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걸림돌이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일반적이 상식으로만 생각하다가 교회에 왔는데 다른 상식이 있게 되면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닐 수 있다. 아주 비슷한데 아닐 수 있다. 내용이 전혀 다를 수 있다. 북한에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서 훈련을 할 것이고 남한에서도 훈련을 한다. 같이 훈련을 하는 것이니까 훈련은 똑같다. 그런데 목표가 다르다. 그러니까 성경 안에 나오는 변화를 요구하는 말은 말은 같고 내용도 비슷하지만 목표는 다르다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번에 우리가 몇가지 말씀을 드렸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했다.
4) 지체로서 봉사함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지체로서 큰 몸으로 봉사하는 은혜로운 길이다. 작은 돈으로 큰 집을 사는 것과 같다. 혼자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집을 여럿이 모아서 구입함으로서 큰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몸의 생활을 실행함에서 있어서 지체로서 봉사한다는 문제다.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은, 지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말이니까 손가락 하나! 발 또는 손 이런 것들이 지체니까 이런 작은 것들이 큰 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손가락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몸 안에서 손은 굉장히 중요하다. 발가락 하나만 없어도 걷는데 굉장한 지장이 생긴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몸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하다. 몸의 생활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큰 은혜다. 손가락이 따로 있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이것이 사람의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사람 전체를 돕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손가락으로서는 대단한 영광이다. f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무슨 영광이 있겠냐는 것이다.
누구 얘기도 늘 했었지만 자기 손가락인데 잘라놓고 나니까 너무 징그럽고 험하다는 것이다. 또 병원에 가니까 돈이 안된다고 붙여주지를 않았다. 대구에서 이리저리가라고 하면서 갔다가 결국 부산까지 갔다가 그래도 안 되어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해서 낙동강에 버리고 왔다. 몸 안에 있을 때는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떨어지고 나니까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조그마한 것이 몸에 붙어있을 때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이었고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큰 몸, 거룩한 몸이 있는데 영광스러운 몸 안에 내가 한 부분이라는 것, 한 지체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너무 은혜로운 것이다.
우리 한 사람은 떨어져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숨 떨어지면 그냥 한 줌의 흙에 불과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교회 안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될 때는 너무 귀한 존재가 된다. 판자 조각 하나가 돌아다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방주 안에서는 얼마나 귀중한 것이냐는 것이다. 그 판자 하나가 없으면 배전체가 가라앉고 만다. 그러니까 배 안에 있는 판자라야 그 판자가 영광스럽고 가치가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이 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가치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을 위할 때 가치가 있다. 판자가 방주를 위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판자 하나는 가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가치 있는 사 람이 되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 못된 생각이다.
미국에 가니까 한인타운이 있었다. 거기에는 다 한글로 간판이 되어있다. 그래서 한국인지 미국인지 착각한다. 거기에 있는 사람도 다 한국이고 그렇다. 거기에서는 영어를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다 한국사람이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갈 때마다 바꿔지는 것이 중국간판은 많아지고 한국간판은 줄어든다. 점점 한인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 바꿔진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중국사람들은 여러 명이 어울려서 빌딩을 산다고 한다. 10명 또는 20명이 모여서 빌딩을 산다는 것이다. 개인은 살 수 없는 것인데 사버리니까 빌딩하나 사면 중국사람이 들어오고 또 하나 사면 또 중국사람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한인타운을 먹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참 좋은 점이 열명이 하든지 20명이 하든지 한 사람에게 맡기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둘이서 사도 싸운다. 그래서 동업은 하지 말아라는 이것이 옛날 사람들의 유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전혀 이의가 없다고 한다. 한 사람을 믿으면 그대로 다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돈이 적어서 상가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데 그 속에 들어가니까 내가 상가 주인이 된다. 빌딩 주인이 된다. 큰집의 주인이 된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그래도 돈이 적으면 방이 적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큰 집이고 큰 집일수록 나는 더 부자가 된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작은 돈으로 큰 집의 주인이 된다. 우리도 작은 존재로 큰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는 살수 없는 집과 같다. 그런데 이 집이 다른 집과 같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이 주인이지만 각자에게 넉넉한 집일뿐 아니라 주인이 많을수록 더 크고 좋은 집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무 커서 혼자는 살 수 없는 집과 같다. 내 돈으로는 살 수 없다. 나 혼자로는 그 집을 살 수 없는 그런 집과 같다. 그런데 이 집이 다른 집과 같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이 주인이지만 각자에게 넉넉한 집이다. 그리고 집이 커질수록 더욱 넉넉해진다. 그러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더 크고 좋은 집이 된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연약하다. 아무리 은혜가 넘친다 해도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지체로서의 나는 한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 하나님의 충만이 되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나는 연약하다. 아무리 내가 뛰고 날아 봐도 역시 연약하다. 아무리 해도 그렇다. 아무리 은혜가 넘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내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체로서 나는 한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된다. 그리스도의 충만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충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해도 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면 나는 손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것이 우리 인생의 영광이다. 나로서는 안 죽어봤자 별게 아니란 말이다.
