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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Ch. 4. 20 novembre 1923: Postulats de la linguistique, pp.95-139).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1980). pp. 145-213.(P.1000.)
*** 이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전제들」에서 저자들은 네 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다. I. 언어는 정보전달, 그리고 의사소통이리라. II.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있으리라. III.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IV.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저자들은 화용론을 기준으로 기호 체계라는 측면에서 “명령어”는 메타언어에 가깝다. 메타언어는 의미론의 메타언어와 달리 기준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명령이다. 화폐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화폐는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아닌 기호체계의 명령인 셈이다.
달러는 메타기호체계의 명령어 일 수 있다. 1944년에 이루어진 브레튼 우즈 체제는 그런 점을 감추고 있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란 ��순금 1온스를 미국 돈 35달러��라는 소위 금의 공정가격을 지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고정환율제도 실시) 그런데 그 체제가 무너진 것은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금태환이 불가능하게 되어, 1971년의 8·15 닉슨 조치(금태환 정지선언)는 달러위기의 타개를 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이 조치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경제 위기에서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달러의 기준화폐라는 권한도 상실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달러는 사실상 핵공포 하에서 세계 유통화폐로서 명령어 체계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령주식이란 말이 등장했다. 핵공포가 아니라도 지엽적으로 거의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들뢰즈 가타리 말로 날자가 있다. 2018년 4월 6일에 삼성증권에서 컴퓨터상으로 메타언어로 기능한 것같은 패스워드가 생겼다는 것이다. 유령주식이라고 들 한다.
두 저자가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보았으면 좀더 길게 설명했을 것이고, 우리나라 삼성증권의 유령주식을 마주했다면 하나의 절대적 “메타언어”의 위협에 대해 n-1을 말했을 것 같다. 윤구병은 국제화폐(달러)를 없애야 한다고 “아메리카 합중국 혁명공약”(한겨레, 2015 09 17)중에 <11조. 연방은행은 폐쇄되고, 국제 화폐, 연방정부 화폐는 폐지된다>고 이미 말했지만 말이다. (51PLB) - [제4장의 명령어(mot d'ordre):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1980)�� 화폐의 비실재성에 관한 이야기를 언어의 화용론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을 푸꼬는 읽었을 것이다. 푸꼬는 ��말과 사물(1966)��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말(le mot)과 화폐(l'argent)의 관계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근대성에 머물렀다는 알았을 것이다. 푸꼬가 들뢰즈를 다음 세기(21세기)에 주목받을 것이라는 것은 괜히 한말이 아닐 것 같다. 들뢰즈는 화폐가 유명론임을 또는 허상임을 알아챘다. 그 단어(mot)는 무(無)만큼 착각이지만, 이야기에서, 설화에서, 민담에서, 경전에서, 그리고 제국에서 그 단어만큼 명령(le commandement)을 잘 내릴 수 있는 방법, 그래서 잘 지배할 수 있는, 그래서 인민을 잘 억압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51PLC)]
* 언어학은 언어의 기호, 문법, 의미, 활용, 발생 등을 다룰 수 있다. 그런데 저자들은 이 장에서 1923년 정치경제학적 의미와 더불어 언어학의 기본전제들을 논한다고 하다. 푸꼬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1966)��이 언어와 사물(또는 사건) 사이의 기표와 표현에 대한 여러 학문(언어학, 자연과학, 경제학, 사회학)들의 전개 발전과정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 두 저자는 언어학이란 점에서 전제가 무엇인가? 서술의 차원이 아니라 진술의 차원, 즉 대상과 관계가 아니라, 이미 말해진 것을 전달하거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고 문장이나 명제의 진리치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진술의 진위 또는 대상과 대응 또는 정합이 아니라, 진술된 것 또는 언술이 세상에서 또는 인간관계에서 영향과 실행에 관여하는 방식(화행론)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51OMH)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봉기로 인민항쟁이 있었고 5월 27일까지 계속되었다. “명령어”에는 날짜가 있다고 필자들은 주장한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날짜가 있다. 그러면 누가 발포 명령을 했는가? 필자들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논지는 엄숙한 왕에 대항하는 인민의 리좀화이다. 그후 심층으로 리좀화가 이루어져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 선고 선언 등의 명령어는 날자가 있다. 즉 정확성이 있다는 것이다. (51PLB)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뢰즈의 배치는 리좀이 탈영토화를 거쳐서 실질적 활용론으로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리좀 전쟁기계]
*** 연대순 배치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145-213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923년 주제는 “1923년 11월 20일 막이 내렸다. 1년 전 오스트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끝은 갑자기 왔다. 좀 더 완만했던 프랑스 인플레이션에서처럼 놀랄 만큼 쉽게 끝이 왔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끝났던 것 같다. 11월 20일 옛 라이히스마르크는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되었다. 새로이 렌텐마르크가 도입되었다.”(51OLF)]
********내용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Ch. 4. 20 novembre 1923: Postulats de la linguistique, pp.95-139)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pp. 145-213.
- Le mot d’ordre. - Le discours indirect. - Mots d’ordre, actes et transformation incorporelles. - Les dates. - Contenu et expression: les variables dans les deux cas. - Les aspects de l’agencement. - Constantes, variables et variation continue. - La musique. - Le style. - Majeur et mineur. - Le devenr. - Mort et fuite, figure et métamorphose.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전제들 145
§04.00. 20 novembre 1923: Postulats de la linguistique, pp.95-139
Fritz Lang, Le testament du docteur Mabuse, (effigie du docteur Mabuse percée de balles) 642.
<그림> 명령어의 배치물: 프리츠 랑의 ��마부즈 박사의 유언(Das Testament des Dr. Mabuse 1933: Le Testament du docteur Mabuse)��의 한 장면, 즉 총알이 관통된 마부즈 박사의 초상(허수아비, 표적지?), 145
§04.01 Le mot d’ordre. 95 - 명령어 147
I. 언어는 정보전달, 그리고 의사소통이리라. (95, 147)
여교사가 학생에게 질문할 때 정보를 얻거나 하지는 않는다. 문법 규칙이나 계산 규칙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기호를 부과하고(ensigner)” 명령을 내리고(donner des ordres), 지시한다(commander). (95, 147)
하나의 명령은 항상 이미 다른 명령들에 의거하고 있으며, 그래서 명령은 잉여이다. 의무교육 기계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에게 문법이 갖고 있는 모든 이원적 토대(남성형-여성형, 단수-복수, 실사-동사, 언표의 주체-언표행위의 주체 등)와 더불어 기호계(記號系)의 좌표를 부과한다.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는 명령어이다.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인 공통감을 정의할 게 아니라 명령어를 발신하고 수신하고 전송하는 저 가공할 만한 능력을 정의해야만 한다. (95, 147-148)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 “남작 부인은 내게 자신의 선의를 확신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단지 내가 인정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점은 경찰이나 정부의 공식 성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신빙성이나 진실성은 거의 개의치 않고 단지 어떤 것을 준수하고 지켜야 하는지 만을 분명히 말한다. (96 148)
슈펭글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말의 근본 형식은 판단의 언표나 느낌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명령, 복종의 표시, 단언, 질문, 긍정과 부정”이며, “준비됐나?” - “예” - “합시다(Alley-y)”처럼 삶에 명령을 내리고 기업이나 대규모 노동과 분리될 수 없는 짧은 문장들이다. 단어는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동자에게 삽과 곡괭이를 주듯이 아이에게 언어와 펜과 공책을 준다. (96, 148-149)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il donne des ordres à la vie). 삶은 말하지 않는다. 삶은 듣고 기다린다. 모든 명령어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명령어의 경우에도 작은 사형선고(une petite sentence de mort)가 있다. 카프카는 그것을 <심판(un Verdict, 선고)이라고 했다. (96, 149)
§04.02 Le discours indirect. 97 - 간접화법 149
어려운 것은 명령어의 지위와 외연을 명확히 규정하는 일이다. 여기서 언어의 기원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명령어는 언어-기능, 즉 언어와 공통의 외연을 갖고 있는 기능일 뿐이기 때문이다. ... 이야기는 본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 타인이 말한 것을 전달한다. 풍문(Ouï-dire, 소문)인 것이다. (97, 149)
따라서 정념(la passion) 때문에 생긴 일그러진 시선을 쫓아내는 것으로도 충분치가 않다. “최초”의 언어, 또는 차라리 언어를 채우고 있는 최초의 결정물은 전의(轉義, le trope)나 은유(la métaphore)가 아니라 간접화법(le discours indirect)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유(la métaphore)와 환유(la métonymie)는 단지 결과일 뿐이며, 이미 간접화법을 가정하고 있는 경우에만 언어에 속한다. 하나의 정념 안에는 많은 정념들이 있고, 온통 소문이요, 횡성수설인 하나의 목소리 안에는 모든 종류의 목소리들이 잇다. 이 때문에 모든 담론(discours, 이야기)은 간접적이며, 언어에 고유한 전용(tranlation)은 간접화법이라는 전용이다. (97, 150)
방브니스트(Benveniste 1902-1976)는 꿀벌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비록 꿀벌이 유기체적인 코드화 과정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전의까지도 사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꿀벌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꿀벌은 자기가 본 것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전달받은 것을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꿀을 지각한 꿀벌은 지각하지 못한 다른 꿀벌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하지만 꿀을 지각하지 못한 꿀벌은 지각하지 못한 다른 꿀벌에게 메시지를 전달 할 수가 없다. 언어는 첫째사람으로부터 둘째 사람에게로, 본 사람에서 못 본 사람에게 가는데 그치지 않고 필연적으로 둘째 사람에게서 셋째 사람에게로 간다. (97, 150-151)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정보로서 기호의 소통이 아니라 명령어로 기능하는 말의 전달이다. 언어는 지도이지 사본(un calque)이 아니다. (97-98, 151)
오스틴(Austin)의 몇몇 유명한 논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잘 보여준다. 행동과 말 사이에는 어떤 언표가 직설법으로 어떤 행동을 기술한다거나 명령법으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는 다양한 외적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과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달성하는 어떤 행동(수행적 발화 – 나는 “맹세해”라고 말함으로써 맹세한다) 사이에는 보다 일반화하자면 말과 사람이 말함으로써 달성하는 어떤 행동(발화 수반행위 – 나는 “...인가?”라고 말함으로써 약속을 한다, 나는 명령법을 사용해서 지시를 내린다...등) 사이에는 내적인 관계도 존재한다. 말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행위, 언표와 그런 행위의 내재적 관계를 우리는 암묵적 전제 또는 비담론적 전제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런 전제는 하나의 언표가 다른 언표들이나 외적 행동과 관련된다는, 항상 설명 가능한 가정들과는 다르다(뒤크로 Ducrot). 수행적 발화라는 영역과 발화 수반행위라는 보다 광대한 영역의 발굴은 이미 세 가지 중요한 귀결을 가져왔다. (98, 151-152)
1) 이제 랑그를 코드(약호체계)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드는 설명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파롤을 정보의 소통으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명령하기, 질문하기, 약속하기, 주장하기는 지시, 의문, 서약, 단언이라는 정보를 알려주는 일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필연적으로 암묵적인 이 구체적인 행위들을 수행하는 일이다.
