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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에 대한 문화론적 독해 - 일기와 기행록을 중심으로 - 정우락(경북대 교수)
- 차례 -
1. 머리말 2.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의 규모 3. 도산서원을 보는 네 가지 시선 4. 문화공간으로서의 도산서원 5. 도산서원과 이야기의 발견 6.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의 서원은 조선 시대의 선비 문화가 압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선비들의 도덕과 학문이 이곳을 통해 배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와 풍속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선도되고 조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원은 주변 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 인공의 공간미학을 연출하고 있으며, 강당과 고문서 등은 물론이고 제향 의례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의 중요한 유·무형의 문화유산 역시 거느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서원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논의함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산서원은 영남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이 말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도산서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가 대학자 이황李滉(退溪, 1501-1570)의 강학지가 발전한 곳이라는 점이며, 그 둘째가 영정조 이래 영남 인심의 수습 차원에서 치제를 내리는 등 조정의 우대정책이 있었다는 점이며, 그 셋째가 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가 어우러져 미려한 풍광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이다. 이로써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유학의 본산’이며 ‘서원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산서원이 영광의 역사만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전환의 과정에서 많은 시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5년에는 서류庶類 출입을 허용하라는 관문關文에 반하여 옥산서원과 달리 이 서원에서 이들의 출입을 막자 서류들에 의해 도산서원 최대의 폭력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01년에는 퇴계의 위패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커다란 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김남수金南洙 등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이 구체제의 상징물로 지목되어 철폐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시련과정을 겪으며 도산서원은 1970년의 성역화 사업, 1975년의 안동댐 건설 등으로 인해 많은 변형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이 지닌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산서원을 문화론적 측면에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학계가 그동안 텍스트 중심주의에 함몰되어 그 텍스트에 대한 살아 있는 가치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 의한 것이다. 이는 텍스트 내적인 가치 문제에 지나치게 침잠한 형식주의 내지 구조주의를 신봉한 결과이다. 본 논의는 여기에 일정한 문제를 제기하며, 조선조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인식하였던 점을 포착해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해서 대중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학문은 현실과 밀착될 때 비로소 활학活學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무엇이 더 긴요한가 하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전문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의 당대적 혹은 사회적 기능을 고려한다면, 이 우문이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본고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산서원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한다. 이로써 도산서원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중성을 염두에 두면서 도산서원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을 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퇴계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과 함께 관련 논문을 찾아서 편집한 이우성의 도산서원을 비롯해서, 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으며 도산서원을 떠올린 안병걸의 논의, 도산서원의 현판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권영한의 책, 퇴계의 생애와 도산서원을 포괄적으로 조명한 윤천근의 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국학자료 심층연구를 하면서 도산서원에 주목하여 괄목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에서 이루어진 지식 생산과 지적 탐구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도산서원을 실제로 운영했던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과 그 관계망은 대체로 어떤 것이었던가 하는 부분이 분석되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논의들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산서원을 어떻게 ‘체험’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였던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체험과 기억은 시나 산문으로 두루 형상화 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는 산문에 초점을 둔다. 체험하고 기억한 바를 더욱 자세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논의는 기행문과 일기가 중심이 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거재居齋나 향사享祀 등 다양한 목적으로 도산서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도산서원을 찾기도 했다. 이 과정에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러한 자료를 우리가 본고에서 특별히 주목하기로 한다. 도산서원을 찾는 목적이 저마다 다를지라도, 심방객들은 ‘퇴계’라는 위대한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도산서원은 조선조 선비들의 필수 심방처가 될 수 있었으며, 부임하는 관리들 역시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성소聖所이기도 했다. 본 논의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자료의 규모를 제시하여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이를 바탕으로 도산서원을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인식했던 당대인들을 만나기로 한다. 나아가 도산서원에서 어떤 이야기가 생성되었는지를 밝혀 문화론적 비전을 제시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산서원의 문화적 의미가 밝혀질 것으로 본다.
2.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의 규모
도산서원은 퇴계가 1561년 축성한 도산서당에서 출발한다. 이 서당의 건립배경과 과정, 그리고 주변의 경관에 대해서는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 즉 <도산기陶山記>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전통은 물론 주자에 의한 것이다. 일찍이 주자는 54세 되던 1183년에 무이산 기슭에 무이정사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읊은 바 있는데, 퇴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1557년(명종 12)에서 1561년(명종 16)까지 5년 만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는 서당을 짓는 과정을 <도산기>에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처음 내가 퇴계의 가에 살 곳을 정하고 시냇물이 보이는 곳에 집 여러 칸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졸박함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대체로 이미 세 번이나 그 터를 옮겼다. 여차하면 비바람에 무너지고 게다가 시냇가가 너무 고요하여 적막한 곳에 치우쳐져 마음을 넓히기에는 부적합했다. 이에 다시 옮기고자 하여 도산의 남쪽에다 땅을 얻었다. 이곳에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는 강과 들이 굽어 보인다. 그 모습이 그윽하고 아득하며 둘레가 멀고 바위 기슭은 초목이 빽빽하고도 또렷한 데다가 돌우물이 달고 차서 은둔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농부의 밭이 그 가운데 있었으나 재물로 바꾸었다. 법련法蓮이라는 중이 그 일을 맡았는데, 얼마 있지 않아 법련이 죽어 정일淨一이라는 중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정사년(1557)부터 신유년(1561)까지 5년이 걸려 서당과 정사 두 채가 대략이나마 완성되어 깃들어 쉴 수 있게 되었다. 퇴계가 본가에서 도산으로 옮겨온 이유를 적고 있다. 이 글에서 퇴계는 퇴계 가에 지은 집이 잘 무너지고 또한 너무 적막하여 도산의 남쪽으로 옮긴다고 했다. 이 도산에서 산수지락山水之樂과 안빈락도安貧樂道를 통해 조화로운 삶을 구가하고, 이 과정에서 끊임없는 인격 수양과 학문 연마를 할 것이라면서 주위의 사물에 이학적理學的 정서가 함축된 이름을 부여하고, 여기에 칠언절구 18수와 오언절구 26수를 지었다. 이 밖에도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한 문학작품은 다양한데, <도산십이곡>과 같은 국문시가도 그 가운데 하나다. ‘ᄒᆞᄆᆞᆯ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아 어늬 그지 이슬고’(<전육곡․기육>),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玩樂齊 소쇄蕭灑한데’(<후육곡․기일>)에서 보이는 것처럼, 퇴계는 ‘천연대’․‘천운대’․‘완락재’ 등의 명칭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사이에서 왕래풍류往來風流를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1570년(선조 3), 퇴계가 세상을 떠난 4년 뒤인 1574년(선조 7)에 유림의 공의로 도산서원이 건립되고, 1년 뒤인 1575년(선조 8)에 사액되었는데 편액은 한호韓濩(石峯, 1543-1605)가 썼다. 도산서원은 향사와 별시 등 특별한 일이 있어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영남 사람은 물론이고 여타의 지방에서도 심방하고 싶은 명실상부한 조선 제일의 서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이 한시나 산문 등 다양한 양식으로 형상화되었다. 여기서는 산문을 중심으로 목록을 만들어 대체적인 기억의 규모를 알아보기로 한다.
