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매일미사 독서는 창세기3장 인간의 죄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 따먹지 말라고 한것을 따먹게 된 불순종이 바로 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오래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죄이기는 하겠지만, 무서운 죄의 결과는 아마도 선악과의 속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은 다 허용하시면서도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선악과 나무를 어찌하여 동산 가운데에 두신 것일까요?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이와같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 우리의 일생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유혹때문이든, 스스로의 호기심때문이든, 하느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것을 거역하고 손을 댄다면 결국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받게되고 영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때로는 육체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11절에서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하고 물으심으로써 그 열매를 먹지 않았더라면 너는 네가 벗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불순종으로 부터 오게된 죄책감과 단절의 슬픔, 고독 그런것이 아니었을지요.
선악과는 영어 표현으로는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앎이라는 나무의 열매(과실) 이더군요.
하지만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었으므로 이미 앎이라는 지혜의 능력 역시도 주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knowledge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라는 의미 의 앎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심리학적인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앎이라는 것은 자각 혹은 이성 또는 자아(ego) 와 같은 심리적 영역의 발달(?) 혹은 인식의 영역의 발달로 뇌에 신경회로의 망상 결합조직 (net work) 가 생기게 되는 상태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지혜의 영역과 죄성을 가진 영역사이의 경계는 어디쯤 일까요?
지혜가 초자아 (super ego)의 영역이라면, 죄성은 아마도 id (원초적 충동)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자아 (ego) 가 존재하는 자리는 super ego와 id 를 자각하고 조절하는 갈등과 긴장과 조화의 영역으로 볼 수 있지요.
따라서 고통이 자리하는 영역이기도 하고, 이성과 지식과 현실적인 자각의 영역이기도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10절에서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라고 한 것은
바로 id 를 ego가 자각하게 된 상태를 뜻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전에는 id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여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겠지요.
따라서 위에서 '알다' 라는 의미는 지식 즉 분별하게 되었다는 이성적 의미라기 보다는 충동적인 악의 본성(id)을 갖게 되었다.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것 같아요.
성모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을 때의 '알다' 와 같은 의미겠지요.
어쨋든 그로 인하여 인류에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비극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 인류의 비극적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그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과일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 선악과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국 그러한 충동의 본성을 우리의 마음속-실상은 뇌의 인식 영역이겠죠ㅡ에 받아들이게(위에서 말한 '알게'되는)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인디언 추장의 얘기중에 우리 마음 속에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에서 그럼 누가 이기느냐는 손자의 질문에 네가 먹이를 많이 주는 늑대가 이긴다 하는 말은 어쩌면 이것을 실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예가 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착한 늑대(super ego)와 나쁜 늑대( id )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그 어느 쪽이든 선택 할 자유 (ego)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선택에 따른 결과 역시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되겠지요.
오늘 매일 미사의 독서 부분을 읽으며 갑자기 떠오른 의문(원죄란 무엇일까)에 대하여 제 나름의 생각을 추론 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묵상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인 해석은 알고 있지 못하므로 그저 저의 단순한 생각일 뿐이지요.
ps. 따라서 신학적인 해석은 어떠한지 알고 싶습니다.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한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요.
많은 인류가 그 때문에 겪는 온갖 고통들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선악과의 본질이 무엇일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신화의 한토막처럼 지나치기에는 의미심장한 무엇이 있다고 여겨지기에요.
(언제든 시간 나실때 천천히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질문 하지 않겠다 했는데, 그래도 역시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요.
확실치 않은 저 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요.^^*
(그리고 한가지 더...^^
오늘 어디서 본 글인데요, 데이비드 호킨스 라는 분의 글의 일부인데, 카르마(업?) 라고 하기도 하고 에고(ego) 라고 하는 말은
위에서의 원죄 라고 하는 부분과 어떻게 관련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래 부분에서는 단 하나의 온전한 출구는 "깨달음"이라고 말 하고 있지요.
이것은 회개와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첨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의 발단을
기꺼이 자신 안에서 보려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에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극단적인 일이라도 무릅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배운 구도자는
(자신과 상관없이) 저 밖에서 일어나는 듯이 보이는 일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집니다.
왜냐하면,
내면을 탐구해 보면, 항상...
지각과 저 밖에 있는 것의 근원이
사실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사회의 에고 프로그램들의 상호작용에 매혹되는데,
영화가 그렇게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세계를 무대로 한
에고의 미묘한 작용들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온전한 출구는 깨달음입니다.
에고는 카르마의 근원이자 저장창고 입니다.
에고와 카르마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cf. 호모 스피리투스 (영성을 가지는 인간을 뜻하는 말)/ 데이비드호킨스
첫댓글 단 하나의 온전한 출구가 깨달음, 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공감이 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서 처럼.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은 다를 수도 있으리라. 끝이 결말이 다를수도...
수많은 종교(?)에서 저마다의 깨달음, 진리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모두 다 같지는 않은 것처럼.
에고와 카르마가 하나이며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것은
카르마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 즉 에고(자아)에 의해 업(좋은것, 나쁜것)이 지어지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 같아요.
마음지기님의 마음을 지키는 것 역시 우리의 에고를 잘 지키는 것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질문이기도 하지만, 저의 묵상이기도 하네요.^^*
지각과 저 밖에 있는 것의 근원이
사실은 이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밖의 것을 볼때
사실은 나만의 창을 가지고서 보는 것이다.
선악과는 그 옛날 에덴 동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안에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