한 조각의 판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가 방주에 박히게 되면 나는 죽고 방주만 있다. 그것이 내 인생에 영광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개인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옹색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나라에 안에서 찾으려고 하면 너무너무 쉬운 것이다. 내가 내 개인으로 그것을 갖겠다고 생각하니까 어려운 것이지 내가 한 방주로서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무 쉬운 것이다. 거기에는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각자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혼자로서 모든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손은 손의 역할만 하고 발은 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이것이 분수를 알고 행하는 지혜로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지 않고 ‘이것은 너무 작다. 내가 하나의 판자조각으로는 너무 작은 것이다.’ 분량은 지금 하나의 판자조각에 불과한데 자기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나는 이 정도 밖에 아니지만 나로 인해서 만들어진 배는 큰 배다.’ 그것이 지혜로운 생각이 아닌가? 지혜가 따로 있겠는가? 혼자로서 모든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손은 손의 역할만 하고 발은 발의 역할만 해도 된다. 그것이 아주 지혜롭고 쉬운 것이다.
나 혼자만 생각해서 발의 역할만 하다 보면 짜증날 것이다. 아니 손은 늘 깨끗하게 씻고 이러고 다니는 데 발은 하루에 한 번 씻어주고 이러니까 ‘나만 왜 이렇게 힘을 써야 되고 나만 왜 이렇게 구두 속에 들어가서 숨 막히게 있어야 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 역할에 대해서 만족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손이 되었으면 좋을 텐데. 왜 발이 되어서 이렇게 고생을 하나? 나는 걸어갈 때 손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고 한다. 이상하게 남이 논을 사는 데 내 배가 아프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손은 손의 역할만 하고 발은 발의 역할만 한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참 어렵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이것이 온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과 다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실행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이고 저 사람은 나 보다 잘 난 게 없는 것 같은 데 부모를 잘 만나 유산을 많이 받아서 평생을 그렇게 산다. 이것이 속을 꼬이게 한다. 안 그런가?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별 것도 아닌 놈이 조상을 잘 만나서 땅을 팔아서 떵떵거리며 다닌다면 괜히 배가 꼬인다. 이게 오기가 나오고 꼬라지가 나오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잠재우기가 굉장히 어렵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갈들이라는 것이 이런 갈등이다. 옛날처럼 아주 빈곤한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빈곤, 이것 때문에 느끼는 갈등, 이것이 아주 심하다. 오죽하면 두 패로 나누어서 싸우겠는가? 다 거기에 그것이 들어 있다.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고, 이것이 모두 그래서 그렇다. 자기 분량대로 생각하기가 어렵다. 우리 사회 같으면 더군다나 그렇다.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거기는 자본주의가 발달했으니까 자기 분수대로 그냥 감사하게 생각한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있는 대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된다. 자본주의의 교육이 그렇게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하기도 어렵고 자본주의를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공산주의를 해 놓으면 불평이 안 나오겠는가? 그러면 능력이 있는 사람이 불평할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만 우리가 손은 손의 역할만 해도 만족하고 발은 발의 역할만 해도 만족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오는 게 아닌가? 교회서도 세상처럼 그런다면 교회를 왜 오겠는가? 교회에서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는 것이 서로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섬기는 것이 서로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손이 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발을 돕는 것이고 발이 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손을 돕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아무리 깨끗하고 하더라도 발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때문에 자기 혼자 때문에 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발 때문에 지금 내가 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에 대해서 내가 감사가 된다. 발도 마찬가지다. 자기 혼자 똑똑해서 되겠는가? 자기 혼자 걸어가면 뭘 하는가? 손이 없이 혼자 뭘 하는가?
내일 아침에 일찍 심부름 갔다 오라니까 어디 가서 뭘 하는 지도 모르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경주까지 갔다 왔다. 100리 길을 걸어서 갔다 왔다. 가 보니까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다. 명령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리번거리다가 돌아왔다. 주인이 찾으니까 어디를 가고 없다. 한 참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떴는데 종이 온단 말이다. “어딜 갔다 오느냐?” “예, 경주 갔다 옵니다.” 갔다 왔으면 뭘 하는가? 아무 일도 안했는데... 발이 아무리 가도 소용이 없다.
몸의 지체가 되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 인생은 정말 허망하다. 어디로 갈지 모르고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는 것이다. 머리가 있으니까 어디로 갈 줄 알고 손이 있으니까 무엇을 만질 줄 안다. 발이 있으니까 걸을 줄 안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
우리는 지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현재 기독교는 이것을 잃어버렸다. 지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위대한 사람, 놀라운 사람, 이런 사람들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 또 기도를 정말 많이 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선망의 대상이다. 심지어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천주교 같으면 그런 사람들을 성자, 또는 그런 반열들이 있어서 숭배하다시피 한다. 본받자, 그렇게 본받자는 말이다. 그런데 다 그렇게 본받으면 뭐가 되겠는가? 지체가 안 되는데, 다 똑똑한 놈만 있는 것이지 방주가 될 수 없으니까 바다에 물이 창궐할 때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통나무로는 배를 지어도 한계가 있다. 판자로 연결되어야 큰 배를 지을 수 있지 통나무배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커 봤자 그렇다. 3000년 되었다는 나무를 가 보니까 크긴 컸다. 그때 열 몇 명이 갔는데 다 두를 정도로 둘레가 컸다. 그런데 그것 속을 파서 배를 만들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작은 판자로 지은 배는 훨씬 크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체로서 산다는 것, 여기서 ‘나는 죽고 몸만’ 이렇게 된다. 그리고 자아가 없어진다. 그 자리가 아니면 자아가 없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자아가 없어지는가? 이것이 어느 종교든지 하나의 숙제다. 나는 죽고, 다시 말하면 자아는 없고 대아만 있는, 소아는 없고 대아만 있는 그것이 어디든지 다 소원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안에서도 자기가 죽어야 된다. 이런 사상이 들어왔다. 그 전에는 그런 것을 몰랐는데 워치만 니의 서적이 들어오면서 그랬다.『자아의 파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굉장히 많이 팔렸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다 ‘내가 죽어야 되겠다. 다 내 문제다.’ 이런 생각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으로 상당한 변화 같은 것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로 완전한 자아의 파쇄라는 것은 없다. 스님들이 평생을 그렇게 한다. 나를 없애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닌가? 쉽게 말하면 나라는 에고(ego)를 없애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되는가? 안 된다. 내가 다 안 물어봤지만 절대로 안 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안 된다.