2) 의미론, 통사론, 나아가 음운론마저도 더 이상 화행론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언어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3) 랑그-파롤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파롤은 단순히 1차적 기표작용(=랑그)의 외부에서 개인이 랑그를 사용한 결과도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통사법을 다양하게 적용한 결과도 아니다. 반대로 랑그의 의미와 통사법은 랑그가 전제하고 있는 파롤의 행위와 무관하게 정의될 수 없게 되었다. (98, 152)
사실 우리는 발화 행위 또는 암묵적 전제가 어떻게 해서 언어와 공통의 외연을 갖는 기능이 되는지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수동적 발화(“그것”을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에서 발화수반 행위(말을 함으로써 행하는 것)로 확장되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의미 확장을 방해할 수 있고 수행적 발화를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99, 153)
그래서 방브니스트에 따르면 수행적 발화는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지시적 용어들의 속성으로 귀착된다(참된 인칭명사의 대명사인 <나>, <너> 등은 연동소embrayeurs로 정의된다). 이렇게 언어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주체성과 상호 주관성의 구조는 발화행위를 전제하는 게 아니라 설명해 준다. (99, 153)
하지만 주체의 의사소통이 이상적 정보보다 더 좋은 언어학적 개념인가? 오스왈드 뒤크로는 방브니스트의 도식을 뒤집어엎을 근거를 발전시켰다. (99, 153)
그리고 발화수반 행위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 사법적 행위나 그에 준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주체화의 과정(procès) 또는 주체의 소환을 랑그 속에 배분한다. 이것들이 랑그에 의존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소리다. 각 랑그에서 주체 형태소들의 역할 과 몫을 측정하는 이런 “행위-언표” 배치물을 해명하는데 있어 의사소통이 정보보다 더 좋은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상호주관성이 의미 생성보다 더 가치 있다고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간접화법에 대한 분석이 이런 관점을 확인해 준다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주체화는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배치물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99-100, 154)
§04.03 Mots d’ordre, actes et transformation incorporelles. 100
– 명령어, 행위, 비몸체적 변형 154
우리가 명령어(mots d‘ordre)라고 부르는 것은 명시적 언표의 특수한 범주(예컨대 명령법, 정언명법)가 아니라 모든 단어나 언표가 암묵적 – 즉 언표 안에서 달성되며 또 언표 안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발화 행위 – 와 맺고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명령어는 명령(des commandements)뿐만 아니라 행위들(les actes)과 관련된다. (100, 154)
언표(l’énonecé)와 행위(l’acte) 사이에 내적 연관, 내재적 연관은 있지만 동일성은 없다. 차라리 그 연관은 잉여(redondance)의 관계이다. 명령어는 그 자체로 행위와 언어의 잉여이다. 신문과 뉴스는 잉여를 통해 작용한다. 우리에게 생각해라 기억해둬라 기대해라 등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언어는 정보전달을 위한 것도, 의사소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언어는 정보의 소통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명령어의 전달이다. (100, 154-155)
잉여는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갖는다. 주파수는 정보의 의미생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공명(<나>=<나>)은 의사소통의 주관성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런 관점이 보여주는 것은, 정보와 의사소통, 나아가 의미생성과 주체화가 잉여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100-101, 155)
개인적인 언표 행위란 없다. 심지어 언표 행위의 주체도 없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언어학자들만이 언표 행위가 갖고 있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분석했다. 이 사회적 성격은 아직 충분치 않고, 여전히 외재적인 채로 머물러 있을 위험이 있다. (101, 156)
언표행위의 사회적 성격을 내재적으로 정초하려면 언표행위가 어떻게 그 자체로 집단적 배치물과 관련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니 분명 언표의 개인화와 언표행위의 주체화는 비인격적인 집단적 배치물이 그것을 요구하고 결정하는 한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간접화법, 특히 “자유” 간접화법은 모범적인 사례로 삼을 만하다. 자유 간접화법에는 선명한 변별적 윤관이 없다. (101, 156)
잉여가 단순한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또는 언표와 행위 사이에 단순한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 말이다. 집단적 배치물을 실재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언어에 내재하는 저 행위들(les actes), 언표와 더불어서 잉여를 만들거나 명령어를 만드는 행위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102, 157)
이 행위들은 특정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이 사회의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몸체적 변형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체(corps)”라는 단어에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정신체des corps moraux가 있다. 영혼les âmes은 육체des corps이다 등).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체들을 변용시키는 능동작용-수동작용(les actions et passions)과 몸체들의 비몸체적 속성일 뿐이며 언표의 “표현된 것”인 행위(actes)를 구분해야 만 한다. 뒤크로가 하나의 행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물어볼 때 그는 바로 사법적 배치물에까지 도달했다. (102, 157) [가문의 전통, 운동단체의 단결심, 비밀결사의 결기, 민족정기 등은 정신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피고가 죄인이 되는 변형은 순간적인 순수 행위 또는 비몸체적인 속성이며, 판사의 선고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평화와 전쟁은 서로 매우 다른 몸체 상태 또는 몸체의 혼합물이지만, 총동원령 선포는 몸체의 비물질적이고 순간적인 변형을 표현한다. (102, 157-158)
사랑은 몸체의 혼합이며, 화살에 뚫린 심장, 영혼의 결합 등으로 표상될 수 있다. 하지만 “난 널 사랑해”라는 선언은 몸체의 비몸체적 속성을, 사랑 받는 자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몸체의 비물질적 속성을 표현한다. 빵을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몸체의 혼합이다. 성체 배령(communier avec le Christ) 역시 영적인 몸체들 뿐 아니라 “실재적인” 몸체들 간의 혼합이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라는 몸체가 크리스트의 몸과 피로 변형되는 것은 언표의 순수한 표현된 것이다...(103, 158)
권총을 휘두르는 항공기 납치범의 위협은 분명 하나의 행동이다. 인질이 처형된다면 그것 역시 행동이다. 하지만 승객이 인질로 변형되고, 비행기-몸체가 감옥-몸체로 변형되는 것은 순간적인 비몸체적 변형이다. 이것은 영국인들이 “발화행위(speech-act)”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대중매체 행위(mass-media act)”이다. (103, 158-159)
§04.04 Les dates. 103 - 날자들 159
명령어의 이러한 순간성은 아주 기묘해서, 무한히 투사될 수도 있고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도 있다. 예컨대 루소가 볼 때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의 이행은 제자리 뛰기와도 같으며 <0의 순간>에서 일어나는 비몸체적 변형과도 같다. (103, 159)
1918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급속도의 인플레이션은 화폐체는 물론 다른 몸체들도 변용시켰던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일군의 “상황”이 하나의 기호적 변형을 갑자기 가능케 하는데, 그 변형은 땅이라는 몸체와 물질적 자산이라는 몸체 위에서 이론적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순수행위 또는 비몸체적 변형이었다. 그 1923년 11월 20일‥… (103, 159)
배치물들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끊임없이 변형들(des transformations)에 내맡겨진다. 우선 상황이 개입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수행적 언표는 그것이 수행되도록 만들어주는 상황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방브니스트는 분명히 보여준다. 누구라도 “나는 총동원령을 내린다”라고 소리칠 수 있다. (104, 160)
