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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 단군기檀君紀 3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차삼국사기 고구려유리왕이십일년 벽지견왕왈 신축시지위나암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견기산수심험 지의오곡 우다록어패지산 왕약이도 즉불유민이지무궁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우가명병혁지환운운 고명년동시월 왕천도국내 즉기지 비단산수험조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原野開亦可知 適於耕農矣 夫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원야개역가지 적어경농의 부고자건도 필취험고은부급교통지편
今平壤松京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금평양송경한양지지 막불개연 장안락양 항위한토건도지지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亦此故也 然則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역차고야 연즉단군지세 민물점번 교통유긴 차경농지업 축점이흥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즉기사속말지지 이남천어패수지빈 이도후일지륭운 개가상견의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우안당서지리지왈 자압강구 주행백여리 내소방소류 동북삼십리
至泊口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지박구득발해지경 우소류이백리 지환도현성 고고려왕도
又東北溯流二百里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天寶中王所都
우동북소류이백리지신주 우륙행사백리 지현주천보중왕소도
또한《당서.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 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우정동여북유백리 지발해왕성운 금자압록강구 약행사백여리
乃得婆江合流處 又行二百里至江界 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내득파강합류처 우행이백리지강계 만포진격강처 전야개활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山河固密 盖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산하고밀 개단군남천사백여리 정도우고염난수지동 패수지북
渤海神州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발해신주신화등지 태무의 이발해지시 유전기적야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建宮室 浚溝開田陌 勸農桑治漁獵
내부제천이천신거 축성곽건궁실 준구개전맥 권농상치어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蒼鹿遊郊外
사제민진용여지물 이보국용 민개희희이락지 시유창록유교외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청룡견조천지 단군내출순지남해 등갑비고차지산 설단제천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有一童子 衣緋衣從中出謁 檀君愛之
환지해상 적룡정상 신녀봉유일동자 의비의종중출알 단군애지
因姓曰緋名曰 天生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有三異人
인성왈비명왈 천생수위남해상장 급환지평양유삼이인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자동방도패수이지 수왈선라 차왈도라 우기차왈동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어시인이용지상 개호가와룡가 사선라주지 도라위학가 동무위구가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우인창록지서 개로가왈록가 의전사부우주지 제치비전갱완의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檀君之化 洽被四土大荒西率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당시지시단군지화 합피사토대황서솔유 남지해대 동궁창해
聲敎之漸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성교지점위호광의 내구획천하지지 이봉동척 치우씨지후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海天碧曰 藍國宅奄慮忽 神誌氏之後
봉우남서지지 거야호활해천벽왈 람국택엄려홀 신지씨지후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封于北東之地 河嶽鹿莊風氣勁雄曰 國亦稱肅愼方言 豪莊之稱也
봉우북동지지 하옥록장풍기경웅왈 국역칭숙신방언 호장지칭야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曰靑丘國
치숙신홀 고시씨지후 봉우남동지지 산하수려 초목창무왈청구국
宅樂浪忽 封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君 夫蘇夫虞及
택낙랑홀 봉주주인씨지후 어개마국 여택기위예군 부소부우급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 夫餘諸國是也 其後夫婁又封
소자부여 개봉우국서지지 구려진번 부여제국시야 기후부루우봉
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 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동래삼인어각지 후세지요저 졸본비류지칭 개기어기소봉국명야
通檀氏之世 凡大國九小國十二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통단씨지세 범대국구소국십이분치천하제주 금불가상의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치우씨기수봉어람국 내소선조지지 무민안업 강습융사 항위서남번폐
且其民數遷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차기민수천사해대지지 이치후세 환여한토제국 와상각축
神誌氏受封於國 地旣勁寒不宜五穀 土廣人稀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신지씨수봉어국 지개경한불의오곡 토광인희목축파적 내사민대궁패검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幷事遊獵 後世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健勁悍
병사유렵 후세기민점사흑수지지 수이어렵위생 간험검색건경한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漢曰婁元魏曰勿吉隋唐曰靺鞨
수강용원출어제국 점지불습문사 후세한왈루원위왈물길수당왈말갈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金女眞等 皆其後身
초여궁북만인상혼 점실기속 파유릉이지탄 근고금녀진등 개기후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 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相土地 開田野興農桑風氣溫美
동족이칭야 고시씨취청구국 관산천상토지 개전야흥농상풍기온미
五穀豊肥民皆衣輕暖而食肥美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오곡풍비민개의경난이식비미 파유관대의리천하지개 문무역득이병흥
夫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倉實而知禮節
부식족화통연후 국실민부이교화성 고관자왈창실이지예절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終歲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의식족이지영욕 약사민종세이사속위려 즉부해가언예의재! 수연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천복지대 구우각수 어시기유한온 토유비척 기여천택지이지불제
何是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하시삼가자지수묵교민지도 소이각이 이기과응역자부동자야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 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단군기봉제후 천하청정거십년 유남이지환 즉갑비고차이남이인야
