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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4 용지로 5쪽 부분부터 철학아카데미 발표문 초고가 있읍니다.
** 들어가기 전 넋두리* (56VKJ)
몇 가지 나의 고민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나로서는 학위논문을 먼저 우리말로 쓴다는 기준을 두고 벩송 철학을 보았고, 벩송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철학적 사유를 했다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았다. 학위 논문을 거의 완성되었던 2003년에는 이미 우리 철학계에 들뢰즈가 푸꼬 만큼이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내가 읽었던 들뢰즈의 벩송에 관한 다섯 가지 문헌들을 보건데, 당시의 생각으로는 들뢰즈가 의식, 기억, 생명을 다루었지만 이상하게도 도덕과 종교를 벩송 속에서 잘 길어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학위 논문에 들뢰즈를 연관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 대한 나의 독서량이 적어서 오는 오해였다. 그 중에서도 벩송과 들뢰즈 사이에 스피노자에 대한 관점이 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4권이 2017년에 나왔는데(1900, 1901, 1902, 1903), 코로나 시절에 읽은 이 강의록은 벩송 자신이 발표했던 두 작품(DI, MM) 그리고 다음 나올 작품(EC)에 대한 주석서 겸 해설서와 같다고 느꼈다. 벩송의 강의록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비교들이 있는데, 이 내용을 들뢰즈가 강의록을 읽지 않았음에도, 들뢰즈의 사유와 벩송의 사유가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연구서와 소개서를 썼는데, 그의 의도는 그의 논문들에 있다. 흥미로운 표현으로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세 가지 방식의 글, 즉 세 편으로 된 글이라 한다. 벩송이 플로티노스를 해설하는 강의록에서도 플로티노스를 세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음을 알았다. 들뢰즈가 초기 스토아를 인용하는 것, 그것은 벩송의 플로티노스 독해와 상응하였다. 벩송과 들뢰즈는 서양 철학사를 읽는 방식이 앵글로 색슨과 전혀 다르다. 전자는 그리스 코스모스로부터, 후자는 로마의 유니베르스(uni-vers 하나로 통하다)이다. 이런 점에 확신을 더하게 된 것은 박홍규전집의 플라톤 강의록들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플라톤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와 다르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벩송에 관한 연구서 없이 개론서 2권과 논문 한편, 사전에 소개 글 하나로서 벩송의 계승자라고 보는 견해를 말했을 때, 너의 과장이지 또는 너의 바램(소망)이지 하는 소리들 들었었다.
알려진 바로는 들뢰즈의 다양체 개념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나왔다고들 하는데, 이런 설명에도 문제가 있지만,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전반의 흐름과는 사맛디 아니한다. 들뢰즈가 중요시 여기는 벩송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철학계의 형이상학의 관점과 심리학의 관점을 뒤바꾸어 놓은, 나아가 서양 철학사를 뒤바꾸어 놓은 것인데, 시론 DI과 물질과 기억 MM이다. 왜? 그러다가 박홍규의 벩송에 관한 유일한 논문을 또 다시 읽었다. 박홍규의 가로축과 세로축이라는 용어와 가로지르기와 세로지르기에 연관을 시키면서, MM 3장을 다시 꼼꼼히 읽고 번역하면서, 들뢰즈와 벩송의 세로지르기가 매우 닮았다는 것을 보았다. 왜 우리나라에서 박홍규 없는 세대들의 읽는 방식이 뭔가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MM 3장의 그림들은 매우 중요하다. 추억들과 기억은 다르다(차히). 강의록에서 추억들은 원자들처럼 다루었다고 하고 기억은 덩어리로서 전체로 다루어졌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될 수 없다. 전체의 흐름이 들뢰즈 표현으로 다양체이리라. 뿐만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번역되고 있는 엥꽁시아(inconscient)은 무의식이 아니라, 내재의식(in-conscience)로 읽어야 하며 기억 전체이다. 이런 벩송의 사유가 프로이트의 원자론적 추억 사고와는 전혀 다른 길을 다시 확인하였다. 왜 들뢰즈와 과타리가 프로이트-라깡를 신랄함을 넘어서 거의 실신하게 만들려고 앙띠 외디푸스(AO)를 썼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들뢰즈는 당시(1973) 자신들의 철없는 비판자들에게, ‘당신들이 철학사를 잘 못 읽었다’고 쫑코(핀잔)를 주면서 당당하게 ‘공부 좀 해라’하는데, 박홍규는 거의 평생동안 “우리나라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서 박정희와 전두환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지금으로는 ‘이명박근혜와 윤석열을 만든 것도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가 박선생님 말대로 여전히 통용될 것이다. 그 철학사가 자연에 관해서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를, 인간에 관해서 소크라테스를 숙고하고 나서야, 플라톤 속에서 제도(폴리스) 와 우주(코스모스)에서 유비된 설명만큼이나, 들뢰즈의 폴리스(정주)와 노마드(유목), 가부장제(외디푸스, 국가와 제국)와 연대 동맹(상부상조, 아나키)의 분류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읽은 바로는, 들뢰즈가 스스로 벩송주의자라고 밝히는 1973년 대담에서이며, 그의 강조점은 MM에 있다. 그런데 그가 공산주의자인 과타리를 만나 아나키즘으로 경도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무지에서 나온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DR 1969)에 의하면, 플라톤에서 이오니아학파의 여진이 남아있는 것이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이며, 그 필연성과 아페이론을 실재성이라하면서 벩송을 따라서 철학사 전체를 다시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재구성하며 플라톤을 해명하는 관점에서 벩송은 플로티노스를 직접 읽었지만, 들뢰즈는 철학사에서 연구자들(브레이어 골드슈미트)통해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여러 작품들 속에 있다. 그런데 나로서는 의미와 논리(LS)를 서너 차례 읽으면서 들뢰즈가 형상론에 반대하여 질료론(아페이론)의 입장, 즉 플라톤주의 대립으로 스토아주의, 이런 대립을 전복해야 한다는 점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푸꼬의 LS에 대한 논평에서, 그 책에서 나오는 언어논리를 넘어서 다른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나로서는 의미의 논리가 앵글로색슨의 언어와 논리를 비판한다는 것을 알아보겠지만, 그러고 나서 무의미(내재성, 아페이론, 공집함)가 생성을 창조한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면서, 무의미(공집합, ø)도 의미있다고 여겼다.
들뢰즈는 그 많은 언어논리의 이야기(그는 철학이라기보다 소설이라 여기며, 벩송 식으로 보면 우화인데)를 비판하면서, 의미도 무의미 모두 파라독사라 한다. 게다가 신앙자들의 망상과 같은 이데아를 모방한 파라독스보다 무의미(아페이론)에서 생산하는 파라독스가 더 흥미있지 않는가라는 정도로 읽었다. 불교에서 공(空, ø)이라 생각했는데 색(色)이듯이, 플라톤을 넘어서 벩송에서 아페이론(휠레)에서 생산(창조)하는 이야기(파라독사) 또는 사건(생성) 흥미롭지 않는가! 앵글로 색슨의 언어논리의 파라독사도 보다 훨씬 더 색체도 다양하고 살아있고 또한 활동적이고, 내가 보탠다면 저항적이고 혁명적이지.
푸꼬는 들뢰즈의 LS를 잘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파라독사들이 상층에서도 심층에서도 생산하는데, 그래도 상층을 비판하는 심층 파라독사의 기능으로 풍자, 아이러니, 유머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벩송의 사람을 웃게 하는 “웃음”을 상기하면서 그래도 유머가 폴리스 사회의 문제를 해소하는 답이겠지라고 읽었다. 푸꼬의 지적이 없었다면 유머로서 세상을 바꾸는 길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푸꼬가 LG 전편에 흐르는 이 세 가지가 들뢰즈의 답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푸꼬는 실천을 염두에 두었을 것인데, 가타리를 만난 두 철학자의 작품에서는 흐름의 생성(저항)일 것이고 창조(혁명)일 것이다. 이렇게 “LS”와 “AO”의 연결이 보이면서, 그래 자연도 휠레도 삶도 흐름이면, 전체는 끊임없는 생성이고 창조이지.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까? 들뢰즈는 개념작업(conception)으로 개념(concept)을 생산하여 “다양체”라 불렀을 것이다. 다양체(le multiplicité)는 물론 벩송에서 온 것임을 들뢰즈가 인정하면서, 들뢰즈가 공감과 더울어 사건에서 공명을 제시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벩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MR)에서 공감의 세계(공동체, 동태적 종교)을 지향하고, 들뢰즈는 자본이든 개인이든 현실의 탈영토화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공명의 세계(동지애, 상부상조사회)로 나가는 길을 제시하는데, 두 철학자는 내재의식의 기원, 사유의 지층을 탐색으로 기원, 원천을 파고들어 심층으로부터 생성과 창발을 보자고 한다.
벩송의 물질과 기억(MM)에서 흐름 또는 기억이 물질과 다른 방식으로 유심론으로 읽는 것은 철학사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이다. 질료, 프뉴마, 프쉬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흐름, 생명, 다양체, 창조, 자유 등은 각 시대 각 철학자의 개념작업(conception)에 속한다. 각각의 개념작업에서 가각의 흐름의 가지를 잡고 있어서, 그 가지만을 따라가다가 다발을 보는 것을 잊게 되면, 질료론과 유물론이 영혼론과 다양체론이, 글자 또는 개념이 달리보이듯이 완전히 다른 개념작업이라고 싸우듯이 논쟁한다. 각자가 자기에 맞는(믿는) 하나의 가지를 잡고서 다른 가지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런 태도는 철학의 태도가 아니라 신앙의 태도인데, 어쩌다가 그리스에서 로마로 오면서 철학의 태도가 신앙의 태도에 밀려났던가. 그리고 중세에는 악마신아에 매여 철학적 태도가 순교자가 되어야 했던가. 그런데 현재에도 무시하는 정도이면 봐줄 수도 있는데 아직도 악마 또는 우리 땅에서는 빨갱이 취급하려 한다(얼마나 많은 이들을 보도연맹, 간첩사건, 민청사건의 행불자, 인혁당, 남민전 등에서 악남신앙으로 순교자를 만들었던가?).