바흐친의 말마따나, 언어학이 상수들만 추출해 낸다면 어떻게 단어 하나만으로 완전한 언표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지를 결코 이해시키지 못할 것이다. 비록 언표행위 이론이나 랑그 이론에 완전히 내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언어학적 범주나 규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보충 요소”가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령어는 단어 자체를 언표행위로 만드는 변수이다. 명령어의 순간성과 직접성은 변형(la transformation)이 귀속되는 몸체들을 변주할 역량을 단어에 제공한다. (104-105, 161)
화행론(la pragmatique)은 언어의 정치학이다. 독일이라는 사회적 장에서 나치의 언표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관한 장 피에르 파예(Jean-Pierre Faye, 1925-)의 연구는 이점에 관한 모범적인 연구이다(그리고 이것은 이탈리아 파시스트 언표들의 구성에 관한 연구로 전사될 수 없다). (105, 161-162)
변형에 관한 그러한 탐구는 명령어의 변주(la variation)와 관련되어 있고, 비몸체적인 속성들의 변주와 관련되어 있다. 이 속성들은 사회체들의 내재적 행위들을 실행시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레닌(Lenine)의 텍스트 「슬로건에 관하여」(1917)에서 출발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레인 고유의 언표 유형의 형성을 좋은 예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텍스트는 이미 하나의 비몸체적 변형이었다. 즉 이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이 몸체로서 주저지기도 전에(avant que) 이미 대중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제1차 인터내셔널은 천재적인 솜씨로 새로운 유형의 계급을 “발명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porletaires de tous les pays, unissez-vous)! 하지만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단절하기 위해서 다시금 또 하나의 비몸체적 변형을 발명 또는 선포하였다. (105, 162)
이 변형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전위를 뽑아내고 다시 이것을 “당”에, 변별적 몸체로서의 새로운 유형의 당에 귀속시켜 버렸다. 비록 이 변형은 관료주의 특유의 잉여체계로 전락해버렸지만 말이다. 이는 레닌의 대담한 도박인가? 레닌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혁명>의 평화적 전개를 위해 2월 27일에서 7월 4일까지만 유효하며, 전쟁상태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이행은 대중으로부터 지도적 프롤레타리아로 가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로터 지휘하는 전위로 가려고 하는 이러한 변형을 내포했던 것이다. 정확히 7월 4일에 소비에트 권력은 끝났다. (105, 162-163)
이것을 외부적인 상황 탓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전쟁, 레닌의 핀란드로 도망가도록 몰아넣었던 봉기 등. 그렇다고 해도 비몸체적 변형이 귀속되는 몸체, 즉 <당> 그 자체가 조직화되기 이전인 7월 4일에 비몸체적 변형이 언표 되었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개개의 슬로건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 갖는 특수성들의 총체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수성은 언어학이 아니라 정치로 귀착될 뿐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안으로부터 언어에 작용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명령어(슬로건)가 바뀌자마자 정치는 어휘뿐 아니라 구조며 모든 문장 요소들을 변주시킨다. 한 유형의 언표는 그것이 화행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만 평가될 수 있다. (105-106, 105-106)
우리는 명시적으로 지령들(des commandements explicites)로부터 암묵적 전체로서의 명령어들로 나아갔다. 그리고 명령어로부터 명령어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 또는 비몸체적 변형으로 나아갔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 나아갔다. 명령어는 이 배치물의 변수에 해당한다. 이 변수들이 특정한 순간에 결정 가능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배치물들은 기호체제(un régime de signe) 또는 기호계적 기계(machine sémiotique) 안에서 결합된다. (106 163)
이 배치물은 횡설수설인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아마도이 무의식의 배치물을 백주에 드러내고, 속삭이는 목소리들을 골라내고, 부족(部族)들과 비밀스런 관용어들을 소환하는 일이며, 거기서 내가 <온자아(Moi)>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추출해내는 일이리라. <나(JE)>는 하나의 명령어이다. 한 정신 분열자가 말한다. “나는 목소리들이 <그는 삶을 의식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MP 107, 164 )
여전히 나의 직접 화법은 여기저기서 나를 가로지르는(traverser), 다른 세계나 다른 행성에서 온 자유 간접 화법이다. (ML 107, 165)
사람들은 거대한 간접화법 아래서 언어를 파악하는 소질을 갖고 있다. 부풀리고(le souffleur) 부풀려지는 능력이 되었건 잉여에 따라 한 곡조 안에 언제나 다른 곡조를 넣어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건 종교의 방언 능력이 되었건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되었건, 사람들은 정말로 무당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107-108, 165-166)
<언어 기능이 언어와 공통의 외연을 갖는 기능이라면 어떤 점에서 그렇게 정의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명령어, 집단적 배치물, 또는 기호체계는 언어와 혼동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어의 조건이다(표현의 초선형성). 그것들은 매번 조건을 채운다. 그것들이 없다면 언어는 순수한 잠재성으로 남을 것이다(간접화법의 초선형적 특징) (108 166)
이렇게 정의된 언어-기능(la foction-langage)은 정보전달적인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또한 정보 바깥에서 의미 생성을 추상해내거나 의사소통 바깥에서 주체성을 추상해 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주체화과정과 의미생성 운동이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기호 체계나 집단적 배치물이니까. 언어-기능은 명령어를 전달한다. 명령어들은 배치물에 의존하고, 배치물들은 자신이 기능하는데 필요한 변수들을 비몸체적 변형들에 의존한다. 언어학은 언어의 조건(la condition)과 실행과 랑그의 요소들의 사용(l’usage)을 규정해주는 화행론(기호계적인 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바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108-109, 167)
§04.05 Contenu et expression: les variables dans les deux cas. 109,
- 내용과 표현: 두 경우에서 변수들 167
II.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있으리라. 109 167
몸체적 변양들(des modifications corporelles)의 집합과 비몸체적 변형들(des transformations incorporelles)의 집합은 사회적 장에서 구분된다. 이 집합들 각각은 서로 다르지만 이 때 내용과 표현이라는 형식상의 구분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용은 형식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구-손이라는 극(極) 또는 사물의 학습>이라는 나름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09, 167-168)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은 서로 대응하지도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본성도 다르고 상호 독립적이고 이질적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런 독립성을 이론화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스토아학파는 몸체의 능동작용-수동작용(이들은 “몸체”라는 말에 가장 큰 외연을 부여했다. 즉 형식을 부여받은 내용이라면 모두가 <몸체>이다)과 비몸체적 행위(이것은 언표의 “표현된 것”이다)를 구분한다. (109, 168)
칼이 살에 박힐 때, 양분이나 독이 몸에 퍼져갈 때, 포도주 방물이 물에 떨어질 때에는 몸체들의 혼합(mélange de corps)이 있다. 하지만 “칼이 살을 벤다” “나는 먹는다” “물이 붉어진다”라는 언표는 이와는 본성상 아주 다른 비몸체적 변형(사건, événements)을 표현한다. 스토아학파의 천재성은 이 역설을 극단까지, 착란과 냉소에 이르기까지 몰고 가서 가장 진지한 근거 위에 정초했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최초의 언어 철학자로 평가되는 보상을 받았다. (109, 168)
스토아학파와 함께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앞의 역설을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된다. 즉 비몸체적 변형, 비몸체적 속성은 바로 몸체 자체에 대해, 몸체 자체에 대해서만 말해지는 것이라고, 비몸체적 변형, 비몸체적 속성은 언표의 표현된 것이면서도 몸체에 귀속된다(s’attribuent). 왜냐하면 몸체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질, 능동작용과 수동작용, 영혼 요컨대 자신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 자체가 몸체[이마쥬]이며, 표상 또한 몸체[이마쥬]이다! 따라서 비몸체적 속성이 몸체에 대해 말해진다는 것, 비몸체적인 표현된 것인 “붉어진다”와 몸체적 질인 “붉다”등을 구별하는 좋은 근거가 있다. (110 168-169) [영혼의 변용(여기서는 변양)과 신체의 변형이라는 구별이 있다.]