도산서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물론 퇴계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창작하면서 쓴 <도산기>이다. 이에 대하여 금난수琴蘭秀(惺齋, 1530-1604)는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를, 기대승奇大升(高峯, 1527-1572)은 <퇴계선생도산기문발退溪先生陶山記文跋>을, 권호문權好文(松巖, 1532-1587)은 <제선생도산기후題先生陶山記後>를, 홍섬洪暹(忍齋, 1504-1585)은 <서도산고후書陶山稿後>를 지었다. 그리고 허엽許曄(草堂, 1517-1580)은 <도산기발陶山記跋>을, 금보琴輔(梅軒, 1521-1584)는 <도산기고증陶山記考證>과 <도산시첩발陶山詩帖跋>을, 성해응成海應(硏經齋, 1760-1839)의 <제도산기후題陶山記後>을 써서 도산서당에 대한 이해를 더욱 세밀하고 정확하게 하고자 했다. 도산서원을 찾은 기록은 퇴계가 서당에서 강학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제, 위의 표에 의거하여 자료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로 보자. 첫째, 자료적 측면에서 일기와 기행문이 대종을 이룬다. 기행문은 다시 도산서원과 청량산 기행으로 나눌 수 있다. 일기와 도산서원 기행문에는 도산서원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당대의 문화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준다. 청량산 유산록의 경우, 이상룡李相龍(石洲, 1858-1932)이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청량산에 대하여 기록하는 중이라서 다른 것들은 기록할 겨를이 없다.”라고 하고 있듯이, 기록의 초점이 청량산 유람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표 28번의 조성신趙星臣(恬窩, 1765-1835)의 경우처럼 가사로 도산서원 심방의 체험을 형상화한 경우도 있어 주목할 만하다. 그는 1792년(정조 16) 3월에 있었던 도산시陶山試에 응시한 후, 도산사원을 찾아 이에 대한 기억을 10년이 지난 뒤에 가사체 <도산별곡>으로 남겼던 것이다. 둘째, 시간적 측면에서 퇴계 당대부터 우리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산서원에 대한 기록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퇴계에 대한 추숭 사업과 맞물리면서 도산서원 방문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퇴계 재세시에는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청량산 유산록이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도산서당에서 강학을 하는 과정에서 유산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때로는 퇴계와 함께 오르기도 했다. 퇴계 사후에도 청량산 유산이 지속되었으며, 도산서원의 소임 등 특별한 임무가 있어 이곳을 방문하여 당시의 경험을 일기로 남겼고, 표 44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셋째, 공간적 측면에서 영남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 범위는 조선 전역으로 펼쳐져 있었다는 점이다. 위의 자료가 도산서원과 관련된 자료의 전모는 아니지만,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강학을 하고 있을 때는 고향인 안동을 중심으로 영주, 풍기, 봉화, 청송 등에서 주로 찾아왔다. 그러나 퇴계 사후에 도산서원이 설립되면서 이곳을 심방한 사람들의 거주지는 더욱 확대되어 위로는 서울까지, 아래로는 경남 함안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물론 퇴계학파가 지역적 범위에서 조선 전역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산서원은 최고의 심방처였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작가적 측면에서 남인이 중심이 되지만 다른 정파 역시 적극적으로 심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이李珥(栗谷, 1537-1584)를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파와 퇴계를 종장으로 하는 영남학파가 있고, 기호지역에도 남인이 있고, 영남지역에도 노론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을 찾는 것은 그 정파와 학통에 따라 시각차가 드러날 수 있다. 여기서 위의 표를 살펴보면 도산서원을 찾은 사람은 이윤우 등 영남지역의 남인이 단연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오숙․오두인․오희상․홍경모 등 기호지역의 노론도 있고, 권용현 등 근세 영남지역의 노론까지 존재하여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조선조 선비들의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의 종류와 규모는 매우 다양하다. 이는 퇴계의 학문 역량과 도산서원의 위상을 방증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위의 표가 한계를 지닌 조사이기는 하나, 일기와 기행문을 중심으로 조사해보면 40편을 훨씬 상회한다. 조사에서 누락된 부분을 인정한다면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대체로 퇴계의 <도산기>를 읽고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는데, 시간적으로는 퇴계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고, 공간적으로는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작가적으로는 영남 남인을 중심으로 기호 노론 등 여타의 정파를 수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와 도산서원이 영남 일원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3. 도산서원을 보는 네 가지 시선
선비들이 무엇 때문에 도산서원을 방문하였을까? 이에 대한 대답 중 핵심에 맞닿아 있는 것은 퇴계에 대한 흠모와 학문적 계승일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지역으로 여행을 할 때면 이곳을 들러 도산서원 상덕사에 알묘謁廟하였다. 향사 등 도산서원에서 시행하는 일련의 행사나, 강학을 위한 거재居齋, 문집 등에 대한 출판사업,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문회, 도산서원 자체의 운영을 위해서 서원에서 회합을 갖기도 했다. 이 밖에도 청량산을 유람하거나 지방관으로 부임한 경우에도 서원을 찾아 퇴계에게 참배하였다. 특히 청량산을 유람하는 경우 도산서원은 이를 위한 숙소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산서원을 찾은 사람들의 시각은 한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물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자신이 인근지역의 선비로서 서원관리자의 입장일 수도 있고, 외지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지역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그가 처한 지역 내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도산서원을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본 장에서는 도산서원을 보는 시선을 넷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퇴계학파의 내부적 시선에 대해서다. 퇴계학파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지만 구심은 당연히 안동권에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는 단순한 심방이나 유산과정에서 이곳을 잠시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퇴계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갖고 주로 도산서원의 운영을 주도하면서 향사 등의 의식을 집행하거나 서원을 찾는 각 지역의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 도산서원은 하나의 일상 공간이었던 것이다. 서원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묘를 중심으로 한 향사享祀와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講學이다. 이 때문에 서원의 일상은 당연히 이 둘을 중심으로 형성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향사와 관련한 다음 자료를 보자. 흐리다가 간혹 개었다. 숙취가 심하였다. 다만 도산서원의 향사에 차임差任되었으므로 감히 가지 않을 수 없어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목욕을 하였다. 오후에 이실而實과 함께 서원에 갔다. 원장 이 형[李詠道]과 김영월金寧越[金澤龍]․이치수李致遂가 헌관으로 왔고, 집사는 정득부鄭得夫 이하 십여 명이었다. 김령金坽(溪巖, 1577-1641)이 계암일록溪巖日錄 1618년 8월 9일조에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그는 도산서원 향사에 차임되어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목욕재계한 후 향사에 참여하는데, 이를 통해 도산서원 향사에 참여하는 지역 선비의 마음가짐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평보 형이 도산서원으로 돌아갔는데, 향사 때문이었다.”라고 하거나, “도산의 향사가 15일이고 또 추석 절제가 있기 때문에 주가主家와 유생들이 모두 일이 있었으므로, 남이준南以俊(1566-?)에게 극력 말하여 15일로 물렸다.”