그 한 가지만 잡고 사고하는 철학들의 약점은 악순환(cercle vicieux)에 빠져있다. 벩송이 이를 선전제의 착각이라 불렀다. 그들은 있지(현존하지)도 않는 것을 ‘이다’라고 하면서, ‘이다’가 ‘있다’로 바뀐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윤구병은 이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썼다). 착각과 악순환이 사고에서 지배하는 경우에, 그 배경에 재산(자본)의 집착에 있다(탐만치의 탐)고 하면서, 이런 사고와 믿음을 만든 이는 바울의 후계자들이며, 아포칼립스를 믿는 자들이다(순복음 다음으로 요즘 신천지가 그 길을 간다고들 한다.).
두 저자는 앙띠외디푸스(AO)가 왜 자본주의 또는 제국에 대한 비판이라 했겠는가. 상층 옹호자들은 재산의 소유를 무소유로 바꿀 수 없는 자들이다. 프로이트-라깡류들이 한 가지를 잡고서(추억들, 상징들), 교황이 아직도 무오류라고 하는 것을 믿듯이, 자신들이 무오류라 믿고서, 그들이 옹호한 집단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을 어떻게 형성 했는지에는 눈감고, 그렇게 형성된 제국을 돌아다니며 명성을 얻어(탐만치의 만) 권위를 누린다고 여긴다. 그 권위가 있기는 한가?라고 하면서 들뢰즈가 무관의 제왕 아나키를 대조시킨다. 제국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겠지만, 제국의 떡고물을 얻어먹는 마름의 노릇을 학문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탐만치의 치). 그들은 스스로 치졸한 인간인지를 모른다. 프란체스코 좌파들을 불 속에 또 물속에 넣었던 프란체스코우파는 재산을 유지했다. 교황청은 직접 브루노를 설득시키려 하다 실패하지 산체로 장작불에 태워죽였듯이, 마름의 학문을 하는 자들이 떡밥에 홀려 치졸함조차도 모른다고 보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이런 책인데도 그가 의미의 논리를 쓰면서 상대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을 학문이라기보다 소설(roman)이라 했다. 유일신앙에 젖은 이들은 소설인줄 안다. 앙띠외디푸스은 장편 소설이고, 천개의 고원은 일만년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대하소설이다.
철학은 주제와 논리를 전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논리들이 얼마나 파라독사에 빠졌는지를 말해주었다. 하나의 방향의 논리가 위험하기도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만치(貪慢癡)에 끝이 없다. 상식(오관)의 믿음으로 양식(일방향)의 추리들이 신앙의 일 방향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1859년 이래로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이들은 많지만 형이상학에서 알아챈 이는 벩송이다. 여러 방향은 이미 여러 삶의 터전위에 살아가고 있다. 이 ‘여러’는 고대 철학의 상식에서 말하는 분할에서 나온 1과 다(여럿)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는 다발에서 생성과 창조의 여러 갈래처럼 각각은 계열이 있고, 계열들의 시간의 흐름에서 공감과 공명에 의해 연대하기도 하고 상부상조하기도 한다. 상층의 논리에서는 적대와 모순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삶의 터전에서 직접적 관계와 간접적 관련만큼이, 서로 살아가기 위해 무매개적 연관들이 얽히고 섥혀 기억의 권능(작동)처럼 흐르고 있다. 아마도 들뢰즈가 벩송의 작품에서 MM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읽었던 24살에, 이미 그의 사상의 기원과 근원이 생성하고 정립과정에 있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박홍규도 벩송에 관한 딱 한편의 논문을 썼는데, 이 한편 논문에 대응적으로 그 많은 플라톤 강독 테이프를 남겼는데, 한편 논문과 전집이 서로 같은 흐름으로 동등이 아니라 대등하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하겠지만, 그 한편의 흐름을 전집처럼 늘일 수도 있고 더 줄일 수 도 있다고 본다. 나의 벗은 나의 글을 흔들어 읽는다고 했듯이, 들뢰즈는 책에서 건져지는 것을 읽는다고 한다. 게다가 전선 소켓의 연결에서처럼 흐르면 읽고 흐르지 않으면 읽지 말라고 한다. 흐름은 기계와 같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전기의 흐름과 닮았고, 규소의 시대는 반도체의 흐름과 더욱 닮아 있다. 여전히 인간은 지구(Terre, 가이아)라는 토지(la terre)에서 삶의 터전이 다양체이며, 물리학자가 말하듯이 지구와 우주가 복잡계이다. 그 덩어리로 흐르다가 강도에 의해 표면에 올라오는 가지들 각각은, 어쩌면 자연이 우리에게 읽히게 하는 한 장의 종이와 같은 것이리라. 지구는 백과전서의 1권이고 태양계가 1권의 책이 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서양 철학사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와 엘레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아테네, 그 절정기에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이오이니아 학파의 마지막 인물쯤 되는 아낙사고라스가 ‘태양은 불타는 돌’이라고 한 것은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였으며, 그가 말했다는 누스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왜곡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자연과 인간의 연결에서 프쉬케(ψυχή)를 탐색했던 이로서 소크라테스이며, 이런 탐구를 헤라클레스(전 16세기경 펠로포네소스 반도의 아르케디아로 온 이집트 왕자) 전통으로부터 실천에 옮기려 한 이는 안티스테네스일 진데, 그가 소크라테스의 후배이자 동료로 지냈다는 것을 강조한 이는 철학자 푸이예(Alfred Fouillée, 1838-1912)였다. 퀴니코스에서 스토아로 넘어가면서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에 대한 탐구로서, 공간과 시간이 있고 이의 유비로서 공간의 원자, 시간의 프쉬케도 볼 수 없는 것으로 사유했던 자들이 초기 스토아였다. 그 스토아의 사유를 누스라고 여기고 플로티노스가 공간과 시간의 분화(분할이 아니라)의 과정을 서술하였다고 보는 벩송은 자연 또는 우주의 근원이 비결정성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ineffable)것”이라 하면서도 그것이 실재성이며, 인간은 이 실재성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을 처음으로 우리 땅에서 전개한 철학자는 박홍규이며, 그의 사유방식을 마치 선승의 제자처럼, 표현하면 개구측착이 되지만 그래도 설명하려고 노력한 이는 윤구병이라고 생각한다. 박홍규의 첫 세대는 늙어간다. 그런데 격세유전처럼 다음 세대가 이어갈 것인데, 하나는 스토아를 읽고 있는 한경자에게서, 다른 한쪽에서 플로티노스를 읽고 있는 송유레와 허민준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서양철학사가 앵글로색슨처럼 상층의 논리가 현실에 적용 또는 이용되는 측면이 있고(49퍼센트), 자연의 자기 생성과 창조의 길 속에서 인간의 삶도 있다는 플로티노스와 벩송 그리고 들뢰즈로 향하는 길도 있을 것이다(51퍼센드). 그럼에도 우리의 풍토는 거의 전자에 관심이 있지, 후자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 표현으로 산업사회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제국이라는 틀에서, 한번은 일제의 잔재들의 학문으로 60여년 다른 한번은 미제의 논리 분석의 학문이 풍비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위상일 뿐이다. 세월은 흐르고 복잡계이 다양체는 여러 갈래들의 가지들을 만들 것이다. 박홍규의 가지 위에 격세유전으로 다다음 세대가, 니체의 표현으로 아제인간이 등장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 속에서 환(桓, éternité)의 사유도, 고조선의 홍익인간도, 원효와 지눌, 이황과 이이, 서경덕과 조광조, 호락논쟁과 실학, 동학과 민간사상등으로 이어지는 통시적 관점을 이어가는 추억들의 단계를 넘어서 기억의 활동성을 발휘하여, 이제는 우리 터전위에서 우리말로 동서를 아우르는 통시태와 공시태를 이루는 학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세계적인 철학자가 없는가가 아니라, 고유한 철학자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우리에게 그 길이 열려있다. 그 열려진 길을 가는 자가 진솔한 학자가 될 것이다.
(3:24, 56VKJ) (4:15, 56VKJJ) (5:26, 56V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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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에서 벩송의 연관: 들뢰즈 연표를 통하여.
1) 벩송에서 길어올리기
1945(스물) 고등사범 준비1차반(hypokhâgne)과 준비반(khâgne)에 들어갔다. - 고등사범학교(ENS) 시험에 낙방했으나, 우수한 성적 덕분에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장학금’을 얻어서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교수들 중, 페르디낭 알키에(F. Alquié, 1906-1985),
1946(스물하나) 대학2학년 3편의 논문 중에서 서평으로 쓴 「보편학, 과학,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
1947(스물둘) 디드로의 수녀 입문(Introduction à La Religieuse de Diderot, 1947)
1947(스물둘) 대학을 졸업하다[학사]. 이폴리트와 캉길렘의 지도로 흄에 관한 논문을 제출. 이는 1953년 경험론과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이라는 제목으로 PUF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이 당시 캉길렘은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1949(스물넷) 깡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은 1949년 그에게 본능과 제도(Instinct et Institution)라는 작은 책의 방향을 제시했었다. [4년 후] 1953 본능과 제도, 출판. 이것은 깡길렘이 주관하는 총서에서 들뢰즈가 텍스트를 모아서 펴낸 책이다.
1953(스물여덟) 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 PUF
[벩송은 학위논문을 귀납법을 주목한 라슐리에에(Jules Lachelier, 1832–1918)게 헌정했다.]
2) 벩송을 관통하여 철학사의 문제거리를 보다.
1956(서른하나) 들뢰즈(Gilles Deleuze), "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 dans Les Etudes bergsoniennes 4, PUF, 1956, pp. 77-112.
1956 들뢰즈 “벩송” 항목 집필: 메를로-퐁티(Merleau-Ponty, 1908-1961)는 마즈노(Mazenot)사전의 출판의 기회에, 그에게 베르그송의 항목을 집필할 것을 권했다.
1957(서른둘) 들뢰즈의 베르그송: 기억과 생명(Bergson: Mémoire et Vie, 1957)(Textes choisis), PUF, 1957,
1962 들뢰즈, (루소 탄생 250주년 기념에서) 「카프카, 셀린, 뽕쥬의 선구자, 쟝-자끄 루소(Jean-Jacques Rousseau précurseur de Kafka, de Céline et de Ponge, 1962)」, in Arts, n. 872, 6-12 juin 1962.]