비몸체적 속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몸체에 귀속시킬 때 우리는 표상하거나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개입을 하는(intervient) 것이다. 그 개입은 하나의 언어 행위(un acte)이다. 이 개입은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반박하기는커녕 확인해준다. 모든 표현 또는 표현된 것은 내용에 끼워 넣어지고 개입한다. (110, 169)
순간적인 변형이라는 날실은 늘 연속적인 변양이라는 씨실 속으로 끼워진다(이로부터 스토아학파에게 날짜의 의미가 중요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어떤 사람이 대머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간부터인가?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다”와 같은 유형의 언표가 날짜나 명령어를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가?) 1917년 7월 3일, 8월 4일 밤, 1923년 11월 20일. 비몸체적 변형이 비몸체적이면서도 몸체에 귀속되고 몸체에 삽입되는 것이라면, 이 날짜들이 표현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비몸체적 변형인가?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은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어떤 평행 관계도 어떤 표현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110, 169)
푸꼬 말대로, 명령어(mot d’ordre)에서 사물의 “침묵하는 질서(ordre muet)”로, 또 그 반대 방향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111, 170)
하지만 우리가 “개입한다(intervenir)” 같은 애매한 말을 쓰는 것, 또 우리가 표현은 내용에 끼어들거나 끼워 넣어진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여전히 명령어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식의 관념론이 아닐까? 우리는 기원이 아니라 끼어드는 지점, 끼워 넣어지는 지점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것도 두 형식이 서로를 전제한다는 틀 안에서 결정해야 한다. (111, 170)
하지만 유죄판결 행위를 표현하는 기호 역시도 모든 작용들과 반작용들과 관련해서 보자면 탈영토화하는 기호일 수 있다(“너는 땅 위에서 도망치며 달아나는 자가 되리라”, 누구든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111, 171)
1923년 11월 20일 무렵 독일에서는 한편으로 화폐체의 탈영토화라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라이히스마르크에서 렌텐마르크로의 기호적 변형도 있어, 이것이 임무를 교대해 재영토화를 가능하게 했다. 1917년 7월 4일 무렵 러시아에서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임시정부라는 “몸체” 상태가 있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라는 비몸체적 기호계가 있어 일을 재촉하면서도 <당>이라는 몸체가 폭발하면 여지없이 교체되어 나가기도 했다. 요컨대 표현은 내용을 발견하거나 표상함으로써 내용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111, 171)
§04.06 Les aspects de l’agencement. 112 - 배치물의 측면들 172
이로부터 <배치물들>의 본성에 대해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축은 수평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두 개의 절편을 포함하는데, 그 하나는 내용의 절편이고 다른 하나는 표현의 절편이다. 한편으로 배치물은 능동작용이자 수동작용인 몸체들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이며 서로 반응하는 몸체들의 혼합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치물은 행위들이자 언표들인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며,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몸체적 변형이다. 하지만 [둘째 축] 수직 방향의 축에 따르면, 배치물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안정화시키는 영토화의 측면들 또는 재영토화된 측면들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실어 나르는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갖고 있다. 카프카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12, 172)
한편으로 배-기계, 호텔-기계, 서커스-기계, 성-기계, 법원-기계가 있다. .. 다른 한편에는 기호체제 또는 언표행위 체제가 있다. 각각의 체제는 나름 비물질적 변형, 나름의 행위, 나름의 상형선고 및 나름의 판결, 나름의 소송, 나름의 “법”을 가지고 있다. <증기선 화부>의 말은 기관실을 몸체로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화부의 담론은 제 나름의 고유한 형식을 갖고 있으며, 기관실의 유사성 없이 나름대로 전개 된다. (112, 172)
K, K의 기능은 모든 배치물을 구동시키는 도주선이나 탈영토화의 선을 가리키지만, 이 도주선이나 탈영토화의 선은 모든 재영토화와 잉여를, 아이, 마을, 사랑, 관료제 등의 잉여를 통과한다(passer). (112, 173)
이렇게 배치물은 네 가지 요소(la tétravalence)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봉건제라는 배치물을 보자. 우선 봉건제를 정의하는 몸체의 혼합체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땅의 몸체와 사회적 몸체, [2] 영주와 가신과 농노라는 몸체, [3] 기사라는 몸체, 그리고 [4] 말이라는 몸체 즉 새로운 연관으로 맺어지는 등자 뿐만 아니라 몸체와 공생들을 확보해 주는 무기들과 도구들과도 연관을 맺는 몸체, ...(112, 173) [혼합체라고 하였듯이, 문장 속에서 네 가지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내 나름으로 분리해 보았다. 들뢰즈 글의 불편함이 여기에도 있다. (51PKG)]
그리고 다른 축을 따라 기사와 그가 타는 짐승[말], 언표와 행위를 실어 나르는 탈영토화의 선이 있으며, 동시에 봉건제의 영토성과 재영토화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십자군 안에서 어떻게 조합되는가를 고려해야만 한다. (113, 173)
따라서 내용이 인과 작용에 의해 표현을 결정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표현이 내용을 “반영하는” 힘뿐만 아니라 내용에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해도 말이다. (113, 173)
사람들은 두 가지 상이한 형식으로 내용과 표현을 가로지르는 투쟁과 갈등을 가지고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이들 형식 자체는 모든 투쟁이나 갈등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들 형식간의 관계는 완전히 비결정적인 채로 남아 있다. 그 관계를 결정하려면 이데올로기 이론을 수정해야 하며, 어차피 생산성 속에 의미 생산이나 기호-가치라는 형태로 표현과 언표들을 도입해야만 한다. 여기서 생산이라는 범주가 표상, 정보, 의사소통의 도식과는 결별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113, 174)
물질적 또는 기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배치물은 하나의 재화 생산에 관련된다기보다는 한 사회 속에 있는 몸체들의 정밀한 혼합 상태에 관련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인력과 척력, 공감과 반감, 변질과 합체, 침투와 팽창이 있어 모든 종류의 몸체들을 서로 변용시킨다. 무엇보다 음식물 체제와 성의 체제는 몸체들의 혼합, 강제적이거나 필연적이거나 허용되어 있는 혼합을 조정한다. (114, 174-175)
도구는 <사회-자연>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을 정의하는 공생관계 또는 합체와 분리할 수 없다. 도구는 하나의 사회기계를 전제하며 사회기계는 자신의 “문(phylum)” 안에서 도구들을 취사 선별한다. (114, 175)
또한 배치물이 기계적 배치물과 집단적 배치물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절되는 것은 이 두 측면의 형식을 양화하는 탈영토화 운동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적 장은 갈등과 모순이 아니라, 그 장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에 의해 정의된다. 배치물에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심층구조와 표층 구조가 없다. 배치물은 오히려 자신의 모든 차원을 평평하게 만든다. 상호전제와 상호 삽입이 일어나는 바로 그 고른판 위에서(sur un même plan consistance) 말이다. (114, 175) [탈주선 행위 자체가 자유, 자치, 자율, 민주를 조성하려 가로지른다. 가로 지르는 한에서 고른판을 만든다.]
또 다른 오류(이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첫째 오류와 결합한다)는 표현의 형식만 있으면 언어 체계로서 충분하다는 믿음이다. 이 체계는 기표작용 하는 음운론적 구조 또는 심층의 통사론적 구조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체계는 온갖 방식으로 의미론을 산출하여 표현을 달성한다. (114, 175-176)
이 모든 기획에 공통된 것은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를 세우고, 이 기계를 상수들의 공시적 집합으로 건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착상된 기계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점에 반대하지 않는다. (115, 176)
촘스키의 추상적인 기계는 여전히 나무 모델에 기대고 있으며 문장들을 만들거나 조합할 때 언어적 요소들의 선형적 질서에 기댄다. 하지만 특히 간접화법과 관련해서 화행론적 값들이나 내적 변수들을 떠올리자마자 우리는 “초문장(hyperphrases)”을 끼워 넣거나 “추상적 대상”(비몸체적 변형)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초문장이나 추상적 대상은 초선형성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그 요소들이 더 이상 선형적 질서에 따라 고정되어 있지 않은 판, 즉 리좀 모델을 함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언어와 사회적 장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서로 침투하는 것은 추상적인 기계의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이다. 추상적인 기계는 배치물의 도표와 관련되어 있으니 결코 순수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115-116, 177)
§04.07 Constantes, variables et variation continue. 116
- 상수들, 변수들, 연속적인 변주 178
III.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116, 178
구조적 불변항(invariant)이라는 문제는 – 그 불변항이 원자적인 것이건 관계적인 것이건 간에 구조라는 관념 자체는 불변항과 뗄 수 없는데 - 언어학에 본질적인 문제이다. (116, 178)
불변항의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몇 가지 형식을 갖고 있다. 1) 한 랑그의 상수들(les consistanes) (대치 가능한 음운론적 상수, 변형 가능한 통사론적 상수, 생성 가능한 의미론적 상수). 2) 언어의 보편자들(les universaux) (음소를 변별적 자질들로 분해할 수 있음, 구문을 기저부(base)의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음, 의미를 최소의 의미론적 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음). 3) 요소들을 연계시켜 주는 나무들(les arbres), 그리고 모든 나무들에 적용되는 이항관계(촘스키의 나무 모양의 선형적 방법을 참조할 것). 4) 권리상 랑그와 공통의 외연을 가지며, 문법성을 갖느냐 아니냐를 따져보아 정의될 수 있는 언어능력(la compétences). 5) 직관적 판단은 물론 요소와 관계도 변용시키는 등질성(l’homogénéité). 6) 객관적 체계로부터 권리상 그것을 파악하는 주관적 의식(언어학자 자신의 주관적 의식)으로 계속해서 이행하면서 랑그의 “즉자”와 “대자”를 건립하는 공시성(la synchronie). (116-117, 178-179)
이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놀이할 수 있으며 어떤 요소를 떼어버리거나 세 요소를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요소들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즉 한 요소의 층위에서 다른 모든 요소들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랑그-파롤이라는 구분은 언어능력-언어수행이라는 구분으로 이어진다. (117, 179)
