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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문> 竹西樓를 거쳐 간 선인들과 남긴 詩
정 일 남
이 글은 죽서루를 거쳐 간 선인들이 남긴 시(詩)를 산책해보려 한다. 어떤 틀에 매여 쓰지 않았다. 두서가 없고 자유자재로 썼다. 필자는 자유기고가가 아니지만 그런 형식의 글을 선호한다. 죽서루를 사랑하며 살아왔던 한 말단 문인으로 선인들이 죽서루를 거쳐 가며 남긴 시들을 모아본 것이다. 죽서루를 다룬 시들을 통해서 죽서루가 어떤 곳인가를 더듬어보았다. 죽서루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 죽서루는 내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 지주다. 어린 시절 한가하고 갈 곳이 없으면 찾아가 놀았던 곳이다. 하지만 어릴 때는 죽서루의 외형만 보았지 역사적 의미는 알지 못했다. 객지를 떠돌아 살면서도 죽서루는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누대는 건축물이지만 내 객지의 떠돌이 생활에서 괴로울 때 영혼에 등불이 되어 주었다. 죽서루는 보물 213호다.
허목(許穆)의 죽서부(竹西賦)에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두타산의 만장(萬丈)을 살피고 오십천의 맑은 흐름에 임한다. 서늘한 바람을 쏘이며 노래를 읊조려 잠시나마 근심걱정을 털어버린다. 해는 뉘엿뉘엿 서천을 향하여 넘어가고 어느 듯 저녁이 다가오니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더 머문다. (중략) 뭇 꽃은 정자 난간에 번지고 짙어가기 시작한 녹음은 뜰을 덮었네. 회랑(回廊)은 고요하여 사람은 없고 새들의 노랫소리 아름답구려. 비가 갠 산은 말끔히 씻어져 푸른 기운이 떨어져 구름이 흩날리는 대밭은 안개가 일어나네. (중략) 조금 뒤에 달이 뜨지 아니하여 촛불을 밝히니 야색(夜色)이 맑고 서늘한 가을 하늘에 은하의 파광(波光)이 인다. 아름다운 집 지붕에는 별이 낮게 깔렸다. 아름다운 저녁에 발을 걷어 올려놓으니 나그네 흥이 일어 신선 사는 봉도(蓬島)가 멀지 않다고 가리키네. 흥이 빨리 날아감이여. 신선을 초대할 수 있을 것으로 깨닫네. 손들은 이미 다 취하였고 즐거운 일로 노래 부르나 나의 슬픈 회포는 끝이지 아니하네. 세월의 빠름은 흘러가는 물결과 같고 세상일은 나를 얽매어 재촉하니 젊은 시절은 그 얼마나 되리. 낡은 것은 가게 마련이고 새것은 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내일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술잔을 들어 노래 부르지 아니 하랴. 그 노래에
자소(紫簫)는 울고 이슬방울은 맺혔으며,
술동이는 차 있는데 밤은 늦었네.
세상에 잠깐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 즐기지 아니 하랴.」
허목은 태어날 때 손바닥에 文 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그래서 문보(文甫)라 했다. 눈썹이 매우 길어 미수(眉叟)라 했다. 송시열과 예학(禮學)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남인의 핵심 인물이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온 것은 좌천이지만 삼척으로서는 행운이라 하겠다. 그는 삼척 주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다. 그가 삼척에서 이룬 업적은 해일의 피해를 막기 위해 <퇴조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삼척의 연혁과 지리 정보를 세세히 기록한 <陟州誌>는 중요한 자료다. 그는 독특한 전서체를 완성한 인물이다. 허목은 동계(東界)에서 경치가 뛰어난 곳이 8곳이 있는데, 이곳을 유람해 본 사람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라고 했다. 경치란 것은 우선 멀리서 조망한다. 그리고는 조금씩 다가서면서 그 변화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더 조금 다가서며 감상한다. 그래야만 그 정경의 전체를 알게 된다. 죽서루가 그렇다. 죽서루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허물어진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그것을 조선 태조 3년(1403) 재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죽서루 동쪽에 용문바위가 있다. 음각으로 새겨진 용문(龍門)이 있다. 바위 뒤쪽으로 올라가면 성혈(性穴) 유적이 있다. 성혈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한다. 이곳 부녀자들은 칠월칠석 날 자정에 찾아가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렸다 한다. 그리고 그 좁쌀을 치마에 담아 집에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신앙이 있다.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햇빛을 가린 구름자락은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네.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다보고
붉은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들 헤아려보네.
산은 벌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이 고을은 높은 누각으로 더욱 유명해졌구나.
