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개막식 입장 순서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한자(간화자)의 획수 순으로
중국은 티벳 사안이나 환경 문제 등 여러 난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올림픽을 잘 치렀다.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매스컴과 방송들도, 국내 현안을 비껴가기 위해서였는지, 여름 내내 올림픽 기사로 지면을 구성하고 올림픽 관련의 프로그램을 화면에 띄웠다.
그런데 개막식과 폐막식을 보면서 중국 패권주의의 ‘악령’을 보는 것과 같아 불안감이 스멀스멀 일었다. 개막공연과 개막식, 폐막식은 전제국가의 매스게임을 연상시키는 면마저 있었다. 개막식장의 각국 입장 순서를 정한 방식을 알게 되면서 그 불안감은 더 커졌다.
올림픽 발상국인 그리스가 첫 번째, 개최국인 중국이 맨 마지막 204번째로 식장에 들어간 것은 관례대로였다. 하지만 기니아가 두 번째여서, 의외였다. 왜 기니어가 두 번째인가?
중국에서는 나라의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표기를 한다.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BOCOG)는 각국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표기하여 첫 한자의 획수 순으로 각국을 배열하였다(첫 글자의 획수가 같을 경우 부수 순이나 두 번째 글자의 총획수를 이차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데, 다소 논란이 있다). 이 때 한자는 우리에겐 약간 생소한 ‘간화자(簡化字)’를 말한다. 우리가 쓰는 한자를 중국에서는 ‘번체자’라 한다.
기니아(Guinea)는 ‘
’로 표기한다(중국식 발음은 ‘지네이야’임). 번체자라면 ‘幾內亞’로 적어야 할 텐데, ‘幾’의 간화자인 ‘
’로 표기하니, 첫 글자의 획수가 2획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은 간화자가 한자의 ‘정자(正字)’라는 점을 선포했다고 할 수 있다. 간화자는 자형(자체)이 번체자와 조금 다르다. 또 중국은 명나라 이래의 214부를 통일부수표에서 201부로 줄였다. 중국이 간화자의 ‘괴상망칙한’ 자형(자체)을 버리고 번체자로 돌아가기를 바란 일부 전문가들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2. 대한민국, 한국, 조선의 입장 순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국은 북한과 함께이거나 북한과 릴레이로 식장에 들어가려고 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측 관계자는 ‘대한민국’이란 정식 국호 대신 ‘한국’이라는 약칭에 만족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이었다면 ‘大’자가 3획이고, 그 부수도 3획이므로, 예맨(也門)의 바로 다음에 일곱 번째로 입장했을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한(韓)은 간화자로는 12획이다. 북한은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그 조(朝)도 12획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은 릴레이로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릴레이 입장을 거부하고 180번째를 배정받았다.
한국의 경우 베트남(越南)보다 앞서야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간화자 월(越)도 12획이다. 한(韓)의 간화자 부수는 4획, 월(越)의 부수 주(走)는 7획이다. 부수 순이라면 확실히 한국이 베트남보다 앞서야 했다. 그러나 첫 글자가 같은 획수인 국가들을 배열할 때 중국은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했던 것 같다. 간화자로 표기할 첫 글자가 12획인 국가는 모두 16개국이다. 그 16개국을 배열한 방식은 발음의 알파벳 순도 아니고 중국식 부수 순도 아니었다.
3. 서울 올림픽 땐 한글 자모의 순
중국은 자국의 문자 체계를 이용해서 올림픽 식장의 입장 순서를 정하였다. 아시아 올림픽 때도 그 체계를 사용했다. 그런데 중국이 자국의 문자 체계를 기준으로 올림픽 식장의 입장 순서를 정한 것은 독창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를 때 우리는 한글 자모의 순으로 각국의 입장 순서를 정했다.
사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올림픽을 치른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 축전에서 우리는 영어 알파벳과는 다른 문자 체계가 지구상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번 올림픽 때 중국의 한국 혐오가 노골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패권주의의 ‘악령’은 동아시아를 넘어 지구 전체의 하늘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다. 다채롭고 풍부한 역사경험이 우리의 체내에 침잠해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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