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신인우수작품 공모 당선작
손종수 「손금」 외 3편
진남숙 「하루살이」 외 3편
심사위원 오세영 · 편집위원 일동 · 김왕노(글)
당선작 발표
제12회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본 잡지의 발전과 함께 관심 독자층이 많아짐으로써 신인우수작품 응모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손종수, 진남숙 두 분을 당선자로 선정합니다.
시와경계는 신인우수작품 공모를 년 2회 시행해왔습니다. 그러나 응모작품이 심사위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중론일 때에는 당선작 없음으로 발표해 왔습니다. 역시 지난 봄호에 당선작 없음으로 발표한 이후 가을호에 만나게 된 두 분이라서 반가움이 큽니다.
두 분 신인의 소감에도 언급되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시와 함께 생활을 해 오신 분들입니다.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의 삶을 변주한 소박한 주제 속에 생의 끊임없는 반추와 일상에의 정진을 담아내는 형식이 돋보입니다. 먼 길 돌아 늦게 도착한 만큼 등단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써가는 열정적인 시인이 되기를 바라며, 축하드립니다.
■ 당선자
손종수 「손금」, 「파스타 하루」, 「비 내리는 야적장에서」, 「출근길」
1958년 서울 출생.
1987년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중퇴.
1996년 주간바둑361 편집국장 역임.
1999년 일간스포츠 바둑칼럼 연재
현 재 세계사이버기원 상무. 일간스포츠 관전기자.
E-Mail stoneshon@hanmail.net
진남숙 「하루살이」, 「명당」, 「낚시」, 「관상 」
1967년 경남 하동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졸업.
현 재 평사리문학관 사무국장.
E-Mail jihydy@hanmail.net
■ 심사위원
오세영 · 편집위원 일동 · 김왕노
손금 외 3편
손 종 수
양파의 실뿌리가 섬세하다는 말은 틀렸다. 섬세한 건 실핏줄이고 나는 지금 손바닥 아래 흐르는 가녀린 강물에 귀 기울인다. 무수하게 뻗어나간 나뭇가지가 뉘엿뉘엿 샛강을 거느렸다. 강의 근원이 유년을 떠밀며 양파뿌리처럼 새록새록 자라난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나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물결무늬의 불가사의한 강줄기다. 나는 성근 기침소리로 얼음장 밑을 지나던 그 겨울의 강물을 알 뿐이나 눈 닫고 귀 감는다. 보이지 않는 물결은 들어야 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는 보아야 한다고 뿔뿔이 흩어졌던 유년의 뿌리들이 한데 모인다. 거기, 오래 전 보았던 그 겨울의 강물이 좀 더 세찬 기침소리로 얼음장 밑을 지나고 있었다.
지금은 이승,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나만의 강가에 오롯이 서 있다.
파스타 하루
올리브기름에 마늘을 볶았죠. 스파게티? 아니, 비골리Bigoli였나 어쩌면 부카티니Bucatini나 페투치니Fettucine였는지도 몰라요. 햇살 너른 창가에 웅크린 채 실눈 감은 고양이가 생각났어요. 상큼한 뽀모도로 Pomodoro에 프리마베라Primavera? 아니, 아라비아따Arrabbiata의 매운 맛이라면, 그래요. 행복한 졸음도 반짝, 눈을 뜰 거예요. 보세요. 벌써 저만치 달음박질하잖아요. 맞아요. 저 고양이는 라자냐Lasagna를 좋아했던 거예요. 앉아서 당신을 기다리는 행복 따윈 없어요. 프루티 디 미레Frutti di Mare 파스타 어때요? 아주 쉽죠. 포크로 돌돌 말아 허기진 시간의 입을 벌리고 살그머니 넣어주면 돼요. 혀끝부터 감겨오는 관능의 환희는 어떤 과일보다 달콤하게 흐느끼죠. 압축된 식물의 울음은 당신의 실핏줄보다 더 섬세하게 풀려나와 입안을 가득 채우고 끝내는 온몸으로 스며들 거예요. 농밀한 까르보나라Carbonara 통후추를 곱게 갈아 뿌려줘요. 거친 사내들의 웃음이 보이네요. 혈관 깊숙이 자맥질하면 아아. 해가 지고 있어요. 이제 그만 떠오르고 싶지만 당신은 이미 페스카토레Pescatore 그물에 결박됐어요. 포유류의 어금니, 송곳니로는 어림도 없죠. 하지만 우울해하진 마세요. 자유보다 구속에 익숙한 당신이니까 체념의 꽃다발이 그리 싫진 않을 거예요. 이글거리는 피 식으면 해도 저물고 목마른 당신은 또 다시 갈증을 부르는 노래를 기다리겠죠.