[1963(서른여덟) 칸트의 비판철학(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PUF)을 출판하다. 칸트의 개념적 조작을 허위비판의 표본으로 삼아 체계적으로 분해하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공식적 지식제도에 속해 있던 들뢰즈가 이 책에서부터 비로소 창조적 철학자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66(마흔하나)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PUF)를 출간. 직관, 지속, 기억, 생명 등의 개념을 조명하면서, 벩송의 보수주의자 정신주의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렸다고 평가되는 책이다. 벩송은 질료의 차원에서 발생을 중요시하는 합리적(추론적) 경험주의자. .
1966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다(Rverser le platonisme: Les simulacre, 1966)」(형이상학과도덕 지) -> 「플라톤과 모방(Platon et le simulacre 1969)」
[1961(서른여섯)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Lucrèce et le naturalisme, 1961)」 in Les etudes philosophique 1961 -> 「루크레티우스와 모방(Lucrèce et le simulacre」 1969.]
1967(마흔둘) 「(구조주의에 대한 인식)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
자허-마조흐의 소개: 냉정함과 잔인함 - 자연은 냉정하고 죽음 앞에 잔인하다.
「타인 이론(Une théorie d'autrui, Michel Tournier)」
「짐승 같은 인간 입문: 졸라」, -「졸라와 균열(Zola et la fêlure, 1969)」
3) 들뢰즈 사유에서 벩송의 자연(본성)과 발산
1968(마흔셋)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9), 표현(expression)인가 설명(explication)인가?
1969(마흔넷)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의 만남. 탈영토와 탈코드와 개념 생성
1970(마흔다섯) 스피노자(Spinoza, 1970) –> 1980 『스피노자, 실천철학(1980)』
“의미논리”를 넘어서 입말(언어): 볼프손, 루이스 캐럴
1972(마흔일곱) 안티 외디푸스(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72)
- 「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 가족:동맹을 넘어서 폴리스:노마드로
- 가타리와 함께 쓴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1975)
1976(쉰하나) 리좀(Rhizome, 1976) 시뮬라크르를 대체하는 표면의 안감으로 리좀
1977(쉰둘) 「정치들 1(Politiques I)」, [다양체, 즉 응집 평면/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 들뢰즈와 파르네, in 대화집(Dialogues, 1977)
「정치들 2(Politiques II)」, [다양체, 즉 혁명 ... 전쟁기계], 들뢰즈와 파르네, in 대화집(Dialogues, 1977), Flammarion, 2008(1977, 1996), I. 151-162, II. 163-176(P.189)
1978(쉰셋) §CC06. 「니체와 바울, 로렌스와 파트모스의 요한(1978)」, in Apocalypse(Paris: Balland, 1978), pp. 7–37. 서문으로
1980(쉰다섯)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 “앞의 책이 출간 된 시기는 68운동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뒤의 책은 천박한 향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 썼다
4) 들뢰즈 사유의 확장
1983(쉰여덟) 영화 1: 이미지-운동(1983) 영화 2: 이미지-시간, 1985
1986(예순하나) 푸꼬(Foucault, 1986) 출간(Minuit). [푸꼬(1926-1984) 사후 2년이 지나], 새로운 시각으로 푸꼬를 조명한 연구서이다. 들뢰즈는 이 책을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또 푸꼬에 대한 존경 때문에”썼다고 했다.
1987(예순둘) 파리 8대학 철학과 교수 정년퇴임하다.
1988(예순셋)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le baroque),
- 「주체에 관한 질문의 답변(Réponse à une question sur le sujet, 1988)」(in Deux régimes de fous et autres textes, 1975-1995, 2003)
1990 §.16. 통제와 생성(Contrôle et devenir 1990) - 대담자: 네그리(Toni Negri)
§.17. 통제 사회들에 관한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 기고문
1991(예순일곱)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 - 벩송의 방법후설 - 방법후설
1992(예순여덟) 「플라톤과 그리스인들(Platon, Les Grecs)」 : 원래 발표 “Remarques(주의)”, Barbara Cassin, ed., Nos Grecs et leurs modernes(우리의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현대인들), Seuil, 1992, pp. 249-250.(2쪽) 1993년에 “Platon, Les Grecs”. Critique et clinique, Minuit, 1993, pp. 170-171. 으로 실린다.
1993(예순아홉) 마지막 저서 비평과 임상의학(Critique et Clinique)를 출간(Minuit)하다.
1995(일흔하나) 들뢰즈는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을 철학지에 기고하다. 이는 「집합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의 기획물의 첫째 꼭지라 한다.
1996 유고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 「집합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의 기획물./ 그는 1947년 교수자격시험에서 벩송의 사상의 기본이 제1평면이라 생각했고, 생을 마감하지 전에도 같은 생각으로 내재성의 평면 즉 ‘온생명’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53MMI)
# 들뢰즈 사유에서 벩송의 위상
- 2023 11 17, 금요일, 철학아카데미 강의실. - 발표문 초고.
01 들뢰즈 사유로 들어가기 전에
서양철학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공시태와 통시태에 따라 다르지만, 공시태 측면에서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인식 측면에서는 선분의 유비에서 네 가지 공시태로 나누었고, 우주와 자연의 측면에서 세 가지 공시태로 나누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인류의 역사적 과정에서 인식과 사회변화에 대한 실증적 설명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우화적(알레로리)으로 변역(變易)의 과정을 겪었다는 전승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가이아(어머니, 자연)시대, 우라노스(자지 짤림)시대, 크로노스(자지 짤림, 거세 콤플렉스)시대, 제우스시대, 영웅시대, 도시들 각각의 건설 설화(테세우스, 외디푸스 등)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상식에 맞추어서 전해왔다. 철학사는 신화를 벗어나 자연에서부터 사유(누스)인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대상을 토대로 사고(로고스)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시기를 지나 둘 사이에 틈을 메울 수 없다고 여기는 추리사고에서 한 방향을 잡았고, 그래도 틈을 메워야 제대로 된 자연과 우주를 논한다고 여기는 추론사유가 다른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는 삶의 편리와 안정을 가져다준다고 여겼고, 누스적 사유가 자연을 아는데 노력을 해야 하는 불편함을 덮어 버리기 위해 신화적(알레고리)으로 설명하는 서술과 해석이 우세하였다. 이 과정에서 심층은 침잠하였다. 과정을 다루지 못한 사고는 공시태적 유비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에서 네 가지로 설명하던 세 가지로 설명하던, 공시태 우선이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인민의 등장으로 자연, 인간, 세상을 실천 속에서 사유하고 배치하는 방식이 도래 했으나, 아직은 인민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들뢰즈는 증기기관의 발달로부터 인민이 자유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사회사적으로 루소를 높이 평가하는 철학사적 방식을 따랐지만, 벩송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동에서 손이 자유로워야 하는 모터의 발명에서부터라고 한다. 모터의 발명이후로, 인민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려 노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논리의 원리 와 물체의 법칙에 따르는 방식과 달리, 사회 속에서 인간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는 꽁트가 등장하였다. 맑스가 프랑스에서 1789년과 1830년을 혁명의 과정을 겪었던 사회를 직접 와서 느끼고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방향을 틀면서, 엥겔스와 더불어 1848년 공산당 선언을 하면서, 세계를 보는 관점에서 공시태와 달리 통시태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공시태의 논리적 사고는 견고하였고, 이런 사고는 플라톤주의에서 스콜라철학,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자아 세계 신에 대한 비판, 헤겔 정신 우위, 논리실증주의,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들뢰즈가 말하는 상층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공시태에서 통시태를 해석하는 철학적 사고의 한계를 보았던 벩송은 통시태를 통한 사유의 전개를 공간화에서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간단히 벩송은 수학들(산술, 기하)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철학적 체계를 세웠던 방식(양식, 한방향)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 도래한 생물학(의학, 생리학)과 후반의 심리학(영혼, 기억)을 통한 다양한 방향의 사유가 있음을 알렸다. 크게 보아 두 방향은, 벩송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 로고스 사고와 플로티노스의 누스 사유 사이만큼 축이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그리스철학의 기원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학파로 과정은 통시태 흐름으로 이어진 누스 사고인데 비해, 로마의 황제(참주)제에 의한 살아있는 권력의 신의 등장에 기댄 크리스트 유일신앙이 로고스 사고임을 보았다. 신앙의 독단은 그리스적 사유의 과정보다 알레고리에 기댄 정태적 논리 사고이며, 이는 신학에 공시태를 우선으로 적용하였면서 이단을 색출하는 싸움을 하였고, 중세는 이를 옹호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시이에 피튀기는 투쟁에서 수많은 사유자들이 종교재판으로 사라졌다.
공시태의 사고의 안정과 공리는 벩송이 말하듯이 고대철학은 상식(5관)을 기준으로 전개했고, 중세철학은 상식을 신앙으로 바꾸었을 뿐이며, 갈릴레이의 물리학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운동을 내려놓음으로서 근대의 데카르트가 이원론을 내세웠지만, 데카르트주의자도 두 가지 중에서 한 방향(양식, 일방향)으로 전개했다. 그 전개를 보증해주려는 쪽이 칸트와 신칸트학파 인식론자들로서 이들은, 고대의 상식을 신앙으로 보증해주었듯이, 물체를 다룰 수 있는 논리와 체계가 우선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바로 그 시대에 물리학에서 내부로 전개되는 원자의 내부 탐구와 더불어 열역학과 전자기학이, 생물학에서 세포의 단위 안으로 들어가서 세포핵과 세포의 내용들로 들어가듯이 철학은 현상(표면)의 내부로 들어갔다. 프랑스 학계는 이 19세기 초반에 둘 사이의 분할과 분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시대에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différentiation)와 차히(différenciation)을 구별하였지만, 들뢰즈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전자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후자는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썼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이해한 들뢰즈는 상층과 심층 사이에 표면을 설정하면서, 표면의 이중성을 제기했다. 이중성의 겉면과 안면이 다르며, 겉면은 이데아를 복사하는 모습이며, 안면은 질료의 자기 생성이라 한다. 둘 다 표면의 현실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두 모습의 기원과 원인은 전혀 다르다. 이런 들뢰즈의 사유는 벩송에서 MM에서 추억들과 기억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벩송이 DI 2장에서 운동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그가 2장 전체에서 쓰는 운동 단위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저기로 운동’은 벩송이 다루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다. 벩송이 말하고자 하는 운동은 플로티노스의 사유로, 보다 더 깊이 초기 스토아의 사유로 또는 소크라테스 사유로 깊이 들어가 보아야 한다. 통시태가 필요하다. 공시태처럼 유비로서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를 언어학자 소쉬르가 실재성과 기표/기의와는 전혀 별개라는 유비적 해석하거나, 또는 그 많은 전기 구조의자들(이와 더불어 프로이트와 라깡까지)이 현실과 그것을 이루는 구조들의 대비를 유비적으로 실재성과 상징성으로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대비와 비유인가? 이는 추상하여 이항 대립을 하나로 올리는 또는 더욱 추상하여 하나가 성립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하나로 올리는 추리와 추상은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인 신으로 재통일시키려는 사고이다. 이런 사고야 말로 자연의 흐름이라는 그리스 전통을 버리고, 로마 시대의 황제와 유일신상의 신을 알레고리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이어가는 스콜라철학의 하나의 통일성이 먼저라는 사고라는 것이다.