문득 벼슬을 버리고 노년을 편하게 보내고 싶으나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임금님 현명해 지길 바라네.
누대에 오르니 씩씩한 기상이 북두처럼 높고
발을 걷으니 안개가 기둥을 감도는데
푸른 물결 파문은 노니는 물고기들 때문이고
백사장의 새 발자국은 전자체를 닮았네.
재상은 춘지의 글귀에 걸려있고
장월은 도리어 주금을 중요시 했네
백발을 쓰다듬느라 글쓰기가 어렵고
진자사가 미명 상대하기 부끄럽네.
죽서루 李承休
위의 시는 시기적으로는 봄과 여름이 아니다. 고니가 등장하는데 고니란 새는 철새로 북에서 살다가 가을이면 한국에 와서 서식하는 새다. 그러니까 위의 시는 가을에 쓴 시로 보면 된다. 그리고 어느 임금님 때 쓴 詩인가를 살펴보면, 여기 시에 <노년>이 나오니 충렬왕 때 쓴 시가 분명하다. 붉은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며 물고기를 헤아려 본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또한 현명하지 못 했던 충렬왕께 정사를 바로잡기 위한 상소문을 올렸던 동안 선생이었다. 간신배에 의해 파직된 이승휴 선생이었지만, 오히려 선생께는 외가가 있는 구동으로 돌아와 병든 노모를 모시고 손수 약재를 때려 올리며 효성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집필 생활에서 대업을 이루었다. 많은 선인들이 죽서루에 대한 시를 남겼지만, 동안 선생이 남긴 시를 으뜸으로 본다. 선생의 진정성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누가 하늘을 도와 이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그 지나온 세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들판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검푸른 빛 서려있고
모래사장 부근에는 차가운 물 고여있네.
시인은 본래 남모르는 한이 많다지만
깨끗한 이곳에서 어찌 나그네의 근심을 일으켜야만 하리오.
온갖 인연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는
푸른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몰아보리.
죽서루 李栗谷
율곡의 시도 돋보인다. 율곡은 파주가 고향이지만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역사상 아홉 번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 한 율곡이다. 천재 중의 천재다. 율곡은 예언자였다. 미래를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의 10만 양병설이 증명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국방에 탁월한 식견을 겸비한 천재였다. 천재는 단명하다 했던가. 아깝다. 49세에 돌아갔다. 율곡이 삼척에 들려 그냥 갈 수 없었다. 진주관에서 하루 묵었을 것이다. 이 천재를 관아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했을 것이다. 허목이 지적한 대로 아름다운 누각이라 했다. 세월의 흐름을 난간 아래 흐르는 물을 보면서 알 수 없다고 했다. 율곡은 시인은 본래 한이 많은 사람이라 했다. 그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낚싯대나 들고 살고 싶어 했던 심정은 사색당파로 권력에 눈이 멀어 왜란을 자초한 조정에 대한 불만으로 보아야 하리라. 나라가 위기에 처할 것을 경고했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것의 불만이 위의 시에서도 보이는 듯하다.
강물에 잠긴 갈매기의 꿈은 넓고도 넓은데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도 하네.
죽서루 李玉峯
여섯 구리 붉은 난간 은하를 막았고
상서로운 안개비는 넌지시 공작새를 적시네.
창해는 달빛 밝아 저물었는지 모르고
구의산 아래는 흰 구름이 가득 찼네.
누각에서 李玉峯
이옥봉의 본명은 이숙원(李淑瑗)이다. 이옥봉(李玉峯)이 삼척에 와서 위의 시를 남겼다. 옥봉이 삼척에 오게 된 것은 조원 (趙瑗)의 소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옥봉의 아버지는 문과에 장원을 해 벼슬이 판서에 이른 사람이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李逢)은 옥천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옥봉은 이봉(李逢)의 소실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비극이었다. 옥봉은 흥선 대원군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옥봉은 당당한 신분이었으나 소실의 몸에서 태어난 옥봉은 다시 소실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옥봉은 조원이 삼척부사로 임명되자 남편을 따라 삼척에 온 것이다. 옥봉은 1583년 8월에 와서 1586년 2월까지 삼척에서 생활했다. 조원의 삼척 부임은 승진이 아니고 좌천이었다. 그러니 옥봉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갈매기의 꿈은 넓다고 했다. 하지만 기러기의 시름은 길다고 했다. 여기 기러기의 시름이 옥봉의 시름으로 보아야 한다. 소실이란 것과 조원의 좌천이 어찌 마음 편했겠는가. 여기 붉은 난간이 나온다. 잠시 마음을 진정하면 안개비가 상서롭다. 이 누각에서 본 달빛은 밝았으나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구의산에는 구름이 가득 찼다고 마무리 짓는다. 여기 구의산은 아홉 개의 봉우리가 구분하기 어렵다는 중국의 산 이름을 빌렸다. 허균(許筠)은 옥봉의 시가 “매우 맑고 강건하다.”고 평했다. 신흠(申欽)은 “근래의 규수의 작품 중에 승지 조원의 첩 이 씨가 제일이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중에 규수 시인으로 허난설헌이 으뜸이고 기녀 시인에 매창이요 소실(小室) 시인으로 옥봉을 꼽았다.
