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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태용할아버지는 고려 충렬왕(1274년~1308년)조 에 사셨던 영광김씨 장흥파 시조(파조)이십니다. 2012년 기준으로 하여 이 선산은 700여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지켜왔습니다. 이처럼 긴 세월동안 선산을 유지 해온 사실은 타성씨들이 부러워할 만큼 실로 자랑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선산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음은 선조님들의 눈물겨운 고생과 정성에 기인한 것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휘 태용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신 때로부터 휘 광원할아버지께서 정치적 탄압을 받으신(기묘사화) 1519년까지는 비교적 선산을 잘 관리해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519년 이후 휘 광원할아버지 후손들이 장흥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선산관리를 할 수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1519년부터 장흥종친이 묘를 찾은 1877년까지 실묘(失墓)기간으로 잡았었습니다. 그러나 월봉할아버지 4촌지간이신 휘 영(潁)님과 그 후손들이 경기도 파주 선산 근처에서 계속 기거하시면서 묘소를 관리해 오다가 1876년 더 이상 관리가 어렵게 되자 장흥 종친에게 연락을 취하여 1877년부터 장흥 종친이 관리하게 되었으므로 실제 실전기간은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사실, 파주 선산은 그 뒤에도 경기도에 있는지라 전남 장흥에서 워낙 먼 거리인데다 후손들의 재정도 어려워 재대로 모시지 못한 부분도 있어왔습니다. 그러던중 6.25사변이 터져 파주선산이 전쟁터로 변하여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파주군 월롱면 일대에 포진지를 구축해야 했는데 하필 우리 선산에 구축예정이던 것을, 포병 1대대를 지휘하던 김한룡장군(당시 대대장)이 "영광김씨문경공"이라는 비문을 발견하고 나서 아무에게도 그 사연을 말하지 아니하고 진지를 묘역 밖으로 이동, 구축하도록 하였으니 이 또한 천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한룡 장군님은 경파(京派)중 충청도 충경공파 후손이시니 이 또한 기묘한 인연으로서, 비단 일족(一族)의 정(情)뿐만 아니라 우리 장흥파 후손들에게는 선영을 구해주신 큰 은인으로서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편, 파주 선산은 6.25사변 이후에도 40여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군부대가 가까이 있어 각종 군사시설로 묘소가 버려진 것과 진배 없었습니다. 이에 기다리다 못한 후손들이 문중대표들의 연명을 받아 국방부장관, 경기도지사, 미군부대장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한 결과 군부대장의 사과를 받고 불법시설물을 철거하고 군 장비를 동원 전답정리까지 해주었으며 그 이후 현재까지 함부로 묘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장흥은 물론, 광주와 서울 지역, 심지어는 일본에 거주하는 종인들까지 연락을 취하여 헌성금 5천6백만원을 투입, 1980년에 제각을 건립 착공하여 1888년 완공하였으며, 선산 임야 1300평을 팔아 위토답 1320평과 재각부지 350평을 더 사들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문중 어르신들이 왜 파주선산에 대해 지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곳에 오시는 젊으신 종친 회원님들은 위의내용을 잘 읽어 보시고 이해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집 ; 카페지기)
참고자료 : 김희수종친(본 카페 닉네임, 부면장)저서 "영광김씨 참판공필파 연원실록" p273~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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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경공의 배이신 정경부인과 이씨와 같은 광산 이씨 후손인데요 내년 2025년에는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시제일이 입춘일이 아니라 한식일 즉 보통 4월 5일이 맞나요?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