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장하다
최 화 웅
책도 오래되면 골동품처럼 소중한 자료가 되거나 애장품이 될 수 있다.
책은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늙고 낡으면 함부로 책장을 넘기기가 조심스럽다. 자칫 부수러지거나 파손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책 몇 권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권은 엔솔러지 형태의 문예지 ‘超劇 제1집’이고 다른 한 권은 ‘부산대학교 개교 10주년사’다. 1954년 6월 15일 발행된 ‘초극’은 대학을 다닐 때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산 것이니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초극’에는 고석규와 김재섭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안표지에는 옛 경남고녀 출신 소설가 한무숙이 소장하고 있던 달을 이고 있는 사슴을 그린 김환기 화백의 수채화를 앉혔다. 103페이지 분량에 하드 표지로 제본한 ‘초극’은 값도 두 가지다. 같은 책을 상제(上製)는 3천 환, 보제(普製)는 3백 환으로 값을 매겨 일종의 후원성격을 띤 특별가격과 보급가격으로 재치 있게 구분해 놓았다. 삼협문화사가 출판한 ‘초극’은 고석규가 편집솜씨를 한껏 뽐낸 예사스럽지 않은 엔솔러지다.
다른 한 권은 1956년 5월 15일 부산대학교 개교 10주년을 앞두고 발간된 ‘부산대학교 개교 10주년사’다. A5 규격에 464페이지로 제법 두툼하다. 광복이 된 단기 4278년부터 4289년까지 11년 동안 개교 초기의 사정과 뒷이야기를 등사본으로 제본 발행했다. 이 자료는 34년 전인 1977년 3월 15일 부산MBC 특집방송 ‘개항 100년을 되돌아본다’ 취재 때 잦은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윤인구 박사의 아버님 고 윤상은 옹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이 자료는 언젠가 틈을 내서 부산대학교 사료관에 넘겨주려고 한다. 그 밖에도 50년대에 발행되어 이미 이순을 넘긴 손 떼 묻은 책들과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는 새 이름을 단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책도 있다.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한하운의 자서전 ‘나의 슬픈 半生記’가 떠올라 문득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었다. 보수동 헌책방을 뒤지고 인터넷을 통해 여러 차례 추적을 했으나 헛일이었다. 구 단위 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에는 물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는 초읍의 부산시립도서관을 찾았다. 1958년도 발행된 초판은 귀중자료로 분류되어 열람이 제한되어 있었고 1962년 7월에 발행된 4판을 서고자료실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길로 양정 학교촌 부근의 복사제본사로 달려갔다. 복사가 끝나고 책을 반납한 뒤 귀한 보물을 찾은 듯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와 책을 펼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책 제목이 ‘나의 슬픈 半生記’가 아니라 ‘나의 슬픈 羊生記’로 바뀐 것이 아닌가. 복사를 하고 표지를 만들 때 반 ‘半’자를 양 ‘羊’자로 잘못 뽑은 채 제본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책을 얻은 엉뚱한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슬픈 반생기’에는 시인 한하운이 천형 같은 나병의 굴레를 쓰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련과 고통의 숨소리가 배어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친다. 그는 ‘소록도로 가는 길에’라는 부제가 붙은 ‘전라도 길’을 비롯한 시 원고를 출판일정에 쫓겨 명동성당의 방공호에서 정리했다고 전한다.
全羅道 길
-小鹿島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많은 사람들은 한하운이 그리워지면 그의 시 ‘전라도 길’에서 만난다.
이 시는 1949년 한하운의 첫 시집 ‘한하운 詩抄’에 실려 큰 반응을 일으켰다. 한하운 시를 읽다보면 우리가 겪는 진한 절망과 슬픔이 되살아나고 몸속에 흐르는 한(恨)과 그리움을 일깨워준다. 문둥이라고 멸시와 냉대를 받던 나병을 앓으면서 낸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가 처음 나왔을 때 미당 서정주 시인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 찬사와 평가도 잠시뿐 6.25 이후 피폐하고 암울한 정치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일부 언론에 의해 조작 날조된 빨갱이 색깔론의 시련을 혹독하게 겪었다. 6.25 이후 전후 복구는커녕 장기집권 야욕으로 흉흉해진 정국과 사회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누구나 멀리하려고 꺼리든 문둥이를 가장 손쉽게 빨갱이나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 집단린치를 가하고 화형에 처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이단(異端)이요, 좌파(左派)로 몰아세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리현상과 지난 과거의 병폐가 한없이 부끄럽다. 보라! 지금도 우리 사회 여기저기의 도가니에서는 치욕과 울분이 뒤엉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시인 한하운에게 있어서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었다.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고자한 한하운의 불같은 사랑의 흔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가장 많이 등장한 여인은 첫사랑 R로 성악가 이경희였다. 다음은 시 ‘리라꽃 던지고’에서 등장한 P양으로 병리학을 전공한 의학도였다.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밝혔듯이 한하운이 베이징대학교 농학부를 다닐 때 열애에 빠졌던 협화의과대학생 최은령이었다. 그녀는 한하운으로부터 나병을 앓고 있다는 고백을 들은 뒤 치료비에 보태라고 거액의 중국 돈과 금반지를 맡기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음독자살로 끝맺었다. 이 애달픈 사연이 당시 현지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세간에 회자하였다. 그뿐인가. 편지글을 남긴 김영자, 이춘애, 명동에서 출판사 무하문화사를 경영할 때 수발을 들었다는 이대 기독학과 3학년생인 백수자양을 비롯해서 한하운이 사랑하고 사랑받은 여인들은 하나같이 순정의 여인들이었다. 한하운에게 있어서 사랑했던 여인들은 투병과 창작활동에 의욕을 불어넣는 동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자신이 나병을 앓고 있다는 고백과 함께 떠나보내야 했던 숭고한 사랑은 그의 인생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이었다. 그가 겪은 애달픈 로맨스를 접한 사람들은 가슴 아리고 뼈에 사무치는 연민을 느낄 것이다. ‘나의 슬픈 반생기’ 56페이지 ‘썩어가는 문둥이’라는 글에서 한 시인은 자신의 꿈과 현실을 ‘파랑새’에 비유해 노래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라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한하운은 평생 슬픈 삶을 노래하며 살았다.