간단히 그런 하나의 통일성은 없다. 단지 ‘이다’일 뿐이다. 현존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로 다양하고 변화하고 변전하는 실체 또는 실재성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이미 다른 하나를 미리 설정(선전제)하여 상정(‘이다’로)해 두는 것이다. 벩송이 선전제의 미해결의 오류를 제시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들뢰즈는 흥미롭게도 벩송을 드러내놓고 철학사적으로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고 말하지 않고,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을 내세워,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말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전복의 철학”의 철학이라 제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벩송의 저술들과 강연, 편지, 서평 등을 다 읽어보았지만 들뢰즈처럼 전복을 말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들뢰즈가 옳았다고 늦게서야 깨달았다. 들뢰즈도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록 네 권(2016-2019 출판)을 읽지 못했는데, 나로서는, 이 강의록과 다시 읽은 LS의 흐름이 거의 같은 방향임을 보았다. 심층의 철학이 질식하였든 듯 하지만, 여전히 깊이에서 흐르고 있었고, 용출(탈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아마도 푸꼬가 말했듯이,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아니 심층철학의 선들이, 이오니아학파, 소크라테스, 플라톤, 플로티노스, 샤르트르학파, 프란체스코 학파, 브루노, 라이프니츠, (정치경제학에서 맑스, 도덕론에서 니체), 벩송, 브레이어, 들뢰즈로 이어지고 있고, 이제는 고등양식과 다음측정이라는 실천으로 아제 인간을 기대하며 ‘차히’ 사유를 하게 될 것 같다. (01; 2:40 56VLC)(3:08, 56VLF)
11 들뢰즈는 젊은 시절에 벩송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들뢰즈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르와 드 푀(Croix-de-Feu)의 가담하였는데, 이 단체는 1936년에 사회당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다섯 살 맏인 형(Georges, 1920-1944)이 있었고 2차대전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였고 수용소로 이송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1942-1943년 고등사범 준비반에 들어갔으나, 형의 소식으로 포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1945년에 재수(la khâgne) 반에서 공부했으나 고등사범 시험에 낙방하였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 덕분에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장학금’을 얻어서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교수들, 페르디낭 알키에(Alquié, 1906-1985), 모리스 드 강디악(Gandillac, 1906-2006), 장 이폴리트(Hyppolite 1907-1968), 조르주 캉길렘(Canguilhem, 1904-1995) 등에게서 배웠다.
당시의 철학계의 분위기는 이러하였다. 프랑스 철학계는 20세기 초에 논리분석의 브랑슈비끄와 인간본성의 벩송이 양대 산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학문의 성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 변화에는 꽁트이래 실증학문의 영향이 컸지만, 다른 한편 카톨릭이 극우파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꽁뜨의 실증 사회학의 여향으로 프랑스 학계는 사회를 현상으로서 다루었다. 벩송의 영혼에 관한 탐구는 사회학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벩송이 사회학 발전에 ‘불쏘시개 역할’(effet repoussoir) 정도를 했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벩송은 뒤르켕(Durkheim, 1858-1917)을 “자유의 반대자”로 보았는데 비해, 뒤르껭은 벩송 사유를 내던지고 개인을 사회 속에 위치시키면서 “영원의 상하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을 이어받은 뒤르껭의 협력자들은 위베르(H. Hubert), 알바쉬(M. Halbwachs), 모스(M. Mauss), 베이예(A. Bayet) 등이 있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1925년에 “벩송을 반대하는 연구 모임”이 있었는데 폴 니짱(Paul Nizan), 폴리쩌(Georges Politzer),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르페브르(Henri Lefebvre)등이 있다. 1930년대에 나온 소련의 철학 사전에는 벩송을 부르주와 철학의 거장이라 하였다. 이런 평가들은 벩송의 기나긴 철학사적 의미를 간과하고, 당대에 활발했던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의 경향에서 비판한 것이다. 벩송이 마지막 작품(MR: 1932)[일흔셋]을 냈을 때는, 사람들이 아직 그 철학자가 살아있구나 정도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미 학문의 방향은 재인식보다 인식의 재현(표상)에 대한 현상으로 바뀌었고,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더 이상 전쟁하지 않기 위해 독일철학을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났다.
교수자격 시험의 과제들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들뢰즈는 벩송의 MM을 읽고 준비하면서 벩송 철학의 전반을 이해했을 것인데, 학계 분위기와 달리 벩송의 사유에 무엇을 보았을까? 대학 시절에 다섯 편의 소논문과 졸업논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다섯 편 중에서 첫째, 「여성에 대한 묘사: 성(性)분화된 타인이라는 철학(Description de la femme. Pour une philosopjie d’autrui sexuée, 1945)」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나서 강연을 듣고서 사르트르를 모방해서 썼다고 하지만, 여성을 남성의 대립자가 아니라 고유성으로 보려고 했다고 한다. 내가 보탠다면 마조허의 시각이 이쯤에서 있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에서 부르주아로(Du Christ à la bourgeoisie, 1946)」이며, 프랑스 역사에서 크리스트교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행에서 과학, 종교, 국가 3가지 대립을 보았는데(사실 이런 관점은 프랑스 철학의 암묵적 대결 구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브루주아와 공동체(카마라드리)를 지향하는 사회로 이행을 보려고 한 것이다. 넷째 「말하기들과 윤곽들(Dires et profils, 1946)」인데, 논문이라기보다 수필처럼 쓰였는데 남자가 부딪히는 세 가지, 즉 다른 남자, 여자, 공동체라는 영역에 대한 소견이다. 그런데 여기서 입말과 입말의 일반화의 방식에서 개념화가 잘 안 되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들뢰즈는 바틀비에 관한 논문 이외에도 이런 관심을 LS 이외에도, 말년에 「그는…더듬거리며 말했다(Bégaya-t-il‥…, 1993)」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넷째, 「보편학, 과학과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 다섯째 「디드로의 수녀 입문(Introduction à La Religieuse de Diderot, 1947)」인데, 여성의 성에 대해 수녀원의 세 수녀원장을 행실에 비추어 쓴 디드로의 소설을 서평한 것이다. 고립된 여성을 자연으로 보는 시각은 서양철학의 이원성에서 배제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중세말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몽기에도, 그 당시에도 실재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첫 논문에서 분화된 성도, 내가 추측 컨데, 분화된 대상은 차이라기보다 ‘차히’일 것이다. 전자라면 비하되고 후자라면 별종이 나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넷째 작품이다. 베토벤의 주치의이며 이탈리아 출신 의사인 말파티(Malfatti, 1775-1859)가 쓴 책에 대한 입문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말파티의 지식들의 무권위와 위계화에 관한 연구, 의학의 특별한 적용과 더불어(1845)에 대해, 의학보다 학문의 두 위상을, 즉 무권위와 위계화를 생각하게 한다. 스물하나에 쓴 매우 흥미로운 사유의 전개를 보인 논문이다. 일반적으로 학문은 당연히 데카르트의 보편수학(mathsis)과 같은 통일성에서 체계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벩송은 극단의 이데아로 이루는 것이 두 종류라 보았고, 하나는 이상 또는 상징으로서 추상화의 극한에서 이데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생성과 창조의 전개에서 생명의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중의 이데아에서 전자는 실재성이 없는 대상화의 극단에서 통일성인데 비해, 후자는 실재성의 변화와 진화로서 지속하는 단위(통일성)라 보았다. 들뢰즈는 이 논문에서 다양체의 개념을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두 극단의 통일체로서, 하나는 세계의 대상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보편수학이 있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생물학, 또는 기예(art)로서 의학을 성립하게 하는 마테즈(Mathèse)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이런 분할이 단지 차이가 아니라 발생에서 또는 자연의 생성에서 분화에서 다르다는 것을 들뢰즈는 저술과 논문에서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이분화(플라톤의 분할이 아니다)의 방식의 설명이 벩송의 「형이상학 입문(1903)」에서 그리고 꼴레즈-드-프랑스에서 행한 의학자 베르나르(C. Bernard, 1813-1878)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 1913)」의 발표에도 있다. 이런 겹치기 현상은 들뢰즈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들뢰즈가 생각보다 벩송을 깊이 읽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을 쓰도록 권한 신비주의자인 마리 막들렌 다비(1903-1999)의 영향일까? 또는 학부 논문 지도교수인 의사 깡길렘(Canguilhem 1904-1995)의 영향일까? 그는 의학에서 경험적 귀납, 그리고 병에서 원인학, 징후에 대한 관심은 지속될 것이다. (56VLC)
의학 또는 생물학은 근본적으로 연역체계가 아니라 귀납체계이다. 이런 관심으로 들뢰즈는 대학졸업 논문으로 이폴리트와 캉길렘의 지도로 흄의 경험론에 관해서 썼다. 이 논문은 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으로 출판되었는데, 벩송은 경험론에 직접적인 저술이 없지만, 박사학위논문(DI)을 내면서 귀납법을 주목한 라슐리에에(Jules Lachelier, 1832–1918)에게 헌정하였다. 들뢰즈도 수학으로 철학하는 방식과 생물학으로 철학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교수자격을 1948년에 8등으로 통과했다. 프랑스에서 철학교수자격 통과는 우리나라 사법고시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크다. 세계사를 이끄는 인물은 사범학교 철학과 출신 22명 중에서 한 해에 한명이 안 된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철학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24살에 교수 즉 공무원으로서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사논문의 인연으로 1949년에 깡길렘은 본능과 제도(Instinct et Institution)(출판 1953)라는 소책자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리할 것을 권했다. 이 본능과 제도의 이원성은 벩송의 EC에서 본능과 지성처럼 (세)분화되는(차히를 드러내는) 관점을 보았을 것이고, 가타리를 만나 둘째 쓴 책에서 이런 차이를 노마드와 폴리스의 대립에 유비적으로 적용하여, 삼위격 신앙이 인류사적 적용의 오류임을 지적하는 데 쓰일 것이다.
