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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
(3) 해방시키는 그리스도
(이사야 46장~48장)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도 잡혀 갔느니라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것인 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구원을 시온에 나의 영광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리라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찌어다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찌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술법으로 물리칠 줄을 알지 못할 것이며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서서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너의 근로하던 것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이 각기 소향대로 유리하고 너를 구원할 자 없으리라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고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옛적부터 네게 고하였고 성사하기 전에 그것을 네게 보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 말이 내 신의 행한바요 내 새긴 신상과 부어만든 신상의 명한바라 하였으리라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것을 다 보라 너희가 선전치 아니하겠느뇨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보이노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였으리라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풀무로 시련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예언하였느뇨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오늘은 이사야 46장부터 48장까지로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 세 번째이다.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예표에 대해 말씀드린다. 그리스도는 포로들을 해방시킨다. 고레스가 포로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고레스는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1.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46장)
46장을 보면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다.
A. 우상들은 힘이 없음
우상은 힘이 없고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다. 그리고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고, 사람들이 떠메고 다니던 것이라고 우상을 정의했다. 사람들은 참 어리석다. 자기가 만들어놓고 그것을 다시 섬긴다. 메고 다니면서 그것을 섬기고 어디에 갖다 두면 가만히 있는 것을 섬기고 자기 주머니에 금을 내어 은을 내어 금장색이나 은장색으로 두드려 만들어서 그것을 놓아두고 그것을 경배한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을 자기가 섬기는 것이니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옛날 시대에는 물건을 만들어서 경배하고 섬기고 힘을 달라고 요구하고 간구하였다. 지금도 그런 사람은 있지만 많지 않고 손으로 만든 것 모두가 우상이 된다.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은 모든 것,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경배하거나 손으로 만들어서 그것에 붙잡히거나 손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따라다니는 모든 것이 우상에 해당된다. 그것은 지식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된다.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 놓고 경배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배하게 한다. 계급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숭배하고 돈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숭배하고 명예나 지식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숭배한다.
오늘날의 우상은 형상(모양)이 없는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모양을 만들어서 했지만 지금은 유형적인 모양이 없는 정신적인 우상들이 더 많다고 할 수도 있다. 또 옛날보다 더 다양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단순했기 때문에 우상도 단순했다. 지금은 사회가 복잡하고 커지고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우상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우상이 더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또 극대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단순했다. 먹고 사는 것이나 생산(자식을 낳은 것)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아주 넓고 다양하고 높은 차원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 우상숭배는 더 심하다.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이 그 안에 명예도 있고 열심도 있고 의도 있고 많은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벨>
‘벨’은 ‘주(load)’라는 뜻이고, ‘신’이란 뜻이다. ‘바알’과 같은 뜻이다. 바벨론의 최고의 신이다. 일본에서는 신들이 많은데 아마테라스 오오카미가 최고의 신이라고 한다. 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에서 일본천황의 신탁이 왔다고 신화 속에서 믿고 있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최고의 신이 있다. 가령 희랍신화에서는 주피터가 최고의 신이다. 벨은 바벨론의 최고의 신이다.
본래는 바벨론성의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벨이 이렇게 위대해졌는가? 함무라비왕 때 바벨론이 번성하여 큰 제국이 되니까 최고의 신이 되었다. 나라의 주 신이니까 신도 제국과 함께 커진 것이다. 그 나라의 신은 그 나라가 번성하면 함께 커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나라가 줄어들면 함께 줄어든다. 왕은 매년 바벨론의 번영을 위하여 벨 신상 앞에 경배했다고 한다. 요즘 야스꾸니 신사에 일본 총리의 참배문제 때문에 많이 시끄럽다. 고이즈미의 이론으로는 자기 나라의 영웅들을 참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등방문을 죽일 놈으로 생각하지만 일본인들은 생각할 때 유명한 재상이고 총리이다. 일본 화폐에 나올 정도의 인물이다. 우리에게 적이 되는 것은 한일합방을 이룬 재상이기 때문이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한민족을 대표하여 이등방문을 권총으로 죽였을 때 한민족으로는 너무나 통쾌한 일이었다. 국가마다 자기 이익이 다르니까 일본에서는 이등방문이 굉장히 위대한 사람이지만 우리에게는 적이다.
바벨론도 바벨론이 번성하면 그 나라의 주 신이 위대해지고, 바벨론이 망하면 그 신도 같이 망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마르둑이 나오는데, 이 마르둑이 벨의 이명이라고 한다. 또 성경에서는 므로닥으로도 나오고 있다.(렘50:2, 51:44) 바벨론의 신을 이야기한다.
