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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고치령 라이딩 분당[버스]→영주 →단산저수지 →고치령 →의풍리 →김삿갓 계곡 →영월[버스]→분당
고치령은 옛날 보부상들이 물류를 위해 넘던 고개였지만 '단종애사'의 슬픔을 간직한 한(恨)많은 길이다. 그 길을 오늘 자전거로 넘어본다.
영주에서 소백산 고치 령을 넘으려면 영주 시내를 흐르는 죽계 천을 따라 올라가야한다. 서울에서 영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면 영주 터미널 앞 정류소에서 하차하여 버스가 지나온 방향 으로 100미터 지점에 보이는 육교를 올라타야 한다. 육교를 지나 약200미터쯤 나아가면 서천교 사거리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우측 제방 길을 따라 약 15km 거리 순흥면까지 외길이다. 도중에 우측으로 판타시욘 리조트가 보인다. 순흥면을 지나 외곽 즈음에 소수서원과 선비촌 그리고 금성대군 신단이 도로변에 있다.
▲ 영주에서 순흥면으로 가는길
▲ 소수서원
▲ 선비촌
▲금성대군 위리안치 위리안치는 중죄인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이나 움막의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형벌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택연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는 바로 금성대군이 순흥면 내죽리에 감금되어 있던 장소이다.
[정축지변'(丁丑之變)]
자전거로 고치령을 넘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였다. 김훈의 자전거길 이라는 책에는 영주에서 영월 김삿갓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 마구령 이야기가 있다. 마구령 정상의 남대리를 묘사한 맛깔스런 글에서 오지마을의 풍광을 보는듯하여 언젠가는 꼭 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던 중 가까이 있는 고치령과 금성대군의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마구령 길에 비하여 도로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에 선듯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번만 해도 처음에는 마구령을 계획하였다가 막판에 고치령으로 계획을 수정한 것도 순전히 역사에 얽힌 그 고갯길을 넘어야겠다는 강한 유혹 때문이었다.
고치령 이야기는 이곳 순흥면 에서 발생한 '정축지변'(丁丑之變) 이다. 1452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이듬해인 1453년 숙부 수양대군(세조)으로부터 왕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반대해온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동생) 은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1455년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결국 단종은 그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실권이 없는 상왕(上王)으로 물러앉았다.
이듬해인 1456년 6월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이 또다시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으며 이 일에 관련된 금성대군도 유배지를 광주에서 이곳 순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 일로 단종은 이듬해인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순흥에 유배되어온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과 결탁하고 고을의 군사들과 선비를 모으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며, 그때 밀사들이 이곳 고치령을 넘나들며 영월 청령포를 왕래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풍산현의 관노 이동(李同)에 의해서 1457년 6월27일 정부에 밀고 되었다. 곧바로 군사들이 내려와 순흥 읍내는 검거와 심문으로 개조차 짖지 않는 공포의 땅이 되었으며 흥주도호부 지역의 수백 명 선비들과 가족은 물론, 흥주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이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당시 죽음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사람들이 죽고서 흘린 피가 죽계(竹溪)를 타고 십여 리를 흘러 이웃한 안정면 동촌리에서 끊어졌다 하여 현재도 이 마을을 사람들은 '피끝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일로 금성대군은 그해 10월 21일 賜死 하였고 단종 은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같은해(세조 3) 10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은행나무 압각수(鴨脚樹) 금성대군 신단 옆에는 순흥의 흥망과 정권의 성쇠를 지켜본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역모의 죄로 흥주도호부가 폐부가 될 것을 예견하여 문종 1년(1451년)에 고사한 이 나무는 인조 21년(1643년)에 되살아났으며, 그 기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숙종 8년(1682년)에 순흥부로 환복 되었다. 이 신기한 은행나무 압각수(鴨脚樹)는 지금도 금성단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다.
[순흥에서 단산저수지]
이곳에서 단산면 까지는 약 8km 거리다. 벌써부터 마음은 시간에 쫒기고 자전거에 속도를 가한다. 단산면 읍내를 벗어나서 조금 더 올라가면 갈림길에 단산교회가 보이고 왼쪽 약간 작은 길로 접어 들어야한다.
▲단산교회 삼거리
이곳에서 단산 저수지까지는 약 3km 넓은 들판에 인삼밭이 보이며 저수지 부근에서 약간 오르막이다. 저수지 위에 만들어 놓은 작은 팔각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간을 보니 12시다. 영주에서 10시에 출발했는데 약 26km를 두 시간에 달렸다. 도중에 소수서원주변에서 잠깐 들리고 간간히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소비한 시간을 감안하면 비교적 빠른 속도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쵸코렛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타이어 바람도 보충했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전송하고 마음을 다잡고 출발이다.
▲단산저수지
[단산저수지에서 고치령 정상]
단산 저수지를 벗어나면 인가도 거의 없고 한적한 길이다 길은 초입부터 약간 오르막길이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좁은 포장도로는 한적하고 간혹 차량이 지나간다. 도로 폭이 좁아서 서로 비켜가기도 힘들 것 같다. 바닥에는 지난겨울에 잔득 뿌려놓은 모래로 미끄럽고 자칫 하면 핸들이 돌아가는 위험이 있다.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계곡에는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고치령 초입
▲맑은 계곡물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문득 무리한 스케줄인가? 라는 의구심이 생기고 약간 불안하다. 인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길을 홀로 올라간다는 중압감이 무겁게 다가온다. 약 15분쯤 올랐을까? 첫 휴식이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다. 단산 저수지를 출발한 후 약 4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느낌으로는 절반정도는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 첫 휴식 장소
잠시 숨을 고른 후 거추장스러운 바지를 벗고 속바지 차림으로 채비를 바꾸었다. 한결 발놀림이 가볍다. 그러나 10분이 채 못 되어 자전거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좌우로 핸들을 돌리다가 모래에 미끄러지면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급경사 커브길 에서 걸린 것이다. 다시 출발을 시도 했으나 워낙 경사가 급하니 출발이 안 된다. 에너지는 이미 거의 소진되고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첫 번째 당하는 끌 바의 굴욕이다.