그러면 언어학자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언어능력의 층위를 다양화할 것이오. 또 체계에 화행론적 가치를 기꺼이 도입하겠소. 브레클레(Brekle, 1939-)는 바로 이런 식으로 “개인마다 특이한 수행능력”이라는 요소를 덧붙일 것을 제한했다.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의 요소 전체와 연결된 요소를 말이다. 하지만 만일 화행론을 군데군데 써먹는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어떤 점에서 “나” “약속하다” “알다” 같은 표현이 “인사하다” “명명하다” “비난하다(condamner)” 같은 표현보다 더 보편적이란 말인가? (117, 179)
마찬가지로 촘스키(Chomsky, 1928-)의 나무에 싹을 틔우는 선형적 질서를 부수려고 노력해 봐도, 선형적 질서를 끊어줄 화행론적 구성요소가 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거나 파생단계에서 지워버리는 한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고 리좀을 구성하지도 못한 것이다. 실로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추상적인 기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다. 추상을 보편자나 상수와 연결시킬 이유는 없다. 추상적인 기계가 변수나 변주들 주위에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추상적인 기계의 독자성을 지워 없앨 이유도 없다. (117, 179-180)
촘스키와 라보프(Labov, 1927-)의 상반되는 입장들을 살펴본다면 문제의 핵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있는 실재이다. 언어학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자주 입에 담는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대한 지적(une marque de fait)일 따름이다. 촘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추상화와 관념화를 필요로 하니, 권리상(en droit) 과학적인 연구를 가능케 하는 등질적 체계 또는 표준적 체계를 이 실재의 집합에서 재단해 내야 한다. 이는 표준 영어만을 연구한다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117-118, 180)
따라서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즉 라보프는 언어의 다양한 특징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화행론이라는 학문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학 외적인 사실을 걸고넘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라보프에게는 다른 야망이 있다. 그가 뽑아냈던 내적 변주의 선들(des lignes de variation inhérente)은 단지 발음이며, 화법까지도 변용시키는 “자유변이형(variantes libres)”이나 체계 바깥에 있으면서 체계의 등질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비관여적 특질들만이 아니었다. (118, 180-181)
체계적인 것은 변주 그 자체이다. 음악가들이 “주제(le thème), 그건 바로 변주(la variation)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변주에서 라보프가 보는 것은 각각의 체계 내부에서 작용하며, 이 체계가 체계 자신의 고유한 역량에 따라 이어지거나 건너뛰게하고, 체계가 자기 안에 갇히거나 원칙적으로 등질화되는 것을 금지하는 권리상의 구성요소이다. 라보프가 염두에 두는 변주는 분명 본성상 음성학, 음운론, 통사론, 의미론, 문체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는 것 같다. .... 라보프는 사실과 권리를 달리 분배하고자 했으며, 특히 권리 그 자체와 추상에 대해 달리 생각하고자 했다. 라보프는 흑인 청년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짤막짤막한 문장들을 말하면서 흑인 영어 체계와 표준영어 체계 사이를 열여덟 번이나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정확성을 기한다면 정작 자의적이고 불충분한 것은 두 체계간의 추상적인 구분이 아닐까? 어차피 [체계의] 형식들이란 대개 특정한 문장들이 우연히 결합된 결과를 가지고 언어학자들이 이런 저런 체계에 속한다고 결정하는 것이니까. (118, 181) [교향곡이 주제의 변주곡인가? 전위의 명령어(슬로건)인 테제는 세포들의 변주곡은 아닐까? 20세기 전사는 변주곡의 실천가가 아닌가?(51PKI)]]
그러니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여만 하지 않을까? 모든 체계는 변주 중에 있다는 것, 체계는 상수와 동질성 아니라 내재적(immanente)이고 연속적(continue)이라는 특성을 갖는 일종의 변화 가능성에 의해 정의 된다는 것, 그리고 체계는 아주 특별한 양태(가변적 규칙 또는 임의 선택적 규칙) 위에서 조정된다는 것. (118-119, 181-182)
라보프가 고정시킨 경계든 언어학이 내세우는 과학성이든 벗어나기는 해야겠지만, 내부에서 랑그를 가동시키는 연속적인 변주(cette variation continue)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은 하루에 몇 번씩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부단히 옮겨간다. 그 차례차례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사장처럼 말하며, 애인에게는 아이의 언어로 말하고, 잠을 잘 때에는 꿈의 담론에 빠지며, 전화가 울리는 갑자기 직업의 언어로 돌아온다. (119, 182)
“나는 맹세합니다(je le jure!)”라는 하나의 동일한 언표(un seul et même énoncé)를 보자. 그것은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말하는 것이냐,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애인 앞에서 말하는 것이냐, 증인이 법정에서 말하는 것이냐에 따라 각기 다른 언표가 된다. 그것은 마치 세 개의 시퀀스(또는 메시앙의 일곱 개의 시퀀스 위에 펼쳐진 네 개의 아멘)과도 같다. 그래도 아직 변수가 단지 상황적이라든가 언표가 권리상 상수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119, 182-183)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실재적이다(réelle sans être actuelle). 언표가 어떤 도약을 하더라도 변주의 선은 연속적이다. 연속적 변주를 만들어라! ... <나는 맹세한다!>라는 연속체(le continuum)와 그에 상응하는 변형들을 만들어라. 이것은 화행론의 관점이다. 하지만 화행론은 언어 내적(intérieure)이며 내재적(immanente)이 되었으며, 그 어떤 언어학적 요소들 그것의 변주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카프카의 세 가지 소송의 선이 있다. 그것은 가족 내에서 아버지의 소송, 호텔에서 약혼 소송, 법정 소송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환원”을 찾으려든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대하는 아이의 상황, 거세와 관련된 남자의 상황, 또는 법과 관련된 시민의 상황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드는 것이다. (119-120, 183-184)
§04.08 La musique. 120 - 음악 184
상수 또는 불변항은 그것의 영속성이나 지속성보다는 비록 상대적인 중심이긴 해도 그것의 중심으로서의 기능에 의해 정의된다. 음악의 조성(調聲, diatonique) 체계 또는 온음(tonal)계에서, 안정성과 견인력을 갖고 태어난 모든 조(調)들은 공명과 인력의 법칙에 따라 유효한 중심들을 갖는다. 그리고 이 중심들은 얼마 동안은 서로 변별되는 안정된 형식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중심화되어 있고 코드화되어 있으며 선형적이고 나무 유형인 체계이다. 사실 단“조”(le “mode” mineur)는 조성 음악에 도망치고 빠져나가는 탈중심적 성격을 부여한다. 단조의 음정은 특이하고 그 화음은 불안하다. 또한 단조는 장조를 모델로 또 표준으로 하여 정렬되면서 조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선법적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20, 184)
본질적인 것은 그 반대운동인 것 같다. 이 비등(飛騰, le bouillonnement)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조성 체계 자체를 변용시켰으며, 상대적인 조성을 보존하면서도 평균율을 해체하고 반음계를 확대했으며 새로운 선법(旋法)을 다시 발명하고 새로운 합성(alliage) 안에서 장조와 단조를 연결하고 매번 특정한 변수를 위해 연속적 변주의 영역을 획득했다. 이러한 비등은 일선에 등장하며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앞서 다듬어진 분자적 재료를 통해 음악에 항상 작용하는 우주의 비음향적 힘들을, 즉 순수 상태에 있는 잠깐 동안의 <시간(un peu de Temps)>, 절대적 <강렬함>의 알갱이 등을 들려주었다. <조성>, <선법>, <무조>란 말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주로서의 예술이 되기 위한 음악, 무한한 변주의 잠재적 선들을 그리기 위한 음악만이 존재할 뿐이다. (121, 185-186)
음악은 언어가 아니다, 음의 성분들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관여적 특질들(des traits pertinents)이 아니다, 음악과 언어 사이에는 대응 관계가 없다, 등의 반론이 여전히 제기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영역이 서로 대응 된다고 주장하지 않겠다. 우리가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열린 채로 두자는 것이며 미리 전제된 모든 구분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랑그-파롤의 구분을 거부해야 하는데, 그 구분은 표현이나 언표행위를 작동시키는 모든 종류의 변수를 언어의 바깥에 두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자크 루소는 <음악-목소리(Voix-Musique)>라는 관계를 제안했는데, 이 관계는 음성학과 작시법은 물론이고 언어학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 음악 속의 목소리는 언어와 음을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기에 변함없이 특권적인 실험축이었다. (121, 186)
이제 목소리는 더 이상 반주를 따라가지 않으며 실제로 <기계화>된다. 그것은 음악기계다. 동일한 음 판 위에서 가사부분, 선율부분, 효과음부분, 악기부, 그리고 결과적으로 전자(電子)부까지도 연장시키거나 중첩시키는 음악기계. 이것은 일반화된 “글리산도(glisando)”의 음 판이다. 통계적인 공간의 구성을 내포하며, 여기서 각각의 변수는 평균값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변수들과 함께 연속적 변주가 되는 주파수의 확률을 갖는다.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 1925-2003)의 ��얼굴(Visage)��이나 디터 슈네벨(Dieter Schnebel, 1930-)의 ��횡설수설(Glossolalie)��은 이점에서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122, 186-187)
때로는 첫째 온음계 목소리 부분이 비밀스러운 언어로 된 단음계적 하강에 자리를 내주며, 연속적인 방식으로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미끄러져 가고, 음 연속체를 점점 더 작은 음정으로 변조해서 마침내 모든 음정이 희미해지는 “파를란도(parlando)”에 합류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온음계 부분 자체가 계단식 건축물 같은 반음계적 층위들에 따라 조옮김되며, 노래는 종종 파를란도, 즉 특정한 음높이를 갖지 않는 순전한 대화에 의해 중단되기도 한다. 게다가 어휘의 발명이나 수사학의 문체(figure)보다는 언어의 공통 요소들 위에서 연속적 변주를 작동시키는 방식 때문에 가치를 갖게 된다는 점이 아마도 은어(argots), 전문어, 직업어, 술래 정하기 노래(comptines), 상인의 외침과 같은 비밀 언어들의 특징일 것이다. (122-123, 188)
비밀스런 언어는 상수에 의해 진해되며 하위-체계를 형성하는 암호나 숨은 코드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공적 언어의 변수들의 체계를 변주 상태로 이끈다. (123, 188)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화된 반음계>‥…이다. 어떤 요소들이건 그것들을 연속적 변주로 만드는 일은 아마도 새로운 구분을 낳는 조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 조작은 그 어떤 기성 구분도 선행하는 구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3, 188)
§04.09 Le style. 123 - 문체 189
문체(un style)라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바로 연속적 변주의 기법이다. 그런데 언어학이 세운 모든 이원론 중에서 언어학과 문체론을 분리시키는 이원론만큼 근거 없는 것도 없다. 문체란 개인의 심리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물이다. 한 언어 속에서 한 언어를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목록을 아무렇게나 만들어 보자면, 또 한 번 카프카, 베케트, 게라심 루카(Ghérasim Luca, 1913-1994),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를 언급하게 된다. (123, 189)