<느보>
그리고 ‘느보’는 ‘네보’라는 이름과 같은데, ‘부르다, 알리다’의 뜻이라고 한다. 벨(마르둑)의 아들인 ‘나부’를 히브리어로 말할 때 느보하고 한다. 문학과 지혜와 모역과 예언의 신이라고 한다. 신년 축제 때 벨과 느보의 신상을 메고 행진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몇몇 사람들의 이름 속에 느보라는 이름이 들어있다. 우리가 잘 아는 느보갓네살이 있고, 느보사스반, 느보사라단, 느보폴라살, 나보니두스 등으로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고 모두 느보라는 이름을 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렘 39:11-14/대하36장,40:1-6) 그만큼 유명한 신이라는 것이다.
이 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와서 숭배했던 신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에 가서 보니 바벨론이 번성한 것이 이 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애굽을 나와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의 여정동안은 여호와를 섬겼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갔을 때 그들은 바알을 섬겼다.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이 훨씬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고 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알을 섬겼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 신은 힘이 없고, 이 나라의 신이 힘이 있다하여 그 나라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연결된다면 힘이 있는 신을 섬기려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소원을 성취시키는 신을 섬기려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니까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서도 그러한 인간의 욕구와 소망을 목표로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것과 똑같다. 예수, 여호와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섬기고 있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자기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신인가를 더 염두에 두고 있다. 만일 그 하나님이 무능하고 능력이 없다면 언제든지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섬길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면 가나안 신을 섬기고 바벨론에 가면 바벨론 신을 섬기는 것과 똑 같은 형상이 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심지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잘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는 것에 압도되었다. 큰 나라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생각이다. 나도 어렸을 때 이승만 박사가 정동교회를 다녔는데 신앙이 없고 믿음이 없을 때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이 믿는 종교라면 내가 믿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이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가서 바벨론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상이고,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 짐이 된다.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것은 매고 다니고 싣고 다니며 내려놓고 경배하는 것들로서 짐이 된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모든 것은 사실상 사람이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그것을 섬기기 시작하면 짐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 내가 섬기게 되면 짐이 된다. 돈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한 것이다. 세상을 사는데 모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들었는데 만들어서 그것을 필요할 때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경배할 때는 달라진다. 경배하면 그 때는 매고 다니고 지고 다녀야 하므로 짐이 된다. 내 필요가 아니라 필요보다 더 큰 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짐에 눌려 사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게 된다. 물질이 필요했는데 물질에 매여 살게 된다. 돈이 필요했데 돈에 매여서 꼼짝 달싹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간답게 살려고 만들어놓았는데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 때문에 인간답게 살지 못한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일이 많다. 택시 강도를 생각하면 돈이 필요해서 강도짓을 했겠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는 사람답게 못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전부 우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존심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자존심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알고 보면 자존심은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어느 자리에서 자기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그 사람을 묶어서 자존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아무리 좋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대치하면, 하나님을 대치하면 그것이 곧 우상이 된다. 양심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하다. 양심이 없다면 사람이 동물처럼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양심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양심에 매여서 더 이상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것이라도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치하는 모든 것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의리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대치하면 모두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벨은 엎드려졌고 느보는 구부려졌다. 가죽과 짐승에 실리웠고 사람들이 떠메고 다니던 것이라고 야유를 했다.
B.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심
그러나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신다. 옛적 일을 기억하라고 했는데 옛적 일은 주로 출애굽의 일이다.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동방에서 구원자를 부를 것이다. 독수리를 부를 것이다.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다. 내가 말하면 이룰 것이고, 내가 경영하면 행할 것이다. 여호와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여호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이루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었다.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었다. 여호와만이 말씀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상은 말하고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상은 말을 못한다. 돈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루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C. 여호와는 자신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구원함
그리고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을 자기 영광을 위해 구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했다고만 생각하는데,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원하여 내리라“(3-4). 자기가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했다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구원했다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을 한 것은 어떤 경우에는 불쌍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잘못할 수 있으므로 괘씸해서 구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옳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가 부족했을 때에도 쉬지 않고 주무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엄마가 애기를 낳으면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애기를 돌본다. 애기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낳았기 때문이다. 애기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불쌍히 여기지만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로서 애기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자기가 낳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자기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예수님도 만일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분 자신의 영광이 없어진다.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신다고 볼 수 있다. 사람도 자시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했던 말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된다. 요즘 선거철에는 공략이라는 것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약속을 한 것이니까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그래야 정치생명이 연장될 것이다. 기어코 이루려고 노력을 한다. 정치가들의 공략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다. 지키지 않으면 한쪽에서 왜 안지키냐고 한다. 선거철 사정과 선거가 끝난 후의 사정은 달라진다. 대통령 되려고 할 때에 백성들에게 약속하는 것과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달라질 수 있다. 대통령이 되고나니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도 선거공략을 했기 때문에 해야 된다고 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선거철에는 어떻게 약속을 하더라도 거짓말쟁이가 되더라도 자기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해야 되지 자기의 약속을 위해서 일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명예를 위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 사람도 역시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실 때 왜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가? 태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지었기 때문이다.