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서원의 향사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이 행사는 먼 곳으로부터 헌관이 오기도 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강학은 서원에서 일정기간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거재에 대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익이 도산서원의 홍의재에 갔을 때, 거재하는 선비 금명구琴命耈를 만나서 서원의 규모와 지명, 민풍民風을 대략 들었던 것에서도 이것은 확인된다. 이 뿐만 아니라, 안정여安鼎呂(晦山, 1871-1939)와 이복李馥(陽溪, 1626-1688) 등은 농운정사에서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거재에 대한 기록은 심원록에 자세하다. 여기에는 1727․1729․1730․1741년 14회에 걸쳐 22명이 거재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날짜 별 기록 인원은 1-3명이었으며, 이들의 거주지는 안동․상주․영해․함창․풍기 등 퇴계학파가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의 북부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도산서원이 강학 기능 역시 성실하게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둘째, 기호 남인의 시선에 대해서다. 18세기 전반에 이르러 남인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향남鄕南과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남京南으로 양분되었다. 기호 남인은 허목許穆(眉叟, 1595-1682)을 종宗으로 하며, 정조대에 이르러 채제공蔡濟恭(樊巖, 1720-1799) 등의 진출에 따라 기호 남인의 학통도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계통화 되었다. 이 때문에 허목은 <송태학상사생김박서送太學上舍生金䥬序>에서 “내가 10년 전에 도산도陶山圖를 보았는데, 그 뒤 청량산을 유람하여 단사협丹砂峽을 따라 올라가서 한서암寒棲庵을 본 다음 도산에서 상덕사尙德祠를 알현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익은 <도산도맥첩발陶山道脈帖跋>에서 “대개 우리나라 유술儒術이 성대하였지만 퇴계 이후로 퇴계만 한 이가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특히 이익은 퇴계에 대한 존모심이 더욱 각별하였다. 다음 자료를 보자. 내가 청량산에서 발길을 돌려 도산을 방문할 때 신택경申澤卿이 함께하였다. 반나절쯤 길을 가서 온계溫溪를 지날 적에 길가에서 멀리 서원을 가리키며 물으니, 답하기를, “노선생의 선대부先大夫 찬성공贊成公과 종부從父 승지공承旨公, 형 관찰공觀察公 세 분을 제사하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遺迹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위의 글은 이익이 1709년(숙종 35)에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쓴 <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의 일부이다. 그는 청량산을 유람한 후 신택경 등과 함께 온계를 거쳐 도산서원으로 갔다. 영남 사람들의 퇴계 존모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의 존모심도 당연히 강하게 실려 있었다. 도산서원에 들러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순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라고 하는 표현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퇴계에 대한 존모심은 퇴계가 직접 기거하며 강학했던 도산서당을 찾았을 때 극도에 도달했다. 그는 여기서 퇴계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나아가 퇴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선배들에 대한 부러움마저 가지기도 했다. 뒷날 여기에 대하여 회고하면서 “나 역시 예전에 영남을 여행하며 도산사陶山祠를 배알하고 몸소 지팡이를 짚고 유적들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라고 하기도 했다. 퇴계에 대한 존모심은 그로 하여금 도산서원과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남길 수 있게 했다. 앞에서 든 <알도산서원기>는 말할 것도 없고, <도산도발陶山圖跋>․<도산사陶山祠>․<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등이 모두 그것이다. 이 가운데 <도산도발>에서는, “<도산도>를 통해 그분의 동정과 노닐던 모습들을 모두 상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무릇 바위 하나 물가 한 곳까지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며, 흡사 수염과 눈썹의 올까지도 셀 수 있을 것만 같고 개연히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라고 하면서, 그 역시 181년 뒤에 퇴계와 같은 신유년(1681, 숙종 7)에 태어난 것을 영광이자 다행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도산서원에 대한 영남지역 퇴계학파의 내부적 시선에 비해, 그 존모심이 더욱 직접적이고 각별했음을 기호 남인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셋째, 강우지역江右地域인 영남 우도의 시선에 대해서다. 강우지역은 안동과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한 강좌지역에 비해 학문적 성향이 사뭇 달랐다. 이에 대하여 이익은, “퇴계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이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고,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이 닥쳐온다 하여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라고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강우지역의 사정이 복잡해지지만, 남명에 대한 존모심은 여전하였다. 이러한 각도에서 강우의 선비들은 도산서원을 보았다. 다음 자료를 주목하자. 영남 72고을은 산이 웅장하고 물이 아름다우며, 예로부터 인재의 보고라고 일컬어졌다. 도덕과 문장, 절의와 충효에 빼어난 분들이 앞뒤로 태어나 그분들이 사시던 곳에 제향하는 서원을 세워 당호堂號와 편액扁額을 걸어놓았으니, 어느 곳인들 남쪽 지방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아 존모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오직 경주의 옥산서원, 예안의 도산서원, 진주의 덕산서원은 회재․ᆞ퇴계․ᆞ남명 세 선생이 사시던 곳이며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그러니 이 삼산三山의 높은 경지에 올라가려면 이 세 현인으로 말미암아 지향을 높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동쪽과 남쪽 지역을 두루 유람하여 삼산서원의 원우院宇․대사․臺榭․동학․洞壑․임천․林泉을 모두 보았다. 이 글은 강우지역인 의령에 살았던 안덕문安德文(宜庵, 1747-1811)이 <삼산도지서三山圖誌序>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는 인조반정 이후 남인계와 노론계가 길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강우지역에서 이 지역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던 남명학을 의식하였다. 그리고 영남의 삼 선생으로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 그리고 남명 조식을 떠올리고 이들이 제향되어 있는 옥산․도산․덕산 세 서원을 삼산서원으로 명명한 후, 세 서원에 대한 서원도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고, 이를 중당中堂에 펼쳐두고 보면서 이들의 학덕에 대하여 흠모하였다. 그리고 강좌지역에 있는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을 심방하고, 이 지역의 문인들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남명을 회재 및 퇴계와 같은 반열에 놓인 도학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강우지역 사인들의 의식이 영남 내적 유학 구도 속에서 어떠하였던가 하는 부분을 짐작할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남명을 퇴계와 병칭하고 함께 존모했던 것은 단성 출신인 이삼로李三老(孤山, 1560-1645)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64세 되던 1623년(인조 1)에 장자 시빈時馪으로 하여금 도산서원을 찾아 알묘하게 하였는데, 이때 퇴계의 <성학십도>를 얻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노李魯(松巖, 1544-1598)의 집에서 남명의 <신명사도>를 구하여, 이 둘을 정사의 동쪽 벽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살펴보며 자신의 몸을 닦아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전반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하범운河範運((竹塢, 1792-1858)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도산서원을 갔을 때 이야순李野淳(廣瀨, 1755-1831)이 도산구곡시陶山九曲詩와 옥산구곡시玉山九曲詩를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자, 집으로 돌아와 이들 작품에 대한 차운시를 짓는 한편, 덕산구곡시德山九曲詩도 함께 지어 삼산구곡시三山九曲詩라고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퇴계와 남명, 즉 도산서원과 덕천[산]서원을 병치하고자 했던 강우지역 선비들의 의식을 파악하게 된다. 넷째, 노론의 시선에 대해서다. 