죽서루 가는 길 감개 깊은데, 늦봄이라 이끼 많이 돋았구나.
지는 꽃잎은 모두 물에 떠가고, 조각달 홀로 죽서루에 돋았네.
골짜기 모습 맑으나 습한 듯하고, 여울 물소리 빙빙 돌며 흐르는 듯,
두타산 구름은 저녁에 일어, 죽서루 처마 밑에 와 자고 가는구나.
죽서루 金炳淵
팔도를 떠돈 감삿갓.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의 해학적인 시에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미당의 시에 “해와 하늘빛이 부끄러워...”란 시구가 있지만, 김병연도 해와 하늘빛이 부끄러웠을까. 해를 보기가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그늘진 얼굴로 평생 살았다. 그 연유야 여기서 말할 입장이 아니다. “네 다리 소나무 소반 위에 죽이 한 그릇 / 하늘과 구름이 함께 떠도네. / 주인장 제발 무안타 하지 마오 / 나는 물속의 청산을 사랑한다오.” 어느 가난한 집에 들러 죽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주는 시 한수였다. 김병연이 죽서루를 찾은 것은 어느 해 늦은 봄이다. 아니면 오월 중순쯤이 아닐까. 복숭아 꽃잎이 오십천 물에 떠내려간다. 꽃이 진 자리에 녹음이 푸르러간다. 그의 걸망엔 무엇이 들었을까. 관아의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진주관에 모시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병연은 두타산 구름이 누대의 처마 밑에서 졸다 가는 대청마루에서 하루를 묵었을까. 하지만 김병연은 쓰다 달다는 말없이 척주를 떠났을 것이다.
죽서루의 주렴(珠簾)과 취죽(翠竹)은 강물에 비치고
천상의 선악(仙樂)은 하게에 내려오네.
강 위엔 사람 없고 몇 개 봉우리만 있더니
바다구름 다 불고 달빛만이 곱구나.
죽서루 鄭澈
관동의 선계가 죽서루라.
위태한 난간에 기대니 여름이 가을 같네.
죽서루 鄭澈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에 대고 싶구나
왕정이 유한하고 풍경이 싫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도 많기도 하구나
나그네의 설움도 둘 데 없다.
관동별곡에서 鄭澈
청철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위의 시들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화는 처처에 산적해 있다. 평북 강계에 유배 생활을 할 때 기생 진옥이 와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철의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이 되면서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주도했던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재가 죽었던가.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고약한 성질이 있었다. 인간은 장단점이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문학사에는 가사문학의 대가다. 주렴은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말한다. 취죽은 푸른 대나무. 죽서루 난간에 서면 삼복더위에도 두타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더위를 모르게 된다. 여름이 가을 같다는 말이 참이다.
문화관광부가 1991년 2월을 정철의 문화인물로 정하고 당시 이어령 장관이 참석한 가문데 정철의 가사의 터란 기념비를 제막했다. 또 하나의 기념비는 정철의 고향 전남 담양에 있다.
돌을 쪼아 절벽 깎아 누각 하나 세웠구나.
누각 옆에는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죽서루 있는 고을 태수 누구 집 아들인가,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워 뱃놀이 하겠구나.
正祖 御製詩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가 삼척을 방문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겨우 우마차만 있던 시절이다. 정조가 다른 왕과는 달리 궁궐에만 머물지 않고 도성을 나와 많은 백성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고는 하나, 천리나 먼 관동지방의 삼척에 이르러 죽서루를 관망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의 시를 접하는 자체가 감동이다. 우린 그의 민정시찰을 상상하게 된다. 정조는 나라 바로세우기에 힘썼다. 그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개선했다. 규장각을 설치했고 탕평책을 폈다. 수원의 화성을 축조했다. 화성 축조에 정약용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다산은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거중기를 발명했다. 큰 바위도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정조는 많은 문화 사업에 힘썼다. 실로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온갖 문집을 발간케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정조가 대관령을 넘어 먼 삼척까지 행차한 것은 비록 죽서루를 보기만이 아니고 민정시찰로 보아야 한다. 천리나 먼 행차를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정조대왕의 태실이 있고 태실비도 있다.