나환자로서 참기 힘든 천대와 멸시, 사회적 편견과 소외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부른 노래는 메아리가 없었다. 더구나 언론에 의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매카시즘적 헤드라인 아래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으로 몰아붙인 악성루머는 그를 끝내 유령인물로, 문둥이로 위장해서 설친 빨갱이 선동꾼으로 매도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터무니없는 좌익 선풍이 삶을 얼마만큼이나 파괴하고 위축시켰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과 슬픔의 투병생활을 소박한 정서와 절제된 고통으로 표현하면서 한 가닥 인간을 향한 꿈으로 절망을 이겨내고자 했다. 한하운이 마침내 음성 판정을 받은 뒤 나환자 구제 운동에 앞장 선 급진적인 휴매니스트였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시대정신을 끝까지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체험한 그는 지금 아무 말 없이 김포 장롱묘원에 잠들어 있다. 그가 마지막 힘겨운 병고를 치르던 고흥반도 끄트머리 외딴섬 소록도에 세워진 시비만이 오늘도 짙은 안개에 싸여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피-ㄹ닐니리 피-ㄹ닐니리”하는 피리소리가 파도에 실어 오는 듯하다. 그의 시 ‘보리피리’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고향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게 해준다.
첫댓글 선생님..
마음의 영성 카페에.. < 깨침>을 전해주는.. 인간적인..선생님 수필을 읽을 수 있어서...정말 좋군요.^.^
한하운 시인은 죽어시 파랑새가 되었을가요?...문득 이런 뜬금없는 상상에 빠져봅니다..^^*
선생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센병 환우들과 잠깐 함께 해본 시간이 있어서 한하운 시인의 시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구라활동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겠지만 천주교회에서 직접 나환자촌을 설립 운영한 것은 1950년 6월 2일 메리놀회 조지 캐롤 안 주교님께서 성나자로 마을을 설립하신 일이 처음이었죠. 천주교회가 직접 설립하여 운영한 나환자촌은 전국에 25곳에 이르렀는데 부산에는 용호동(오륙도) 상애원, 장림, 기장 삼덕마을의 일광 성가원등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나병의 치료와 예방, 미감아 보호와 완쾌된 사람의 사회복귀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은 1958년 10월 6일 화물선을 타고 부산항에 입항한 이탈리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소속 Francisco Faldani(한국명 범덕례)신부님이셨습니다.
한하운 시인은 천국에서 파랑새가 되어 우리들에게 꾀꼬리 같은 좋은 노래를 들려주실거라 확신합니다,
좋은 시 마음에 담아갑니다,
문둥병=나병=한센병=피부병=신비의병=이중의고통=가난한이웃=하느님나라
노르웨이의 생물학자 한센이 나균을 발견함으로서 그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한센병을 앓고 있는(있었던 분들 모두와 시인 한하운 형제를 포함한) 모든 분들이
하느님 나라에 우선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드립니다.
안 신부님께서도 장림 나환자촌에서 봉사하지 않으셨습니까? 6.25 전후에 우리나라에서 구라활동을 시작하신 성직자는 모두 외국 신부님들이셨습니다.이 점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깊이 성찰케 합니다. 성나자로마을을 세우신 조지 캐롤 안 주교님, 부산 한센병 환우들의 아버지 범덕례신부님을 비롯한 오륙도 상애원과 석포 미감아를 위한 프란치스코 보육원, 그리고 일광성가원에서 봉사하신 모든 수사님들, 그리고 장자호 신부님과 안창호 신부님, 밀양의 박갑조 신부님과 구라활동에 나서고 계신 모든 은인들께 하느님의 가호를 빕니다. 특히 투병 중인 모든 환우들께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사랑 속에서 쾌유하시길 간구하겠습니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지금은 하느님 품에서 편안히 쉬실 범 신부님과의 추억이 되살아 나네요. 초 중등 시절 용호동이랑 일광 공소에 신부님 따라 다니면서 미사 봉헌하던 일이랑 미감아들이랑 친구하여 놀 던 일이 새록 새록 생각납니다. 그들은 그저 이웃이고 친구일 따름이었던 그 시절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범 신부님께서는 부산항에 첫발을 디딘 지 열흘만인 1958년 10월 16일 범일동성당 신부로 발령받으셨습니다. 주일이면 흰수염을 휘날리며 오트바이를 타고 범일동으로부터 대연동, 석포, 용호동, 멀리 기장을 오가며 성당터를 잡기에 바빴고 소형화물차를 손수 운전하여 나환자촌에 약과 식량을 날랐다고 합니다. 지금 석포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 당시 언덕바지 난민주택에서 미감아 27명을 보호하기 시작한 일이 '성 프란치스코 보육원'의 출발이었습니다. 그 때 범 신부님과 함께 하셨다니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수상하게 변해도 우리 범 신부님과 모든 은인들을 오롯이 기억하며 주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청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