노론 정치인들이 강우지역과 강좌지역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강우지역의 경우, 남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북인세력이 구성되어 있었고, 이 세력의 제거를 의미하는 인조반정 이후 이 지역은 철저한 보복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명학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에 비해 강좌지역인 퇴계학파와는 정치적 제휴를 하는가 하면, 이 지역이 17세기 후반 이래 중앙 정치로 진출이 차단되면서 이에 따른 불만이 고조되자, 조정에서는 조용론調用論을 내세우며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영남의 노론세력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근세의 자료이기는 하나 다음 자료는 매우 흥미롭다. 월헌月軒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도산의 수석水石이 사람들에게 많이 칭송되는 것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화양華陽보다 낫다고 하기도 했다. 지금 다만 높은 산과 긴 내는 볼 수 있지만 수석이 기이하고 빼어난 것은 보이지 않으니, 어찌 전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시각이 각기 달라서인가.”라고 했다. 이에 내가 “도산을 칭송 하는 사람들은 수석에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수석으로 그것을 구하려 하는 것이 옳겠는가? 만약 수석을 화양과 비교하자면 함께 견줄 수가 없다. 이제 나와 그대가 시험 삼아 도산과 화양의 산수에 대하여 마음대로 논해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넓으면서도 멀고 깊으면서도 조용하며, 깊은 물이 널리 퍼져 있고 고상하면서 밝고 아름다워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게 자득케 하여 끝날 수 없을 듯한 것이 도산에 있다. 푸르면서 깊고 우뚝하면서 웅장하여, 벽처럼 서서 물이 쏟아지고 높이 솟구쳐 밝아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용동시키고 숙연히 일어나게 하는 것이 화양에 있다. 요컨대 모두 각기 빼어난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규모와 기상은 스스로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위의 자료는 권용현權龍鉉(秋淵, 1899-1988)의 <동정일기東征日記> 가운데 일부이다. 그는 노론의 학통을 이으며 경남 합천에 살았는데, 역시 영남 노론으로 김해 출신인 이보림李普林(月軒, 1903-1972)과 함께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도산 산수를 논하게 되었다. 이들은 여기서 송시열宋時烈(尤庵, 1607-1686)을 제향하고 있는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 일대의 산수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이 둘을 비교하여 각각의 특장을 드러내었다. 도산의 산수가 ‘함홍연이涵泓演迤’ ‘가아명려佳雅明麗’한데 비해, 화양의 산수는 ‘벽립수락壁立水落’ ‘준위광명峻偉光明’하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도산의 넓으면서 수려한 산수와 화양의 높고도 밝은 산수를 대비해 놓았다고 하겠다. 영남지역의 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기호지역의 노론 역시 퇴계에 대한 존모심은 남달랐다. 물론 권이진權以鎭(有懷堂, 1668-1734)처럼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도산서원을 찾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오희상吳熙常(老洲, 1763-1833)과 같이 도산서원을 심방하면서 “돌을 쌓아 돈대를 만들어 모두 선생이 명명한 것이 있었지만, 서원을 지키는 이에게 물어 보았더니 사리에 밝지 못하여 거의 알지 못하였다.”라며 원직院直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퇴계에 대한 존모심만은 특별했다. 윤광소尹光紹(素谷, 1708-1786)가 1751년(영조 27) 9월에 도산서원을 찾아 극진한 존경심을 표하면서 상덕사의 자리가 헤어진 것을 보고 다시 짜서 교체해주기도 한 데서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노론 인사들에 의해 화양 산수와 비교되면서도 역대로 심방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퇴계에 대한 강한 존모심을 갖고 도산서원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시선이 조금씩 달라 흥미롭다. 안동권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 내부에서는 도산서원을 향사를 모시는 일상공간으로 인식을 하였고, 이익으로 대표되는 기호 남인은 퇴계에 대한 극도의 존경심을 갖고 애정 어린 눈으로 도산서원을 바라보았다. 남명학이 강한 자장을 형성하고 있었던 강우지역 선비들은 도산서원을 남명의 덕천[산]서원과 병치시켜 이해하고자 했고, 노론 학통에 있는 선비들은 도산의 산수를 송시열의 화양 산수와 대비하고자 했다. 심방객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시선의 교차 현상은 도산서원을 새롭게 이해하는 길을 열 수 있어 주목되는 부분이다.
4. 문화공간으로서의 도산서원
<도산기>에 보이듯이 퇴계는 도산서당 일대를 하나의 일상공간이자 이상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과 하학을 통해 상달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조선조 선비들의 학문적 이상이었다면, 퇴계는 여기에 매우 충실한 학자였다. 이 때문에 그는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사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며 이념화하였고, 이르는 곳마다 18절의 칠언시 혹은 26절의 오언시를 지어 자신의 심회를 드러냈다. 퇴계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이곳에서 마음속으로 얻은 즐거움이 얕지 않아, 이에 대한 말이 아무리 없고자 하나 말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산서원과 더욱 밀착되어 있는 18절의 칠언시는 이러하다. (1)<도산서당陶山書堂>, (2)<암서헌巖棲軒>, (3)<완락재玩樂齋>, (4)<유정문幽貞門>, (5)<정우당淨友堂>, (6)<절우사節友社>, (7)<농운정사隴雲精舍>, (8)<관란헌觀瀾軒>, (9)<시습재時習齋>, (10)<지숙료止宿寮>, (11)<곡구암谷口巖>, (12)<천연대天淵臺>, (13)<천운대天雲臺>, (14)<탁영담濯纓潭>, (15)<반타석盤陀石>, (16)<동취병산東翠屛山>, (17)서취병산<西翠屛山>, (18)<부용봉芙蓉峯> 위의 것은 지금도 거의 확인이 되는 공간들이다. 퇴계는 이들 공간을 명명하고 시를 지어 심회를 표출함으로써 도산서당 일대가 하나의 성리학적 문화공간이 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심방객들은 우선 <도산기>를 정확히 읽으며 퇴계의 생각을 따라갈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홍섬洪暹(忍齋, 1504-1585), 촛불을 돋우어 가며 <도산기>를 읽는다고 했고, 김창흡金昌翕(三淵, 1653-1722)은 세밀하게 <도산기>를 읽는다고 했으며, 윤봉구尹鳳九(屛溪, 1681-1767)는 <도산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상쾌해진다고 했다. 이처럼 퇴계의 <도산기> 읽기 열풍은 남인과 노론을 가리지 않았으며, 이를 읽으며 퇴계를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히 하였던 것이다. 도산서원으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부내에서 낙천洛川을 따라 석간대石磵臺를 거쳐 곡구암谷口巖으로 들어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촌에서 탁영담에 놓인 다리를 건너 곡구암을 거쳐 천연대로 오르는 방법이다. 권길權佶(應善, 1712-1774)은 <복주노정기福州路程記>에서 “석간대를 지나 도산 동구에서 말에서 내렸다. 푸른 벽과 붉은 바위가 좌우에 우뚝 솟아 있고, 소나무․호두나무․상수리나무․홰나무 등이 울창하였다. 동구 가운데 원사院舍가 있었는데 담장으로 둘려져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석간대를 거쳐 도산서원을 찾은 것이다. 이에 비해 이항무李恒茂(濟庵, 1732-1799)는 <강좌행일기江左行日記>에서 “도산서원을 향하여 가면서 탁영담에 놓인 긴 다리에 올라서 건넜다. 못 가운데 반타석이 있었는데, 곧 선생이 갓끈을 씻던 바위였다.”라고 적고 있으니, 그는 의인촌에서 탁영담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도산서원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도산서원을 찾는 길은 둘이 있었지만, 심방객들은 주로 석간대를 거쳐 곡구암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했다. 석간대는 도산서원 들머리에 있다. 이곳은 퇴계가 62세(1562) 되던 해 3월에 이정李楨(龜巖, 1512-1571)이 도산서당을 찾아와 3일 동안 머물다가 떠날 때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애틋하게 헤어진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으로 1780년 8월 19일 박종朴琮(鏜洲, 1735-1739)은 청량산을 유람할 때 도산서원으로 들어서면서 “골짜기 아래 작은 대 위에 하나의 비가 서 있었다. 비에는 ‘석간대石磵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선생께서 암서헌을 찾는 손님을 전송할 때면 늘 여기까지 이르렀으므로 뒷사람이 표시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도산서원에 들어온 선비들은 어떤 동선으로 이 서원을 관람하였을까? 이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세 방향으로 나뉜다. 