방주 안에서만 나는 죽는다. 꼼짝 못해야 죽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데 어떻게 죽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니까 죽지 내가 스스로 돌아다니는 데 어떻게 죽겠는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환경에 들어가야 없어진다. 판자조각이 되어 그 안에 들어가면 자기는 없어져 버린다. 벽돌 한 장이 건물 안에 들어가면 그때 자기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고 건물만, 건축만’ 그게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헛된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안 될 일, 평생해도 안 될 일은 안 생각했으면 좋겠다. 물론 된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된다고 하면 몇 명이나 되겠는가? 60억이나 70억 명 가운데서 된다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자기 혼자서 자기가 없는 삶,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 가운데는 그렇게 될 분이 없다. 그래서 내가 안심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나는 될 수 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르겠다. 미안한 말이다. 아마 안 그럴 것이다. 우리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은 안 그럴 것이다. 그렇게 똑똑하면 우리 교회 안 나온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은 우리 교회에 못 나온다. 그렇지 않은가? 나오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안심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지체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 누구는 머리고 지체고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다. 머리만 혼자 있으면 뭘 하는가? 아무리 이 기계가 좋다고 하더라도 머리만 가지고 사람이 되는가? 안 된다.
머리만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밑에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활동을 못하는 전신 마비인 사람이 있다. 목이 상해서 그런 사람이 있는데 머리는 말짱하다. 모든 생각이 그대로 있다. 단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평생을 누워 있다가 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봤다. 이 사람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인데 움직이질 못한다. 머리가 아무리 좋으면 뭘 하는가? 그 머리를 실행할 몸이 없는 데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고 다 중요하다. 서로가 다 중요하다. 서로 지체가 되었다.
그러니까 각기 받은 은사대로 그렇게 봉사해야 된다.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손이면 손, 발이면 발, 이것이 모두 선물이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든지 이것은 다 선물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래서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이 변화된 봉사다. 이게 진짜 변화가 아닌가? 판자 조각이 자기 스스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직 변화가 아니다. 많이 변화되었다. 판자조각까지 되었으니까. 통나무가 잘라지느라고 변화되고 다듬어진다고 변화되고 많이 변화되었다. 그런데 최종적인 변화에 오지 않으면 변화하나 마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방주 속에 딱 들어갈 수 있을 때, 빠져 나올 수 없도록 박힐 때, 그때 변화가 완성되는 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쉽다. 옛날에 나도 변화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게 참 어려웠다. 남이 보기에 겉모양은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내 속에 완전하게 변화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노력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교회에서 적어도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은 다 그렇게 하려고 한다. 변화되어서 새 사람 되려고 노력한다. 하는 데 그게 쉽게 되는가 하면 안 된다. 한쪽이 변화되면 다른 한쪽이 안 되고 그렇다.
우리는 지체가 되었다. 지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 나는 지체구나. 나는 손이면 손, 발이면 발이지 손도 되고 발도 되는 것은 안 되는구나.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5) 자신을 준비함
그 다음에는 자신을 준비하라는 말이 나온다. 12장부터 15장까지는 여러 부분으로 실행해야할 여러 가지를 열거해 놓았는데 너무 많아서 이것을 일일이 하다보면 몇 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꺼번에 함축을 시켜 놓았으니까 여러분이 읽어도 다 아는 말이고 목표만 분명하면 교회를 위한 변화이구나 하는 것만 확실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김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사랑해야하고 서로 우애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한다. 요즘은 순모임을 하니까 더 잘되는 것 같다. 옛날에는 교회에서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막연했는데 지금은 순이 있으니까 순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너무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까 너무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너무 구체적으로 봉사한다.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막연해져서 어디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를 무엇으로 사랑해야 할지 잘 모른다.
오늘 권자매가 간증하는 것을 듣고 참 많이 변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순모임할 때는 마이크까지 서기까지는 하는데 서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은 못하고 생각만 하고 서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술술 나온다. 놀랍게 변화되었다. 뉴욕 한복판에 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보통 때는 말을 잘하는데 마이크 앞에만 서면 말똥말똥 서가지고만 있는 것이다. 오늘 보니까 아주 유창하다. 뉴욕에서도 순모임을 하니까 입이 열린 것 같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음
기도에 항상 힘씀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고 기도에 항상 힘쓴다. 우리가 늘 기뻐하려면 항상 소망이 좀 있어야 한다. 되든지 안 되든지 소망이 있어야 하는데 소망이 있으면 절망에 빠져도 완전히 빠지지 않는 것이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일에 절망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거기서 절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되는데 절망할 수 있는가. 인간이 소가 된다면 절망적이지만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인데 왜 절망하겠는가. 번지수만 잘 찾으면 누구라도 될수 있다. 번지를 못 찾아서 우편이 잘못 배달되어서 그런 것이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함 손 대접하기를 힘씀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라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자. 이것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공급하고 서로 대접하고 이런 것이 다 기쁨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바이다.