(3:25, 56VLC)(3:28, 56VLF)
22 들뢰즈 철학사를 재검토 하다. 변방에서 기존 철학계로 얼굴을 내밀다.
벩송이 고등학교 철학 강의에서 당대의 필수였던 심리학 강의, 고대철학사 강의를 비롯하여 중요철학자들을 강의 했듯이, 들뢰즈도 인간, 세계, 역사들을 강의하고 철학사를 강의하면서 철학사를 정리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69년 출판된 세 권의 책에서 보면 철학사를 깊이 읽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중에서 에밀 브레이어와 그의 제자 골드슈미트의 인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무 교육의 5년을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할 시기가 온 것이다.
들뢰는 1956년에 베르그송 학회에「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논문을 실었다. 이 개념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의 토대가 될 것이다. 나로서는 이 논문이 1995년 쯤에 읽으면서 벩송의 당연한 논리를 전개했다고 여겼으나, 슐레즈(Philippe Soulez, 1943-1994)의 벩송: 전기(Bergson: biographie 1997) 앞 부분에 슐레즈 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놀랐다. 슐레즈는 교통사고 당하는 그날의 가방에도 들뢰즈의 이 논문이 있을 정도를 이 논문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차히”를 이미 보았고, 아마도 철학사를 준비했으리라.
차이와 차히를 철학사적으로 관심있는 인물에 대해 적용해 본다면 누구를 거쳐 가야 했겠는가? 우리가 보기에 벩송의 저술에서는 인간에 관한 한 또는 영혼(프쉬케)에 관한 한 심층의 통시적 선들(계열)은 소크라테스, 퀴니코스 안티스테네스, 플로티노스, 라마르크, 의학 생리학자인 베르나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강의록에서는 더 상세하다. 심층의 통시적 계열을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의를 들었던 브레이어는 나중에 철학사적으로 전개했고, 골드슈미트는 초기 스토아를 정리했다. 이런 공시적 문제로서 계열을 통시적 관점으로 소설을 쓴 것이 LS(1969)이다. 이 작품은 그의 학위 논문을 쓰면서 심층과 상층의 계열들을 언어와 논리가 전개한 서술이 모두 파라독사라고 하였는데, 이런 파라독사의 흐름에서 유일신앙자들의 독단(dogme, 교리)도 마찬가지로 파라독사이며, 정신분석학도 파라독사로서 소설과 같다고 보았다. 이런 상층의 원리와 법칙이 유비와 알레고리(우화)의 이야기라고 보고, 들뢰즈 스스로도 자신의 저술 LS를 소설(roman)이라 했다. 그리고 나중에 AO를 쓰고 난 뒤, 한 대담에서 다음에는 (천개의 고원 같은) 대하소설을 쓸 것을 우스게처럼 말한다.
나중에는 그는 인물중심이 아니라, 사건을 표현하는 단편소설이 왜 철학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고, 소설, 회화, 건축, 음악, 연극, 영화도 “철학들”인 셈이다. 하나에서 모방하는 철학의 체계와 달리,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오는 각 줄기들도 철학들이며, 그 줄기의 다발이 바로 다양체이다. 이런 개념작념은 벩송의 창조적 진화(EC)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 차이 논문의 발표와 더불어, 메를로퐁티가 주제한 철학자들의 사전 편찬에 “벩송”이란 항목을 쓴다. 사전의 지면 상 벩송의 소개 글이지만, 벩송의 철학자적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와 더불어 대학 교양학부에서 쓰일 벩송에 관한 발췌문을 뽑아낸, 베르그송: 기억과 생명(Bergson: Mémoire et Vie, 1957)이 나온다. 이 책도 개론서이지 연구서는 아니지만, 그가 벩송을 얼마나 깊이 읽었는지를 알리는 글이며, 벩송을 읽는 중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그는 벩송이 제시한 내재적 자아와 기억, 우주발생론과 생성, 지성과 대등한 본능의 인식,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공감을 보여주려 한다. 다음 1966년 벩송에 관한 개론서로서 단행본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가 나온다. 이 책은 직관, 지속, 기억, 생명 등의 개념을 조명하면서, 베르그송의 보수주의자 또는 정신주의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렸다고 평가되는 책이다. 베르그송은 질료의 차원에서 발생을 중요시하는 합리적(추론적) 경험주의자이다. 그러면 이 두 저술 사이에 무슨 일[사건]이 일어났는가?
철학사에서 초기스토아시대에도 이미 “볼 수 없는” 것임에도 “느끼는” 것이 있다는 문제가 제시되었고, 벩송은 나중에이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플로티노스에서 신아이스테시스(공감성)를 보았다고 한다. 벩송에 이어서 브레이어 철학사에서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을 크게 서너 가지라 하는데, 우선 공간과 시간이며, 다음으로 원자들 넣고 또 하나 프쉬케를 보태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벩송의 MM 3장을 유비적으로 보면, 그는 실재하지만 대상화는 안 되고, 이미지작용에서 재인식(재현이 아니다)할 수밖에 없는 것(기억)이 있다고 보았다. 공간과 시간을 재현으로 보여주는 상징과 이미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은 실재성이 아니다. 그래서 공간을 설명하는 이미지로서 추억들(원자들)과 삶의 과정을 살아가는 동안에 느끼는 기억(프쉬케)으로 분해(세분화)하였다고 본다. 나로서는 늦게서야 느꼈지만, 박홍규와 들로즈는 일찍이 깨달아서 철학사를 통시적 시각으로 보고 정리하였다고 본다. 즉 벩송의 철학사에 통시적 시각은 고중세에 상층, 근세에 표면, 1830년 이후로 심층이라 할 수 있다. 박홍규는 평면축과 수직축으로, 들뢰즈는, 아마도 브레이어 덕분에, 상층, 표면(이중성), 심층으로 철학사의 흐름을 보았다.
사람들은 이 시기에 들뢰즈와 푸꼬가 니체에 주목하였다고 하나, 프랑스에서는 헤겔이 이후에 이항대립의 변증법으로 정신이라는 최고위 관념 설정에는 이의제기 많았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그 낌새를 차린 자들을 헤겔의 변증법의 반대자들로서, 키에르케골, 맑스, 니체, 프로이트들 들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독일에서 학문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독일 바깥에서 활동했다. 이런 낌새는 알아차리기 위해 표면의 이중성을 주목해야 할 것인데, 들뢰즈는 우선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1961)」에서 모방의 이중성을 다루었고, 학위논문에서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에서 이미 제시되었던 시뮬라크르의 이중성을 길어 올렸다. 이 표면의 문제는 도덕론 또는 공동체론(공산주의)이라 할 수 있는데, 니체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이라기보다, 들뢰즈는 크리스트교와 아제인간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의 도덕론의 계보, 즉 고고학(통시태)는 유일신앙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그들은 율법의 두려움에서 원한과, 원죄의 덮어씌움에서 죄의식으로 백성을 억압과 억제 속에 살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마하트(Macht)가 권력의 추구의 개념이 아니라 생성에서 권능으로 읽은 들뢰즈는 니체가 원한과 죄의식에 대한 허무주의 극복이 아니라 새로운 삶(새로운 공동체)로 나가는 아제인간(초인이라 부른다)에서 찾으려 했다. 들뢰즈가 본 니체는 허무가 먼저 있음을 말하지 않고, 자연(Nature 본성)의 생성과 창조가 먼저이며, 이 자연에서 생성하는 아제인간이 세상을 달리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이 다른 세상은 다발의 계열들이 다양하게 발산하여 각 계열이 자기창조의 길을 가는 여러 항들과 같다. 그 항들이 현실 즉 고른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 주사위 놀이와 같다는 것이다. 푸꼬가 근대사회를 광기의 역사라 하는 것은 주사위의 한 면만(방향만)을 다룬 것이고, 들뢰즈가 본 다방면으로 표출하는 세상은 여러 다른 세상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칸트의 하늘의 별 같은 도덕론과 헤겔의 절대정신의 변증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니체를 통해 폴리스의 위계에서 결함과 무로 취급되었던 심층을 자연의 생성과 활동으로 뒤집어 보았고, 허무주의와 변증법에 대한 비판으로 “망치의 철학자”로 불리는 이를 “전복의 철학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면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Mystere d'Ariane, 1963)」와 1964년 화요몽 학회에서 영겁회귀에 관한 발표를 통해서 테세우스의 폴리스의 삶 대 새로운 삶으로서 디오뉘소스적 삶을 대립시킨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의 차이 개념작업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베르그송주의(1966)에 이어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다(Rverser le platonisme: Les simulacre, 1966)」를 썼다. 이미 이 논문은 LS(1969)를 예고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 철학회(SFP)에서 발표한 「드라마화의 방법(La méthode de dramatisation, 1967)」이다. 이 발표는 소르본 대학의 앞선 세대의 철학과 교수들 앞에서 새로운 철학 방법을 제시하였다. 철학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과정을 드라마처럼 전개해야 한다는 것인데, 역동론의 방법과 미분화/세분화의 차이를 제시한 것이다. 이런 방법론으로 보면, 구조주의는 대상(상징)의 논리 위에 선 공시태의 관점이고, 과정과 역동론은 추론은 통시태의 관점이다. 들뢰즈가 정태론에서 역동론으로, 공시태에서 통시태로, 폴리스에서 노마드로 관점은 거의 정립되어 간다. 이로써 자신의 관점에서 학위논문, 부논문, 그리고 의미의 논리가 나온다. 벩송은 과거의 철학이 “전도”된 철학이라고 하듯이, 들뢰즈는 전도를 넘어서 “전복”의 철학을 말할 것이다. 전복, 이는 곧 혁명을 의미한다. 무엇의 전복이겠는가? (3:06 56VLD) (3:16, 56VLF)
33 들뢰즈 철학계의 중심의 경계(8대학)에 서다.