2. 바벨론은 심판받음 (47장)
A. 처녀라고 자랑하지 말라 (처녀 딸)
47장에는 바벨론이 심판 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처녀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는 말이 나온다. 너희는 안연히 있을 것이라고 더 이상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고는 가난한 사람들이 맷돌질을 한다. 너희는 가난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널 것이라는 것은 요즘 같으면 미니스커트를 입으므로 해당되지 않겠지만 옛날에는 얼굴도 가리고 눈만 내놓고 사는 사람들이므로 여자가 강을 건너려면 치마를 걷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B. 열국의 주모로 자랑치 못할 것
그리고 열국의 주모로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C. 과부가 아니라고 자랑치 말라 (8)
과부가 아니라고 자랑하지 말아라.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리라”는 말이 있다. 계시록에 가면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의 과부는 불행한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고, 자녀를 잃은 것은 슬픔이다. 이런 말로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D. 악을 의지하고 자랑치 말라 (10)
악을 의지하고 자랑하지 말아라. “네가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는도다”. 사람이 자기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이기겠는가, 누가 나보다 큰 자가 있겠는가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악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다. 자기의 힘이나 권력을 의지하고 자기 스스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이기겠는가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독재자들이 그렇게 했다. 자기 힘이 완전하게 굳어지면 권력이라는 것은 불안한 상태에 있으면 자기가 불안하니까 권력을 강화시켜 안정된 상태에 놓으려는 습성이 있다. 겉으로 말하기는 일이 잘 안되니까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불안정하다. 그래서 여소야대가 되면 여당에서는 어찌하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여대야소를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 왜냐하면 권력을 안정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권력의 중심 혹은 출처가 국민에게 있기 때문에 여소야대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후진국에서는 여소야대가 되면 항상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여대야소 형국을 유지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을 해 왔다. 김대중 정부 때만 여소야대 정부를 가졌다. 정당하게만 한다면 여소야대라도 문제가 안된다. 자기 자신에게 확실한 권위만 있다면 나는 두 사람이고 저쪽은 다섯 사람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내 쪽에 힘이 약할 경우는 나는 두 사람이고 저쪽이 다섯 사람이면 안되는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라도 뒤바꾸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결국 악이 행해지게 되고 이렇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악을 의지하고 악을 행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는 사람들은 스스로 나 뿐이다 처음에는 일이 안되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다음에는 안정된 자리에 이르게 되면 나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악을 의지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E. 사술과 모략을 자랑치 말라 (12)
그리고 사술과 모략을 자랑하지 말아라.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사술, 모략이 무용할 것이라”. 여기의 진언은 종교적인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사술과 모략이 당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영험을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한 왕이 와서 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정복할 것이니까 그때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권세는 왜 그렇게 망하게 되는가? 권세를 남용했기 때문이다.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내가 내 백성을 징치하기 위해 내 백성을 맡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한다. 자기들은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이스라엘을 맡겼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자기 백성을 징치하기 위해서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내 백성을 학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내가 공연히 너희에게 포로를 준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도 하나님 뜻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징치를 받아야할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다루어 망한다는 뜻이다. 내가 때리라고 해놓고 너무 때렸다고 벌하는 식이다. 부모의 마음이 이러하다. 자기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서 벌을 주려고 누구에게 요청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알고 벌을 주어야하는데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된 줄 알고 팔이 부러지게 때렸다든지 하면 그 부모는 징치하기 위함이었는데 지나치게 하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보복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 백성을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그들을 낳으신 이가 있고 그들을 안으시고 품으신 이가 있는데 그것을 자기들의 권세로 함부로 다루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해석한 일이지만 세상에서도 사실 그렇다. 세상에서도 자기가 권세나 힘이 있다하여 상대방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학대하거나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에 좋지 않다. 종말을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다음에 어찌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제일 비슷한 예가 군대이다. 한달 먼저 오고 하루 먼저 온 고참이라고 자기 밑에 있는 사람에게 심하게 한다. 군대는 법률로 하니까 밑에 사람은 할 수 없이 맞는 것이다. 한달 먼저 왔다고 하루 먼저 왔다고 큰 권세도 아닌데 그 권세를 가지고 너무 지나치게 아주 악질적으로 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마지막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제대하고 사회에 나오면 세상에 나와서도 군대가 아니다. 어떻게 하여 세상 직장에 갔더니 군대에서 자기 아래에 있던 사람이 과장으로 앉아있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는 권세 그것만 가지고 자기가 잘난체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핍박을 하면 자기에게 무엇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다음에 어찌될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바벨론은 바로 자기에게 있는 권세를 자기 것으로 알았다. 그것은 위임된 것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는 다 위임된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더 강한 자가 오면 뺏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인 줄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던지 자기 것이 아닌 줄을 알아야 된다. 내게 어떤 권세가 주어져도 자기 것이 아니다. 요즘은 달라졌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검찰청에 들어가면 사람을 짐승 취급했던 경우가 있었다. 검사라고 해보았자 나이 30세 정도 된 사람인데 40세도 넘은 사람을 꿇어앉혀 놓고 욕하고 별짓 다했던 시대가 있었다. 자기가 평생 검사하면 모르지만 평생 검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음에 내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한다. 지금 있는 권세만 사용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바벨론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자기의 권세가 영원한 줄로 아는 사람은 망해야 되고, 이런 사람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바벨론은 망할 것이라고 47장은 이야기한다.