상덕사를 먼저 찾는 경우, 도산서원을 먼저 찾는 경우, 도산서당을 먼저 찾는 경우가 그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이윤우․안정여․하범운·권용현 등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권헌정과 이익 등이며, 세 번째의 경우는 오숙․조임도․이항무 등이다. 주로 ‘상덕사→도산서원과 광명실→도산서당’, ‘도산서원과 광명실→상덕사→도산서당’, ‘도산서당→도산서원과 광명실→상덕사’ 순으로 심방하였으며, 기타의 건물은 이곳을 살펴보는 과정이나 이후에 찾았다. 도산서원 내에 들어온 선비들은 서원의 각 공간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퇴계를 느꼈고, 마지막으로 천연대 혹은 천운대에 올라 퇴계의 넓은 덕을 상상하였다. 서원 안의 안내는 오희상吳熙常의 경우처럼 원직院直이 하거나, 권길權佶의 경우처럼 원복院僕이 하거나, 이항무李恒茂의 경우처럼 서원의 유사나 퇴계 후손이 직접 하기도 했다. 안정여安鼎呂(晦山, 1871-1939)가 <도산첨알록陶山瞻謁錄>에서 “무릇 서원에 들어온 자는 비록 늙은이라도 원내에서는 지팡이를 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팡이를 서원의 문밖에 세워두고 당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원내에서는 퇴계에 대한 존경심을 극도로 표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상덕사, 도산서원과 광명실, 도산서당 순으로 살피고, 이후 천연대 등 여타의 공간을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상덕사尙德祠에 대해서다. 상덕사는 퇴계와 그의 제자 조목趙穆(月川, 1524-1606)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상덕’은 퇴계의 덕을 높인다는 의미일 터인데, 논어 「헌문」에서 공자가 남궁괄을 칭찬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퇴계와 그의 제자 조목이 모셔져 있으니, 이곳을 찾는 선비들은 매우 경건할 수밖에 없었다. 1631년(인조 6) 6월 14일에 상덕사를 찾은 조임도趙任道(澗松, 1585-1664)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나서 제복을 빌려 입고 사당에 들어가 분향을 한 후 전알展謁을 하였다. 이때 동쪽에 월천의 위패가 있는 것도 보았다. 안정여安鼎呂도 사당에 들러 퇴계에게 먼저 배알한 후 위패를 봉심한 후 퇴계의 위패에는 “퇴계이선생退溪李先生”, 종향위인 조목의 위패에는 “월천조공月川趙公”이라 쓰인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조목에 대해서는 “대개 계문溪門에서 의발을 전수받은 자가 많았는데, 유독 월천이 종향된 것은 서원을 건립할 때 공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상덕사에서의 퇴계에 대한 예경은 이익이 가장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는 <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謁>에서, “원노院奴를 불러 사우祠宇의 바깥 정문을 열도록 하고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에 감히 들어가니,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의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또 남쪽 문을 열어 주어, 우리들이 뜰아래에서 엄숙히 참배하고 추창하여 서쪽 계단을 통해 가서 몸을 숙이고 문지방 밖에 차례로 서서 사당 내의 제도를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왼쪽에 월천 조공을 배향하는 신위만 있을 뿐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뜰아래서 참배를 한 후, 문지방 밖에서 사당 내의 제도를 살펴보았던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은 도산서원과 광명실에 대해서다. 도산서원의 경우, 이익은 그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기록하였다.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은 홍의재弘毅齋이다.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강당講堂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典敎堂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閑存齋이다. 한존재에는 원院 내에 반드시 장임長任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통솔하며 항상 이곳에 거처하였으며, 박약재와 홍의재는 제생이 머무는 곳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강학은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에서 하였고, 상읍례는 마당에서 하였는데 비가 올 경우는 동․서재의 마루에서 하기도 했다. 향사를 마친 후 음복례飮福禮 역시 주로 강당에서 하였다. 도산서원을 들러 선비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서원에 걸려 있는 다양한 현판들이었다. 권헌정權憲貞(遯窩, 1818-1876)은 “벽 위에 걸린 현판을 두루 보았는데, 동쪽에는 <사물잠>과 옛 <백록동규>가 걸려 있었다. 가운데는 정조가 임자년(1792)에 내린 사제문이 걸려 있었고, 원액은 ‘도산서원’ 네 자였으며 한석봉이 쓴 것이었다. 사당은 ‘상덕’이라 하였고, 동재는 ‘박약’, 서재는 ‘홍의’라 하였으며, 가운데는 ‘광명실’인데 곧 서책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유사가 없었기 때문에 두루 관람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라고 적었고, 이항무李恒茂는 현판의 의미까지 생각하며 전교당은 ‘오전명륜五典明倫’, 광명실은 주자 장서각의 ‘혜아광명惠我光明’, ‘한존재’는 ‘한사존성閑邪存誠’에서 뜻을 취한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박종朴琮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전교당 옆에 ‘경의재敬義齋’라는 현판도 있었다고 했다. 광명실은 동재와 서재 사이에 위치한다. 하범운河範運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이, 여기에는 퇴계의 친필과 함께 내사본內賜本 등이 보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퇴계와 그의 제자들이 학문을 한 가장 직접적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에 대하여 권길權佶은 “원중에는 선생의 친필이 많았으며, 또 손수 쓴 편지가 있었다. 월천이 배접해서 첩을 만들었는데 모두 6권이었다.”라고 하면서 광명실 소장의 사문수간師門手簡을 전했다. 이 책은 별도의 궤를 만들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으며, 정조가 읽고 그 말미에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남붕南鵬이 그의 <청량기행> 1926년 8월 18일자에 자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광명실에 보관되어 있는 책은 엄격히 관리되었다. 벽상에 “서불출문書不出門”을 써 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하범운은 “우뚝한 존각尊閣에는 진장珍藏과 보축寶蓄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벽상에는 ‘서불출문’ 네 자가 걸려 있었다.”라 적은 것이 그것이다. 권도용權道溶이 <강좌기행록江左紀行錄>에서 “광명실은 원회院會가 있을 때가 아니면 문을 열 수가 없었으므로, 찾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라는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처럼 도산서원 광명실의 서책은 보고 싶은 책이 있더라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도산서당에 대해서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거처하면서 강학을 했던 공간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곳이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은 선비들은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익은 <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에서, “이곳은 정말 선생이 친히 지은 곳이어서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이도 사람들이 감히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였다. 때문에 낮은 담장과 그윽한 사립문, 작은 도랑과 네모난 연못이 소박한 유제遺制 그대로여서 마치 선생을 뵌 듯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라고 하였고, 이복 역시 도산서당에 있는 정우당淨友塘․절우사節友社․몽천蒙泉․유정문幽貞門 등을 제시하면서, 백 년 뒤에 찾아와 퇴계의 유적을 보고 느끼는 경모의 마음을 전하면서, 퇴계에게 친히 배운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심방객들이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도산서당의 규모와 구조였다. 권길이 <복주노정기福州路程記>에서 “도산서당은 세 칸이었다. 가운데는 방이 있었고 서쪽에는 부엌이 있었다. 가운데의 반 칸은 작은 토방이었는데 서당을 만든 중이 묵던 곳이었다. 방의 동쪽에는 한 칸의 마루가 있었는데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네 자가 걸려 있었고, 마루 가에는 반 칸의 퇴주退柱가 있었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권헌정․이복․이항무 등도 이러한 도산서당의 구조에 관심을 가졌으며, 도산서당에 게판되어 있는 다양한 현판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항무는 암서헌․도산서당․완락재 등은 모두 퇴계가 68세 때 쓴 것이라고 밝혀두기도 하였다. 