▲ 끌 바의 굴욕 급경사 커브
연이어 다가오는 크고 작은 급 경사길 을 타고 가다가 끌기를 반복하는 연속이다. 허벅지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겨우내 소홀이 했던 근육이 놀라는 게 무리는 아니다. 정신 나간 짓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내이며 무리한 도전을 후회하였다. 도대체 정상은 어디란 말인가?
▲ 올라온 길
한 시간 정도는 거의 사투를 하다시피 올랐다.
▲ 힘들었던 끌바지점 기억을 되살려보며
[고치령 정상]
고치령은 해발 760m 로 산 정상에는 간단한 표지 석과 우편 에 금성대군 산신각이 있다.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고개를 넘어 영월 방면으로 약 50m 쯤 되는 지점에 약수터가 있다. 정상도착 시간을 보니 정각 오후 2시다. 단산저수지를 출발하여 약 2시간 이다. 끌바로 오른 반쪽짜리 라이딩이지만 나름대로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껴본다.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있어 차를 세우고 사진 한컷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고치령 정상에서
▲고치령 정상 금성대군 산신각
▲ 약수터
[고치령 정상 출발]
정상에서 약 30분 정도 쉬었나보다 마음이 급하다 오후 5시40분 영월에서 분당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는 마음이 부담이 된다. 2시 30분 출발이다. 고개를 넘어서니 모래가 잔득 깔린 급경사길이다 브레이크를 잡으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모래 때문에 핸들이 돌아간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안경을 벗었다. 까딱하면 곤두박질 할 것만 같다. 그래도 약수터는 지나칠 수 없어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파란 플라스틱 그릇에 가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조금 남아있던 물통의 물을 버리고 약수를 채우고. 곧 바로 출발하였다.
▲ 모래가 깔린 하산길 급경사
[고치령에서 마락리]
마락리는 고치령을 내려오며 첫 마을로 여기까지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영주시에 속한다.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왔나 보다 급경사가 끝나고 다시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약간 울퉁불퉁하다.
▲마락리 부근 비포장
[경상북도 영주시 마락리] 마락리를 지나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지나는 길옆으로 몇 채의 집이 보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쉬어서 마을의 동정을 보고 싶었지만 마음이 바쁘다.
▲ 한적한 마락리
▲ 마락리 임산물 집하소
▲ 경상북도와 충청도 경계
마을을 벗어나자 경상북도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 경계 표시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참 불편할 것 같다. 고치령 너머 영주까지 민원을 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이 고개를 넘어 다닐까 차라리 조금 아래에 있는 의풍에 속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런 곳에 사시는 어르신들이 관공서를 찾아갈 일도 없을 것 같다. 쓸데없는 나만의 생각도 잠시 자전거는 계속 아래로 내 달린다.
[충청북도 단양군 의풍리]
한참을 내려가니 도로는 시멘트 포장길로 바꾸어지고 계곡 양쪽으로 들판이 넓게 펼쳐진다. 들에는 간혹 농사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저 아래로 제법 마을이 형성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포크레인으로 무언가 파내는 모습도 보인다 간혹 새로 신축한 전원주택 도 보인다. 마을을 지나치며 옆으로 의풍리 보건소라는 간판도 보인다.
▲ 충청북도 단양군 의풍리
의풍마을은 산이 높고 아름다우며 땅이 걸어서 사람이 살기에 좋아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중의 한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소백과 태백의 사이에 자리 잡은 ‘양백지간(兩白之間)’ 인 까닭에 임란이나 병란도 비켜간 천혜의 은둔지였다. 지금이야 마구령 길이 크게 뚫렸지만 옛날에는 영남에서는 마구령과 고치령이 접근하기 쉽지 않았고, 단양과 강원 영월에선 남한강을 따라 소백산과 태백산 험산준령을 넘어야 했다. 한때 <정감록>을 믿는 후예들이 몰려와 좁은 계곡을 따라 200여가구 남짓 살았다고 한다.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이곳에서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중년의 여인네들 서너 명이 담벼락 가까이에서 낮선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사진을 찍기가 공연히 쑥스럽다. 카메라를 다시 내리고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도로 상태가 좋아지고 자전거는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 달린다. 조금 내려가자 삼거리 충북 단양 방향, 마구령 방향 그리고 영월 김삿갓 계곡으로 통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영주에서 출발하여 마구령과 고치령이 만나는 지점이다.
▲ 의풍 삼거리
[의풍리에서 영월]
김삿갓 계곡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15분이다. 이곳에서 영월버스 터미널까지 거리는 약 30km 남은 시간은 2시간 반 정도이다. 김삿갓 계곡으로 들어서자 강바람이 골을 타고 앞에서 불어온다. 날씨는 잔득 흐리고 몸은 피곤하다. 동강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 멀고 페달이 무겁다. 길고 지루한 길을 달려 터미널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오후 5시 15분이다. 2013.3.31 .토요일
Naver지식백과:노비로 추락한 단종의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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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가운 날씨에 수고 많으셨어요.비록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많이 응원했답니다.^^
덕분에 힘을 얻고 달렸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