3. 이스라엘은 불의하였으나 여호와는 의로우심 (48장)
48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불의했지만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내용이다.
A. 야곱 집의 불의
‘불의한 야곱 집이여’라는 말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무엇이 불의한가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이름으로 부름 받는다는 것이다.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한다. 남이 자기들을 이스라엘로 부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다.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유다의 근원은 왕권을 말한다. 하나님이 위임한 왕권에서 나왔다.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에만 소용되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을 보고 불의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꼭 권력을 빙자하여 불의를 행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자기 아버지가 경찰 서장이라고 나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실하지 않는 것은 더 불의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불의한 것과 지위가 높은 사람이 불의한 것은 차원이 다르다. 똑같은 일이라도 지위가 낮은 사람이 한 것은 별 것이 아니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한 것은 더 불의한 것이다.
야곱 집의 불의를 지적할 때 일반적인 관점에서 지적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면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며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함이 없었다. 의로움이 없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면서 만일 성실하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이야 성실하지 않아도 흠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물론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도 대우받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백성이라 해놓고 그 이름을 빙자해서 세상 사람보다 더 못해버리면 이것은 더 불의한 일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이 나온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나은 위치에 있으면서 나은 축복 가운데에 있으면서 그들보다 못하다면 당연히 그들이 가는 곳도 못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것만이 아니고, 그것은 큰 의무를 동반하는 것이다. 권리가 있다면 의무가 동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이 있다면 저주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 안에서도 크지만 저주 안에서도 큰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보면 그들만큼 영광스러운 백성도 없지만 그들만큼 고난을 많이 받은 백성도 없다. 영광도 크면 고난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이 하찮은 이름이 아니고, 이 놀라운 이름을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되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만국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있다는 사람이 또 다른 것을 섬기고 있다, 그리스도가 전부라고 하는 사람이 또 다른 것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불의한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나님밖에 없다고 해놓고 또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의한 일이다.
야곱 집의 불의를 지적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분은 얼마나 자기 백성에게 온전함을 원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B. 여호와의 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1) 새 일을 보임
첫째는 새 일을 보이일 것이다. 이것은 창조된 것이고, 옛적에 없던 것이다.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인용해서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새로 창조된 것이다. 교회는 알고 보면 새로 창조된 것이다. 전에 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종교적인 관념으로 옛 종교적인 관념으로 교회를 보고 생각하면 안된다. 교회가 옛 종교적인 관념으로 휘말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옛 종교적인 관념 안에서 보면 정상적이지만, 새 창조라는 입장에서 보면 비정상적이 되었다.
내가 새 일을 보일 것이라는 것은 창조된 것이고 옛 적에 없던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다는 이 사실은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왔던 백성들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을 생각해보면 창조된 것이지 전에 있는 일이 아니다. 전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역력하게 기억해야 되는 문제였다. 우리는 옛 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 일을 받았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보여주셨구나를 알아야 된다.
