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순 란
<테마시>
봉황산
봉황산을 오른다
신선한 기운이 소매 깃을 파고
산들바람 붙잡는
나무 의자에 앉으니
솔향 짙은 그리움
옛사랑
온 몸으로 전해진다
진주, 실직정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레몬빛 햇살로 풀어져 깔깔깔 웃고
구절초들이 떨리는
손길로 두 잎 떼어가란다
살아온 날들이 후회 된 듯
가르마 같은 산책로 따라가면
바람소리 발밑에 쌓여
잃어버린 시간을 줍는다
꽃 잔디와 입맞춤 나누며
자동차 행렬로 나란히 걷던
소녀의 발자국
어둑한 가슴
희망의 샘 두어 개 출렁인다
봉황산에 들면
정월대보름제
-기줄다리기
거친 파도 같은 사내들은
능선처럼 긴 밧줄위로
장갑 낀 두 손 마중을 나간다
너도 나도 영차! 영차!
핏빛 가득한 음성으로
한 가득 뿜어낸다
봄이 가진 힘!
굳어진 관절을 일으켜 보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린다
이겨야 한다는 간절함이
빰의 건반위로 빠르게 출렁인다
칡넝쿨처럼 악착스럽게
골 깊은 손금사이로
시간의 공기가 삐걱인다
풀잎이 그네를 탄다
파초 잎처럼 오래 흔들리면서
잠자고 있던 욕망이 깨어난다
세시 민속놀이인 기줄다리기
함성의 열정은
양면 색종이 같다
호박잎
아침저녁이면
장차게 뻗는 호박잎을 솎아
오늘 점심에
보슬보슬한 보리밥과
호박잎 쌈으로
추억도 같이 먹는다
초여름을 품은 호박잎쌈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 주었던 양푼만한 호박잎
자연이주는
추억의 맛
입맛 잃었을 때 별미가 된다
여름 햇살에 피어난
노란 호박꽃 복스럽고 예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서 먹던
깔끔하게 손질된 호박잎
가끔 시장 좌판에서 추억을 볼 수 있다
어느 노동자의 시낭송회
창문에 하얀색 시를 멘 친구들과
밤하늘의 별을 품은 남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온도로 웃는다
숨 가쁜 삶을 견디어낸 늦은 저녁
발음이 불분명한 소리는
끝없이 새어나오고
어둠을 시처럼 낭송 하는
노동자이고 시인인 그 남자의 목소리는
아슬아슬한 곡예로 멈추지 않는다
점퍼를 즐겨 입는 남자
가랑잎 같은 아내와 30년을
바람 속을 걸어왔다
가을이 익어가듯
헝클어진 내 마음에
누렁둥이 호박은 어깨를 맞대고
가을을 속삭인다
심장처럼 뜨거운 조명아래에 앉아
현수막에 적힌
‘시의길 시인의길’ 이란 문구를 보면서
찻잔 속에 숨어
가을을 듬뿍 타서
오래전 나를 만나기도 한다
꿈이 익는 시간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복인가
꿈은 꾸는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가을 오후
오후의 긴 그림자
기억의 끝에 머물러
가을 이야기를 읽고
누런 벼로 가득찬
논이 주던 편안함
꽃도 꿈을 꾸며
빨갛게 시집으로 꽃물 든다
전철이 바람 속을 뚫고
경적을 울리며 나를
아프게 하고 떠나간다
오늘 내가 너를 껴안았으니
앞으로의 날들을 참고 견딜 수 있을거야
가끔 공기가 새고
바람이 들락대는 가슴에도
부처처럼 떠다니는
아슬아슬한 사랑을 이어가는 오늘
힘들어도 함께 가야할 까닭이 있기에
희망의 문을 열고
너의 시간 안에 산다
사람들의 하루가 저무는 시간
가을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다
내 숨결도 따뜻해진다
카페 게시글
40집(2017)
정순란/ 호박잎 외4편
늘푸른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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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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