위태로운 벼랑위에 높이 솟은 백 척 누각
아침 구름 저녁 달 그림자 맑은 물에 드리우고
반짝이는 물결 속에 물고기 뛰노는데
한가로이 난간에 기대어 갈매기를 희롱하네.
肅宗 御製詩
조선 500년 사에 죽서루를 찾아 시를 남긴 왕이 정조와 숙종으로 보인다. 다른 사료는 찾을 수 없다. 숙종은 조선 19대 왕이다. 조선시대의 실책은 사색당파로 피폐해졌다. 편을 가르기와 그에 대한 갈등이다. 권력 쟁탈이 끝이지 않았다. 숙종의 치세는 환국(換局)이었다. 환국은 정치 전환을 의미한다. 당파의 교체와 정책 변화였다. 13세 나이로 즉위했다. 46년간 재위했으나 숙종은 불행하게도 왕자를 얻지 못했다. 겨우 숙빈 최 씨에서 영조를 얻었다. 그의 재위 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이율곡의 추출과 송시열의 사사(賜死)일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여기서 많은 것을 들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숙종은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했다.
도외기를 다 가진 골원은 편안하고
벼슬아치 재미는 유한함이 첫째이다.
누ᄀᆞᆨ의 저녁달은 침상으로 스며들고
죽서루의 아침 구름 추녀에서 일어난다.
묵은 학처럼 빙빙 돌아 먼 섬으로 가고
자라처럼 솟은 바위 첩첩산봉 마주본다.
죽서루 金克己
고려의 명종조의 문인이다. 그의 시는 자연과의 교감과 부드럽게 표현하는 게 특징. 따라서 전원 귀의의 시가 많다. 농민들의 삶을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그는 진사가 되어서도 벼슬에 관심이 없었다. 초야에서 시에 빠졌었다. 40대에 명종의 부름을 받았다. 벼슬은 의주방어판사. 직한림원을 거쳐 금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가 말년에 6품 당하관으로 돌아갔다. 당대의 최고 문사인 최자(崔滋)는 그의 시에 대해 “표현이 맑고 내용이 풍부하다.”고 평했고, 후대의 평자들은 “의경이 온자하고 시어 구사가 유려하여 기상이 호방하다.”고 찬양했다.
이 외에도 죽서루에 관한 시가 많이 있으나 이제 끝을 맺을 차례다. 죽서루엔 여러 현판이 있다. <第一溪亭>은 1662년(현종 3년) 허목이 쓴 것이다. <海仙遊戱之所>는 1837년(현종3년) 이규현이 썼다. <關東第一樓>는 1711년(숙종37년) 이성조가 썼다. 죽서루를 가장 사랑하고 자주 찾았던 인물이 과연 누구였던가. 여기서 우리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동안 이승휴 선생이다.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두타산 구동으로 귀향한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독서와 집필 생활에 몰입한다. 여기서 얻은 것이 저 유명한 <帝王韻紀>와 말년의 사생활을 기록한 <動安居士集>이다. 동안 선생은 집필에서 피곤하면 여가선용으로 죽서루를 자주 찾았다.
죽서루는 동안 선생의 정신적인 안식처였다. 동안이 죽서루를 자주 찾은 것은 죽죽선 이란 기녀가 죽서루 동편에 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안이 외로우면 그가 좋아하는 거문고 소리를 듣기 위해서 찾았으리라 추측된다. 많은 한양의 문객들이 죽서루를 방문했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과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안 선생은 죽서루를 주거지 같이 사랑했던 인물이다. 구동에서 아침 일찍 떠나면 두어 시간 지나면 도달하는 거리에 죽서루가 있었다. 동안 선생은 오늘의 <두타문학>의 뿌리이고 그 시발점이라 보아야 한다. 그의 문학정신의 영향을 받아 많은 후학들이 문단에 등단했다. 실로 문학의 꽃이 만발했다. 이 꽃들이 그 뿌리가 동안 선생이란 자부심으로 살아간다. 동안선생이 선호한 것이 거문고와 바둑과 복숭아꽃이다. 동안 선생은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 마시며 두타의 품속에서 신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선생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점이 없는 게 아니다. 동안 선생이 가장 아꼈던 죽서루에 선생을 기리는 문비(文碑)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이 사업만은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끝)
<첨언> 이 글은 이미 <실직문화>에 발표 했던 글을 수정 보완 해 올립니다. 읽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