오늘 교회는 새 일이다. 새 창조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 것은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고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선했다는 말이 아니다. 술 먹던 사람이 술을 먹지 않게 되었다는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새로 창조된 것이다. 물론 술 먹던 사람은 술을 안먹어야 하고 담배 피우던 사람은 피우지 않으면 좋고 개선하는 것이 좋다. 우리 교회에서 잘못하면 개선은 필요없다 하여 술도 계속 먹고 담배도 계속 피고 싸움도 계속하면 안된다. 그것은 수준 이하의 문제이다. 우리는 새 창조 안에 있으면서 옛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그것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옛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혹시 세상사는 것에는 필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옛 것에 속한 것이니까 우리가 버려야 된다. 어떤 사람은 교회 열심히 다니고 종교생활 할 때는 술도 안먹고 담배도 안피웠는데 대구교회에 와서 율법생활 할 필요가 없다하여 다시 담배 피우고 다시 술 먹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코로 들은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고, 내가 말을 잘못 했는 것인지 듣기를 잘못 들은 것이지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옛 것이 지긋지긋해서 버려 보려고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도 버릇이 되면 자기 습관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옛 것만 못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우리 교회에 있다. 물론 어떤 전환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새 일을 보일 것이다. 새 일은 우리가 개선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항상 겪어보면 새 창조에 속한 일이다. 그 전에는 옛 창조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답답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자기 생각 속에서 계속 생각을 한다. 새 창조가 보이지 않으니까 옛 창조 안에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차원을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말을 해도 자기 옛 창조의 생각 안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해결이 안된다.
하나님의 해답은 옛 창조 안에서 우리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새 창조 안에 있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 즉 이러니까 이렇고 1+2는 3이 되는 방식은 옛 창조 안에서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 방식은 아무리 해도 옛 창조밖에는 안된다. 다른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면 새를 행한다. 결코 옛 창조의 내가 1+2를 하면 3이었는데 하나님이 3+5를 하면 8이 되고, 나는 1+2를 하면 3이 되는데 그분은 3+5를 하면 8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새 창조를 만나게 되면 그 전에 내가 고민했던 것이나 그 전에 도저히 풀리지 않던 문제나 도저히 계산으로 안되는 문제인데 어디로인지 날아가 버린다. 상관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날아가 버린다. 미국에 가서 영어를 못하면 답답한데 그 차원에서 생각하면 계속 영어를 공부하거나 사전을 외우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 영어를 배우는 방법밖에는 길이 없다. 배우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꿈을 깨니 영어를 한다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와버리면 사전도 왜 사야 되는지 모르겠고 공부도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고 왜 내가 답답해했는지도 모르겠고 다 모르는 것이다. 세상이 다르니까 전혀 다른 것이다.
아담 안의 삶과 그리스도 안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삶은 새 일이지 결코 옛 일이 아니다. 거기서 단어를 하나 더 아느냐 덜 아느냐, 표현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차원이 아니고 거기서 공부를 해보았자 조금 더하고 덜 한 것밖에 더되겠는가. 차원이 같은 차원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잘할 수는 없다. 어떤 천재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거기서 태어난 사람과 외국인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우리는 미국 사람 영어를 따라 갈 수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선교사에게 영어를 통역했는데 선교사가 하는 말이 한국사람 중에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못 봤다고 말했다. 그 뒤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또 다시 신학교를 가고 대학원을 가고 그리고 미국 선교부에서 30년 동안 일을 했으니 얼마나 영어를 잘하겠는가. 자기도 할 만큼 영어를 하지만 그런데도 중학교 때 온 사람과는 어느 정도 상대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온 사람하고는 상대가 안된다고 한다. 남의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거기서 노력하는 한다는 것은 그런 차원밖에는 안된다. 혹시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까지 오른다할지라도 그것은 그 차원 밖에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새 일이지 결코 옛 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도저히 해결되지 않거든 거기서 해결하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을 알면 거기서 그것을 버려야 된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곳에 있구나하고 버려야지 그것을 기어코 붙잡고 거기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 잘못하다보면 미친다. 사람이 안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보면 과부하가 걸려서 결국은 회로가 고장이 나고 결국은 회로가 끊어지고 만다. 그러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된다. 자기 생각으로 해결이 안되면 포기해야 된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고, 하나님은 새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다려야 된다. 언제 하실지는 모르지만 새 일을 하시는 분이 있다. 나와 다른 곳에서 나와 다른 차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그 믿음이 없으면 항상 옛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서 뱅뱅 돌고 돈다. 말씀을 들어도 계속 그 자리로 돌아가고 계속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이 주어지고 징계라는 것이 주어진다. 도저히 안되니까 비상적인 방법과 수단을 쓰는 것이 징계이다. 옛날 훈련소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철조망이 왜 생겼는가 하면 전라도 사람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훈련소가 너무나 배고프고 어려운 때이니까 도망을 잘 쳤다고 한다. 방망이는 왜 생겼는가? 그것은 경상도 사람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말을 듣지 않아서이다. 공립학교는 왜 생겼는가? 충청도 사람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무학자가 많아서라고 한다. 도저히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도저히 안되니까 쓰는 수단이다. 징계가 올 때까지 미련하게 있으면 안된다. 철조망을 안만들도록 해야 되고 방망이 치지 않도록 해야 되고 공립학교 폐지되도록 만들어야 된다.