심방객들은 현판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 퇴계의 유품을 관람하였다. 이들은 여기서 서안書案․등경燈檠․연갑硯匣․청려장靑藜杖․사분沙盆․오분烏盆․혼천의渾天儀[선기옥형璿璣玉衡]․타구唾具․점석簟席․화준花罇 등을 보았고, 시렁 위에 놓인 화문석畫紋席과 퇴침退枕을 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유품에 대한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즉 권헌정은 “벼루는 과거를 볼 때 들른 유람객이 훔쳐갔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이익은 “무릇 벼루는 한 조각 돌덩어리일 뿐이나, 이곳에 있으면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다만 다른 돌덩이와 같은 것일 뿐인데, 저 훔쳐간 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던가.”라고 하면서 벼루의 분실에 대하여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또한 경상감사 허적許積(默齋, 1610-1680)이 만들어 기증한 청려장 보관함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다음은 천연대로 가보기로 하자. 천연대는 천운대와 함께 도산서원 앞쪽 강변에 위치해 있다. 대에는 ‘천연대天淵臺’라는 석각이 있는데, 이것은 퇴계의 유지에 따라 조목이 이산해李山海(鵝鷄, 1539-1609)의 글씨를 받아 새긴 것이다. 조목은 1601년 10월 10일에 이를 새기고 <각천연대고문刻天淵臺告文>을 지어 스승 퇴계의 사당에 고하기도 했다. 이익과 이복 역시 이 사실을 전하였는데, “돌에 새긴 ‘천연대’란 세 글자는 또한 월천이 유의에 따라 만든 것이다.”라고 하거나, “천연대의 허리에 입석立石이 있었는데 석면에 ‘천연대’라는 큰 글씨 셋이 있었으니, 곧 조월천이 아계의 글씨로써 새긴 것이다.”라 한 것이 모두 그것이다. 이익이 밝히고 있듯이 천연대는 천운대天雲臺와 마주하여 우뚝 서 있었으며 물길이 도도하게 흘러 앞을 지나가고 시계視界가 탁 트여 원근을 막힘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金得硏(葛峯, 1555-1637)은 <유청량산록>에서 “서쪽으로 천광운영대에 올라 탁영담을 굽어보고, 동쪽으로 천연대에 올라 반타석을 보니 강변의 모습을 글로 다 쓸 수가 없다.”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때문에 심방객들은 천지를 부앙俯仰하면서 ‘연비여천鳶飛戾天’ ‘어약우연魚躍于淵’의 활발발活潑潑한 자연 생명력을 느끼고, ‘천광운영天光雲影’의 천리유행처天理流行處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퇴계의 높고 큰 덕을 여기에 결부시키며 흠모해 마지않았다. 권길이 “천연대와 운영대에 올라 탁영담을 굽어보면서 선생의 풍의風儀와 덕용德容을 상상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천연대나 천운대 위에서 여행 당시에 경험했던 일상에 대하여 기록하기도 했다. 조임도趙任道(澗松, 1585-1664)는 천연대를 굽어보면서 퇴계가 쓴 <도산기>의 경관과 달라진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배를 띄울 수 있는 탁영담이 여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의문을 제기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을사년(1605) 홍수의 재해로 말미암아 근래에 없어졌습니다. 산이 무너지고 나무가 뽑히었으며 구릉과 골짜기가 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득연은, 천연대에서 반타석을 내려보면서, “그때 어부 한 사람이 그물을 올리고 있었는데 물으니, 의인의 주민이라 했다. 버들가지에 꿰인 고기를 나누어 주어 나그네의 반찬을 하도록 했다.”라고 하면서 천연대와 탁영담 주위의 당시 풍정을 전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였던 농운정사 역시 심방객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안정여安鼎呂(晦山, 1871-1939)는 이 정사의 구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산첨알록陶山瞻謁錄>에서 “농운정사는 급문제자들이 강습을 하는 집으로 대개 아홉 칸이었다. 공工자형에 의거하여 좌우에 각기 세 칸, 가운데가 세 칸이었으며 지극한 법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모두 선생이 손수 설계하여 지은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늦게 태어나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복李馥(陽溪, 1626-1688)은 관란헌觀瀾軒과 농운정사隴雲精舍에 학도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전했고, 이항무는 이곳의 시습당時習堂이 선비를 기르는 곳으로 반궁泮宮의 격식이 있다고 하면서 현송絃誦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밖에도 역락재亦樂齋는 멀리서 유람 온 선비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17세기 후반의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도산서원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문화생성 공간이었다. 조성신이 <도산별곡>에 노래하였듯이, 심방객들은 이곳에서 주로 퇴계의 “풍채風采를 뵈옵는 듯 기침소리를 듣잡는 듯”하였다. 도산서원 관람의 동선이 한결 같지는 않았지만, 상덕사에서는 지극한 존경심을 일으키며 알묘를 하였고, 도산서당에서는 퇴계의 유품을 살펴보면서 퇴계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천연대에서는 탁 트인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우주에 가득한 자연 생명력과 퇴계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이로써 퇴계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증폭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도산서원 내부에 있는 다양한 글씨나 광명실의 서책을 통해서 심방객들은 도산서원이 지닌 문화사적 의미를 예각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즉 도산서원은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문화적 의미로 재구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5. 도산서원과 이야기의 발견
도산서원이 선비들에게 있어 하나의 문화공간이었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생성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주제인 문화론이 복합성과 융합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동안 도산서원에서 생성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퇴계의 정신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표현을 욕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토리텔링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도산서원에서 생성된 그동안의 이야기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도산서원은 우리시대의 눈높이에 맞게 새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는 도산서원에서 생성된 이야기 몇 가지를 제시해 보기로 한다. 첫째, 도산서원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인 위패와 서적에 대한 것이다. 퇴계는 세상을 떠난 후 상덕사의 위패로 봉향되었다. 위패는 퇴계의 혼령이 깃든 것이므로 퇴계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 등 위기적 국면에 봉착하면 서원의 유사有司는 이 위패부터 먼저 보호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도산서원 위패의 수호자인 이운李芸(芝山, 1568-1638)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현보李賢輔(聾巖, 1467-1555)의 증손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퇴계의 위패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즉 전란이 일어나자 위패를 청량산으로 피신시키고, 그 후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안치하였다가 전란이 평정되자 다시 도산서원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운은 도산서원에 보관 중이던 서책과 문서 역시 마루 밑에 땅을 파서 갈무리하여 서원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하였으며, 1599년의 퇴계집 간행에도 많은 공로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도산서원에서는 서원의 재물을 출연하여 이운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기리고, 완의完議를 써서 “매년 3월 11일 기일에 서원에서 쌀 한 말․생선 한 마리․꿩 한 마리를 갖추어 보내고, 이와 같은 예를 영원히 지킬 것”이라며 목판에 새겨 서원의 벽에 걸었다. 이 현판은 1848년(헌종 14)에 이휘녕李彙寧(古溪, 1788-1861)이 옛 기문 가운데 빠뜨린 부분을 보완하여 현재 광명실의 벽에 게시해 두었다. 이 이야기는 도산서원의 문화가 어떤 노력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강학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에 대해서다. 퇴계 위패의 보호는 서원의 핵심 기능인 선현에 대한 봉사奉祀와 관련이 있다. 