2. 그리스도를 본으로 사람들을 대함(12:14-13:14)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본으로 사람들을 대하자는 말인데 12장 14절부터 13장 14절에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본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상대할 때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삶이다. 교회생활은 잘 하는데 세상 사람에게는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욕을 먹는다.
(일반적인 삶)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향하여,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는 어떻게 살았던가? 이 모범 안에서 합당하게 살 것을 권고함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향하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을 향하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는 항상 그리스도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살았던가를 늘 생각하고 이 모범 안에서 합당하게 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는 어떻게 했는가?
가령 우리가 전혀 믿지 않는 사람, 교회와 관계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런 경우에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살라는 말이다. 교회가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하고 살면 안 된다. 예수님도 교회 아닌 많은 사람을 접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 항상 속에 생각하기를 이럴 때 그리스도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음
박해하는 자를 대했을 때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이것도 어렵다. 박해하는데 축복하는 것은 어렵다. 왜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오히려 박해하는 자가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박해하는 자와 같이 싸우면 내가 박해받는 것이 아니다. 박해하는 자와 맞붙어 싸우면 나는 박해받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싸우는 자다.
박해받는 자는 그리스도를 인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니까 내가 잘못해서 남에게 야단을 듣는다든지 하는 것은 박해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을 박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잘못해서 주님을 욕을 얻어 먹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박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 좀 있는데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너무 좋지 않다고 하면 돌아가서 욕을 한다. 그러면 그것을 박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마땅히 내가 받을 짐이다. ‘하나님 나를 저 사람들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 진짜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박해를 받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함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는 말은 아무리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웃집에서 어려움이 생겼으면 같이 느껴야하고 같이 동참하고 한마디라도 위로해야지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 너는 지옥 갈 놈이고 나는 천당 갈 사람이라는 식으로 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측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미움을 받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슬픔과 멀리 있으면 안 되고 그 사람과 고락을 함께 해야 한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음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음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다 필요한 일이다. 다 필요한 일인데 어디가도 다 이렇게 가르친다. 유교도 그렇게 불교도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그 말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도모함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함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에게 맡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자. 악을 악으로 갚으면 똑같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 나는 선한 체 하면 안 된다. 악을 악으로 갚아버리면 이미 나는 똑같은 사람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웃과 더불어 화목해야 한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데 이웃사람들과 만날 싸운다, 사소한 일로 다툰다면 덕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세계에는 별 사람이 다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옆에 사람과 화목이 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다 화목하고 지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사람의 사정도 알아야 하고 내 이익을 너무 취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내 이익만 찾으면 화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도 자기들의 이익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싸우는 것이다. 개가 뼈다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을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고 사람도 그렇다. 먹을 것이 있으면 싸운다.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에게 맡긴다. 이것도 아주 중요하다. 나를 헤치는 사람을 나고 갈 구어 줘야지 하면 안 된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이것만 해도 아주 중요하다. 원수를 내가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것도 좀 어렵다. 내가 갚아야 시원하지 남이 갚으면 덜 시원하다. 그러니까 내가 갚아야지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원수가, 원수가 되고 또 원수가 되는 것이다.
중국 소설을 보면 몇 대를 걸쳐 원수가 되어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내놓고 산속에 들어가서 무술을 익혀서 나와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전부 다 무협지 소설이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살면 원수가 끝이 나지 않는다.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이 일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고 내가 복을 받는 길이다. 그것이 손해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참 이상하다.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원수를 갚지 않았으면 당장에 볼 때는 내가 큰 손해를 본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어떤 길을 통해서도 다시 복이 돌아온다.
악에게 지지(끌려가지)않고 선으로 악을 이김(교화함)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는데 선을 악으로 이기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아주 어렵게 된다. 누구든지 싸우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선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들은 선의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싸우는 것이다. 악을 이겨야 한다. 더군다나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계속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는 선하니까 악을 이겨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선은 악에게 끌려가지 말고, 따라가지 말고 선으로서 악을 교화시키라는 뜻이다.
데모하고 대들고 해서 내가 손을 봐줘야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세상을 바르게 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다 선하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는 선하기 때문에 저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싸움에 그 판이다. 일만 있으면 건수만 있으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싸우는 선수들이다. 동네 운동회 있으면 늘 나오듯이 싸울 일만 생기면 남의 일이고 내 일이고 상관이 없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것도 그렇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으니까 잘못 들으면 그럴 수 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은 내 선으로 그 사람을 교화시키라는 말이다.
원수를 갚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 숯불을 머리에 올려놓은 것 같을 것이라고 분명히 내가 저 사람을 해쳤으니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 머리가 숯불이 올려져있는 것처럼 뜨거워질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자.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함(13:1~7)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13장 1절에 있는데 이 구절이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여기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세는 구체적으로 정권을 말한다. 로마의 정권, 무력을 가진 정권을 말한다. 옳치 않은 정권에 대해서는 대항을 하는 것이 우리가 배운 교육이고 지식인데 옳치 않은 정권에 어떻게 복종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굉장히 말이 많은 구절이다. 이것은 바울이 잘못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바울이 권세에 아부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의 말들이 있다.