2) 노하기를 더디 하고 참고 너를 구원함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고 참고 너를 구원할 것이다.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에서 너희를 택했다고 한다. 연단은 했지만 은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은은 완전히 녹이는 모양으로 은처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난의 풀무에서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것은 내가 너희를 완전히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징계하려고 그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죽하면 망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신 하나님이 참다 참다 안돼서 결국은 이방인들에게 버렸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돼서는 안될 것이다.
3)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심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시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구원 하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이 붙어있는데 만일 잘못한다고 해서 계속 놔두어 계속 저주를 받게 하면 온 이방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결국은 여호와 자신을 욕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징치하기 위해서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계속 내버려두어 자식이 더 나빠지게 되면 자식이 잘못해서이지만 결국 부모를 욕하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그 부모를 욕하게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4) 처음이요 마지막이심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말이 계시록에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부터 나온 말이다. 내가 말하였고, 내가 부르며, 내가 인도하므로 그의 길이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고레스를 부르면서 한 말인데 그분은 미리 예언하시고 부르시고 그리고 인도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그분에게 대한 신뢰를 갖게 된 것은 그분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5) 비밀히 말하지 않으심
비밀히 말하지 않으셨다. “내가 그것을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16). 사실 하나님 말씀은 비밀히 말한 말이 하나도 없다. 다 공개되어서 하는 말이다. 10번, 100번 다 귀가 닳도록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못 들은 것 같다. 계속 말했지만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꼭 감추어놓고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처럼 인식이 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비밀히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모세 한 사람만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그를 대면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비밀히 해서가 아니다. 그 시대의 그 백성 가운데 모세 한 사람밖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지 결코 그분이 비밀히 말해서가 아니다.
오늘날도 우리 교회를 처음 밖에서 본 사람들은 그 교회 안에 비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만큼 공개된 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비밀하게 본다. 왜? 자기들이 이해 못할 일이 많기 때문에 무슨 비밀이 있지 않는가 한다. 자기들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어느 잡지사에서 취재하러 오면서 가방에 가스총을 넣어가지고 왔다. 가방에서 가스총을 꺼내면서 기자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테러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그런 곳으로 생각하여 가스총을 가지고 왔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런 곳이 전혀 아닌 것으로 알게 되니 우리 형제들과 사진도 찍고 갔다. 그 사람은 친히 보았는데 그 뒤 또 어떤 사람들은 말을 번복하기도 하였다. 와서 보면 알텐데 와서 보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생각하여 말을 만들어 우리가 비밀을 가진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절대로 비밀이 없다.
6)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심 (17)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신다.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실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인도하면서 그 백성을 목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 갈 때 하나님이 자기를 해할 것이라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돌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부르신 이가 있다면 어찌 그것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불렀으면 당연히 돌보신다. 내가 잘못해서 못 본 것에 불과하지 부르신 이가 불러놓고 엉뚱한 일을 할 수는 없다. 불러놓고 버릴 수는 없다.
늘 이야기하지만 내가 신학교에 갔을 때 나는 부름을 받고 갔으니까 절대로 일없는 사람을 불렀겠는가. 불렀으면 무슨 책임을 지실 일이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3년씩 기도해서 왔는데 당장 걱정이 되어 이 신학교를 졸업하면 어디로 가느냐 취직할 자리가 있느냐 전망이 있느냐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한 일이 헛일이다. 즉 부르심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가 있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있었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어서이다. 하나님의 부르심만 분명하다면 절대로 부르신 이가 책임을 지신다. 사람이 불렀어도 무작정 불렀을 리가 없고 사람이 고용이 했어도 악덕 기업가가 아닌 이상 책임을 지지 않고 고용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러놓고 어찌 책임을 지지 않겠는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여 스스로 떨어져나갔는데 그래도 지금 어디 가서 다 목사 한다고 하고는 있을 것이다.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의지를 믿고 그것을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왔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부르셨으면 분명하게 그분이 책임을 지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막을 통과하게 할 때 목마르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반석을 쪼개어 물이 나게 하셨다.
4. 구원자를 부르시고 보내심
구원자를 부르시고 보내시는 분이시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며 내가 말하였으니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으니 정녕 행할 것이다. 고레스를 가리켜 말한다. 이 사람은 해방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하는 사람이다. 고레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켰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사탄의 포로됨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분이시다.
바벨론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정치적인 바벨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바벨론이다.