비 내리는 야적장에서
빗물도 불이 된다는 걸 몰랐다
아무렇게나 뒤엉켜 쌓인 나무 패널들과
사람의 손길로부터 멀어진지 오래인 듯한 짐들
폐타이어 위 널브러진 푸른 작업복과
확확 타들어가던 숨들
찢겨나간 이름표 위로 타닥타닥 되살아나고 있었다.
잊혀지고 버려진 것들에게도 남아있는 불씨가 있었던 것이다
배고픈 내 생이 통째로 쌓여 있던
흑석동 산 9번지 야적장을 지나다
기억이란 도화선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곳에서는 온전하지 않은 것이 온전한 것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잠시 적재되었다 옮겨갈 것이었으므로
내 생의 한때도 온전치 못한 여러 조각이 되어
위로처럼 야적되었었다
유독 잦았던 빗줄기들 되살아 난다
부질없음과 질긴 미련과 막막하던 참회까지
젖은 채로 타는 다비의 시간이다
잊은 사람에게 버린 사람에게
빗물은 불의 도화선이다
출근길
조심조심 그늘로만 걸어가. 델포이신전을 떠난 아폴론의 마차 보이지 않더라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돼. 난처한 황금화살은 언제나 4옥타브 투명한 그의 목소리보다 먼저 날아오지. 한 대라도 맞으면 새까맣게 타올라 먼지처럼 흩어질 거야. 공포는 뱀파이어의 심장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냐. 저기 그늘 지운 해 웅덩이 질펀하게 흐르다 멈춘 끄트머리 날카로워도 망설이지 마. 넘어서야 하는 건 첨탑이 아니라 현기증이란 걸 알아야 해. 흐린 바람 앞세우고 인두겁 뒤에 숨어 살금살금 횡단보도 건너며 보헤미안 광시곡을 듣는 겨울아침 풍경.
*보헤미안 광시곡(Bohemian Rhapsody)- 영국 록그룹 Queen의 노래.
당선소감
다시 시인을 꿈꾸며
오래 전 시인에 대한 동경과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곤을 숙명처럼 짊어진 이 땅의 모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굴레가 꿈을 꿈으로 남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연은 우연으로부터 오듯 어느 날부턴가,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시의 가냘픈 숨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불시에 그리워져 뒤척이던 설잠 속에 다녀가신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아련하거나, 배곯은 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애잔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잊고 살았던 시집을 다시 꺼내 읽고 예전처럼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행복해졌습니다. 시인이 되지 않아도 좋다 여길 정도였습니다. 시를 읽고 습작하는 시간만큼은 그냥 시인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인연은 또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도록 바싹 다가왔습니다. 주변 여러 지인의 격려와 권고에 따라 또 다른 꿈 하나를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유년의 제 가난한 시절만큼이나 절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물이 만화방창할 때 수백 명의 시퍼런 생명들을 한꺼번에 바다에 수장시키고도 4개월여가 흘러갔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위정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향한 증오심이 불같이 일어나 일상이 편치 못했습니다. 거리로 나가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생전 처음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간절하게 원했던 길이기에 부족함을 알면서도 한 걸음 내딛습니다.