이 말은 민주 국가에서 대단히 곤란한 말이다. 이런 교육이 없었고 또 이런 교육을 어떻게 하겠는가? 모든 교육은 옳치 않은 것을 보거든 그것에 저항해라고 했는데 옳치 않은 것을 보고도 복종하라고는 교육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일제시대에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했던 구절이었다.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데 그 권세에 복종해야하느냐 하는 문제로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분명히 남의 나라가 와서 내 나라를 정복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내가 복종을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니까 이것이 뭔가 잘못된 것이고 이해가 안 되고 하니까 이 성경구절이 대단히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정권이 그렇게 악하지 않았기에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그렇다. 바울도 결국은 핍박을 받다가 죽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이 처형되었다는 자리를 보존해 놓았다. 거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바울의 목을 치니까 머리가 한번 두 번 뛰어갔다고 해서 거기에다 자리를 기념해 놓았다. 바울도 역시 그 권세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러니 바울이‘아 지금은 좀 조용한 때니까.’이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이것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잘못 말하면 전부 오해가 되어버리니까‘여러분이 알아서 하십시오,’그것도 안 되고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자세 문제 같다. 내가 해보니까 자세 문제다. 내가 젊었을 때, 그때가 70년대로 한참 제 3세계의 바람이 불어올 때였다. 남미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해방신학이 유행했었다. 남미는 대부분 캐톨릭이다. 그때 남미의 농산물, 커피 등을 미국자본이 점령을 했기에 농사를 지어서 미국자본이 다 가지고 갔다. 그런데 남미 사람들 대부분이 캐톨릭 교인으로 캐톨릭 신부들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자기 교인들은 가난해지고 돈은 모두 미국으로 가니까 이 신부들에게서 나온 것이 해방신학이다. 신부들에게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참 일리가 있기는 있다.
본 회퍼 같은 사람은 아주 천재적인 신학자였다. 나찌독일하에서 30대에 미국에 유명한 신학교 교수로 갔던 천재적인 신학자였는데 나찌가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고 ‘내가 미국에서 혼자 편하게 살 수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교수직을 그만 두고 독일에 들어가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 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결국 잡혀서 죽게 되었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저서로 신도의 공동생활 이란 책이 있는데 그 때 나는 그 책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정말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그 사람을 볼 때 독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너무 순수한 사람이었다. 내가 30대에 정말 감동 받은 책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朴정권이 있을 때였는데 교회 안에 한 쪽에서는 그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힘도 없지만 교회에(본회퍼Bonhoeffer)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마침 우리교단에서 핍박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이 말이 딱 맞아 떨어진 때였다.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이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위에 있는 권세가 와서 실제로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그 권세에 내가 복종해 되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 때 내가 복종했더라만 조용해졌을 것이다. “내가 잘못 했습니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했으면 아주 쉬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는 결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가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저항을 했다. 4년 동안 저항을 했다.
그 때 나를 도와주는 내 편이 많았다. 그래서 더 한 것 같다. 그런데 결굴 역부족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나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아 세상은 힘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의 보다 힘이 중요한 것이로구나!’이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C.C.C.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준곤 목사님의 사상이 이런 사상이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이것이 金목사님의 사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일부에서는 정권에 아부한다고 金목사님을 비난했다. 그 분이 조찬기도회도 만들고 대통령을 참석시키고 정치인들도 참석시켰고 전군신자운동도 전개했다. 그런데 그분을 가까이서 접촉해보니까 정권에 아부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분이 아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 이것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파고 들어가서 복음을 하나라도 전해볼까를 주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한 가지를 주야로 생각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니까 도저히 안 됐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모르면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는 이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 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부인이 6.25때 죽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어린 딸 하나가 남았고 그 어린 딸 하나를 키운 것이다. 그랬으니까 한이 맺히면 얼마나 맺혔겠는가. 자기도 같이 끌려가다가 어떻게 해서 빠져나가서 산속으로 도망을 쳐서 살았는데 거기에 아버지를 세우고 너가 나오지 않으면 여기서 쏴 죽이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큰 소리로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숨어서 살았으니까 얼마나 원한이 맺혔겠는가! 그런데 이 분은 이것을 신앙으로 승화를 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구나! 복음이 없어서 그렇구나. 문제는 예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러니 예수를 전해야 되지 원수를 갚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민족복음화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간절한 마음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이 잘한 것이다.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없고, 그런 간절한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만일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정권이 어쩌고 정치가 어쩌고 하는 여기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오로지 한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권세에 복종하던지 안 하던지 간에 나는 복음을 전하는 게 내 목적이다.’이렇게 된 사람이다. 객관적으로 잘 했다 못했다 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는 저렇게 하고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대로 한다.
옛날에 보면 남의 초상집에 가면 가는데 마다 대성통곡을 하고 우는 할머니들이 있다. 그 할머니가 특별히 그 집에 슬픔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설움이 항상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초상이 나면 자기 설움이 터지니까 초상이 나면 가서 우는 것이다. 남이 볼 때는 ‘친척 인가보다. 동생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대로 한다. 원한을 풀지 못한 사람은 원한 그대로 뭔가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 쓰인 말은 김중권 목사님처럼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다.
바울도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유태인들에게 고단당하고 또 로마인들에게 고난을 당했다. 그런데 ‘권세들에게 복종해라!’는 이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권세하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세하고 싸우면 언제 복음을 전하겠냐는 말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의를 다 제거 하고나서 복음을 전하려면 언제 불의를 다 제거 하겠냐는 것이다. 길은 바쁜데.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악을 다 제거 하고 나서 예수를 전하려면 언제 전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악과 싸우고 있을 시간에 예수를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분명히 악한 정권도 포함되어있다.