게다가 문체는 필연적으로 외적인 원천을 갖듯이, 관념은 외부로부터 먼저 오고 언어는 뒤따라온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이 저자들 각자가 나름의 변주 기법과 나름의 확장된 단음계를 가지며 나름의 속도와 음정을 미친 듯이 생산한다는 점이다. 「정열적으로(Passionément)」라는 시에서 게라심 루카의 창조적 말더듬기를 보라. 고다르의 또 다른 말더듬기도. 연극에서는 밥 윌슨(Bob Wilson)의 정해진 음높이 없는 속삭임, 카르멜로 베네(Carmelo Bene 1937-2002)의 올라가고 내려가는 변주들을. 말을 더듬기는 쉽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말더듬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124 189-190)
여기에 잉여의 새로운 형식이 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언어에는 언제나 동사“être” 와 접속사 “et” 사이에, est 와 et 사이에 투쟁이 있다. 이 두 단어는 발음이 같고, 스펠링이 비슷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언어 속에서 상수로 작용하며 언어의 온음계를 형성하는 반면 후자는 모든 것을 변주시키며 일반화된 반음계의 선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190)
우리 프랑스인들보다도 영어나 미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 줄다리기와 거기 걸린 판돈, 또 “그리고”의 결합가(valence)를 더 많이 의식하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걸작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여진다.” 그것은 말더듬기와 같은 것이다. 단지 파롤만이 아니라 랑그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이다. 외국인이 되어라.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경우만이 아리나, 네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어라. 2개 국어나 다국어 병용자로 존재하라. 124, 190-191
두 개의 국어나 다국어 병용자로 존재하라 그렇더라도 하나의 동일한 언어 안에서 방언이나 사투리(patois)도 쓰지 말고, 사생아나 혼혈아로 존재하라. 하지만 혈통을 순화시키면서, 문체가 언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가 강렬하게 되는 것은, 값과 강열함의 순수 역속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 안에서 비밀스펀 하위-체계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숨길 것 하나 없이도 모든 언어가 비밀스럽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절제와 창조적 뺄셈을 통해서만 이 결과에 이른다. 연속적 변주에는 금욕적 선(線)들이 있을 뿐이며, 약간의 풀과 맑은 물이 있을 뿐이다. (125, 191) - [윤구병의 혁명공약: 제2외국어를 하나 가져라 / 연속적 변주가 금욕적이라는 점에서 스토아의 걸승의 정신이 남아있다. 대혁명에서 로베스삐에르, 프랑-프러시아 전쟁이후 알프레드 비니의 “늑대의 죽음”에도 있다. 철학에서 라베송의 스토아에 관한 논문이 두 편 있다.]
우리는 아무 언어학적 변수든 취해서 이 변수의 두 상태 사이에 있는 필연적으로 잠재적인 연속선 위에서 변주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우리는 랑그의 상수들이 일종의 변이를 겪기를 기다리거나 변화가 파롤 속에 축적된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변화의 선 또는 창조의 선은 충만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추상적인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하나의 랑그는 필연적으로 개척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추상적인 기계는 기 가능성 또는 잠재성[들](potentalités)을 포괄해야함 한다고 예름슬레우는 지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재태(potentiel 또는 virtuel)”는 실재(réel)에 대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잠재태는 장조적인 것의 실재성이며 변수들의 연속적 변주화로서, 변수들의 상수적 관계의 현재적(actuelle, 현실적) 결정에만 대립된다. (125, 191-192)
예를 들어 비문법성은 더 이상 언어의 문법성에 대립되는 파롤의 우연적 성격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문법적 변수들을 연속적 변주 상태로 만드는 선의 관념적 성격이다. "he danced his did" 또는 “They went their came" 같은 커밍스(Cummings, 1894-1962)의 독특한 표현에 관한 니콜라스 뤼에(Nicolas Ruwet 1933-2001)의 분석을 다시 살펴보자. 그에 따라면 우리는 커밍스의 비문법적 표현들에 이르기 위해 문법적 변수들이 잠재적으로 거쳐 가는 변주들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he did his dance", "he danced his dance", "he danced what he did" ‥…, "they went as they came", "they went their way" ‥…). 뤼에는 커밍스를 구조.적으로 해석했지만, 우리는 지정형적인 표현이 올바른 형식들을 거쳐서 생산된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비정형적인 표현 자체가 올바른 형식들의 변주를 생산하고 형식들이 상수가 되지 못하게 한다. 비정형적 표현은 랑그가 탈영토화되는 정점을 이루며, 텐서(tenseur)의 역할을 한다. (125-126, 192-193)
<그리고‥…> 라는 단순한 표현도 언어 전체를 가로지는 텐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리고>는 하나의 접속사라기보다는 자신이 연속적으로 변주시키는 모든 가능한 접속사들의 비정형적 표현이다. 또한 텐서는 상수로도 변수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매번 상수의 값을 뺌으로써(n-1) 변수의 변주들 보장해준다. 텐서는 이 어떤 언어학적 범주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텐서는 간접화법에 대해서든 언표행위라는 배치들에 대해서든 본질적으로 화행론적인 값이다. (126, 193)
종종 사람들은 이런 변주가 언어 속에서 일어나는 창조의 일상적 작업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 아이, 광인의 몫으로 남겨진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추상적인 기계를 누적적 효과나 통합체적 돌연변이에 의해 이차적으로만 변경될 수 있는 상수를 통해 정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보편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일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독자적(singuilière)이다. 그것은 현실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잠재적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virtuelle-réelle)이다. (126, 193)
추상적인 기계는 항상 독자적(singulière)이며 개인의 것이건 집단의 것이건 고유명에 의해 지칭되는 반면 언표행위라는 배치물은 집단이 말하건 개인이 말하건 항상 집단적이다. 레닌이라는 추상적인 기계와 볼셰비키라는 집단적 배치물……. 이는 문학적에서건 음악에서건 마찬가지이다. 개체의 우위란 없다. 다만 <독자적인 추상>과 <집단적 구체>의 분리 불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배치물이 추상적인 기계와 독립해서 기능하지 않듯이 추상적인 기계는 배치물과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127, 194)
§04.10 Majeur et mineur. 127 - 다수와 소수 195
IV.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195
언어는 다질적인 가변적 실재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언어학자들이 과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등질적 체계를 다듬어내야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린가. 이러한 생각은 상수들의 집합에서 변수들을 추출해 내거나 변수들 사이에서 상수적 관계들을 설정하겠다는 것이다(음운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대치>를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랑그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모델은 랑그를 등질화하고 중앙 집중화하고 표준화하고 다수적이거나 지배적인 권력의 언어가 되게 하는 정치적 모델 바로 그것이다. (127, 195)
한 랑그의 통일성은 우선 정치적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지배적 언어는 때로는 넓은 전선(戰線) 위로 나가며 때로는 한꺼번에 중심으로 달려든다. 하나의 언어가 등질화되고 중앙 집중화되는 방식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공화국의 방식은 당연히 왕정의 방식과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덜 견고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수와 상수적 관계를 뽑아내려는 과학적 기도는 언제나 발화자들에게 그것을 부과하고 명령어를 전달하려는 정치적 기도를 겸한다. (128, 195-196) [미국의 점령에서 첫째 발표문(=명령어)은 모든 문서는 영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하여 한글을 배제되었다. 언어적으로 미국이 반도 남쪽을 포획한 것이다. ]
하얗게 소리 높여 말하라
그래 이 얼마나 굉장한 언어인가 ‘
고용하기에
명령하기에
일에 죽음의 시간을 정하기에
그리고 재충전하는 휴식 시간을 정하기에‥… (128, 196)
그러면 두 종류의 언어를, “고급(hautes)”어와 “저급(basses)”어, 다수어와 소수어를 구분해야만 하는가? 고급어-다수어는 상수의 권력(le pouvoir)에 의해 정의되며 저급어-소수어는 변주 역량(la puissance)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는 다수어의 통일성과 방언들이 다양성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128, 196)
말름베르그(Malmberg, 1889-1953))에 따르면 방언지도에서 명확한 경계선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인접지대 변천 지대, 식별불가능지대가 발견될 뿐이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퀘벡어에는 지방 억양의 변조와 변주 그리고 강세 악센트의 놀이가 풍부하다. 그러니 문자보다는 악보로 표기하는 편이 퀘벡어의 본질을 보존하는데 유리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방언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불확실하다. (128-129, 197)
예컨대 퀘벡어는 표준 불어에 대해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퀘벡어는 표준 영어에서도 별의별 음성학적ㆍ통사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변주한다. 반투 족의 방언은 모국어에 대해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로서의 아프리칸스 말(l’afrikaans) 및 흑인들이 다수어에 대항하는 말로서 선호하는 언어인 영어와 관련해서도 평가 된다. 간단히 말해 방언 개념이 소수어 개념을 해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소수어가 방언을 방언 나름의 변주 가능성들(ses propres possibilités de variation) 에 따라 정의해 주는 것이다. (129, 197)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이런 관점을 채택할 수 없다. 촘스키가 지적하듯이 방언, 게토 언어, 소수어는 어차피 등질적인 체계를 뽑아내어 상수를 추출하는 식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129, 198)
불어는 세계적 다수어의 기능은 잃었지만 항상성, 등질성, 중앙 집중성은 전혀 잃지 않았다. 반대로 아프리칸스 말은 영어와 투쟁하는 국지적 소수어가 되었을 때 등질성을 얻었다. (129, 198)
하나의 언어가 다수어의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다수어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 언어는 자신을 “소수어”로 변환시키는 연속적 변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를 오염시켰다고 비난함으로써 그 언어의 세계적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예를 들면, 영어의 영향에 반대하는 순수주의자들의 비판, “프랑글레(franglais)”에 대한 편협한 비난이나 먹물들의 비난). (130, 198).
