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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체육사랑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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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스포츠 스크랩 월드컵과 함께 한 응원문화
김용수 추천 0 조회 55 15.03.12 2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30년대, 응원단의 텃세? 아직은 과도기

 

우루과이에서 제 1회 월드컵 축구가 시작되었던 1930년. 경기장에서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인데도 당시에는 이를 잘 수용하지 못해 학교 응원단끼리의 대항전 등 과열응원이 있는가 하면 응원단의 텃세도 만만치 않았던 시절. ‘동대문운동장’의 옛 이름인 ‘경성운동장’이 1925년 완공되면서부터 관중석, 박수소리, 승리의 환호 등 초창기 응원문화가 태동되었다.

1969년, 소극적인 성격의 전환점, 월드컵 응원

1969년 경향신문의 한 기사에는 “이번 대회에서 성적 못지 않게 큰 소득이 있었던 것은 한덩어리로 뭉쳐 열렬히 응원을 한 국민의 단결된 모습이라 하겠다. 이것은 남의 앞에 나와 응원하는 것을 쑥스럽게 여기던 우리의 소극적인 성격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 되었다.”라고 월드컵 축구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당시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던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의 지역 예선15-A조에서는 호주가 1위, 한국이 2위, 일본이 3위를 차지했다.

1973년, TV, 라디오, 다방, 버스에서 귀를 기울이던 시절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시내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빈 버스만 오고 갔다. 특별히 모일 곳이 없던 때라 다방이나 TV가 있는 상점으로 몰려가거나 집에서 가족들과 TV앞에 모여 앉아 응원을 했다. 1973년은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전에서 차범근 선수가 연장 후반 극적인 결승골을 넣어 스타로 떠올랐던 때이기도 하다. “내 발끝 하나에 운동장에 꽉 찬 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가 일순간 번쩍 들렸다가 내려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모으는 월드컵의 응원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1985년, 치어리더와 밴드로 조직적인 응원

축구협회는 과거 올림픽에서의 경험을 거울삼아 한국선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잠실올림픽경기장에 8만 관중을 동원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직적인 응원을 위해 치어리더를 선발하고 밴드까지 동원했다.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는 한국과 말레이지아의 축구경기가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궂은 날씨에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만 관중들은 박자 하나 틀리지 않게 3.3.7 박수 등으로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리를 뜨거나 우산을 펴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질서의식이 고취된 단합된 응원이었다.

1994년, 연예인들의 응원출정, 조직적인 응원

1994년 6월 미국에서 열렸던 월드컵에 한국의 연예인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월드컵 응원단이 참석했다. 가수 김흥국은 전년도 월드컵축구 응원단장으로 활약한 데 이어 100여 명의 연예인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떠났다. 가수 김광진, 이승철, 임병수, 현인, 코미디언 한무 등과 조직적인 응원을 위해 11명의 치어리더를 선발하는 등 응원문화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5년, 순수한 응원문화를 꿈꾸는 ‘붉은 악마’의 등장

 

축구에 대한 열정을 담아 1995년 12월에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지원 클럽인 붉은 악마(Red Devil)가 창설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Great Hankuk Supporters Club)’이라는 임시이름으로 프랑스월드컵 예선부터 조직적 응원을 시작했다. ‘붉은 악마’는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나라 대표팀이 예상치 못한 4강에 오르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에 외국 언론들이 ‘붉은 악령(Red Furies)’ 등으로 표시한 데서 유래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50명 정도 참석했으나 2002년 월드컵부터 5천여 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7만여에 이르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2002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돋보인 거리응원

2002년 6월은 한ㆍ일월드컵 4강 신화와 ‘붉은 물결’의 감동이 함께했다. 국민들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거리에서 응원을 하거나 스크린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함께 응원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붉은 악마를 자청한 것이다. 이렇게 2002년 자발적 ‘거리응원’이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게 된 해였다. 하지만 월드컵 같은 국제대회에만 열띤 응원을 한다든지, 응원 후 거리에 쓰레기가 뒹구는 모습 등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2010년, 소통문화를 만든 2010월드컵

 

지난 6월 어마어마한 인파가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반포한강시민공원은 작년 4월 개장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월드컵 응원에 한 마음을 모았고, 광화문 광장, 서울 광장, 시청 광장, 코엑스 광장, 상암월드컵경기장 등 다른 본선 진출국에도 유례가 없는 392만 명이라는 인파가 거리 응원에 나선 것이다. 한가지 2002년과 다른 점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온라인 상에서도 응원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혹은 집에서 각기 축구를 보면서도 서로 응원을 공유하는 등 거리에서 시작된 축제의 마당이 공간의 벽을 넘어 온 국민을 소통하게 만든 것이다.

 

아쉽게도 16강에 머물고 말았지만 과거와 달리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시민들이나 승패에만 연연해하는 모습은 아니다. 선수들의 지친 모습엔 더 열띤 격려를 하고, 선전하는 모습에선 가슴 벅찬 함성을 터뜨린다.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단결력과 문화의식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응원문화도 보다 성숙하게 자라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해외시장에서 홍보를 하고 싶어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인지도를 높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는 4년이 남았다. 지금의 분위기를 더욱 발전시켜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기리는 문화를 이끌어 가는 대한민국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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