권세란 게 다 좋은 권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권세자체가 악할 수도 있다. 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 말씀은 권세가 좋아서 하는 말도 아니고 사랑스러워서 하는 말도 아니다. 이거하고 싸우고 있다 보면 다른 것을 못한다. 길거리에서 데모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전도를 하겠는가. 못한다. 데모할 일이 한 두 가지냐는 것이다. 매일 데모해도 모자란다.
그러니까 기업인들을 자세히 보면 국회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돈벌이 한다고 정신없다. 왜냐면 기업은 하루라도 쉬면 적자가 얼마나 나겠는가. 엄청난 손실이 온다. 그리고 잘못하면 넘어지고 그러면 완전히 죽는다. 그러니까 생명을 걸고 돈 벌이 하는데 투쟁을 한다. 만약에 그렇지를 않고 국회서 무엇을 하나 그러고 있으면 돈벌이 못한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그러든지 저러든지 돈 벌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다. 국회서 맨날 싸워도 그래도 돈 버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딱 망조 들게 생겼다. 그러나 저러나 돈 버는 사람이 있다. 눈 딱 감고 돈 버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정치는 후퇴하고 있다.
돈 버는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 것 다 생각하고 참견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니 좋아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니고 내 목표가 다른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란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 왜 굴복해야 되나? 그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한 말이다. 세상에 관심 있으면 해야 된다. 그것이 내 목표 같으면 해야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로지 복음에만 관심 있는 그 사람들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지켜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된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빛의 갑옷은 바로 그리스도다. 옳으니 그르니 싸우고 있는 이것은 어둠이다. 빛의 갑옷을 입으면 전할 것은 복음뿐이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있는데 하늘의 빛을 못 보니까 땅의 어두운데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싸움이 이전투구다. 진흙바탕에서 개들이 싸우고 있는 건데, 내가 조금 많이 물어뜯었을 것 같은데 다 똑같다는 것이다. 권투하는 사람들 보니까 치고맞고 하는데 그래도 자기가 한 번 더 쳤다는 데 대해서 쾌감을 느끼고 한다. 정말 못할 짓이다. 요즘 보니 여자들도 한다. 세상에 어떻게 할 일없어 저런 것을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돈 벌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어두움 에서는 서로 싸울 수밖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를 입으면 우리는 무엇이 복음인지 무엇이 복인지 무엇이 인생의 길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둠하고 싸울 필요가 없다.
3. 믿는 이들을 받아들임(13:1~7)
그리고 믿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다. 이것은 유태인이 아닐지라도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하는 말도 되고, 또 믿음이 아주 연약한 자를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 하지 말아라. 나는 조금 더 믿음이 있다 해서 믿음 없는 사람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그때 당시는 안식일에 관한 문제도 있었고, 음식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있으니까 돼지고기 먹어도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하는데, 초보자들은 아데네 신전에서 제물로 썼던 돼지고기를 시장에서 팔았는데. 그것을 사먹으면 우상숭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먹지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알지도 못하고 돼지고기 먹어도 상관이 없는데 저것을 먹지 않고 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은 지금 돼지고기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봐야 되지 돼지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만 보고 있으면 안 된다. 그 사람 마음을 봐야 된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떤 형제가 과거에 엉망이었지만 그 사람이 교회에 와서 새 사람이 되었다면 새 사람이 된 것만 봐야 되는데, 과거에 엉망진창이었던 생각하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간증이 나와도 너는 과거에 그런 놈이라고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 빛이 비춘 것이 중요하다. 지금 무엇을 위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한번만 간증을 하고 갔다 하더라도 아주 좋은 간증을 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이 정말 감사한 사람이다. 교회를 위하고 갔다. 누가 돈을 준다고 그렇게 해주겠는가. 아무도 돈을 주어도 해주지 않는다. 배우들을 데려다가 다른 것을 하라고 하면 잘하지만 돈 줄 테니 간증하라고 하면 안 한다. 그러니까 한 번만이라도 간증하고 간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다.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다. 그 교회가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감사한 사람이다.
우리는 다 종으로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함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
우리는 다 종으로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내가 누구의 종으로 사는가? 이 문제이다. 내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마음도 종으로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변화할 일이 못되고 신전에 바쳤던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하다가도 그 사람보고 믿음이 없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자기는 그렇게 해서 믿음을 지키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것을 비난하면 되겠는가? 안 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음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 나는 괜찮지만 형제는 그것을 보고 거리껴 한다면 그것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괜찮다고 그냥 두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질 것 같으면 내가 하지 말아야 된다.
자신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함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씀
자신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비방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나는 옳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은 그것이 좋지 않아서 비방을 받는 경우가 있다. 잘난 체하는 것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한다. 자신의 선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잘난 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는 정말 좋은 마음으로 했는데 다른 사람은 그것을 비난할 수도 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데 저것은 자기 선이지, 변화된 것이 아니야, 우리 교회는 특별히 이렇게 비난 할 수 있다. 다른 교회에서는 선한 일을 하면 다 박수치고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누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저것은 선이야 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것은 우리 교회 문화의 특색이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한 일로 우리가 박수를 받아야 되지 저것은 선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가 정죄 받지 않도록 함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가 정죄 받지 않도록 해야 된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으로 오히려 내가 정죄를 받으면 안 된다.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는 것으로 네가 또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남을 비판하고 나면 그 비판이 도로 나에게 돌아온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내가 비판하려거든 나도 비판 받을 생각을 하고 비판을 해야 된다. 내가 비판 받기 싫거든 비판을 하면 안 된다.