乃遣夫餘率兵定之 後益遣夫蘇夫虞 築城於甲比古次以備南巡
내견부여솔병정지 후익견부소부우 축성어갑비고차이비남순
今江華三郞城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금강화삼랑성시야 마리산우유참성단 차즉단군설단제천지두악야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盖水行藉舟 陸行藉車泥行乘山行則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
개수행적주 육행적차니행승산행즉 차내상고교통지구 이륙행불여
水行之易 是以上古建都 必擇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수행지이 시이상고건도 필택임수지지 범인거지칭미자 필왈조산대수
或依山傍水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혹의산방수배산임유자 기소종래상의 고단군지세 필사의산임수이결거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耕農漁獵隨便可行 山海經所謂 北海有國名曰 朝鮮天毒育也其人
경농어렵수편가행 산해경소위 북해유국명왈 조선천독육야기인
水居受愛也人者 非但其聲敎之澤 洽被四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수거수애야인자 비단기성교지택 흡피사역가규견 기결거지풍의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
부단군제천 비단두악야 부수즉제태백 남순즉제두악야 이갑비고차방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 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갑비고차는
在海濱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其地孤絶靜謐
재해빈통항용이 즉남순지제 필치제어단소야 기지고색정밀
山岳淨潔海天收霽則 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산악정결해천수제즉 심창영지기 사인자감 신명지척강자야
余嘗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而太多頹 仁祖十七年
여상유관기지 제단첩석 위지상원하방 이태다퇴 인조십칠년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개축운 희! 평양고성 왕임검구궐 금불류패석잔초 독일루천단
得保其形骸 豈僻處海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득보기형해 개피처해 인적희도고야! 여실불승 추원지비의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어국삼십여년 정치홍수 호파류천 회양요만지시야 패수창일평양침잠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내견사자 편상토지지의 점거아사달하당장지야 금문야구월산하
有莊莊坪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유장장평즉기지야 여상관기지 방수백리무대하 이수세동주 원토고조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
가피서래지수의 내결려아사달하 사부루진제평양지민 부치평수토루년
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이수공완 당장지민 역이안토이락거의 금속사혹운 단군조홍수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而漢書? 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貊
사팽오치산천 전민민운운이한서? 식화지명서 무세즉위수년 팽오천예맥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들 하는데,《한서.식화지(食貨志)》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朝鮮等句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조선등구즉시내 동서유양개팽오 상전후이동장조선수토지역야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吳相通
사상개유 여차기교사야 개부루여불우동음 차한음우오상통
而彭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이팽불양자지초성 개여부음상근 즉후인망부루우이지기기음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又訛而只記彭吳也 今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우와이지기팽오야 금인가유부루단지자 리락정결처 축토위단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咠藁艸掩之每十月 必薦之以新穀
토기성화곡 치어단상 편집고초엄지매시월 필천지이신곡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혹칭업주가리 즉보새부루씨치수전거지의 뢰위진호지신야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 규원사화 - 단군기檀君紀 4 @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
부루기평수토잉구이전민거 만민함회기덕 급지조정택우이 습오지기
蒸成疫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 乘間滋殖
증성역리병사자심다 부우병의약이치지 우치맹수독 승문자식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태장횡행민간 부소내연고시구법 이건예위과 금석상격 인차광조화종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燻燒山澤於是獸 遠遁而其害漸除 今人多携取火之物 有金石艾三種
훈소산택어시수 원둔이기해점제 금인다휴취화지물 유금석예삼종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 夫蘇石 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필관지이부소지명 여부소철 부소석 부소우자 개원어부소씨지완기공야
夫婁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부루우사민대검극이행 급지궐령필적석위퇴 행봉맹수즉용이위비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후세소위석자군자 위위동국용무지일목 이실원어차야 금유속상존이
野村氓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야촌맹이차위석성황 파회외경지의 하후속지릉이 여차기심야!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初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초신시지말 치우씨형제 수자록퇴귀 이동인지점거회대자심다
與漢土之人雜處 農織牧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珠魚貝
여한토지인잡처 농직목자이위업 차남비해도지민 개이주어패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상교여어한토 초초주식어빈해지지 지시해대강회지지 수위기주리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 尙書所稱 夷萊夷淮夷島夷者 皆是也
여한토지민 교(유)유이착거 상서소칭 이래이회이도이자 개시야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부여지평남이야 열수이남완복왕화 이고청구지민 득점천거 급홍수기평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後之辰弁諸族 皆是也
남도자익다 어시남이지인 병첨어신화 수변기속후지진변제족 개시야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兪之亂 兪者之屬也 洪水之際僥倖得免 及看水土
어국사십여대 이유유지란 유자지속야 홍수지제요행득면 급간수토
定而州里蕭然 乃乘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討平之