그러면 라보프는 다수어이고 표준어인 언어일지라도 “자기 내부에서 생겨난” 변주들과 독립적으로 연구될 수는 없으며, 엄밀히 말해 그 변주들은 혼합적인 것도 외부적인 것도 아니라고 응답할 것이다. 촘스키, 당신은 등질적인 체계라는 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오. 내재적이고 연속적이고, 규칙적인 변주가 있어 그 체계는 벌써부터 작동을 멈춰버렸으니(촘스키는 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할까?) (130, 199)
따라서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사람들은 변수를 다룰 때, 때로는 변수들에서 상수들과 상수적 관계들을 뽑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변수들을 연속적 변주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130, 199)
경제학에서든 언어학에서든 보편자란 있을 수 없다. 보편자는 항상 변수들에 기반한 보편화나 획일화(=규격화)로부터 귀결된다. 상수(Consrante)는 변수(variable)에 대립되지 않는다. 상수는 변수를 연속적 변주로 다루는 방식과는 또 다르게 다루는 방식이다. (130-131, 200)
“다수(majeur)”와 “소수(mineur)”는 두 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사용 또는 두 가지 기능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2개어 병용이라는 예는 분명 좋은 예지만 단순히 편의상 좋은 예라고 하는 것뿐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체코어는 독일어에 비하면 당연히 소수어이다. 하지만 프라하의 독일어는 빈이나 베를린의 독일어에 비하면 이미 잠재적 소수어이다. 독일어로 글을 썼던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는 독일어를 소수어로 창조했다. (131, 200-201)
사실 빈곤은 상수의 제한이며, 과잉이 변수의 확장인 것처럼, 모든 성분들을 끌어들이는 연속체를 전개하기에 이른다. 이 빈곤은 결핍(un manque)이 아니라 일종의 공(空, un vide) 또는 생략(une ellipse)인 데, 우리는 이것 덕분에 상수에 들어가지 않고도 그 윤곽을 그릴 수 있으며 상수에 자리 잡지 않고도 위나 아래로부터 상수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과잉은 수사학의 문체나 은유나 상징적 구조가 아니라 활발하게 바꿔 말하기인데, 이것은 또한 언표 속에 간접화법이 널리 현존하고 있음을 증언해준다. 빈곤과 과잉 속에서 좌표는 거부되고 상수적 형식은 해체되며 잠재 차원의 차이들(différences de dynamique)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 언어가 이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그 언어는 악보 표기법뿐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도 더 가까워진다. (132, 201)
빼기(soustraire)와 변주, 삭제(retrancher)와 변주, 이것은 똑같은 조작이다. 따라서 다수어 또는 표준어에 대해 소수어의 특징은 빈곤과 과잉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표준어를 소수어로 취급하기, 다수어의 소수화-되기는 절제(une sobriété)와 변주(une variation)가 있을 뿐이다. (132, 201-202)
소수어는 자기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어는 다수어와 관련해서만 존재한다. 소수어는 다수어 그 자체가 소수어가 되도록 다수어를 투자하는 것이다.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하기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 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소수파”라 불리는 작가들의 힘이며, 이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유일하게 위대한 작가들이다. (132-133, 202-203)
아직 알려지지 않은 소수어들을 그려내기 위해서 다수어들 정복하기. 소수어를 사용해 다수어 자아내기(faire filer). 소수파 작가는 자기 자신의 언어 속에 있는 이방인이다. 만일 그가 사생아라 해도, 만일 그가 사생아로서 살아간다 해도, 이는 언어들을 섞고 혼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언어에 텐서들(des tenseurs)을 설치하여 자기 자신의 언어를 빼고 변주하기 때문이다. (133, 203)
§04.11 Le devenr. 133 - 생성 203
소수파라는 개념은 매우 복합적이다. 소수파는 음악, 문학, 언어학을 참조할 뿐만 아니라 법률, 정치도 참조한다. 소수파와 다수파는 단지 양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수파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인 도량형 원기(原器, mètre-étalon), 즉 표현이나 내용의 상수를 내포하고 있다. (133, 203)
심지어 맑스주의자조차 “거의 항상 서른다섯 살 이상의 자격을 갖춘 남성 국민 노동자의 관점에서 헤게모니를 표출했다.” 따라서 상수가 아닌 어떤 규정이 본성상, 수와 무관하게 소수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하위-체계 또는 바같-체계로 고려될 수 있다. 당신의 선택이 상수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당신에게 선택지를 주는 선거 활동이나 다른 모든 활동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당신은 사회의 변화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133, 203-204) (바로 이어지는 문장)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역전된다. 왜냐하면 다수파는 추상적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항상 <아무도 아닌 자(Personne)>, 즉 율리시즈이지만,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dévier)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le devenir tout le monde)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son devenir potentiel)이기 때문이다. 다수파라는 “사실(fait)”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아닌 자>로부터 나온 분석적 사실이며 모든 사람의 소수파-되기에 대립된다. (133-134, 204) [이름이 없는 자(oudis) Personne으로 번역했다. 영어로는 nobody라고 했던가?]
다수파 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결코 생성이 아니다. 생성(le devenir)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여성은 그 수와 관계없이 상태 또는 부분집합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소수파이다. (134, 204)
하지만 소수성이 가치있는 생성의 씨앗, 생성의 결정체가 되는 것은 중간치나 다수성의 통제 불가능한 운동과 탈영토화를 열어 놓을 때뿐이다. 이런 이유로 파졸리니(Pasolini 1922-1975)는 자유 간접에서 본질적인 것은 언어 A나 언어 B에 있지 않고 오히려 “실제로 언어 B가 되어가고 있는 언어 A에 다름 아닌 언어 X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소수 의식의 보편적 형상은 만인이 생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창조란 바로 이 생성(ce devenir) 이다. (134, 205)
확실히 방언 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 많으나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 접속시키고(en les connectant) 결합함으로써(en les conjuguant)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imprévu)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134-135, 205)
다수파의 양식(le mode majeur, 장조)과 소수파의 양식(le mode mineur, 단조)은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연속적으로 변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령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명령어는 언표행위의 변수로서 랑그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며 요소들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방식을 규정하니, 명령어야 말로 변수의 두 가지 방향과 변수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메타언어”인 것이다. (135, 206)
“이렇게 해라”, “그러지 마”라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아들이 자신의 인격personne의 한 지점에서 체험하는 작은 사형 선고와 분리될 수 없다. 죽음, 죽음. 이것이야 말로 유일한 판단(=심판)이며 판단을 체계로 만드는 자이다. 판결. 그러나 명령어는 그 자신[자체]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고의 외침(un cri d’alarme)이나 탈주의 전언(un message de fuite, 계시) 같은 것이다. (135, 206)
카네티가 사자의 포효를 원용한 것은 옳았다. 사자의 포효는 도주와 죽음을 한꺼번에 언표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는 명령을 받고서 죽음을 갈망하기도 하지만 도망치기도 한다. 유대 예언전통은 죽으려는 소망과 도주의 약동을 신적 명령어(le mot d’ordre divin)에 용접시켰다. (135, 206-207) [그런데 신적인 부름을 받은 자 즉 자연의 방향을 잡은 자는 드물고, 일은 지난하다.]