<정치적 바벨론>
고레스가 해방시킨 것은 정치적인 억압이었으니까 정치적인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제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대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였고, 제왕은 그리스도를 대치하여 인권을 유린하였다. 바벨론, 이것은 로마로 이어지는 세계이다. 바벨론 - 메데파사 - 희랍 - 로마로 이어지는 세계이다. 사자 - 곰 - 표범 - 이빨이 날카로운 짐승, 네 짐승을 말하면서 4대 제국을 암시하는 말이다. 바벨론은 결국 로마가 되는 것이다. 메데파사와 희랍을 지나서 로마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은 무엇이 될지 모른다. 오늘날의 로마, 오늘날의 바벨론은 무엇일까?
BC 40년경에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그리고 예수를 처형했던 나라이다. 그러나 부활로 승리해서 교회가 산출되었다. 그리고 AD 4세기경까지 교회는 그런대로 정통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틴에 오면서 교회는 정치와 야합하게 되었다. 이 황제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게 되고 여기서 니케아 신조라는 것이 산출되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 교리와 신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그 신조는 유효하다. 개신교에서도 캐톨릭에서도 아주 확고부동한 신조로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니케아 신조를 산출했다고 해서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 바로 정치와 종교의 야합하는 시작이었다. 이것이 결국 로마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AD 590년까지 교황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정치와 종교가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하였다.
<종교적 바벨론>
여기서 종교적인 바벨론이 생기게 된다. 종교적인 바벨론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을 더 중요시하는 세계로 넘어오게 된다. 종교도 그 나라를 위해서 있는 종교가 되고, 물론 그 나라도 종교를 위한 나라가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서로 엉켜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계시록에 오면 바벨론, 큰 음녀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오늘 현실 앞에서 볼 때 두 가지 면으로 포로가 되어있다. 정치적인 면이라는 말은 물질적이고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필요에 매여 있는 바벨론이 생기게 된 셈이다. 보통 세상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흐름과 세상의 목적에 사람들이 전부 매여서 하나님의 왕국을 대치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교회는 부수적으로 다닌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그런 사람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이 현실 생활을 사는 것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라파 같은 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나라도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꼭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아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니까 종교 탄압이라는 것은 없다. 북한이나 중국은 종교 탄압 같은 것이 있지만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박해를 받는 일은 없는데 세상의 풍조의 포로가 되어있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의 포로가 되어있다든지 컴퓨터의 포로가 되어있다든지 한다. 그와 같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또 자기들이 매인바 되어있다. 이런 것이 다 바벨론에 해당된다.
그리고 종교적인 바벨론은 무엇인가? 교리에 매인 사람, 의식에 매인 사람, 전통에 매인 사람이다. 종교적인 바벨론에 매인 사람이 더 많다. 종교적인 것에 매인 사람은 정말로 풀기 어려운 답답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매인 사람은 머리에 수건을 안쓸 수가 도저히 없다. 매 주일 밀가루 떡을 받아먹던 사람은 도저히 그것을 안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매주 쇠고기를 한 점씩 주었다 하더라도 우리 같으면 안먹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밀가루 떡이지만 이것 하나를 받아먹느냐 아니냐가 내가 성체를 받아먹느냐 안먹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을 먹느냐 안먹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먹는 것은 엄청나게 큰 죄에 속한다.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대죄에 속한다. 개신교도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일에 성찬을 해야만 예배가 되는 곳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 보는 기이한 현상으로 어떤 사람들이 와서 보고 왜 여기는 십자가가 없느냐 왜 여기는 찬송가가 없느냐 왜 여기는 성경책을 갖고 오지 않느냐 왜 여기는 기도를 안하느냐는 이야기들로 문제가 된다. 왜 그런가? 자기가 그런 것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너무너무 어렵다. 종교적인 교리에 매인 사람들은 도저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리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것을 순교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종교적인 속박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세상 속박도 있지만 종교적인 속박은 더 심각하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의식이나 교리 같은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도 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좋지 않으냐고 하고 다 하면 걸리지 않을 것 아니겠느냐. 거기다가 말씀까지 좋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교재도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사람이 많이 있다. 왜 우리는 의식이나 교리 같은 것들을 환영하지 않는가? 그것이 오면 사람은 그것에 더 빨리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만든 것이다. 똑같은 뱃지를 같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굉장한 일체감을 갖는 것이다. 말 한마디를 똑같이 하는 것도 굉장한 일체감을 갖는다. 예를 들어 만날 때마다 ‘오 주 예수여’라고 한다면 일체감을 갖는다. 그것을 안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이 된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 큰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쉽기 때문에 빨리 익숙해져버린다. 사람은 욕을 더 빨리 배운다. 한국에 와있는 미군들도 한국 사람들이 욕하는 것은 다 알아 듣는다. 아이들은 욕은 빨리 외운다.