들뢰즈는 1968년 5월 프랑스 “사건” 중에도 학위 논문에 열중했으리라. 그는 이 해에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9)(DR)을 발표하고, 학위 부논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SPE)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LS)를 냈다. 68년 5월의 변혁으로 대학제도가 개편되어 파리 시내에는 7대학 까지, 교외에 파리 8대학부터 독립적인 대학이 되었고, 8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철학계의 중심과 변방의 경계선에 들어섰다. 그를 주목한 이는 푸꼬였다.
주 논문 차이와 반복(1969)은, 나로서는 그가 벩송의 통시적 관점을 철학사적으로 재배치 했다고 본다. 벩송의 철학 통시태 벩송 작품 전체를 읽고 나서야 이미지 상으로 만들 수 있는데 비해, 들뢰즈는 한 권의 저술에다 모아 놓은 셈이다. 벩송은 철학사 전반을 따로 쓰지 않았지만, 벩송 작품들의 흐름을 읽으면, 자아, 자연(세계), 삶(공동체)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관해 일관해서 서술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는 DR(1969)에서 한권으로 묶어냈다. 벩송이 ‘밖에서 안으로’라는 철학사의 방향 제시를, 들뢰즈 차이와 반복 이라는 두 개념을 앞세워서 방향을 설명했다. 흥미롭게도 서장의 제목에서 ‘반복과 차이’을 결론장의 제목에서 ‘차이과 반복’으로 뒤집어 놓았는데, 벩송식으로 보면 전도(l’inversion, 언어 도치)로 보이지만, 들뢰즈는 LS(1969)와 같이 읽게 되면 전복(subversion)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몇 가지만 생각해보자. 우선 책의 줄거리를 보면 들뢰즈는 충실하게 철학사를 따르고, 상층, 표면, 심층의 구별을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서장의 차이는 동일율에 의한 차이이며 그 차이를 형성하는 것은 원본에 대한 모방(시뮬라크르)의 차이에 의해서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론장의 차이는 “차히”로서 자연(우주발생론)의 생산에서 다양한 차히 발생은 모방할 원본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서장의 동일반복에 대해 결론장의 이질반복이다.
원본이 없이 생성이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생물학에서 종들의 다양성을 보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원본 없는 모방(시뮬라크르)은 무엇인가? 자연에서 여럿이 발생하고, 그 발생들 사이에 참조하면서 또 다른 발생을 한다. 그 참조라는 것은 벩송이 다음측정(recoupement)이라는 용어로 쓴 것인데, 기하학적 측정에서 쓰는 것을 유비적으로 썼으며, 들뢰즈는 말년에 라이프니츠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알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찾았을 것 같다. 다른 한편 나로서는 차이와 “차히”를 구별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나무라기만 하지 잘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한철연까지도 들뢰즈를 읽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 속에서 꾸준히 이 용어를 썼다. 들뢰즈가 DR 영어판 서문에서 자신은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différentiation)와 생물학과 심리학의 차히(differenciation)를 구별하였다고 한다. 이런 구별은 로베르 사전에서는 라마르크 이후로 생물형성논쟁에서 개념들을 구별하여 왔다고 한다.
부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9)(SPE)는 여전히 논란거리인데, 표현(expression)은 글자 그대로 눌린 것의 발현(ex-pression)이다. 설명(explication)으로 번역되는 것도 접혀있는 것의 풀림(ex-plication)이라고 생각하면, 벩송에서 외연(extension)을 긴장의 풀림(ex-tension)으로 읽어야할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런 용어들에서 벩송의 경우는 “지속의 상하에서” 보는 경우와 “영원의 상하에서 보는” 경우가 다르다고 한다. 벩송의 저술에서는 스피노자의 자연(즉 신)의 표현에 대한 모호한 견해들이 있다. 그런데 들뢰즈도 보지 못했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록에서는 벩송을 스피노자가 자연의 흐름으로 보다기 보다 자연의 연역적 풀림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스콜라철학에 은연중에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았고, 차라리 라이프니츠가 흐름의 생성과 전개로서 은총론과 모나드론을 썼다고 설명했다. 벩송의 이러한 견해는 강의록이 출판되기 전(2019)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우리가 보기에 묘하게도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부논문을 쓰고 난 뒤에도 몇 편의 논문을 썼는데, 스피노자를 카톨릭의 삼위격의 설명과 달리 읽으려는 노력에서 “세 가지 논문”으로 된 복합적인 저술이라 한다. 우선 1978년 「스피노자와 우리(Spinoza et nous)(1978)」 논문에서 이미 윤리학의 제5권이 스타일이 다른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1989년 편지에서 윤리학 안의 세 가지 언어로 되어 있으며, 개념, 감화, 지각이 인식의 세 가지 종류처럼 설명한다. 셋째 1993년의 「스피노자와 세편의 “윤리학”(Spinoza et les trois “Ethiques”, 1993)」의 글에서는 윤리학 안에 세 가지 글쓰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기호들(les Signes)/감화들(affects), 용어들(les Notions)/개념들(concepts), 본질들(les Essences)/지각들(percepts)이라 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학위 논문의 부록처럼 보이는 LS(1969)이다. 이 책은 그가 머릿 글에서 표면의 전개는 “주사위 놀이들 – 이야기들과 장소들, 하나의 복잡한 장소, 하나의 “얽히고설킨 이야기(histoire embrouillé)” - 과 같다”고 하면서, “논리학적이고 정신분학적 소설(roman)”이라고 한다. 철학사적으로 언어로서 현상 또는 표면의 문제거리를 푼다고 할 때는 진실과 거짓으로 구분하는데, 많은 표면적 사실들(만들어진 것)은 현실적으로 진위 구별이 안 되는 것이 더 많다. 그러면 서로 다른 사실들에서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척할 것인가는 언어인 한에서 논리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로 제시된 서술이 독사로 배척했던 서술들과 마찬가지로 독사에 머문다는 것을 언어분석에서 많은 예를 발견한다. 그러면 언어에서 독사(doxa)란 무엇인가? 들뢰즈가 보기에 독사를 규정했던 진리라는 명제들도 파라독사라는 것이다. 고대의 거짓말쟁이 파라독사에서 19세기말 언어분석에서 파라독사들이 모두 주사위 던짐의 한 수에 지나지 않은 놀이이라고 보면, 표면에서 일어나는 현실들 즉 사건들은 파라독사들의 놀이터가 아닌가? 이런 것을 풀려고 노력했던 풍자, 아이러니, 유머들은 기호를 생성하고 개념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표면이라는 현실 평면에서 새로운 생성과 창안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이 원리와 체계, 그리고 법칙과 질서에 관한 일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면은 재현이 아니라, 생성의 가지들의 부딪히는 평면으로서 사건들이다. 푸꼬는 이러한 관점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철학이 표면의 사실들(사건들)에서 재현을 다루면서도 왜 하나의 체계를 하나의 질서라고 하는지를 문제 삼았다. 그 하나라는 인식의 방향(양식, 일방향)이 인간을 광기에 몰아넣었고, 그 광기의 해체는 배열과 배치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도 눈치 챘다. 들뢰즈도 푸꼬에서 배치의 문제제기를 수용하지만, 그 배치가 원리와 질서에서 온다고 하거나 이에 견주어서 판단하고 설명하는 경우에, 마찬가지로 파라독사보다 깊은 함정에 빠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함정이 무엇인가? 라깡과 결별한 가타리는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대상화의 극한으로 상징계로부터 사고하는 것은 파라노이아의 극한이며, 그것은 언어놀이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과 실재성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상을 다루는 이들은 세 가지 위격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몰아가는 사유 극한을 진리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파라노이아에 있으며, 이런 통일성을 원리와 질서로 삼은 판단과 명제들은 가족제도, 외디푸스 신화, 국가체제, 자본 제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발설하게 된다. 우선 앙띠 외디푸스다 그리고 통시적으로 천개의 고원이다. 프쉬케는 내재의식(무의식)의 다발의 발산이며, 광점에서 빛의 발산이다. 분산, 발산, 스키조프레니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사회에 관한 시각에서 첫 작품에서 둘째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논문 「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를 통해 삶의 터전은 가족관계 대 동맹이라는 유비를 넘어서 폴리스 대 노마드의 관점을 제시한다. 이로서 그는 삶의 도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확장해 나간다. 리좀(Rhizome, 1976)을 출판하고 난, 뒤 1977년 파르네와 대담에서 천개의 고원의 내용을 미리 던진다. 「정치들 1(Politiques I, 1977)」에서는 다양체 용어를 응집 평면/내재성 평면(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과 유비적으로 쓰고, 「정치들 2(Politiques II, 1977)」에서는 다양체가 혁명기계로서 작동하는 전쟁기계라고 한다. 그는 정치와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가타리의 가로지르기 이상으로 세로지르기에서 의미를 부각시켰다.
우리가 세 작품을 짧게 설명하면, 사람들은 뭔가 빠뜨린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 지면상 다 말할 수 없지만, 후기구조주의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푸꼬, 데리다, 등등의 철학자들과 더불어서 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달리 생각하며, 그 시대에 앙띠 외디푸스는 철학계, 정신분석학계, 문학계가 충격에 싸여 일정시간 관망하는 것 같았다. 들뢰즈와 작가들 사이에 대담들을 보면, 대담자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들뢰즈가 대담자에게 말하듯이, 우리의 이야기들이 철학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철학사를 잘 읽지 않았다고 응수했다. 나로서는 이 말을 수긍한다. 철학사에서 자연(질료)과 이데아(관념)로 구별을 그리스 철학사에서 보아야 했을 것을, 수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재현을 다루는 철학은 로마로부터 또는 바울로부터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자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철학사를 모르고 누구의 침을 발라서 비판의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스피노자에게 버크가 있었고, 벩송에게 쟈그 마리땡이 있듯이 이들에거 철없는 비평가들이 있었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l’inconscient)을 발견했으나 무의식을 외디푸스 신화에 덮어씌우려 했다고 하면서, 대담 중에 내재의식의 발생(생성)의 측면에서 들뢰즈 자신이 나는 벩송주의자라고 한다.