이와 함께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講學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원의 강학이 강당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앞서 살핀 대로 안정여와 이복 등은 농운정사에서 끊이지 않는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농운정사는 구조가 공부의 공工자로 되어 있었으며, 편액도 시습재時習齋라 하였으니 그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이에 대하여 퇴계는 일찍이 “날마다 명성明誠을 일삼기를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하니, 거듭 생각하고 다시 실천하기를 때때로 하네. 공부가 익숙하면 깊이 얻음이 있으리니, 좋은 음식이 입을 기쁘게 함과 같을 뿐이랴.”라는 시를 지어 공부의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정구鄭逑(寒岡, 1543-1620)가 살평상을 만들어 도산서원에 기증한 것도 강학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도산서당의 협청夾廳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익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알도산서원기>에서, “헌의 동쪽에 또 작은방 하나를 붙여 헌과 통하도록 해서 청廳을 만들고 나무를 쪼개 판板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와상臥床 모양 같았다. 금생이 말하기를, ‘선생 당시에는 이것이 없었는데 한강寒岡이 유의遺意를 받들어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권길 역시 적기 하면서 퇴계가 강학할 때 마루가 좁은 것을 혐의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정구가 만든 것이라 했고, 하범운은 이것이 송나라의 학자 호원胡瑗의 강학처인 호재湖齋에 학생들이 많이 몰려 모두 받아들일 수 없어 당을 넓혔던 고사를 염두에 두면서 정구가 퇴계의 유지를 받든 것이라 생각했다. 셋째, 도산서원에 편재한 현판 글씨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산서원에는 수많은 글씨가 있다. 여기에는 퇴계가 쓴 것도 있고, 한석봉이 쓴 것도 있으며,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심방객들은 이 가운데 퇴계가 쓴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이복은 <선성왕환록宣城往還錄>에서, “아침에 일어나 전알展謁을 하고 식사한 후 완락재에 들어갔다. 곧 노선생이 평소 거처하던 곳이었다. 방은 완락재, 헌은 암서헌이었고 총괄하여 이름을 도산서당이라 하였는데 모두 팔분체八分體로 편액되었으며 선생의 글씨였다.”라 적고 있고, 이어서 “농운정사로 향하였는데 곧 완락재 서편에 있었다. 그 당에 올랐는데, 팔분체로 두 편액이 걸려 있었으며 역시 선생의 글씨였다. 하나는 관란헌, 또 하나는 농운정사였으며 학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퇴계의 글씨는 도산서원에도 있었다. 도산서원 편액은 한석봉이 쓴 것이지만, ‘전교당’을 누가 쓴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이가 있었다. 이항무가 대표적인데 그는 여기에 의문을 갖고 관련사실을 <강좌행일기江左行日記>에 적어 두고 있다. “주인에게 전교당은 누가 쓴 것입니까 하니, 주인이 선생이 일찍이 세 글자를 쓴 것인데 역동서원에 걸어두었던 것입니다. 이 서원이 완성된 후 이 당에 옮겨서 걸게 된 것입니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글씨는 퇴계의 다른 글씨체와 달라 사실 여부를 확인 할 필요가 있다. 이 밖에도 천연대에 석각된 이산해의 글씨에도 관심을 갖고 기술한 경우가 많아, 도산서원의 정치적 성격 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특별하다. 넷째, 도산서당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다. 심방객들은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퇴계의 유품을 통해 퇴계를 느꼈다. 이 가운데 사분沙盆의 용도에 대한 의문이 이곳을 찾은 이들 사이에 있었다. 권길權佶은 <복주노정기福州路程記>에서, “또 사분이 있었는데, 동이의 몸에는 구멍이 두루 나 있었다. 원복院僕이 말하기를 ‘밤에 등불을 그 속에 두면 불빛이 구멍으로 나와 매화를 그린 듯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권헌정權憲貞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 사실은 전하면서 사분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이항무李恒茂는 방 곁에 있는 오분烏盆을 보고 어떤 사람은 화분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향분이라 한다고 하면서, “아마도 선생이 향을 피우고 독서를 하였을 터이니, 향분이라는 설이 근사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퇴계 유품의 기능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도산서원은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익이 전한 삭적削籍된 도산서원 원장 이야기는 그 대표적이다. 그는 <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에서 “(도산서당의) 벽면에 선생의 차기箚記와 필적이 정연하게 있었는데, 근래 원장院長 아무개가 유택遺宅을 수선하는 일로 방백에게 아뢰니, 방백도 감히 필요한 물자를 아끼지 않고 주었다. 종이를 많이 얻어 벽을 모두 새롭게 도배해 버려 이제는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사림이 회의하여 서원 문적에서 원장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조롱하고 한탄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 원장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퇴계의 필적을 없앴기 때문에 그 원장에 대한 특별한 원망과 함께 심방객들에게 커다란 안타까움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 탁영담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퇴계는 <도산잡영>에서 탁영담에 대해서 노래했다. 그리고 10월 기망旣望을 맞아 이문량李文樑(碧梧, 1498-1581) 등과 함께 배를 띄워 놀면서 <탁영담범월濯纓潭泛月> 등의 시를 짓기도 했다. 이러한 퇴계의 풍류는 그 후예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도산서원의 향사를 마치기라도 하면 동지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김령이 “나와 영월․치원․이실․박효술 등 여러 사람은 배를 타고 탁영담을 거슬러 올라가 반타석에 도착하였다. 가을 물이 한창 가득하여 맑은 흥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영월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다. 한창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는데 술이 떨어져 이어 대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이러한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탁영담이 뱃놀이하며 흥취에 취하게 했던 공간만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커다란 익사사고가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령의 계암일록 1605년 7월 22일조 의하면, 분천汾川의 이협李莢 등이 풍파가 크게 일고 물결이 거세지는데도 불구하고 사공을 야단치고 협박하여 탁영담을 건너다가 도산의 수노首奴 두 명과 서원書院 사람 세 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김령은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관련사실을 자세히 적어두었다. 이러한 인재人災 뿐만 아니라 홍수가 나서 여울이 되어버리는 천재天災 역시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다. 이처럼 탁영담은 복합적인 사연을 갖고 있었던 공간이라 하겠는데, 흥미소와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역시 적지 않다. 도산서원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도덕주의에 입각한 것에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것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이운의 위패와 서책 지키기나 정구의 살평상 이야기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퇴계의 글씨를 없앤 도산서원 원장 이야기나, 탁영담 익사사건은 후자에 해당한다. 후자에는 조목의 위패에 또아리를 튼 구렁이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앞서 제시한 근대전환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도산서원에 대한 중요한 기억을 제공한다. 이러한 도산서원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새롭게 주목된다. 도산서원을 오늘날 하나의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6. 맺음말