참으로 깊이 들어가야 될 것은 안들어가고, 표면에 있는 것이 먼저 들어와 버린다. 모슬렘 사람들이 세계 어디에 있든지 하루에 다섯 번인가 몇 번인가를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는데 이것은 자기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것을 떠날 수가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큰 영향력을 준다. 생각해 보면 나무 십자가를 달고 안달고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십자가를 달아놓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식이나 교리 같은 것들이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크다. 그것 좀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왜 김일성 뱃지를 다 달고 다니는가? 이유가 다 있다. 뱃지를 달고 안달고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처음 오신 분들은 혼란이 된다.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으니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든다. 뭘 해야 될지 모르니까 자꾸 뭘 해야 될까만 찾는다. 뭘 해야 될 것을 찾을 것이 아니다. 생명 안에 부딪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인데, 두리번거리다가 십자가를 찾다가 성경책을 찾고 있으니까 생각이 전혀 다른 곳에 있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난 뒤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한마디도 못 들은 것 같다. 그것을 보면 심각하구나, 종교적 바벨론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심각하구나를 알 수 있다. 여호와 증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교리로 똘똘 뭉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무슨 방법으로도 안된다. 계속 자기 할 만만 한다. 교육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말고 듣는 척하고 내 말만 계속하라고 한다. 그것이 교육방법이다. 상대방과 토론하러 간다고는 하지만 토론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하러 간다.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다. 그리고 신출내기와 오래된 사람이 같이 오는데 처음 온 사람은 말을 듣다보면 솔깃하여 귀가 열릴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혼자 보내지 않고 둘씩 보낸다. 그 사람이 넘어가려고 하면 금방 데리고 가버린다. 아주 철저하다.
우리가 종교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장로들의 유전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유태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타파했기 때문에 어쩌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할 수도 있다. 십자가에 달린 일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옛 것을 타파하는 의미도 있다.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밝히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하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월삭을 지켜야 된다는 이야기들이다. 유태인들이 유전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똑같이 해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예수 믿는 것은 좋지만 우리 조상들이 믿던 좋은 것을 왜 안하느냐는 사람들 때문에 나온 말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죽으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킨다고 잘못될 것도 없고 월삭을 지킨다고 잘못될 일이 없다. 조상들이 전통적으로 해 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것들을 모두 용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들이 진리를 대치하기 때문에 실제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제사 지내는 분들도 간혹 있는 것으로 아는데 강력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니까 지내는 모양인데 물론 조상에 대한 예의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 뭔가 빠져나가지 않은 것이 있다. 내가 차남이 되어 참여할 때는 덕으로 참여를 하지만 내가 장남이 되어 내가 주도가 되어 하는 경우에는 뭔가 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뭔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실제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뭔가 실제가 있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왔으면 뭔가 달라져야 될 것이다. 어떻게 달라져야 될 것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달라져야 될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에 와서 자기들이 전혀 모르는 일이고 자기들이 하지 않던 일이니까 그것을 보고 문화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고 종교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강력하게 우상숭배로 제제를 했다. 그래서 약 100년 동안 핍박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목이 잘리고 죽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것은 전혀 이해하지 않고 우월한 국민으로서 미개한 국민에게 왔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요를 하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는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해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실제가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문화적인 대결이었고, 종교적인 대결이었고, 습관적인 대결이었고, 유전적인 대결이었을 뿐이지 그리스도가 그것으로 대치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나 안지내는 사람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매 한가지였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해야 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 사람마다 다르므로 뭘 정해놓고 있을 수가 없다.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대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무엇은 우상이고 무엇은 우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이 자기를 주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을 내가 숭배하게 된다면 그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고레스로 예표된 그리스도는 근원적으로는 사탄의 포로됨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다. 사탄의 포로됨 안에는 종교의 포로도 들어있고, 유전적 포로도 들어있고, 사람의 유전에 따라 다른 것들도 다 들어있다. 사탄이 사람을 포로로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잡는 방법도 있고, 세상적으로 잡는 방법도 있다. 사탄의 전략은 무궁무진하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포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죽으면 다 해방된다. 옛 남편으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는 죽으면 된다. 사탄의 포로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죽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미 사탄의 포로됨이 없어져 버린다. 거기에는 장로의 유전이나 세상의 유전이 남아있을 수가 도저히 없다.
오직 새 것! 내가 새 일을 행할 것이라는 새 일만 있을 뿐이다. 새 일 안에는 옛 세상도 없고, 옛 종교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중심이 되는 세계가 오게 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우상이 어디라도 있고 언제고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이런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모래 속에서 금을 찾듯이 우리가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당신에게 목표를 두고 당신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갈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많은 소리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많은 모양 가운데 주의 모양을 보게 하시고 많은 영광 가운데 주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오직 한 길만 그 하나만 분명하게 보이도록 주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시도록 원하고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가 장님이 되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