벩송은 프로이트보다 일찍이 내재의식(l’inconscient)의 실재성을 MM에서 주장했다. 단지 단행본을 “내재의식(무의식)”을 따로 다루지 않았지만, 내재의식의 실재성을 정교하게 또한 의학 생리학의 연구들을 수렴하여 주장했다. 그런데 왜 벩송의 내재의식 즉 기억이 들뢰즈에서 주목받았을까? 의문이다. 그럼에도 박홍규의 논문을 보면 가로축과 세로축의 두 논리 전개방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가로지르기 다른 하나는 세로지르기이다. MM 159 쪽의 그림으로 보면 가로축과 세로축인데, 우리는 뒤집어서 밑에서 올라오는 세로축와 양 옆으로 퍼지는 가로축으로 읽으면 들뢰즈의 심층의 솟아남과 용출(탈주)의 개념작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면이라는 사건은 가로축이며 가로축의 두께(세대 층위)와 강도가 현실의 삶과 터전이다. 이 터전에서 배열과 배치에서 접속(코드 연결)에 따라서 사건은 다양하게 생성되고 작동한다. 그러나 이 평면을 연역적으로 이끄는 원리와 질서가 현실적으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님에도, 먼저으로 설정된(선가정) 통일성(동일성의 원리)이 현실을 재현의 극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프로이트-라깡류의 현실의 평면을 상징계와 더불어 해석하는 것이 이미 기존 외디푸스, 교회권, 국가권이 정립을 넘어서 진리와 절대적 기준으로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당대에 카톨릭 권세, 국가 권력추구, 지식 권위 등은 생성을 무시하고 무화시키며, 나아가 악의 축으로 만들려는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당시 왜 조용했을까? 이번에는 벩송을 비판하듯이 1930년대처럼 젊은 맑스주의자를 동원할 수 없었다. 전쟁의 공포를 조성할 수 없었으리라. 들뢰즈가 두 권의 책 서평에서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올 것이라 했다. 라깡과 사르트르가 세상을 뜨고, 푸꼬 마저 들뢰즈의 옹호발언을 했을 때, 그들의 탈출구는 어느 쪽이었을까? 프랑스 철학사에서도 이런 대립은 죽 있어왔다. 그리스 철학사에도 마치 이오니아와 엘레아학파의 대립처럼, 그러나 유일신앙의 지배 하에서, 즉 영원 상하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언제나 가부장(외디푸스)이 승리 하듯이 통일성이 승리했다. 가타리와 들뢰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프랑스와 달리 미국에서 이의제기를 했다. 그런데 그 소칼의 책도 프랑스어 판에서 들뢰즈가 빠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소칼의 문제제기는 들뢰즈가 말하듯이 철학사를 전혀 모르는 이가 제기한 파라독사의 하나일 뿐이다. 철학사를 무엇을 누가 어떻게 읽어야 할까? (4:16: 56VLD) (4:28, 56VLF)
44 철학적 사유의 확장: 사건과 다양체
LS에서 양식(일방향)의 사고가 파라독사에 빠짐을 알렸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진리와 명제화의 연결, 이접, 순접의 관계를, 삶의 터전에서 사건으로 바꾸어 보려고 했었다(AO, MP). 사건은 시뮬라크르로서 고른 평면위에서 생산 또는 생성되는 국면이기에, 개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푸꼬의 지적이 유효하다. 그러면 주체가 있기나 한가? 들뢰즈는 다양체 속에서 주체화의 과정을 보려고 한다. 다양체에서 개체화의 과정에서 현실로 들어난 평면과 달리 가상의 세계에 투사하는 방식은 상상을 넘어서 환상, 망상으로 치닫는다. 이는 삶의 실천이 아니라하더라도 인간의 사유의 확장이다. 이에 대해 새로운 장르로 등장한 영화라는 주제로 다루었고, 이런 사유의 발현과정이 디지털 시대(규소의 시대)에서 새로운 사유의 터전으로 제시되었다. 이 사유는 기존의 하나의 질서와 규약(코드)을 벗어나 개체들의 활동 각각이 다른 코드들을 제시한다. 탈코드라 하는데, 흥미 있게도 국가를 넘어선 제국에서 자본이 탈코드에 앞장서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문제는 통제 또는 재코드화에 관련되어 있다.
탈코드, 들뢰즈/가타리는 AO 에서 3+1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도대체 합하여 네 가지 항목은 무엇을 지적하고자 했던가. 다시 논리학으로 돌아가 이항의 관계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A, B, AB 세 가지 요소를 함께 집합처럼 다루면, 분명히 공집합(φ)이 있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고에서 공집합은 없는 것이었다. 세 가지의 경우에 일반화로서 개념을 성립시키면 두 경우의 상위로서 하나를 설정할 수 있으며, 즉 종과 류의 관계이다. 이런 수학적 논리를 언어논리 적용하는 것이 오류임을 두 저자는 강하게 비판했다. 생성은 이 셋을 생산하는 공집합(φ) 이 있고, 이 공집합의 터전에서 활동 또는 작동하는 내재의식이 욕망하는 기계였다. 가족관계와 동맹관계로 설정했던 것과 달리 폴리스(규약)과 노마드(탈규약)의 관점은 논리의 결합방식과 달리 사건의 결합방식에서는 전혀 다르다. 사건, 고른 평면 또는 응집 평면의 사건들의 나열은 비트켄슈타인의 사실들 묘사를 통한 세계의 설명과는 다르다.
다양체 발현으로 현실 평면 위의 사건들이 삶의 터전이다. 이 사건들이 언어적으로 연결, 이접, 순접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니다. 이 터전의 각 사건들은 서로 흐르고 엉키고 절단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각 나라의 정치제도(종교 교리와 진리치 포함)와 인민을 통제하는 방식도 다르다. 「통제와 생성(Contrôle et devenir 1990)」과 「통제 사회들에 관한 후기(Post-scriptum sur les sociétés de contrôle, 1990)」에서 이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다양체는 생성과 용출로서 고른 평면에 질서 있게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기존 제도와 체제(국가, 종교, 논리)에 맞게 통제되고 또는 예속되는 방식으로 고른 평면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나로서는 들뢰즈가 생성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프랑스 철학사 경과에서 그 나름대로 비판하고자 했다고 여긴다. 벩송이 보기에 하나의 통일 또는 기준을 삼는 사고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는데, 들뢰즈는 그런 위험성이 하나로 몰아가는 변증법에 있다고 보았다. 변증법이 언어에 결합 방식에서 “그러므로”와 닮은 종합으로 보면, 고른 평면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로 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생성에서 내재성의 평면위에는다른 방향들이 무수히 많다는 점에서 심층만큼이나 표면도 다양체이다.
프랑스 철학에서는 절대자를 옹호하는 헤겔의 변증법을 반대하는 철학자들을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라 하고, 키에르케골,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꼽는다. 이들은 모두 독일 바깥에서 활동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독일 지식인이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들뢰즈는 약간 달리 보았다. 니체의 중요성은 “권능”을 자연(심층) 속의 솟아나는 것으로, 그리고 절대자와 같이 여기는 초인을 다음세대 즉 아제 인간으로 바꾸어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무의식(내재의식)의 발견이 중요하지만, 그 내재의식이 현실적 표면에서 제도와 체제인 상징계(외디푸스)와 연관으로 설명했던 프로이트-라깡 계열을 비판하였다. 그는 맑스를 따로 한 권 또는 한 장으로 할애를 하지 않았지만, 앙띠외디푸스 이래로 종교와 정치의 비판에서 자주 인용하여 맑스의 관점에서 권력과 국가기구가 인민의 통제와 억압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벩송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진리 또는 체계를 주장하는 이들이, 공간을 바탕으로 원자론적 방식에서 개념(관념)을 조합하는 사고에 빠졌으며, 관념연합과 같은 방식으로 추리한다고 보았다. 벩송이 보기에 이런 통속적 유물론은 자연과 세계를 설명과 해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은 생성과 과정, 발산이 있으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직관과 재인식을 통하여 지속(시간) 속에서 파악해야 하며, 그 지속은 자연 또는 생명이 근원이고 기원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벩송에 매우 충실하게, 자연 즉 다양체에서 생성과 발현(용출, 탈주)을 보았다.