본고는 도산서원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 학계가 텍스트 중심주의에 함몰되어 형식주의 내지 구조주의만을 신봉해왔다는 반성적 입장에서 제출된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미시사적 입장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산서원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느꼈는가 하는 것을 주목한다. 이로써 도산서원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성에 바탕한 대중성 역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이 현실과 소통할 때 비로소 활학活學이 되어 그 존재 의의를 확보한다고 볼 때, 본고의 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산서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가장 상세한 기록은 퇴계의 <도산기>이다. 퇴계 사후 에도 이 글은 거듭 읽혔으며, 도산서원을 찾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필수적 자료였다. 도산서원 관련 산문은 일기와 기행문이 중심이다. 여기에는 도산서원을 찾아 느낀 점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당대의 서원문화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준다. 시간적 측면에서는 퇴계 당대부터 우리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산서원에 대한 기록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공간적 측면에서는 영남을 중심으로 그 범위가 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리고 작가적 측면에서는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이 중심이 되지만 다른 학통의 선비들 역시 적극적으로 도산서원을 찾았다.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학문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시각을 달리했다. 퇴계학파 내부에서는 서원의 일상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향사享祀와 강학講學은 이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호 남인의 경우 이익李瀷이 보여주듯이 퇴계에 대한 각별한 존모심을 갖고 도산서원을 심방하였으며, 낙동강 오른쪽인 강우지역에서는 남명학적 전통 위에서 도산서원을 덕천서원과 병치시켜 이해했다. 그리고 노론의 경우는 도산 산수와 화양 산수를 대비하면서 각기 특장이 있음을 보였다. 도산서원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상이하였지만, 퇴계에 대한 존모심은 강한 구심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도산서원은 어떤 문화공간으로 인식되었던가. 상덕사尙德祠에서는 퇴계와 조목의 학덕을 기렸고, 도산서원과 광명실에서는 현판을 낱낱이 들어 그 의미를 천착하고, 이것으로 도산서원에 내함된 이학적 지향을 찾기도 했다. 특히 도산서당에는 퇴계의 유품이 있어 이를 통해 지근에서 퇴계를 느낄 수 있었으며, 탁 트인 천연대와 천운대에서는 우주와 맞닿아 있는 퇴계의 풍의風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심방객들은 농운정사나 역락서재 등을 거닐며, 퇴계학단의 강학풍경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도산서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운李芸은 위난의 시기를 맞아 퇴계의 위패 보호를 위하여 온힘을 다했고, 안동부사 정구鄭逑는 퇴계의 유지에 따라 살평상을 도산서원에 기증하여 강학환경을 개선할 수 있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도산서원에 편재한 현판 이야기, 퇴계 유품 이야기 등 즐비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도산서당의 벽면에 붙여둔 퇴계의 차지箚記를 훼손하여 삭적된 원장 이야기나, 사족의 횡포로 탁영담에서 익사사건이 발생한 이야기 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 모두가 도산서원을 동태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제 남은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해 보자. 첫째, 퇴계의 공간 상상력과 그 변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퇴계가 도산서당을 건축하면서 사물에 이름을 붙이며 문화화 하고, 나아가 관련 시를 지어 자신의 심회를 드러냈다. 여기에는 당연히 퇴계의 공간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다. 퇴계 사후에는 그 후예들이 이에 대한 차운시를 지어 퇴계와 도산서원을 기렸다. 조보양趙普陽의 <경차도산십팔영운敬次陶山十八詠韻>, 정종로鄭宗魯의 <경차도산잡영敬次陶山雜詠>, 곽종석郭鍾錫의 <근차노선생도산잡영謹次老先生陶山雜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계승과 변이를 함께 보여주고 있어, 도산서원을 문화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 둘째, 도산서원 심방의 동선을 개발하는 일이다. 도산서원 심방의 동선은 내적인 것이 있고 외적인 것도 있다. 내적인 것은 천연대에서 도산서당, 광명실, 도산서당을 지나 상덕사에 이르는 길이고, 외적인 것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청량산 등 주변의 문화경관을 함께 고려하는 길이다. 이 둘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 역시 이 둘을 함께 강조하며 도산서원을 심방하거나 청량산을 찾았다. 그러나 오늘날 도산서원의 관람 동선은 우리 시대에 맞게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내적으로는 유물각인 옥진각玉振閣 등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으며, 외적으로도 안동댐 조성 등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이를 고려하면서 심방의 동선은 새롭게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교육기관으로서의 도산서원을 주목할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도산서원 강당이 ‘전교당典敎堂’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항무李恒茂는 그의 <강좌행일기江左行日記>에서 전교당이 ‘오전명륜五典明倫’의 의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농운정사의 ‘시습당時習堂’ 역시 양사養士를 위한 반관泮館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도산서원이 일개의 사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공적인 위상을 갖는 대표적인 기관임을 암시한다. 도산서원이 지녔던 교육적 측면에서 다시 읽히는 부분이다. 넷째, 현판을 통한 도산서원의 문화 이해이다. 도산서원의 현판에는 서원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전교당이 인륜을 밝힌다는 의미라면, 동재 박약재博約齋는 ‘박학어문博學於文, 약지이례約之以禮’(論語 <雍也>)라는 공자의 말에서 빌려온 것이고, 서재 홍의재弘毅齋는 ‘사불가이불홍의士不可以不弘毅,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論語 <泰伯>)이라는 증자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도통론에 입각하여 오전五典으로 인륜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니, 도산서원이 지닌 최종적인 지향점을 여기서 보게 된다. 다섯째, 퇴계에 대한 체험적 이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물이 갖고 있는 문화적 의미나 학술적 의미를 거의 도외시하였다. 퇴계의 유물은 도산서당에 보관되어 오다가 1970년 옥진각玉振閣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유물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퇴계를 느꼈다. 이것은 문집을 통한 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 유물을 통해 퇴계를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유물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영남 삼산서원 가운데 도산서원과 덕산[천]서원을 문화적으로 대비시켜보는 일이다. 퇴계와 남명이 서로 비교 논의되듯이, 이 두 서원 역시 대비될 수 있다. 사우祠宇의 명칭도 상덕사尙德祠[도산]와 숭덕사崇德祠[덕천]으로 비슷하지만, 유정문幽貞門과 경의당敬義堂[齋]은 두 서원에 모두 존재하였다. 그러나 덕천서원에는 유정문이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도산서원에는 경의재가 없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도산서원과 덕천서원이 지닌 문화적 의미는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학이 공부와 멀어진 역설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도산서원을 다시 생각한다. 성균관과 향교가 과거를 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했던 장소였다면, 서원은 수양을 전제로 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는 공간이다. 경쟁과 성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이를 추종하는 대학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원문화를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고인들이 인격완성에 매진하였던 마음을 쓴 자취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농운정사는 그 자체가 ‘공工’의 형태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를 따져 물으며 서원문화는 새롭게 부활되어야 한다. 그 중심에 도산서원이 있다. |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