모든 일을 믿음을 따라 행함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함(15:1~)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움
모든 일은 믿음을 따라 행한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된다.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된다.
‘모든 일은 믿음을 따라서’라는 말은 복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라는 그런 말이 된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되지 그것을 까발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이 강한 것이 아니다. 내가 주를 위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내가 담당해야 된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폭로해버리면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더 못한 사람이다. 남의 약점을 담당해야 된다.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자. 나는 늘 남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기쁨만을 위해서 살면 얼른 좋은 것 같다. 입맛에 곶감이 좋다고 얼른 좋은 것 같은데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좋은 것이 돌아오지 않는다. 항상 남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나도 좋고 남도 좋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갖겠는가?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된다. 그러면 좋은 관계가 된다. 그런데 내가 내 욕심을 이루려고 하다 보면 남을 기쁘게 못하게 된다. 적당히 먹을 것 있으면 욕심 낼 필요가 없다. 얼마나 먹다가 죽는다고.
옛날에 너무너무 먹을 것이 없었으니까 죽은 사람 입에 북망산 가는 길에 먹고 가라고 쌀을 잔뜩 넣어준다. 또 노잣돈 하라고 관 속에 돈을 넣어준다. 그런 돈이 없어져서 한국은행에서 돈 찍느라고 돈이 얼마나 들어간 줄 아는가. 오죽 가난했으면 그랬겠는가? 죽은 사람 입을 벌려 쌀을 집어넣었다. 죽어서 장사지내러 가는데 그동안 배고프다고 쌀을 넣어주고 있다.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자. 성경은 위로 받은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조카 롯과 둘이 한 땅을 놓고 얘기할 때, 둘이 다 양이 많아져서 싸우게 될 때, 아브라함이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고 했다. 순모임하더니 성경공부를 하더니 나보다 더 많이 안다. 어디 구석에 있는 성경구절을 물어보면 책을 쓸 때는 썼지만 지금은 기억을 못한다. 그런데 그것을 물어본다.
성경에는 위로 받는 사람이 많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해서 좋은 땅 소돔은 조카 롯이 가져가고 자기에게 남은 것은 산지였다. 한심할 것인데 성경에는 네가 바라보라, 이 모든 것을 네게 줄 것이라고 쓰여있다. 아브라함에게 넉넉하게 하나님이 위로가 되었다. 내가 세상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면 하나님이 내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냥 계시지 않는다. 손해 본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냥 계시지 않는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자. 우리가 다 서로 좋게 하고 하나님의 위로로 가득 차게 되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서로 받음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서로 받고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자.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자. 우리가 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자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잘못해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이 돼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다.
* 하나 모든 자비하신 은혜를 받은 자로서 권고함.
바울은 율법으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증인으로서 사람들을 권고한다.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했다. 맨 처음 1절에서 모든 자비하심으로.
바울은 율법으로는 최고의 지도자였다. 가마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지도자였다. 그 위치의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율법 교사, 서기관 급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증인으로서 사람들을 권고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내가 너희를 권한다고 한다.
이것은 받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이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율법으로 완고하게 뭉친 율법 덩어리 같은 인간에게 까지도 베푸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안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받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이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자기 같은 사람이, 율법으로 완고하게 뭉친 율법 덩어리 같은 그런 사람인데, 이런 인간에게까지도 베푸시는 은혜는 그냥 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안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자비가 있는데, 자비도 높고 낮은 것, 깊고 넓은 것 등으로 종류가 많다. 자비가 크기 때문에. 그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말은 이런 자비, 저런 자비가 있는데, 영으로 옥에까지 내려간 자비도 있고, 죽은 나사로를 일어나라고 한 자비도 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자비 안에서 자기는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모든 은혜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자기는 은혜를 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고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모든 은혜의 원천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볼 때는 이 사람은 은혜를 받을 만하지만 저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자비하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고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부잣집이라 창고가 여러 개다. 그래서 부잣집에는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가나한 집에 가면 낮에는 고구마밖에 먹을 것이 없다. 그런데 부잣집에 가면 고구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 아주 부잣집에 가면 입맛에 맞도록 다 먹을 수가 있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 가면 내 입맛에 맞든지 안 맞든지 간에 한 가지밖에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을 생각하면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결함이 있거나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자기는 은혜를 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같이 율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은 흠이 없고 바늘도 찌를 데가 없는 사람은 은혜를 입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간 사람인데 무슨 약이 통하겠는가? 무슨 음식이 통하겠는가? 절대로 은혜를 입지 못할 사람인데 자기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그 속에 자기에게 베푸실 수 있는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인가! 모든 자비하심! 당연히 은혜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이야 늘 있는 것이니까 줄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은혜를 받았다면, 만백성이 다 안 된다는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창고 안에 들어있는 은혜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은혜를 입은 것은 정말 구석에 감춰놓은 그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동네에 청마상사라는 철물점이 있었다. 시골인데도 잘 된다. 가보면 없는 것이 없다. 만물상이다. 내가 한 번은 낫트를 구하려고 가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저쪽으로 가보라고 해서 가봤더니 내가 딱 찾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다놓으면 일년에 팔릴지 삼년에 팔릴지 모르는 물건이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재고가 남으니까 그런 물건을 미처 사다놓지 못한다. 우선 잘 팔리는 것만 사다놓는다. 잘 팔리는 것만 찾아오는 사람은 되지만 나처럼 삼년에 한번 팔릴까 말까하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은 주지를 못한다. 그 집에 가면 거의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시골에 있어도 잘 된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도 그렇다. 가난한 상점에 가면 몇 가지 물건만 있지 아주 세세한 물건은 없다. 이 사람은 여유가 많이 있는 사람이라 다 사다놓는다. 팔리든지 안 팔리든지 사다놓다. 그 모든 물건 가운데, 그것이 모든 은혜다, 내가 살 물건이 있다.