들뢰즈는 맑스주의자들처럼 국가 권력의 부재로서 아나키가 아니라, 권능의 응집으로서 아나키를 보았다.그 아나키(무권력, 무권위)가 정체 측면에서 인민이며, 인민이 곧 토대이다. 인류사의 과정에서 토지시대의 참주(황제), 산업시대의 국가, 자본시대의 제국의 위상은 절대자에 대한 유비적 일반화의 개념일 뿐이다. 이를 전복하는 것은 인민의 카마라드리(동지애)에서 나온다. 니체에 대해서 이미 말했지만, 유일 종교가 인민에게 행한 횡포와 공포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상부의 아버지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는 후배 또는 지나간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는 누구인가? 만들어져 가는 아제세대 즉 어린이의 주체화과정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점이 많다. 그는 무의식을 도식화하고, 1차 대전 이후에 삼위격을 받아들이면서, 손님(환자)을 삼위격의 코드 속에 다시 몰아넣는 것을 치료로, 그리고 코드의 상징을 종교인들처럼 독단(dogme, 교리)의 신앙으로, 천국을 미리 당겨서 주이상스(향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 철학자들의 비판하는 방식에서 국가, 사회(도덕), 종교가 위계질서 속에서 인민을 또는 새로운 사유를 억압하고 또는 질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벩송은 이런 억압의 역사를 잘 알았고 강의록에서 더 잘 드러난다. 물론 나로서는 들뢰즈가 이 네 편의 강의록을 읽지 않았지만 같은 길을 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벩송과 들뢰즈를 잇는 에밀 브레이어가 있다는 것이 아마도 좋은 연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문제는 심층에 대한 형이상학에 관한 문제거리일 것이다.그 중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다루는 방식이다. 벩송은 스피노자를 논리의 풀림으로 보았고, 라이프니츠는 개체들의 발현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는 그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나온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은총 다음으로 모나드를 다룬 방식을 읽는 벩송의 사유는 특이하다. 은총은 자연의 자기발현으로 보고, 그 속에 모나들이 각각이 자기의 발현으로 읽으면서, 세계라는 모나드와 개별자들의 모나드들사이에 연관을 라이프니츠는 반영(거울효과)처럼 보았는데, 벩송은 에너지의 발현(충력, 엘랑)으로 읽었다. 들뢰즈는 벩송의 그 강의록을 읽지 않았지만 스토아학파들의 우주전체와 부분들의 견해로 보는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raison, 자연섭리)이론을 다시 다룬다. 자연의 다양체는 다양한 가지들을 발현하는데, 벩송은 가지들 사이에 일치 또는 합의가 먼저 있으며 이를 공감이라고 했는데, 이는 플로티노스의 신아이스테시스(공감성)에서 가져왔다. 들뢰즈는 두께있는 평면에서 강도를 지닌 노마드들(가지들) 사이에 공명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공명이 규소의 시대에 개체들 사이의 의식의 교류인 정보소통망(SNS)의 흐름과 같을 것이다. 물론 자본의 제국은 탈영토화를 이룩하여 전지구적으로 흐르고 있으면서도, 3+1의 다른 하나로서 재영토화하려고 권력, 권세, 권위의 카르텔를 이룩하여 노마드들을 통제하고 재코드화하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연 즉 다양체는 생성과 생산, 창조와 발명을 길을 갈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서로 직접(접촉) 소통하지 않았지만, 벩송과 들뢰즈에서는 흐름에서 무매개적인 공감과 공명으로 다음측정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 즉 흐름과 생성의 사유에서 보면 벩송과 들뢰즈는 유비적을 닮았다. 벩송의 글 속에서 운동과 정지라는 개념만을 보면, 상층의 사고는 정지이고 심층의 사유는 운동이다. 그 운동의 사유는 벩송도 들뢰즈도 이오니아학파의 사상으로부터 이라 한다. 이오니아 사유에서 신화의 배격과 소크라테스의 참주의 배격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플라톤과 그리스인들(Platon, Les Grecs, 1992)」을 섰다. 들뢰즈는 철학의 사유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벩송이 동적 사유를 한 것은 그리스 사유에서 였다고 보는데, 이상하게도 로마의 황제정과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앙은 정태적 사고였으며,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보탬으로서, 권력, 권세, 권위의 패거리(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의 권위, 즉 자연의 숙명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심층철학의 마무리로서 새로운 기획을 했다고 한다. 그 제목이 “집합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라고 하는데, 우선 논문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을 썼고, 그리고 미발표로 논문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L’actuel et le virtuel)」을 써 놓았었다. 나로서는 집합과 다양체를, 원자론(에피쿠스)적 유물론 과 자연론(스토아 유물론)으로 읽고자 한다. 벩송은 자아, 자연, 세상을 다루면서 원자론적 관념연합의 정태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자발성에 의한 역동적 사유로 나갈 것을 말했다. 벩송이 MR에서 자연 즉 “우주가 신들 만드는 기계”라고 끝을 맺는다. 들뢰즈는 아마도 다양체로서 자연이 생명을 발현하여 현실에서 다양한 잠재성을 드러낸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들뢰즈가 공식적 기록으로 벩송의 MM에서부터 철학사를 달리 보는 관점을 가졌다고 한다. 그것은 MM의 3장 도식 셋째의 것으로, 우리나라의 박홍규선생님도 2500년 사유를 전환시킨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브레이어는 벩송의 1900년 초의 강의를 듣고서 철학사(7권)”를 쓰면서, 자연이법과 종교독단, 심층과 상층의 대비로 서술하였고, 로비네도 프랑스 철하사를 쓰면서 이법과 신앙의 두 축으로 설명했다. 그럼에도 사상사는 상층의 지배였으며, 벩송이 등장하기 전까지 덮여져 있던(들뢰즈 표현으로 질식할 것 같은) 심층을 표면으로 올린 철학자는 벩송이고, 이를 다양하게 잠재적인 것의 발현으로 세우려고 했던 철학자는 들뢰즈라 생각한다. (3:32, 56VLE) (4:01, 56VLF)
(22:15, 56VLF)
# 덧글 1.
소크라테스는 자기 고향에 사약을 받았고, 후기 스토아의 세네카는 제자인 네로가 반역의 죄를 씌우려 할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브루노는 교황청에 설득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아서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 벩송은 태어난 고향 파리에서 나찌 점령하에 유대인으로 외롭게 세상을 떴으며, 들뢰즈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반마케토니아 운동을 피해 어머니 고향으로 갔으나 1년을 더 살았고, 프로이트는 터전인 비엔나를 떠나 영국에서 환영받았지만 1년여를 살았다. 철학하는 태도에 차이가 아니라 차히가 있을 것이다. (56V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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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2.
들뢰즈의 마지막 기획이 영어 위키에서는 “맑스의 위대함”도 포함한다고 쓰여 있었다.나로서 이말의 의미는 중요하지만, 맑스가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로서 맑스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심층의 철학자인지를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스토아 초기의 문제까지 접근이 없다.
다른 하나는 지젝(Slavoj Zizek, 1949-)에 관해서 이다. 그는 파리 8대학에서 라깡의 사위인 밀리에(Jacques-Alain Miller, 1944) 더불어 연구했다. 그가 라깡을 비판한 들뢰즈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영어위키에서, 들뢰즈가 철학자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비역질“(buggery, enculage)"이라고 했는데, 위키의 주에는 출전이 ”Negotiations[Pourparlers (1990), p. 6.이라고 한다. 그리고 첫 인용자자 지젝이다. 국내에서도 들뢰즈를 비하할 때 “비역질”이라고 한다. - 프란체스코파를 종교재판으로 제거한 도미니크파가 있었다. 나로서는 스피노자에게 열렬한 제자(버그)가 로마를 가서 스피노자에게 악의에 찬 편지를 보낸다. 벩송에게도 꼴레쥬드 프랑스에 수강했던 마리땡이 앙시옹 프랑세즈를 만나 벩송의 비판서를 쓰고 2차대전 이후 교황청 대사로 간다. 나는 이것이 음모가 아니라, 사유방식이 다르면 다른 사유를 악마화하는 버릇이 여전하다고 본다. 그 악마화의 방식이 철학사에서 심층의 사유를 질식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제반 과학사의 발달은 용출하고 탈주하고 있는 중이라 본다.
*** *** *** 참조
공시태로 본 철학사의 일부:
# 도표1 : 두 상반된 방식의 통합은 가능할까?
동방의 사유 | <아테네> | 서방의 사고 |
이오니아학파 아르케와 질료 | (델로스 동맹) | 엘레아학파 수와 존재 |
아페이론 | 소피스트 | 페라스 |
직관 | (아르카디아) 신화 =>비극 | 체계 |
비의(오르페우스) | 신탁과 현실 | 참주(황제)제도 |
(노마드) 자연권 | 변론(설득)과 논쟁(논리) 민주정 | 통치권 (노모스) |
자연에서? | 시민(=영혼) | 보편체계에서(?) |
(생성, 변화), 운동 | 철학 아카데미아 | 수학 + 논리, (부동) |
* 20세기 세계 대전은 정치경제학적으로 동방과 서방이란 세계관을 낳았다.
우리나라는 이런 양극 체제의 산물로서 북체제와 남체제로 남았다.
* 21세기에는 혁명을 거친 소련과 중국 대 자본 집중화로 이루어진 미국과 서유럽이라는 양극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사이(가운데) 지형들이 여럿 있을 수 있다. 이 두 극 사이에서, 한반도의 양 체제로 분할과 유사하게, 우크라이나가 분할될 것인가는 역사의 과정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덧붙여 이번 전쟁을 대하는 태도에서 로만카톨릭은 우크라이나에, 그리스 정교는 러시아에 우호적이다.
# 도표2: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불가(佛家), 염처경(念處經), 유가(儒家) 대학(大學)
영 혼 | (벩)순수추억에서 지각으로 | (벩)지각에서 표상을 거쳐 대상화 | 싯달다 | 대학 | ||||
지성: noēsis epistēmē | noēsis | 인식 | Ideas | 이데아들 | 알 수 있는 것들 ta noēta | 법(法) | 정심 (正心) | |
dianoia | 추론 | Objets mathe. | 수학적 대상들 | 심(心) | 성의 (誠意) | |||
감성: doxa | piste | 신념 | Etres vivants | 물체들 | horata 감각적 대상들 aisthēta | 수(受) | 치지 (致知) | |
eikasia | 추측 짐작 | Images Ombre | 그림자들 | 신(身) | 격물 (格物) |
나로서는 ‘이뭣꼬’의 안다는 것은 영혼(psychē)이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55QKG)
# 도표 8: 통시적 흐름의 위상들
지속(la durée): 흐름(le flux), 과정(le procès), 긴 드라마(le long drame) = 삶(la vie)
프랑스 정치위상: 극좌파를 검은색, 좌파로부터 우파로 경향을 색깔별로 보면,
현玄[빛] | 빨강 | 주황 | 노랑 | 파랑 | 무색[흑] | |
플라톤 | 아페이론 | 그림자 | 사물(신체, 물체) | 수학적 형상 | 이데아들 | 페라스 |
아리스 | 질료인 | 효과인 | 형상인 | 목적인 | 원동자 | |
플로티 | [일자] | 누스 | 세계 영혼 | 개인 영혼 | 물체(신체), | 세상 |
데카르 | 영혼 | 신체 | 물체(자연학) | 정신 | [신] | |
스피노 | 신,자연 | 영혼 | 사유와 운동 | 능산적 자연 | 소산적 자연 | |
라이프 | [우주 ] | 물체 | 생명체 | 인간 | 우주 | 모나드들 |
벩송 | 지속 | 심층자아(Moi) | 표면자아(moi) | 사회자아(soi) | 신비자아(Soi) | [보살] |
박홍규 | 아페이론 | 운동 → ← 정지 | 페라스 | |||
들뢰즈 | 무권위 | 리좀(인민) | 노마드(용출선) | 국가기구 | 제국 |
(55PLD)
* 검은 색과 백색으로 양 끝을 나눈 것은 셸링과 헤겔에 대한 평에서 가져온 것이다. 셸링은 우주가 검다는 점에서, 헤겔은 절대자의 완전함이 빛과 같다는 의미로 볼 경우이다. 두 철학자의 사유의 전개는 도표에 넣지 않았던 것은, 나로서는 그쪽 전공도 아니라서,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를 원인에 대입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생성 과정을 탐구하면, 생명있는 존재들이 얼마나 오랜 노력이 죽 이어져 왔으며, 수많은 갈래 길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느끼게 한다. 여기 위의 도표는 단지 상징화된 용어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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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시태로 본 서양 철학사.
표베르그송18도표둘수정33
<표: 파>
<표: 나>
(23:12, 56V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