다시 또 시를 처음 쓴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도 장장 30년은 쓰게 될 것입니다.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독려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더더욱 사람다운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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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외3편
진 남 숙
바다가 있었고
빈 낚싯줄에 어린새우를 먹이는 바람이 있었고
어린새우의 순장에 놀란 물결이 있었고
물결 따라 쫄복들의 행진이 있었고
그들 행로를 지우는 노을이 있었고
엉성한 낚싯대를 걷어 올리는 바람이 있었고
바람은 멀리 떠나보낸 물결에 닿아 있었고
물결은 앞선 어둠에 덮여 있었고
어둠은 그림자를 지우며 지긋이 눈감아 주었고
그림자 속에 또 한 그림자 있었고
어린 새우와 물결과 바람과 그림자를 품은 달이 있었고
달을 품은 그림자 하나 있었고
명당
무주고혼을 위한 저녁 예불시간
범종 울음 흐르기를 기다린다
처마 끝의 물고기 한 마리 뎅그에서
소리가 멈췄다 랑 소리를 기다리는 사이
나뭇잎 한 장 빙그르르 떨어진다
바스락 소리가 나자 푸드득 새 한 마리
튕겨 올라 화살같이 사라진다
앞뒤 위아래도 없이 가벼운 몸으로
내장을 말갛게 씻어낸 지 오래인 물고기는
다 비워도 때로 소리가 차지 않을 때도 있다는 듯
꾸덕꾸덕 전생의 비늘을 닦는 중일까 졸다말다 뎅그 뎅그
허공의 벽과 허공의 구릉을 헤엄쳐 갈
꿈에만 부푼 것인지
미세한 바람에 쇠몸통을 움찔거릴 뿐
나지 않는 렁 소리에 수 시간 째 무신경이다
허공의 서쪽 구름언덕 아래
딱 그쯤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가 보다
날개 없이도 지느러미 없이도 순간의 몸통을 날려
뎅그렁 혼자 우는 물고기
한날한시 미진으로 흩어져도 좋겠다
딱 그쯤에서 조용히 아늑하게 둥글둥글 살다가
가는 곳
낚시
단단히 묶어둔 거룻배가 먼데서
오는 파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뒤척입니다
기별은 없고 비릿한 바람만 멈칫거리겠지만
그것도 바다의 소식이었으므로
앙 버티던 등대의 흰 발부리가 기우뚱 흔들렸습니다
감성돔 한 마리 공중에 획 날았다가
쿨러에 뛰어 들었습니다
학꽁치는 입술에 노을을 바르고 함구했습니다
등짝이 꿰인 어린 새우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비린내 갓 풀어진 노량포구에서는
모든 생은 슬펐으되 죽음은 아름다워
바다는 늘 붉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낚싯대를 거두어 돌아가는 한 남자
바다의 슬픔을 짊어지고 갑니다
실은 감성돔이 쿨러에 뛰어 들던 찰나
먼 데, 한 척의 거룻배가 뒤집혔다는
파다한 소문입니다
관상
열사람이 읽으니 열 가지 모습의 내가 있다
거울 속에 나를 반듯하게 가두고
천천히 고쳐 읽는다
밤을 꼬박 새도 당신이 던진
지워지지 않는 언어에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좀체 해독되지 않는
똬리 튼 뱀의 독성 같은 당신의 언어
내 생의 사전에도 없는 이 대책 없는 글자를
미안하지 않도록 조목조목 갈무리 한다
부러진 모서리 하나 잘 달궈진 인두로
와지끈 지져 뭉갠다
굳은살이 투덕투덕 앉으면
거울 밖의 것도 거울속의 것도 나였거늘
당당하게 나의 관상을 읽어 보일 것이다.
깜깜했던 천장에 아이들이 붙여놓은 야광별 뜬다
별을 품은 어느 날쯤엔 관상도 조금 바뀌어 있겠다
당선소감
시인이란 이름의 배 한 척
어느 한 달은 산 것처럼 살았고 또 어떤 한 달은 죽은 듯 살았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엉킨 부조리함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견딘다는 것은 내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하는 자위로는 엉터리 문장 안에서 수사를 찾는 일처럼 망막한 일이었다.
절망이 최고조에 달하고 치유가 절박했던 순간, 내 희망의 메신저는 ‘당선’이란 단어로 왔다. 당선되었음을 전해주신 분의 목소리가 대숲에 떨어지는 빗소리처럼 선들 했다. 세상사에 무기력하고 용기 없음에 오랫동안 웃음을 지우고 있었다가 참으로 모처럼 안면근육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니, 시 한번 써 봐라.”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남숙아, 시가 너를 구원해 줄 거야.”라고 하신 다독임이,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교황의 기도문처럼 길게 와 닿는 날이었다.
이제 ‘시인’이란 이름의 배 한 척 얻어 삶의 문장과 사유의 바다에 띄워진 샘이니 용기백배하여 홀연히 나가야할 더 큰 숙제가 주어졌다.
그런 용기와 기회를 내게 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인사를 드린다. 오늘도 가시방석에 앉아 물 한 모금으로 거대한 벽과 맞선 사람들이 모니터 속에 갇혀 있듯. 죽은 듯 살아낸 봄 한 철 또한 가을까지 맞물려 왔다. 같이 공부한 문우들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께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