바울은 자기 같은 사람은 도저히 가망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어느 구석에 감춰놓았던 은혜로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그의 자비하심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나는 빗나갔겠구나. 나는 그 길에서 빗나갔겠구나. 나는 정말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학교에 가니까 어린아이들이 왔는데 나는 그때 27세였다. 아이들은 20세였다. 3년 동안 기도하고 왔다느니 금식을 하고 왔다느니 했다. 그래서 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렇게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저렇게 기도하고 왔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해본적도 없고 생각 자체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부르셨는가? 그런데 그것이 표가 났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니까 수군수군한다. 장래가 어떠니 갈 곳이 있느니 없느니 여기에 나오면 어디를 가느니,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슬슬 떨어져나갔다. 그래서 그때서야 내가 생각하기를 3년 동안 기도하고 왔다고 하더니 슬슬 떨어져나가나? 나는 그냥 있었는데 오라고해서 와서 왔고 내가 오고 싶다고 온 것도 아닌데 나가라고 하겠는가하고 배짱이 있었다. 자기 갈 곳이 없다고 이 사람들은 3년 동안이나 구했다는 사람들이 슬슬 빠져나갔다. 나도 생각해보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자비가 넓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사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한 번도 기도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도 없는 나를 왜 불렀는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요, 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구하지도 않았고 두드리지도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그냥 교회만 다닌다고 왔다 갔다 했다. 교회에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그 모든 자비하심! 왜 이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말을 썼겠는가? 거기는 은혜를 입지 못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은혜라는 뜻이다. 여러 분도 한 사람 한 사람 다 특이한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은혜를 받았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아서 찾은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는 셈과 마찬가지인데 그때 내가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나님을 따라 가면 내 마음대로 못 살겠구나하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다행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 교회생활을 나가다보면 별별 말이 다 있다. 여기에 다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수를 갚지 말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수를 안 만나서 그렇지 원수를 만나보라, 감당할 수 있는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미리 하는 말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라는 말이 나왔다. 너희는 그렇지만 그래도 너희를 구원할 자비하심이 있다는 말이다. 나를 봐라. 내가 율법 덩어리다. 도저히 내가 복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이 왔다. 그 은혜로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를 구원한다는 말이다.
혹시 들으면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누구의 말이라도 지키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있으니까 그 중에는 포함될 수 있다. 나도 내가 마음대로 못하니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구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보면 내가 할 말이 없는 사람도 있다. 도저히 할 말이 없다. 너무나 꽉 막혀버리면 할 말이 없다. 내가 받은 은혜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내가 받은 은혜로는 이 사람을 도저히 치유할 수 없다. 의사가 학교에서 공부를 다 하고 나왔는데 도저히 고치지 못할 병도 있다. 나는 다 안다고 왔지만 너무너무 어려운 환자를 만나면 어찌할 바를 모를 수도 있다. 그와 같이 나도 나대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면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나대로 은혜를 입었으니까 나대로 받은 것밖에 모르고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쏟아내면 내가 앞이 콱 막혀버린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한 마디 하면 그 사람이 뭐라 하는가? 당신이 그렇게 당해보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는 여유가 있었구나. 거기다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무리 약을 처방해도 약이 듣지 않는다. 아무리 의과대학을 좋은 곳을 나와도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자비하심도 필요하다. 나에게 온 그 자비하심 말고 또 다른 자비하심이 필요하다.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을 권고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나는 된다고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있으니까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될 것이니까 절망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자비하심이 오면 될 수도 있다. 내가 모른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와버리면 될지 안 될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생각할 때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그 자비하심의 물결이 나를 뒤엎으면 내가 정신이 없어져서 할 수도 있다. 너무나 폭포수처럼 와버리면 내가 전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날아가고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뭘 받아서 죽을병이 나았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모든 자비하심을 받은 것이다. 그 사람은 도저히 다른 길로는 안 되니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방언을 한 번 해보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안수도 받아보고 별짓을 다해보았는데도 안 된다. 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저 사람 완고하고 완강하다고 했을 것이다. 나에게 강권역사를 해도 안 된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자기는 안수를 해서 안 된 사람이 없는데 아무리 가슴을 비벼도 안 되도 그 사람이 절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권역사를 해도 안 된 사람이라고 했다. 강권역사를 해도 안 된 이 사람을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 분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절망할 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다 할 수가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가 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함.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서 마쳤다. 이 안에 있는 자세한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다.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고, 안 될 것도 하나도 없고, 될 것도 없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주시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니까 소망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너무 짐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나를 가능하게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넉넉함, 우리가 알지 못하는 풍성함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알아도 다 알 수가 없고 우리는 다 체험한다고 하더라도 다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서 당신이 내리시는 그 풍성한 은혜, 모든 자비하심, 그것을 먹고 마시고 살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우리 중에 한 사람도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어서 낙오된 사람이 없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님의 은혜가 부족해서 탈락하는 사람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 주님의 은혜로 넉넉하게 구원 받도록 주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