§04.12 Mort et fuite, figure et métamorphose. 136 - 죽음, 탈주, 모습, 변신 207
여기서 명령어의 첫째 측면, 즉 언표의 표현된 것으로서의 죽음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것이 앞의 요구사항에 부합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죽음이 본질적으로 몸체에 관련되고 몸체에 귀속된다고 할지라도, 죽음은 비몸체적 변형이라는 진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죽음 자체의 직접성과 순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죽음 앞에 오는 것과 죽음 뒤에 오는 것은 능동작용과 수동작용의 오랜 체계, 몸체들의 느린 노동일 수 있다. 죽음은 그 자체로서 능동작용도 아니고 수동작용도 아니다. (136, 207)
한편으로 죽음은 몸체들과 몸체들의 형식들과 상태들을 분리시키는 저 건널 수 없는 관념적 경계로서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주체가 형식 또는 상태를 바꾸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조건 – 그것이 비록 통과제의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 으로서 존재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카네티는 “변형의 금지(l’énantiomorphose)”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확고부동하고 엄숙한 <주인>에 기대는 체제이다. (136, 207)
“변형 금지가 반복되면 세계는 축소된다(…) 변형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일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일 게다. (…) 죽음 그 자체가 가장 엄격한 경계로서 계급들 사이에 놓이는 것이다.” 그런 체계 속에서 모든 새로운 몸체는 서로 다른 주체들뿐만 아니라 대립가능한 형식 또한 만들어내야 한다. 죽음은 그 형식을 보든 실체를 보든 일반적으로 모든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몸체적 변형이다(가령, <당(黨)>의 몸체는 변형을 금지하는 조작없이는, 그리고 제1세대를 제거하며 나타나는 새로운 전사들 없이는 뚜렷이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136, 208)
우리가 여기서 표현 못지않게 내용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사실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개의 판이 하나의 배치물 속에서 몸체의 체제와 기호의 체제로 가장 분명히 구분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것들은 여전히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 (136, 208)
예컨대 예름슬레우가 지적하듯이,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은 음성적 단위들로 나뉘고 내용은 사회적, 동물학적, 또는 물리적 단위로 나뉜다(“송아지” 어린-수컷-소로 나뉜다). 이항성의 그물망, 나무 형태의 그물망은 양쪽 모두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두 판 사이에는 그 어떠한 유사성도 없으며, 그 어떤 분석적 대응 관계나 일치 관계도 없다. (137, 209)
모든 요소들[내용 요소들과 표현 요소들]은 추상의 정도도 서로 다르고 탈영토화의 정도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 요소들은 매번 그러한 명령어와 그 윤곽 위에서 배치물 전체를 재영토화 한다. 종합 판단의 학설이 갖는 의미는 <선고(la Sentence)>와 <형상(la Figure)> 사이에, 즉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 사이에 선험적인 연결(un lien apriori)(동형성, isomorphisme)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37, 209)
그러나 명령어의 또 다른[둘째] 측면, 즉 죽음이 아니라 탈주를 고려하면 변수들은 이제 새로운 상태, 즉 연속적 변주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극한으로 이행은 이제 비물질적 변형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몸체들에 귀속된다. (137, 209)
여기서 소수파 과학들과 다수파 과학들을 극복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곡선이 되려 하는 파선(破線)의 도약, 선과 운동에 관한 모든 조작적 기하학, 변주를 만드는 실용주의적 과학. 이것들은 유클리드적 불변항을 사용하는 왕립과학 또는 다수파 과학과 다르게 진행되었으며 오랜 의심과 억압의 역사를 거쳐 왔다(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아무리 작은 간격이라도 엄청난 것이다. 변형의 대가는 변함없는 엄숙한 왕과 대립된다. (137-138, 210)
[표현 형식과 내용 형식] 이 두 판의 구별은 고른판 위에서 완전히 상대적인 구분이 된다. 탈영토화가 절대적(absolu)이 되고, 배치물을 휩쓸어가는 고른판 위에서. 이 때 절대(Absolu)는 분화되지 않는(indifférencié)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한히 작게”된 차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질 속에서 만들어진다. (138, 210-211)
신시사이저(un synthétiseur)는 모든 매개변수들을 연속적 변주로 만들며, 점차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마침내 방식으로 서로 전환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접합접속이 있자마자 공통질료가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만 우리는 추상적 기계, 또는 배치물의 도표에 이른다. 질료가 형상 또는 형식을 부여받는 실체를 대체했듯이, 신시사이저는 판단을 대체했다. 에너지론, 물리-화학, 생물학적 강렬함을 한쪽으로 묶고, 기호계, 정보이론, 언어학, 미학, 수학적 강렬함을 다른 한쪽으로 묶는 것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강렬성들의 체계들의 다양성은 탈주의 벡터들 또는 긴장들이 전체 배치물을 낳자마자 그 배치물에 결합되며 그 위에서 리좀화한다(rhizomatiser). (138-139, 211) .
어떤 경우에 삶과의 관계가 강경해져야 하고 어떤 경우에 숙여야 하는가? 어떤 순간에 반항해야 하고 어떤 순간에 항복하거나 침착해져야 하는가? 또 언제 건조한 말을 해야 하며 언제 감정이 넘치는 말을 또는 오락적인 말을 해야 하는가? 절단이 됐든 단절이 됐든 오직, 연속적 변주만이 이러한 잠재적 선을, 삶의 이러한 잠재적 연속체를, “일상 뒤에 있는 본질적 요소나 실재”를 끄집어 낼 수 있다. 헤르초크(Werner Herzog, 1942-) 영화에는 빛나는 언표가 있다. 영화 속의 인물은 자문한다. <이 대답에 누가 대답할 것인가?> (139, 212)
명령어 속에 삶은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명령어 아래에는 패스워드(des mots de passe)가 있다. 통과로서 존재하는 말들, 통과의 성분들이 있다. 반면 명령어는 정지들, 지층화되고 조직화된 구성물들을 나타낸다.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이라도 분명 이중의 본성이 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출하라. 명령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켜라. (139, 212-213)
(노트6:35, 43PKK) (10:40, 51OLI) (16:24, 51PKB) (23:22, 51PKJ) (28:15, 51PLB) (31:8, 51PLC)
# 참조 제4장의 목차를 정리해 보다가 ..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전제들」에서
I. 언어는 정보전달, 그리고 의사소통이리라. (95/147), §04.01 명령어(Le mot d’ordre. 95/147 ), §04.02 간접화법(Le discours indirect. 97/149), §04.03 명령어, 행위, 비몸체적 변형(Mots d’ordre, actes et transformation incorporelles. 100/154), §04.04 날자들(Les dates. 103/159)
II.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있으리라. (109/167), §04.05 내용과 표현: 두 경우에서 변수들(Contenu et expression: les variables dans les deux cas. 109,/167). §04.06 배치물의 측면들(Les aspects de l’agencement. 112/172),
III.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116, 178), §04.07 상수들, 변수들, 연속적인 변주(Constantes, variables et variation continue. 116/ 178), §04.08 음악(La musique. 120/184), §04.09 문체(Le style. 123/189)
IV.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127/ 195), §04.10 다수와 소수(Majeur et mineur. 127/195), §04.11 생성(Le devenr. 133/203), §04.12 죽음, 탈주, 모습, 변신 (Mort et fuite, figure et métamorphose. 136/207)
이 「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전제들」에서 저자들은 네 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다. I. 언어는 정보전달, 그리고 의사소통이리라. II.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있으리라. III.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IV.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저자들은 화용론을 기준으로 기호 체계라는 측면에서 “명령어”는 메타언어에 가깝다. 메타언어는 의미론의 메타언어와 달리 기준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명령이다. 화폐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화폐는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아닌 기호체계의 명령인 셈이다.
달러는 메타기호체계의 명령어 일 수 있다. 1944년에 이루어진 브레튼 우즈 체제는 그런 점을 감추고 있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란 ��순금 1온스를 미국 돈 35달러��라는 소위 금의 공정가격을 지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고정환율제도 실시) 그런데 그 체제가 무너진 것은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금태환이 불가능하게 되어, 1971년의 8·15 닉슨 조치(금태환 정지선언)는 달러위기의 타개를 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이 조치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경제 위기에서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달러의 기준화폐라는 권한도 상실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달러는 사실상 핵공포 하에서 세계 유통화폐로서 명령어 체계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령주식이란 말이 등장했다. 핵공포가 아니라도 지엽적으로 거의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들뢰즈 가타리말로 날자가 있다. 2018년 4월 6일에 삼성증권에서 컴퓨터상으로 메타언어로 기능한 것같은 패스워드가 생겼다는 것이다. 유령주식이라고 들 한다.
두 저자가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보았으면 좀더 길게 설명했을 것이고, 우리나라 삼성증권의 유령주식을 마주했다면 하나의 절재적 “메타언어”의 위협에 대해 n-1을 말했을 것 같다. 윤구병은 국제화폐를 없애야 한다고 혁명공약에서 이미 말했지만 말이다.
(51PLB)
첫댓글 형용사 아르카이오스(ἀρχαῖος)의 기원에 명사 아르케(ἡ ἀρχή, -ῆς)가 있다. 이 명사는 그리스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시작(commencement) (여기에서 ἀρχαῖος(오랜)이 나왔다) 과 명령(commandement) 이다. (p. 55) 그리스 언어 강의 1(Cours de langue grecque, livre 1), 프롱티에(Alain Frontier, 1937-), Belin, 1976(1990) P. 192. [요한복음 첫 문장 참조] - [동사 아르코(ἄρχω), commander(명령하다); commencer(시작하다); se mettre à(~하기 시작하다)] (54Q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