정이주리소연 내승동침 기세파맹 즉사부여회집중외지병토평지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 兪)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내익봉부여 북방지지 사택우수홀즉선평양 사부루거왕임검성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령부소수낙랑홀 부우감당장경 갱봉고시씨어남방지지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어시단군서지왕임검성 안무서민 대회제후 령부신천하농상지정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내북순이제천우태백지록 봉천하산옥하천지신 범삼천여 력우수홀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이지숙신홀 회북동제후 령제신지씨지령 수립묘우숙사달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서전이지엄려홀 회남서제후 령제치우씨지령 수립묘우엄려달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부남순이지갑비고차 제천우두옥지전 수지낙랑홀 회남동제후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령제고시씨지령 수립묘우소루달 내환지평양 팔가급중제후필집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여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 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
단군내사제가급국내인민 각헌제우일월 음양사시지신 급산악하천
里社之主祭畢 大誥于有衆若曰 惟皇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리사지주제필 대호우유중약왈 유황일신재최상일위 창천지
主全世界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주전세계조무량물 탕탕양양 무물불불포 조조영영 섬진불루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惟皇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유황일신재최상일위 용어천궁계만선 원만덕 군영호시 대길양
大光明處曰 神鄕惟皇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대광명처왈 신향유황천제강자천궁 솔사먼단부 위아황조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滅萬惡
내지공완이조천 귀신향자이유중 유즉천범 부만선멸만악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 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性通功完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성통공완내조천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이심 내조천
天範惟一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천범유일인심유동 유병기심 이급우인심 인심유화 역합천범
乃用御于萬邦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내용어우만방왈 이생유친 친강자천 유경이친 내극경천 이급우방국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是乃忠孝爾克體是道 天有崩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爾男女
시내충효이극체시도 천유붕필극탈면 비금유쌍 폐리유대이남녀
以和毋怨毋妬毋淫 爾嚼十指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이호무원무투무음 이작십지통무대소 이상애무서 참호우무상잔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가국이흥 이관우우마 유분궐이호양무서탈 공작무상도 가국이은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爾觀于虎强暴不靈 乃作爾毋桀以物毋傷人 恒導遵爾天範
이관우호강폭불영 내작이무걸이물무상인 항도준이천범
克愛物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田
극애물이여유월궐 즉영부득신우 신가이운 이여충화우화전
花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毋凌弱濟恤 毋侮卑爾雖
화장진멸 신인이노 이부경무릉약제휼 무모비이수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존중하며 너희 하늘 본보기를 따라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厚包厥杳香必漏爾敬持彛性 毋懷慝毋隱惡毋藏禍心克
후포궐묘향필루이경지이성 무회특무은악무장화심극
敬于天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경우천친우민 이내복록무궁 자이유중 기흠재!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니,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단검기대호우유중 어시신덕대창 여차수십년 천하부희희언 망기재의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駕洛國
혹왈 차즉단군팔조지교령 가이차분팔목 혹설시야 후세가락국
房登王時有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방등왕시유시선인자 자칠점산이래 견왕어초현대왈 군이자연위치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 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
則民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즉민이자연성속 위치지도 고유기법 군하불체지 궤이대뢰
辭不受而去 此道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사불수이거 차도파선성지결야 우최고운란랑비서왈 국유현묘지도
實乃包含三敎 接化生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魯司寇之旨也
실내포함삼교 접화생차여입즉효어친 출즉충어군로사구지지야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竺乾太子之化也 孤雲精敏文學卓越諸人 博通古今文名飄動
축건태자지화야 고운정민문학탁월제인 박통고금문명표동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散見於載籍者
기언가위선채선성수훈지정화의 차외산견어재적자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記矣
급도가문집 여사문록삼한습유기등제서자 불가기의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과《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종차시상출순 이맹동월제천 수위만세지유속 차내동방특유지성전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이비외방지가비야 태백일산 족압곤륜지명이유여의 고지삼신산자
卽太白山也 三神又云三聖今文化 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
즉태백산야 삼신우운삼성금문화 구월산유삼성사 즉경사환인
桓雄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환웅환검자야 금단군지교 수부득건행 이신화영훈유전어후세
擧國男女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小兒十歲以內
거국남녀유숭신어잠묵지중 즉인생생사 필왈삼신소주 소아십세이내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三神者卽創天地
신명안위급지우용준 다택어삼신제석 삼신자즉창천지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조치민물지삼신야 제석등어 수출어불가지법화경 역천제지의
此則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
차즉지인고사역출어치류지수야 불가망이위비 석사마상여위한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으로서,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무제왈 폐하겸양이불발 계절야삼신지환
註云 三神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주운 삼신상제 삼신지설 당시역통우한토의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